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중심 교만한 사고 벗어나야 인간이 산다

신동진 마을활동가
신동진 마을활동가

가을에 농작물 수확을 하고 나면 줄기, 잎, 뿌리와 같은 부산물들이 생긴다. 흔히 ‘영농부산물’이라고 부르는데 그 양이 적지 않다. 예전에는 이 부산물을 태우곤 했지만 지금은 불법이다. 밭의 해충을 없앤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고, 산불로 이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농부산물을 퇴비장에서 삭혀서 다음 해 퇴비로 사용한다. 처음 퇴비장에 부산물들을 갖다 놓을 때는 이 산더미 같은 풀들이 줄어들기나 할 건지, 정말 퇴비가 될지 의문스러웠지만, 시간이 흐른 뒤 보슬보슬한 흙처럼 변하는 풀들을 보며 자연의 순환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퇴비장에 영농부산물만 갖다 놓은 것은 아니다. 쌀 씻고 나온 쌀뜨물을 갖다 붓고, 먹다 남은 막걸리도 붓고, 음식물 쓰레기 1차 발효시킨 것도 붓고, 가끔 모아놓은 소변도 갖다 붓고, 농업기술센터에서 미생물 액을 받아 와 갖다 붓기도 하고 하니, 내가 모르는 신비한 역사가 퇴비장 안에서 일어났다.

 

퇴비장. 좌측이 올해 영농부산물을 쌓아놓은 퇴비장, 우측이 작년에 영농부산물을 쌓아놓았던 퇴비장.
퇴비장. 좌측이 올해 영농부산물을 쌓아놓은 퇴비장, 우측이 작년에 영농부산물을 쌓아놓았던 퇴비장.

위 사진 우측의 바닥에 있는 거무스름한 흙이 처음에는 왼쪽 퇴비장의 풀처럼 있던 것이 변한 것이다. 그 흙 속에는 지렁이와 장수풍뎅이 애벌레가 한가득이고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곤충들도 눈에 많이 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도 물론 많을 것이다. 그 각종 미생물과 곤충 등 생명체들이 어떤 상호작용을 해서 이런 결과물을 만들었는지 나는 잘 모른다. 현대과학도 잘 모를 것이다. 미생물과 곤충의 세상은 아직 미지의 영역이 많기 때문이다. 검색 사이트에서는 아래와 같은 두 종류의 사진이 earth’s inhabitants라는 똑같은 이름으로 검색된다.

 

그림 출처https://ufees.net/en/news/there-are-8-billion-of-us-on-earth-the-population-of-the-planet-reached-a-new-record/
그림 출처https://ufees.net/en/news/there-are-8-billion-of-us-on-earth-the-population-of-the-planet-reached-a-new-record/

위 그림에서 지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들이 아래 그림에서는 몇 %나 될까? ‘지구의 거주자(earth’s inhabitants)’ 중 Insects(곤충)가 52%로 가장 많고, 그 외 무척추동물이 19%로 그다음, 식물이 16%, 버섯, 균, 이끼류가 6%, 규조류(Diatom), 박테리아, 바이러스 등이 3%, 척색동물(Chordates) 3%가 지구에 살고 있다. 척추동물을 포함하는 척색동물이 약 7천 종이라고 하니 현세의 인간종은 척색동물 중에서도 7천분의 1을 차지하는 종에 불과하다. 가장 많은 비율로 살고 있는 곤충의 개체수가 약 100경이라고 한다. 인류를 80억이라고 치면 100경(1018) ÷ 80억 = 125,000,000으로, 곤충은 인간보다 무려 1억 2천5백만 배 더 많이 지구에 생명체로서 살고 있다.

지구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의 비율로만 보면 지구의 주인은 곤충이다. 무척추동물을 포함해 71%다. 이 생명체들이 지구상에서 어떤 관계를 맺으며,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으며 생태계의 평화를 유지하며 살고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인간은 0.1%에도 못 미칠 지구 거주자로서 ‘만물의 영장’을 자칭하며, 인간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99%가 넘는 비인간 존재들의 삶의 영역을 마음껏 유린하며 살아왔다. 몇 해 전 우리가 혹독하게 겪은 코로나19 사태는 우리가 생명체를 무시하며 생태계의 평화를 깨뜨려서 생긴 결과물이다. 그들의 서식지를 인간은 무도하게 침범하고 파헤치고 그곳의 생명체들을 죽여버렸다.

그 생명체들의 역공이 이제 더 자주, 더 심각하게 인류를 죽일 것이다. 더 센 놈이 올 것이라고도 한다. 개별 생명체가 아닌 생명체 총체로서의 지구도 생태계의 평화를 깨는 인류의 파멸을 경고하고 있다. 기후재앙이라는 이름으로 숱하게 울려대는 멸종의 경고음을 인간은 그냥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리의 소음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숱한 생명체들에 대한 앎과 존중 없이 인간의 안전은 보장되기 어려운데도, 그 생명들을 알아채는 감수성은 점점 무뎌져 왔다. 극소수의 인간이 대다수의 비인간을 약탈하면서도 무감각해진 무도한 인간성은, 인간 사회 속에서도 극소수의 인간이 대다수의 인간을 약탈하는 부익부 빈익빈 세상을 더 심화 확대시키고 있다. 이 무도함과 AI의 만남이 만들 끔찍한 세상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인간다움’을 지킬지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런데 그 지키고자 하는 ‘인간다움’이 고작 지금까지 다른 생명체를 업신여겨온 ‘인간다움’에 그친다면 어떤 긍정적 변화도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다. 독자들에게 묻는다. 여러분은 언제 생명 존중의 감성이 생겨나고 함양되고 있다고 느끼는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풀꽃>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 유흥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중

“우리는 어떻게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을 갖게 될까?”라는 질문을 내 자신에게 묻다가 평소 좋아하던 시와 문장이 동시에 떠올랐다. 위 시와 문장을 연결지어 생각해보면, 생명체를 자세히 보고 오래 봐서 사랑하게 되면 그 생명체가 전과 같지 않게 보이게 된다. 그 숱한 생명체를 자세히 오래 볼 수 있는 삶, 그런 삶은 바로 농사를 짓는 삶이다.

 

사진 좌측부터. 퇴비장에서 갖고 온 퇴비(거무스름하고 보스보슬한 흙)를 밭에 뿌리고 토종 호밀 씨앗을 파종하고 볏짚을 덮었다. 볏짚은 옆 친환경 논에서 추수하고 나온 부산물이다.
사진 좌측부터. 퇴비장에서 갖고 온 퇴비(거무스름하고 보스보슬한 흙)를 밭에 뿌리고 토종 호밀 씨앗을 파종하고 볏짚을 덮었다. 볏짚은 옆 친환경 논에서 추수하고 나온 부산물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귀촌한 내가 생명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된 것도 농사를 짓고 나서 부터였다. 흙을 만지며 그 속에 숱한 생명체들을 보게 되고, 그 신비스러움을 보고, 만지고, 맡고, 듣고, 느끼며 생명체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고, 인간 중심의 사고가 얼마나 교만하고 위험한 사고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 숱한 생명체들의 공존과 순환을 보며 자연스럽게 평화로운 세상의 형성을 경험하게 되었다. 농사는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함께 짓는다는 말을 몸으로 느끼며 이전과 다르게 생명체를 대하게 됐다. 산업사회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속도의 노예로 살 때는 경험하지 못한 삶이다. 이런 체험의 확장은 꽃을 보고 씨앗을 받으며 농사짓는 토종씨앗 농사와 마을공동체 활동에 힘을 북돋워 주는 원천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기후재앙을 예전과 다른 고통의 무게로 느끼게 되었다.

도시 아파트의 베란다에 텃밭 상자를 들여놓아서라도, 아파트 단지에 정원 텃밭을 만들어서라도, 학교에도 텃밭을 만들어서, 작게라도 농사를 짓고 농사일을 중심으로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수확물을 함께 먹고 나누는 작은 공동체가 도시에서도 많이 생겨나길 바란다. 이런 삶이 가공할 만큼 일 처리 속도의 편익을 제공하는 AI시대에 그나마 속도의 감옥에서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가 될 것이다. 인공의 도시에서 인공지능에게 지배당하지 않을 인간다움을 지킬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