윤석열 정부 1년을 말한다: 외교

'가치 외교' 추구했으나 결국 '자해 외교'로 귀결

겹겹의 대중 군사 포위망…주축은 '한‧미‧일' 동맹

일본과는 '밀월'…한국민 자부심·사법주권 희생

중국은 '파경'…반도체와 중국 수출 부진 장기화

파국 직전 한·러 관계…관건은 우크라 군사 지원

가치·국익 균형 외교 절실…한국만 희생 없어야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 편집자 주 : 시민언론 민들레는 창간사 첫 마디에서 윤석열 정권 6개월을 '거대한 퇴행의 시대'라고 규정했습니다. 다시 6개월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시간이 갈수록 더 악화하고 있습니다. 이에 현 상황을 집중 분석하는 '윤석열 정부 1년을 말한다' 기획 기사를 8일부터 닷새간 연재합니다. 12일에는 마지막으로 전문가 좌담회가 예정돼 있습니다.

 

탱크 앞에 서 있는 어린 동생을 업은 소녀. [유엔사령부 홈페이지] 시민언론 민들레
탱크 앞에 서 있는 어린 동생을 업은 소녀. [유엔사령부 홈페이지] 시민언론 민들레

윤석열 정부는 출범하면서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 등 보편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들과 연대해 권위주의 진영에 맞선다는 '가치 외교'를 천명했다. '글로벌 중추국가'로 도약하겠다는 야심 찬 비전도 내놓았다.

그러나 1년을 되돌아보면 딱히 '외교'라고 부를만한 것이 없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작년 10월 공개한 국가안보전략(NSS) 서문에서 "세계에서 미국에 도전할 의사와 역량이 있는 유일한 국가"라고 규정한 중국을 경제적, 군사적으로 포위하려는 '미국의 그랜드 디자인'에 맞춰 그저 각본에 따랐다고 보는 게 진실에 가깝다.

중국 포위를 위한 미국의 그랜드 디자인은 경제와 안보 크게 두 날개를 지닌다. 
경제 분야에선  '경제 안보'란 개념을 내세웠다. 중국을 저지하기 위해 경제를 자유무역이 아니라 '국가안보의 관점에서' 접근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세계무역기구(WTO)로 상징되는 자유무역 질서를 훼손하고 보호주의로 복귀하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당연히 미국 안팎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지구촌의 경제적 번영을 낳은 전후의 자유무역 질서는 미국이 주도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돌변한 배경이 있다. 자유무역 질서의 최대 수혜자인 중국이 사회주의적 권위주의 정치체제를 청산하기는커녕 한층 더 강화해 나가면서 미국 위주의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의 뜻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두고 볼 수만 없었을 것이다.

'경제 안보'는 그랜드 디자인의 화두에 해당한다. 그 핵심은 미국이 동맹국, 우방국과 손잡고 반도체 등 첨단 기술과 핵심 부품‧장비의 공급망을 별도로 구축해 중국의 경제 발전을 저지한다는 것이다. 디커플링(탈동조화)을 통해 중국 경제를 불구로 만드는 게 미국의 목표다. 이는 군사력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의 인플레 감축법(IRA)과 반도체과학법이 그 방편들이다. 또한 그 대표적인 실행 기구가 대중 경제 포위망인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미국·일본·대만 4자 간 반도체공급망대화('칩4')도 그 일환이다.

 

한국, 미국, 일본은 3년 만인 14일 워싱턴D.C에서 한미일 안보회의(DTT)를 개최하고 미사일방어훈련과 대잠수함전훈련 정례화에 합의했다.이달 4일 제주남방 공해상에서 열린 한미일 해상 훈련 모습[해군 제공] 2023 04 15 연합뉴스
한국, 미국, 일본은 3년 만인 14일 워싱턴D.C에서 한미일 안보회의(DTT)를 개최하고 미사일방어훈련과 대잠수함전훈련 정례화에 합의했다.이달 4일 제주남방 공해상에서 열린 한미일 해상 훈련 모습[해군 제공] 2023 04 15 연합뉴스

겹겹의 대중 군사 포위망…주축은 '한‧미‧일' 동맹

다른 날개는 대중국 군사 포위망이다. 미국은 중층 구조를 설계하고 있다.

미‧일 동맹(아시아)과 미‧영 동맹(유럽)을 두 기둥으로 삼고, 호주가 양쪽에 다 가담한다. 먼저 미‧영 동맹에 호주를 합치면 오커스(AUKUS)가 탄생한다. 일종의 앵글로색슨 동맹이다.

미‧일 동맹과 호주에 인도가 가담하면, 중국 포위를 위한 인도‧태평양 전략에 따른 4자 안보협의체인 쿼드(Quad)가 된다. 그러나 미국이 쿼드의 반중 핵심 축이길 원한 인도가 외려 취약한 고리로 드러났다.

미국의 기대와는 달리 인도는 백신 배분과 인프라 투자, 공급망 다변화 등과 같은 '비군사 분야' 협의에만 참여하고 '반중국 군사동맹' 가담은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 대타로 낙점된 곳이 세계 군사력 순위 6위의 대한민국이다. 미국은 멀지 않은 장래에 한‧미‧일 군사동맹까지 염두에 두고 3국 군사협력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약한 고리인 한·일 군사협력을 강하게 압박하는 것도 그래서다.

한·일 군사협력에 신중했던 전임 문재인 정부와는 달리 윤 정부가 기다렸다는 듯 온 몸을 내던지자 미국은 입을 다물 줄 모른다.

 

윤석열 대통령이 26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국빈만찬 특별공연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싱어송라이터 돈 매클린의 친필 서명이 담긴 기타를 선물받고 있다. 2023.4.28 [공동취재]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26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국빈만찬 특별공연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싱어송라이터 돈 매클린의 친필 서명이 담긴 기타를 선물받고 있다. 2023.4.28 [공동취재] 연합뉴스

여기에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도 끼어들었다. '글로벌 나토'로의 전환을 내세우며 러시아는 물론 중국을 '서구의 공동안보 위협'으로 새롭게 규정하고 동진하고 있다. 주요 서방 7개국(G7)도 경제와 안보를 비롯해 여러 분야에서 대중 견제의 강력한 틀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6‧25 전쟁 당시 북한군, 중공군과 맞서 싸웠던 유엔사령부(UN Command)의 부활과 16개 참전국을 비롯한 유엔사 회원국 결집과 확대는 미국이 극도로 공들이는 작업이다. 

미국은 오는 11월 서울에서 유엔사 회원국 국방장관회의를 한국과 공동 주최한다. 미국의 의도대로 회원국의 확대와 결집이 이뤄진다면 유엔사는 가공할 전력을 확보하게 된다.

윤 정부가 차제에 일본의 유엔사 회원국 가입을 허용할 수도 있다. 한반도 유사시 유엔사의 이름으로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상륙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2023.3.1.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2023.3.1. 연합뉴스

일본과는 '밀월'…한국민 자부심·사법주권 희생

미국의 그랜드 디자인에 비춰 보면, 지난 1년 윤석열 외교는 '자유 의지'로 포장했지만, 미국의 시나리오에 맞춰 기계처럼 움직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 대통령의 자격을 의심받으면서까지 일본에 굴종하고, 다른 한편으로 최대 교역국이자 흑자국인 중국과는 싸늘하게 갈라선 윤 정부의 비정상적 외교는 예고됐던 거나 다름이 없다.

대일 외교를 관통했던 키워드는 무조건 한일관계를 개선하라는 미국의 거센 압박이었다. 반중국 전선을 힘으로 뒷받침할 한‧미‧일 동맹 구축 작업에 가장 약한 고리여서다. 미국은 당연히 한국과 일본 양쪽 모두에 무조건 관계 개선을 주문했지만, 한국의 완패로 끝났다.

한일관계의 최대 걸림돌은 일제 식민 지배의 합법성을 주장하고 불법적인 군대 위안부와 강제동원(징용)의 존재를 부인하며 제대로 된 사죄와 배상을 거부하고, 한국 고유 영토인 독도에 대해 온갖 궤변을 내세우며 영유권 주장을 갈수록 강화하는 일본의 태도였다.

일본은 미국의 압박을 받고도 최악의 한일관계 책임이 한국에 있다고 버텼으나, 윤 정부는 지레 겁을 먹고 강제동원 '제3자 변제안'을 갖다 바쳤다. 사실상 협상이랄 것도 없었다.

대일 저자세는 한결같았다. 정상회담 '애원'에서 시작해서 강제동원 문제 협상, 한일 위안부 밀실 합의 복원, 독도 인근의 한·미·일 군사훈련, 한국 해군의 일본 욱일기 경례 허용, 일본이 개정 국가안전보장전략에 독도를 '일본의 고유 영토'라고 최초로 명시한 데 대한 미온적 대응, 일본의 재무장 용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한 소극적 대응까지 열거하기도 힘들다.

 

대한민국 고유 영토 독도. [사진공동취재단=연합뉴스 자료사진]
대한민국 고유 영토 독도. [사진공동취재단=연합뉴스 자료사진]

그 절정은 윤 대통령의 첫 3·1절 기념사와 '제3자 변제안'이었다. 

3·1절 기념사에서 윤 대통령은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란 구실로 여전히 침략사를 부인하는 일본을 '협력 파트너'로 세탁해 줬다. 

그리고 강제동원 피해 배상과 관련해 피해자의 권리와 한국의 사법주권을 묵살한 채 일본 정부와 전범 기업에 면죄부를 주는 '제3자 변제안'을 강행하고 구상권까지 포기했다.

이를 두고 한국 내에선 '윤석열 퇴진' 구호까지 나오면서 대학과 종교계, 언론계, 시민사회 등에서 시국선언이 줄을 잇고 있지만, 정부 차원에서 일본과의 관계는 '밀월'에 가깝다. 지난 3월 16일 도쿄에 이어 두 달도 안 된 7일 서울에서 한·일 정상회담이 열렸을 정도다. 

기시다는 7일 정상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나 자신은 당시 혹독한 환경에서 많은 분이 매우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겪으셨다는 것에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 대상이 '강제동원'인지도 특정하지 않았고, 기시다 개인의 감상을 표출하는 데 그쳤다. 진정성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을 하면 될 일이다.

열흘 뒤면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열릴 일본 히로시마에서 한‧미‧일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다. 3국 군사협력의 속도와 강도를 더 올리겠다고 선포하는 자리일 듯하다. 미국은 글로벌 안보 차원에서 총지휘를 맡고, 동아시아 차원에선 이미 일본을 대리자로 책봉했다.

문제는 이 과정이 재무장을 통한 일본의 군사대국화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거기엔 과거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일본 극우세력의 염원이 깔려 있다.

윤 정부는 강제동원 등 과거사 족쇄를 풀어주고 재무장을 용인하면서 '공격적 군사대국'으로 가는 일본의 길라잡이를 자청했다. 그 일제에 의해 참상을 겪은 한국민의 일방적 희생을 밑거름으로 해서 말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정부는 개정 국가안보전략을 비롯한 안보 3문서를 통해 75년간 지켜온 평화헌법의 전수방위(공격받을 때만 반격) 원칙을 버리고 사실상의 선제공격 능력인 '반격 능력'을 갖추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2027년까지 방위비를 국내총생산(GDP)의 2%인 10조 엔대까지, 지금보다 두 배로 늘리는 등 대대적 군사력 증강에 돌입했다.

지난 2일 공개된 교도통신 여론조사에 따르면, 일본 국민 중 '개헌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72%에 달했다. 여기에 고무된 기시다는 개헌 필요성을 다시금 강조하고 이른 시기에 국민투표를 시행하겠다는 의욕을 보였다. 공격적 군사대국을 향한 수순을 차근차근 밟고 있다.

3월 들어 10일까지 반도체 수출이 41%나 감소하고, 대중국 수출도 35%가 감소한 영향으로 연간 기준 무역적자가 230억 달러 수준을 기록했다. 사진은 부산항 신선대부두와 감만부두에서 수출입 컨테이너가 쌓여 있는 모습. 2023.3.1. 연합뉴스
3월 들어 10일까지 반도체 수출이 41%나 감소하고, 대중국 수출도 35%가 감소한 영향으로 연간 기준 무역적자가 230억 달러 수준을 기록했다. 사진은 부산항 신선대부두와 감만부두에서 수출입 컨테이너가 쌓여 있는 모습. 2023.3.1. 연합뉴스

중국과는 '파경'…반도체와 대중국 수출 부진 장기화

한·중 관계는 '파경'이나 다름없다. 뭣보다 참사 수준의 수출과 대중국 무역수지가 말해주고 있다. 2018년 최대 무역 흑자국이던 중국이 5년 만인 올해 최대 적자국으로 뒤바뀌었다. 반도체와 대중국 수출 부진이 장기화하면서 수출 역성장과 무역수지 적자가 지속되고 있다.

1일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4월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무역수지는 14개월 연속 적자, 수출은 7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4월 대중국 무역수지는 22억7000만 달러의 적자로, 작년 10월 이후 7개월째다. 대중 수출액도 작년보다 26.5% 감소한 95억2000만 달러로, 11개월 연속으로 줄어드는 실정이다. 적자로 돌아선 경상수지도 날로 더 나빠지고 있다.

정부 간 외교 활동도 끊긴 거나 다름없다. 작년 11월 윤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이 프놈펜에서 회동한 이후 만난 적도 통화한 적도 없다. 외교부 장관급에서도 마찬가지다.

작년 12월 12일 박진 외교부 장관이 당시 왕 이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과 화상통화를 했고, 올해 1월 9일 축하 인사차 친강 신임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과 전화 통화를 한 것이 전부였다.

먼저 '헤어질 결심'을 한 쪽은 윤 정부다. 외교 전면에 자유와 인권 등의 가치를 내세우고 인도‧태평양 전략에 따른 중국 포위망에 가담한 것이다.

70년 한미동맹 역사를 고려한다면 반중 전선을 구축하고 줄을 확실히 서라는 미국의 압박을 마냥 거부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중국도 미·중 패권 경쟁 시 한국이 미국 편에 설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다고 봐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22년 11월 15일(현지시간) 인도네시아 발리 한 호텔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2022.11.15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22년 11월 15일(현지시간) 인도네시아 발리 한 호텔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2022.11.15 연합뉴스

문제는 윤 정부의 헤어지는 방식이다. 갈라서기가 불가피해도 최대한 상대를 자극하지 말아야 하는 건 상식이다. 특히 무역과 같은 경제적 이해가 맞물려 있을 때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윤 정부는 거칠었다.

작년 6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 기간에 "중국을 통한 수출 호황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는 최상목 경제수석의 '탈(脫) 중국' 발언이 신호탄이었다.

그 뒤로도 딱히 이해관계도 없는 대만과 남중국해 문제에 대한 윤 대통령과 박진 외교부 장관의 잇단 개입 발언이 중국을 자극했음은 물론이다.

북한 대응을 명분으로 중국과 인접한 서해를 포함해 한반도 역내로 미국 전략자산을 끌어들이는 것도 양국 간 큰 갈등 요인이다.

지난달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은 윤 정부가 권위주의 진영, 특히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전방위 압박 작전에 '행동대'로 나설 것을 선언한 자리였다. 회담에서 채택된 '한미 정상 공동성명'과 핵협의그룹(NCG) 창설 등 확장억제 강화를 담은 '워싱턴 선언'에 그 내용이 압축돼 있다.

한미동맹을 '가치'를 공유하는 '글로벌 포괄적 전략 동맹' '행동하는 동맹'으로 규정지음으로써, 한국이 중국과 러시아 등 글로벌 이슈 개입을 확대해 나갈 것임을 분명히 했다. 최악의 상태인 한·중 관계의 회복은커녕, 그 갈등이 더 증폭될 것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시 주석이 LG디스플레이 광저우 생산기지를 직접 찾아 '한중 우의'를 강조한 적이 있었다. 지난달 12일이었다. 그러나 일주일 후 대만 문제를 건드린 윤 대통령의 로이터 인터뷰가 보도됐다.

그리고 닷새 뒤인 4월 24일 정재호 주중대사는 신임장 제정 때 시 주석의 연내 방한을 기대한다는 윤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했다. 물이 엎질러진 뒤였다.

한·중 관계는 복원이 쉽지 않은 단계로 접어드는 반면, 인도와 브라질, 사우디 등 중견국들과 글로벌사우스(저소득국)는 미국은 물론 중국과의 관계도 영리하게 유지해 나가고 있다.

정작 패권 다툼을 하는 미국과 오랜 앙숙인 일본마저 중국과의 소통 채널을 가동하면서 국익을 위해 필요할 때를 대비하고 있다. 윤 정부가 반중 전선에 너무 앞장서다 고립될 수도 있다. 뭣보다 대중, 대북 소통 단절은 한반도 문제조차도 일본에 의존하게 할 우려가 크다.

 

미국 기밀문서 중 '한국 155㎜ 포탄 운송 시각표'(ROK 155 Delivery Timeline). 155㎜ 포탄을 싣고 경남 진해에서 독일 노르덴함항으로 출발하는 선박 출항 직전 육군 탄약지원사령관이 진해 탄약부두를 방문한 것이 확인됐다. 2023.4.20. 김성진 기자
미국 기밀문서 중 '한국 155㎜ 포탄 운송 시각표'(ROK 155 Delivery Timeline). 155㎜ 포탄을 싣고 경남 진해에서 독일 노르덴함항으로 출발하는 선박 출항 직전 육군 탄약지원사령관이 진해 탄약부두를 방문한 것이 확인됐다. 2023.4.20. 김성진 기자

파국 직전 한·러…관건은 우크라 군사 지원 여부

러시아 관계도 위태롭다. 작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한국은 미국 주도의 대러 제재와 우크라이나에 대한 비군사 분야 지원에 동참했다.

이를 문제 삼아 러시아는 한국을 일본, 유럽연합(EU) 회원국과 함께 '비우호국 명단'에 올렸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지금은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미국 정보기관의 용산 대통령실 도청 내용이 유출되면서 한국 국가안보실장과 외교비서관이 미국의 압력에 직면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155㎜ 포탄 지원 문제를 놓고 협의했던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언론 보도 등을 종합하면, 한국은 지난해 미국에 수출한 155㎜ 포탄 10만 발과 이번에 미국 기밀 문건이 폭로한 33만 발을 포함해 폴란드로 보내는 40만 발 등 총 50만 발을 보냈거나 보내는 중이다.

지금은 '최종사용자'가 미국과 폴란드인데, 이것을 우크라이나로 제공하려면 한국의 승인이 필요하다. 만약 윤 정부가 이를 승인한다면 한·러 관계는 파국으로 직진한다.

앞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작년 10월 '무기·탄약 지원 시 한·러 관계 파탄'을 경고한 바 있다. 최근 러시아는 윤 대통령이 로이터 인터뷰에서 △ 대규모 민간인 공격 △ 대량 학살 △ 심각한 전쟁법 위반 등을 조건으로 군사 지원을 시사하자 "분쟁 개입" "적대행위"라고 강하게 반발하며 한국이 실제 행동에 옮길 경우 대북 무기 지원까지 경고하고 나선 상태다.

지난 한미 정상회담에선 군사 지원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다만 정상 공동성명에서 양국은 "필수적인 정치, 안보, 인도적, 경제적 지원 제공을 통해 우크라이나를 계속 지지할 것"이라고 밝혀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파국 여부는 윤 대통령의 결정에 달려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1일 서울광장 동편에서 열린 '104주년 3.1절 범국민대회'에서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상징의식을 하기 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를 위로하고 3있다. 2023.3.1.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1일 서울광장 동편에서 열린 '104주년 3.1절 범국민대회'에서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상징의식을 하기 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를 위로하고 3있다. 2023.3.1. 연합뉴스

'가치 외교' 추구했으나 결국 '자해 외교'로 귀결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역대 한국 정부가 지켜온 대외 정책의 기본 틀이 있었다. 국민의힘 계열이냐 민주당 계열이냐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었지만 말이다.

한미동맹을 주축으로 삼되, 남북대화를 통해 북핵과 한반도 위기를 관리, 해결하고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통해 국익을 챙기면서도 균형자로서의 위상을 확보한다는 게 그 골자였다.

가치 외교를 내세운 윤 정부가 이 기본 틀을 무너뜨린 비용은 싸지 않았다.

미국이 주도하는 반중국, 반러시아 전선의 선봉에 서면서 막대한 경제적 피해가 발생하고, 북한의 도발에 더해 한반도의 안보 위기도 가중되고 있다. 정작 국민의힘 계열인 보수 노태우 정부에서 시작된 북방외교의 30년 성과마저 뒤흔드는 셈이다.

또한 중국을 겨냥한 한·미·일 3국 동맹 구축에 앞장서다 보니, 윤 대통령은 한·일 관계 개선을 구실로 일제의 식민지 과거사와 전쟁범죄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역사적 과오를 범했다. 일본의 재무장과 군사대국화의 길을 열어줌으로써 후환마저 예고하고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에는 강력한 저지와 함께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에 주도적으로 나서야 하는데도 '힘에 의한 평화'만을 주장하며 극단적 대결을 추구하고 있다.

모든 사안을 '반공'과 '멸공'의 눈으로만 보던 1950∼1960년대로 한반도 시계를 돌려놓은 듯한 착각을 준다. 지난 한 해 동안 상전벽해란 표현도 부족할 만큼 거대한 역사적 퇴행이 진행된 것이다.

이것이 윤 정부가 말하는 가치 외교를 바탕으로 한 '전략적 명확성'의 실체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정의구현사제단)은 20일 오후 7시 전북 전주시 풍남문 광장에서 김영식 정의구현사제단 대표 신부 주례로 '검찰독재 타도와 매판매국 독재정권 퇴진 촉구' 시국미사를 봉헌했다. 2023.3.20. 사진 이호 작가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정의구현사제단)은 20일 오후 7시 전북 전주시 풍남문 광장에서 김영식 정의구현사제단 대표 신부 주례로 '검찰독재 타도와 매판매국 독재정권 퇴진 촉구' 시국미사를 봉헌했다. 2023.3.20. 사진 이호 작가

가치와 국익 균형 외교 절실…한국만 희생 없어야

지난 2일 국무회의에서 윤 대통령은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을 평가했다. 그는 "한미동맹은 가치동맹의 주춧돌 위에 안보동맹, 산업동맹, 과학기술동맹, 문화동맹, 정보동맹이라는 5개 기둥을 세웠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실상은 윤 대통령의 평가와 다르다. 삼성전자와 현대차가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하고도 반도체와 전기차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됐고, 동맹국에 의해 대통령실 도청당했는데 항의도 제대로 못 하는 그런 관계가 '산업동맹'과 '정보동맹'의 실체라면 정상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지난달 한미 정상 공동기자회견에서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기자는 한미 관계의 현주소를 정확히 꼬집었다. 그는 바이든을 향해 "선거를 앞두고 국내 정치에 도움을 얻으려고 핵심 동맹에 피해를 주는 게 아니냐"고 따졌다. 윤 정부가 할 질문을 미국 기자가 대변한 셈이다.

'가치 외교'를 추구했으나 미국에는 푸대접받고 악화된 중국·러시아 관계 탓에 경제 피해는 날로 커지고, 일본엔 과거사 면죄부와 재무장의 길을 용인하는 '자해 외교'로 귀결됐다. 윤 정부 1년 외교에 대한 총평이다.

두 진영의 충돌 지점에 놓여 화살받이가 되는 가치 외교 일변도에서 벗어나, 가치와 국익의 균형을 이루는 입체적이고 실용적인 외교가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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