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번 강서구청장 선거는 정치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다. 보궐선거의 원인제공 당사자를 3개월 만에 특별 사면하여 공천한 것은 현대 정치사에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국힘당 내의 반대 정서에도 무리수를 두며 김태우를 공천하게 한 것은 이재명과 조국을 동시에 날리기 위한 윤석열의 전략이었을 것이다. 알다시피 김태우는 문재인 정부 민정수석실 특별감찰반에 파견된 검찰수사관으로 여러 건의 부적절한 행위로 검찰로 돌려보내진 후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에 대한 감찰무마 의혹을 언론에 유포하며 공익신고자를
얼마 전 가까운 지인이, 예전엔 부모로부터 네가 안 나서면 나라가 안 돌아가냐, 적당히 하라는 타박을 들었는데 이젠 자식에게 적당히 하시라는 걱정을 듣는다며 혀를 찼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후쿠시마 핵폐수 무단 투기에 가장 분노하는 세대도,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구속 여부에 대한 질문에 부당하다는 응답이 가장 많은 연령대도 4050이었으니,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이 세대의 현실인식은 다른 세대에 비해 진보적이거나 관심이 많은 세대라 할 수 있겠다. 에코 챔버 효과이기도 하겠지만 기성세대가 주로 이용하는 SNS인 페이스북에서도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장안에 화제인 영화 ‘오펜하이머’를 뒤늦게 보았다. 간간이 들리는 “어렵다”는 말에, 과학에 무지한 나로서는 복잡한 수학공식이나 과학적 지식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지레 겁을 먹었다. 하지만 영화는 과학자를 주인공으로 삼아 ‘과학과 정치’의 관계를 다룬 지극히 정치적인 영화였고, 후반부로 가며 매카시즘에 먹잇감이 된 과학자의 얄궂은 운명이 영화의 날실 역할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영화관을 나오며 들었던 생각은, 한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 또는 고차원적인 사고를 하는 한 인간
예고 없이 발생한 전시상황도 아닌데 국민을 동원수단으로 삼아 관제 억지 국격을 연출한 새만금 세계스카우트 잼버리대회가 끝났다. 돈은 돈대로 쓰고 국제적 망신은 심장을 찌르는데 저들의 자화자찬에 구역질이 날 지경이다. 연예인과 기획사를 대하는 태도는 과거 박정희 정권의 채홍사를 연상케 하고 공기업이든 사기업이든 마음대로 징발할 수 있는 사유재산쯤으로 여기는 무도한 정부를 지켜보는 것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일이다. 정부와 검찰의 나팔수로 전락한 언론이 아무리 펜 마사지를 한다한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실시간으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2017년 1월 대기업 통신사 콜센터에서 현장실습 중이던 여고생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특성화고 애완동물과에 다니던 여학생은 소위 욕받이 부서라고 불리는 통신사 해지 방어팀에서 극도의 업무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자해, 구조되었지만 3일 뒤 저수지에 몸을 던졌다. 현장실습 나간 업체에 취업해 스크린도어 사고로 희생된 김 군이 아니어도 특성화고를 비롯한 실업계고 학생들이 현장실습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산재로 목숨을 잃은 사례는 수없이 많다. 그때마다 정부는 부랴부랴 대책을 내놓았지만 현실은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스포츠 경기나 선거라는 정치 이벤트를 출격, 육탄전, 비밀 병기 등 전쟁용어를 동원해 주목도를 높이는 것에 반감이 컸다. 정정당당하게 자웅을 겨루면 되지 전투를 치르는 양 공격성을 고취시킬 것까지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 종종 나도 모르게 그런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시민권을 얻은 1987년 이래 중요하지 않은 선거는 없었지만 내년 총선은 역사의 분수령이 될,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선거가 될 거라 생각하니 절로 결전을 앞둔 심정이 되는 것 같다.문제는 조국 전 법무부 장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얼마 전 한적한 길을 운전하며 가다 개와 산책하는 노년 남성을 만났다. 평화로운 풍경이다. 그런데 점점 가까워지며 티셔츠 등에 ‘자유통일’이라는 문구를 보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자유통일? 평화통일이나 남북통일도 아니고 자유통일이라니, 갸우뚱할 때 그를 지나쳤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의 앞모습을 보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60대 후반이라는 것과 티셔츠 가슴 왼편에 ‘광화문 온’이라는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순간 광화문 태극기가 떠오르고 동시에 심장 박동이 빨라지며 온갖 불쾌한 감정이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한 집 건너라고 할 만큼 암환자가 많아졌음에도 의학기술 발전과 더불어 국민건강보험의 중증환자 산정특례제도 덕분에 생존율과 완치율이 크게 향상되었다. 암 진단을 받으면 수술과 항암치료, 방사선 치료라는 표준치료가 마치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제시된다. 후유증을 최소화한 항암제나 표적치료제가 많이 개발되었다고 해도 환자 본인이나 가족 입장에서 항암치료는 불안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환자들이 표준치료를 선택하는 것은 신체적 후유증을 감수할 만큼 항암치료의 이익이 크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현행 선거법에서는 공식 선거운동 기간 이전에 선거운동할 수 있는 자는 후보자와 후보자의 배우자, 직계가족으로 제한하고 있다. 이들은 법적으로 허용하는 선거운동원 숫자에서도 자유롭다. 후보자들 사이에서 부모가 오래 살거나 배우자가 여럿이거나 자식을 많이 두어야 유리하다는 우스갯소리가 오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후보자의 부인이나 아들딸의 호감을 주는 언행이나 외모로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하기에 선거캠프에서는 의도적으로 팬덤 현상을 시도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황당한 일도 없다. 어여쁘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보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어지럼증을 느끼는 현상을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하고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무신경함을 마크 트웨인 신드롬이라 한다. 소설가 스탕달이 이탈리아 피렌체 산타크로체 성당을 방문했을 때 특이한 경험을 한 것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을 보고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한 마크 트웨인의 무신경함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같은 사람도 대상에 대한 배경지식과 경험, 성향에 따라 감흥도 다르기 마련일 것이다.원주에는 1963년 개관하여 2006년 폐관한 후 방치되어 있던 마지막 단관
이럴 수도 있구나, 국가와 국민의 자존을 이렇게까지 유린하고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수 있다니, 행정수반이 사법부를 무시하고 국가의 중요한 명운이 달린 사안을 국회의 검토 한 번 없이 마구 싸질러도 정녕 제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입법부와 사법부의 존재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게 요즘 솔직한 심경이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지만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뼈아픈 사건 한 가지를 꼽으라면 반민특위 해체를 들겠다. 해방 이후 친일청산이라는 첫 단추를 잘 꿰고도 또다시 친일세력에게 찬탈당한 역사가 요즘처럼 가슴을 짓누
이름만 들어도 오싹해지는 건물이 있다. 독가스 대신 물고문, 전기고문이 자행된 아우슈비츠나 다름없었다는 김근태 선생의 아픈 회고가 아니어도, 육중한 철문을 지나 검은 벽돌의 건물 입구에 서면 “여기 들어오는 자, 지금부터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했던 단테의 지옥문 경구를 절로 떠올리게 만드는 곳, 남영동 대공분실이 바로 그곳이다. 1974년 내무부 산하 치안본부 시절 독재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경찰의 어두운 역사 현장인 남영동 대공분실은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어 도망갈 수도 없는 라비린토스(미궁)와도 같은 곳이었으며
우리는 지금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나라에 살고 있다. 상식과 합리적 사고를 전제한 사회적 합의라는 정치의 프로토콜이 부정되고 어떠한 반론도 허용되지 않으며 질문해야 할 권능을 가진 이들은 스스로 일차원적인 존재로 전락했다. 기자는 국민을 대신해 불편한 질문을 해야 하고 대통령과 권력이 집중된 대통령실은 국민의 의사를 경청하여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는 건 민주정의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다. 그러나 마치 왕정복고시대인 양 삼권분립이라는 민주정의 근간을 흔들고 정당한 문제제기나 의혹제기를 불순한 행위로 낙인찍음으로써 정치를 실종시켰다. 말
철학과 태도가 반영된 말과 글은 어떤 자리에 있는가에 따라 그 무게가 다르다. 국내외 언론이 24시간 대통령의 말에 집중하는 것은 국민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외교안보, 경제 안보에 대한 언급은 국가의 존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에 대통령의 말이 갖는 무게는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대통령의 언어는 공식 연설문이든 느슨한 자리든 단 한마디도 허투루일 수 없는 것이다.정치인들은 맥락을 거세한 채 일부분만 보도한 발언으로 곤욕을 치르곤 하는데 대중들과 말로 소통해야 하는 정치인에게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소통이 더욱 중
10.29 이태원참사가 있은 지 58일, 그동안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제3자인 내가 이럴진대 부모의 마음은 오죽하랴 싶어 차라리 우울 속에 있는 게 나을 성 싶을 정도였다. 그러다 두 생존자의 증언을 들으며 큰 위안을 받았다. 한 사람은 이태원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좋아 핼로윈 때마다 방문했었다는 생존자 김초롱 씨이고 또 한 사람은 유가족이자 생존자, 그리고 목격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故 박지혜 씨의 동생 박진성 씨였다. 간발의 차이로 살아난 이들에게 위로를 받는 아이러니, 나는 두 사람의 증언을 읽고 들으며 ‘이것이 인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상대적으로 부모님을 일찍 여읜 나는 곡하는 소리를 꽤 여러 번 들었다. 처음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우는 소리를 내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점점 그 곡소리가 여간 위안이 되는 게 아니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저렇게 서럽게 울어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좋겠다... 그러다 장례식의 주인공은 망자라는 것. 그리고 곡소리를 듣는 대상은 상주가 아닌 망자이며 이렇게 슬피 울어줄 테니 이승에 미련 두지 말고 훠이훠이 잘 가라고 인사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미쳤다. 아이고 아이고, 망자와의 이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