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들어온 겨울 파리

김혜형 작가, 농부
김혜형 작가, 농부

민감한 생체 온도계를 가진 곤충들

거실 유리문 여닫는 짧은 사이, 방충망에 붙어 있던 파리 한 마리가 잽싸게 집 안으로 들어온다. 기온이 떨어지는 늦가을 무렵 곧잘 벌어지는 일이다. 파리가 사람의 집을 기웃거리는 이유는 단 하나, 겨울 추위를 피해 목숨을 연장해보려는 것이다. 파리는 생존에 적합한 온도를 감지하고 그쪽으로 향하는 주열성(走熱性)을 가지고 있다. 주열성을 가진 곤충이 파리만은 아니어서, 무당벌레와 오이잎벌레, 심지어 노린재도 사람의 집에서 새어 나오는 열을 감지하여 방충망과 창틀에 달라붙는다.

파리의 작은 더듬이엔 고감도의 온도 센서가 탑재되어 있다. 왼쪽 더듬이와 오른쪽 더듬이가 각각 감지한 온도가 0.1도 차이만 나도 날아가는 방향을 즉시 틀 수 있을 정도다. 파리의 우왕좌왕이 사람 눈엔 무작위적으로 보이지만 당사자에겐 쾌적한 온도를 향한 기민한 방향 전환일지도 모른다. 파리 더듬이의 민감도는 에드 용이 쓴 『이토록 굉장한 세계』에 잘 나와 있다. 무수한 생명체들의 경이로운 감각 세계를 엿보게 해주는 대단한 책인데, 읽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제한된 감각으로 이 세계와 다른 생명체를 편견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생명체들은 오랜 진화의 세월 동안 생존을 위한 감각을 예리하게 벼려왔고, 그들이 가진 능력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 눈에는 하찮기 이를 데 없는 파리 한 마리도 놀라운 초감각의 소유자다. 우리가 그들의 감각을 거의 알지 못하는 건 인간의 제한된 감각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힘께 하기 어려운 불청객을 최대한 이쁘게 그려봤다.
힘께 하기 어려운 불청객을 최대한 이쁘게 그려봤다.

동거하기 어려운 불청객, 파리

겨울이 가까워지면 무당벌레와 오이잎벌레, 깡충거미와 각종 노린재가 집안 곳곳에서 목격된다. 그들은 거실 유리문과 현관문 주변을 배회하다 사람이 드나드는 틈을 노려 슬쩍 기어든다. 냄새 지독한 노린재류는 발견 즉시 휴지로 집어서 밖으로 던지고, 노란 보호액을 흘리는 무당벌레도 창틀에서 끄집어내 내쫓는다. 하지만 오이잎벌레나 깡충거미는 못 본 체한다. 내가 그들을 특별히 총애해서가 아니라, 생활에 크게 방해되지 않는 데다 음식물이나 쓰레기통을 탐하는 것도 아니어서 굳이 제거할 필요를 못 느껴서다. 겨울 벌레에 관한 내 용인의 범위는 나의 편의에 근거한다.

아무리 내가 살생을 꺼리는 소량의 자비심을 장착했다지만, 파리만은 겨울 동거 곤충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나는 이 불청객이 성가시다. 녀석은 시끄럽고 산만하다. 소음, 잡담, 복잡한 공간, 말 많은 사람을 피하는 나의 성향상 파리는 동거 생명체로서 결격이다. 게다가 녀석은 오만불손하게도 내 밥상을 넘본다. 접시 위 따뜻한 음식을 마구 밟고 다니는 녀석 앞에서 나의 참을성은 한계에 다다른다.

파리는 발이 혀다. 파리의 미각 수용체는 발바닥에 있다. 파리가 음식에 내려앉는 건 맛보기 위해서다. 발로 맛보다니, 인간으로선 상상하기 어렵지만 곤충에겐 흔한 능력이다. 나비도 꽃의 꿀을 빨기 전에 발로 맛본다지 않나. 신통한 능력이긴 하지만, 녀석이 내 집에 들어오기 전 꽃만 밟고 다녔을 리 없으므로, 나는 녀석을 내쫓기로 결심한다. 두 가지 길이 있다. 쉬운 길과 어려운 길. 때려잡는 건 쉽지만 생포는 기술력을 요한다.

나의 빠른 손짓도 파리에겐 슬로비디오

살생이 께름해진 뒤부터 생포의 노고가 늘었다. 오이잎벌레나 무당벌레는 손가락으로 슬쩍 집어내면 된다. 하지만 파리는 그럴 수 없다. 파리의 순발력은 놀라울 정도다. 조심조심 손을 뻗어 휙! 낚아채는 순간, 이미 손에 없다. 순간이동이라도 하는 걸까? 파리가 그토록 빨리 움직일 수 있는 비밀은 파리의 시각정보 처리 속도에 있다. 파리가 보는 속도와 인간이 보는 속도는 다르다. 뇌의 시각정보 처리 속도가 인간의 경우 초당 60헤르츠인데 비해 대부분의 파리는 초당 350헤르츠까지 올라간다. 그러니 인간의 빠른 손짓도 파리 눈엔 슬로비디오처럼 보일 수밖에.

“그들의 눈에는 인간의 영화가 슬라이드 쇼처럼 보일 것이다. 우리의 가장 빠른 행동조차 나른해 보일 것이다. 살의를 품고 휘두르는 손바닥도 쉽게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권투는 태극권처럼 보일 것이다. (…) ‘모두가 우리에게 킬러 파리를 어떻게 잡느냐고 물어요.’ 곤살레스-벨리도는 말한다. ‘병을 들고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가기만 하면 돼요. 충분히 느리다면, 당신은 배경의 일부로 간주될 테니까요.’” - 에드 용, 『이토록 굉장한 세계』, p.121~122

까마득히 잊고 있던 옛 기억이 떠오른다. 그토록 빠른 파리를 극도로 느리게 잡았던 역설의 기억. 내가 어렸을 때는 주거환경이 지금과 달라서 파리가 무척 많았다. 나는 파리를 아주 잘 잡는 아이였다. 파리채로 때려잡는 게 아니라 어김없이 생포했다. 방법은 이렇다.

투명한 비닐봉지의 입구를 방방하게 연 채 살짝 쥐고 살금살금 파리에게 다가간다. 앉아 있는 파리의 위쪽에서 비닐봉지를 겨눈다. 비닐봉지를 서서히 내리다가 빠르게 파리를 덮친다. 놀라서 날아오른 파리가 비닐봉지 속에 갇혀 붕붕거린다. 비닐봉지의 중앙부를 손으로 모아 쥐어 파리가 빠져나오지 못하게 한 후, 다시 아래쪽 입구를 방방하게 벌려서 다음 파리 사냥에 나선다. 이 방법은 백발백중이어서, 파리 수십 마리를 비닐봉지 하나로 잡을 수 있었다. 그때는 원리를 몰랐지만, 이제 보니 느린 속도와 투명성이 열쇠였구나.

자연의 분해자들이 치러주는 장례

인간에겐 귀찮기 그지없는 파리지만, 파리는 생태계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분해자이다. 파리는 썩어가는 유기물, 부패한 사체를 빠르게 찾아내 그곳에 알을 낳는다. 알에서 깨어난 구더기는 엄청난 속도로 유기물을 먹어치우며 성체가 된다. 파리나 송장벌레, 지렁이 같은 자연의 청소부들이 죽은 동물의 몸과 배설물과 썩어가는 유기물을 없애주지 않는다면 지구 표면은 삽시간에 짐승의 사체와 배설물로 뒤덮일 것이다.

집 주변 숲에 다람쥐가 많고, 족제비도 가끔 보이고, 너구리와 오소리, 고라니와 멧돼지도 지나다닌다. 우리 뒷산과 계곡에서 수많은 동물들이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어가지만, 나는 그들의 주검을 거의 보지 못한다. 딱 한 번 어린 고라니의 사체를 뒷산 비탈에서 보았을 뿐이다. 이미 분해가 상당히 진행된 데다 반쯤 말라 있어 삭아가는 낙엽 같았다.

숨을 거둔 고라니에게 가장 먼저 도달한 곤충은 파리였을 것이다. 그 다음엔 송장벌레, 지렁이, 톡토기가, 마지막엔 미생물이 고라니를 낱낱이 흙으로 분해해 주었겠지. 자연이 치르는 장례는 깨끗하다. 쓰레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죽은 동물은 분해자에 의해 흙으로 바뀌고, 영양 가득한 흙은 식물을 키우고, 그 식물 덕분에 동물이 먹고산다. 그러므로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진실이다.

 

서리 내린 아침, 화분에 파리 한 마리가 웅크린 채 죽어 있다.
서리 내린 아침, 화분에 파리 한 마리가 웅크린 채 죽어 있다.

파리에 대한 헌사, 시와 하이쿠

초겨울, 집 안에 들어온 파리를 보면 생각나는 시가 있다. 제목이 「노화도의 겨울」인데, 내 머릿속에는 그냥 ‘겨울 파리’로 입력되어 있다.

“겨울 파리 / 한 마리가 / 나와 함께 산다 //
내 식탁 위에 함부로 / 오르는 법이 없고 / 내 얼굴에도 버릇없이 / 발을 대지 않는다 / 내가 누우면 / 천장에 붙어 자고 / 내가 일어나면 내려와 / 반가이 맴돈다 //
밥상 위의 부스러기 / 남겨둔다 / 나갈 때 보일러를 / 켜둔다” 

(김진수 시, 「노화도의 겨울」 전문)

본업은 화가인데 한때 시집도 냈던 내 오라비의 시다. 전교조 해직교사로 긴 세월 고생하다 뒤늦게 복직한 첫 발령지가 노화도였다. 외로운 ‘섬마을 선생님’의 썰렁한 학교 관사에, 추위에 시달리던 파리 한 마리가 온기를 찾아 날아들었던 모양이다. 일주일간 파리와 동거하다 주말이 되어 뭍으로 나간 김 선생, 월요일 새벽 어스름에 해남 땅끝에서 승선한 철부선(쇠로 만든 짐배)의 뱃전에서 파리를 생각한다. ‘살았을까, 죽었을까.’ 관사에 도착해 방문을 여니, 보일러 꺼진 관사의 냉기를 견디지 못한 파리가 김 선생의 하얀 베개 위에 쓰러져 있더란다. 위의 시는 ‘애파리’를 향한 김 선생의 애틋한 헌시다.

시를 소개한 김에 하이쿠 하나 덧붙인다.

“죽이지 마라, 파리가 손으로 빌고 발로도 빈다.”
- 코바야시 잇사 (류시화 역)

파리가 발을 비비는 건 미각의 유지를 위해서지만, 하찮은 미물에 마음을 포개고 연민을 느끼는 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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