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기업 판단할 문제"…한국 '어부'냐 '새우 신세'냐 기로
미국에 '항의' 못하는 윤 정부…"정부 존재 이유 부정" 비판도
'2위' 마이크론, 작년 중국·홍콩 D램 매출 약 2조4000억 원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중국이 마이크론을 제재하면서 생긴 '공백' 메우기를 두고 논란이 뜨겁다.
미국 반도체기업 마이크론을 상대로 지난 21일 중국이 "심각한 보안 문제"를 들어 제품 구매 중단을 발표하자, 마이크론이 공급하던 메모리 반도체 D램을 누가 대체할 것이냐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 부문 선두 주자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그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글로벌 D램 시장 점유율에서 작년까지 세계 1, 2위였으나, 올해 1분기에는 삼성전자가 1위를 지킨 가운데, 마이크론이 SK하이닉스를 제치고 2위에 올랐다.
마이크론은 작년 매출액 308억 달러(약 40조7000억 원) 중 16% 이상을 중국 본토와 홍콩에서 올리고 있다. 이중 D램 매출이 약 37% 점하고 있어 대중국·홍콩 D램 매출은 약 18억 달러(2조4000억 원) 규모에 이른다. 엄청난 규모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정도도 아니다.
자연스레 마이크론의 공백을 메우는 과정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그리고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와 같은 중국 기업이 반사 이익을 얻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한국, 마이크론 공백 채우지 말라"…미국, 전방위 '압박'
그런데 장애물이 생겼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에 이어 의회까지 나서 마이크론 사태를 활용한 한국 기업의 중국 판매 확대를 차단하고 나선 것이다.
미국 정부의 이런 움직임을 지난달 파이낸셜타임스(FT)가 폭로했다. 미국 정부가 살제로 중국이 마이크론을 제재할 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에서 마이크론 대신 반도체 판매를 늘리지 못하게 해달라고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는 게 보도 내용의 골자다.
미 의회에선 한국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거의 '협박성 경고'도 나왔다. 미 하원의 마이크 갤러거 '미중전략경쟁특위' 위원장은 23일(현지시간) "최근 몇 년간 중국의 경제적 강압을 직접 경험한 동맹국인 한국도 공백 메우기(backfilling)를 차단하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맹국'을 구실로 동맹국인 한국에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억지가 아닐 수 없다.
D램은 미국이 대중 수출 통제 품목에 포함되지 않은 범용제품이어서 이런 미국의 요구는 그야말로 '반(反) 시장적' 행태란 비판이 거세다.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26일 KBS라디어 '홍사훈의 경제쇼'에 출연해 "이것은 미국의 수출금지 품목이 아니다"라며 "자기 나라 기업이 장사를 못한다고 다른 나라 기업도 장사를 못하게 막아서 되는가"라고 반문했다.
앞서 작년 10월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의 반도체 생산 기업에 미국 기업의 첨단 반도체와 관련 기술·장비의 수출을 사실상 금지하는 수출 통제 조치를 발표했다.
이는 ▲ 핀펫(FinFET) 기술 등을 사용한 로직칩(16nm 내지 14nm 이하) ▲ 18nm 이하 D램 ▲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를 생산할 수 있는 장비·기술을 중국 기업에 판매할 경우 허가를 받도록 했다.
미국에 '쓴소리' 못하는 윤 정부 "기업이 판단할 문제"
문제는 윤석열 정부의 '나 몰라라'하는 행태다. 국민에게서 권력을 위임받았다면 마땅히 국리민복을 위해 당당히 외교를 펼쳐야 하는데도, 미국 앞에서만 서면 작아지고 잇단 미국의 과도한 요구에 제대로 '항의'도 못하는 실정이다.
인플레감축법(IRA)과 반도체과학법(CSA) 상 보조금 부당대우 건과 미국의 용산 대통령실 도청 사건이 그 대표적 사례다. 마이크론 사태 관련 대처도 마찬가지다.
미 행정부와 의회의 압박이 음으로 양으로 간단치 않은 상황인데도, 윤 정부는 힘든 의사결정을 기업에 떠넘기고 발뺌하는 모양새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미국의 요청 사실을 부인한 데 이어 22일 장영진 산자부 1차관도 출입기자 간담회에서 "정부가 (기업에)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고 기업이 판단할 문제"라고 주장했다.
장 1차관은 "기본적으로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는 글로벌 사업을 하니 양쪽을 감안해서 잘 판단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정부는 빠질 테니 기업들이 '결정'하란 얘기나 다름이 없다.
'보안 문제'를 구실로 한 지난 21일 중국의 마이크론 제재는 미국의 대중 디커플링(탈동조화·공급망에서 배제) 시도가 미국 기업에도 타격을 줄 뿐 아니라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을 교란시킬 것이라는 대미 경고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날은 전방위적 대중국 견제를 천명한 미국 주도의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공동성명이 발표된 다음 날이란 점에서 중국의 '시위 성격'이 짙다.
미·중 '마이크론' 격돌…한국 '어부'냐 '새우 신세'냐 기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언급을 피하며 극히 신중한 모습이다. 미국 상무부가 수출 통제 조치를 통해 중국 내 삼성전자의 시안 낸드 공장과 SK하이닉스의 우시 D램 공장의 생산량과 장비 반입을 통제할 수 있어 한국 기업의 처지에선 '미국발 경고'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연합뉴스는 풀이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22일 자 기사에서 반도체를 둘러싼 첨예한 미·중 갈등 이란 지정학적 요인을 고려할 때 한국 기업의 상황 활용이 쉽지 않을 것으로 봤다.
최배근 교수는 "한국이 얼마나 우습게 보이면 그렇게 하겠나"라면서 "이 정부는 미국에 쓴소리 한번 제대로 한 적 있는가. (기업들이 알아서 판단하라는 것은) 정부가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마이크론 제재를 둘러싼 미·중 '고래 싸움'에서 의사결정을 못해 등 터지는 '새우'의 신세가 될지, 과감한 의사결정을 통해 실리를 챙기는 '어부'가 될지 윤 정부가 결정할 시점이다.
한편 안덕근 통상교섭본부장과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장은 26일(현지시간)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무역장관 회의에서 만나 회담을 했다. 통상 분야이긴 하지만 오랜만에 양국 간 장관급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중국은 회담 후 보도문을 통해 "양측은 반도체 산업망과 공급망 영역에서의 대화와 협력을 강화하는 데 동의했다"고 강조한 데 반해, 한국은 "중국 측에 교역 원활화와 핵심 원자재·부품 수급 안정화를 위한 관심과 지원을 요청했다"고 밝히는 등 서로 강조하는 포인트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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