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 판사들의 초라한 문맹의 몰골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장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장

그리스 단어 오클로스(ὄχλος)는 요즘 말로 개돼지 같은 백성, 흙수저 같은 백성이라는 뜻이다. 마가복음에 38번, 요한복음에 20번 나오는 단어다. 예수 추종자 중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그들은 대부분 가난했다. 예수는 가난한 군중에게 가장 많이 신경 썼다.

오클로스라는 단어는 원래 부정적인 의미 없이 백성 전체, 또는 피지배 계급을 가리켰다. 바빌로니아에 유배당하지 않고 고향 이스라엘에서 이방인의 지배 아래 살았던 유다인을 멸시하는 뜻이 에즈라와 느헤미야 시대 이후로 추가되었다. 바빌로니아로 끌려가지 않았던 유다인은 끌려간 유다인만큼 성서를 잘 알지도 못했고, 유배 시절을 반성하고 묵상한 수준 높은 신학을 접하지도 못했다.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은 자신들의 높은 성서 지식을 자랑하면서 해외로 끌려가지 않았던 유다인을 대놓고 무시하기 시작하였다.

해방 가져다 줄 인물 기다렸던 예수 시대 유다인들

신약성서 네 복음에서 군중과 죄인이 같은 뜻의 개념은 아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며 사실상 유다인 아닌 사람처럼 살았던 유다인도 있었다. 군중이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땅의 사람들(Am Ha-arez)’과 같은 개념도 아니다. 네 복음은 ‘땅의 사람들’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고, 군중을 ‘땅의 사람들’과 동일시하지도 않았다. 네 복음은 군중을 자세히 설명하거나 정의하지 않았다. 그리스 사람이 단어를 정의하기 즐겨 한다면, 유다인은 사례를 들어 단어를 설명하기 좋아한다.

군중이 예수와 예수 운동을 바라보는 눈은 유다인이 바리사이 운동을 보는 눈과 비슷하였다. 유다인은 바리사이들이 시작한 유다교 개혁 운동을 관심 있게 보고, 존중하고, 영향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유다인 모두가 바리사이 운동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다. 군중은 예수와 예수 운동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귀 기울이고, 영향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군중 모두가 예수 운동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평범한 유다인은 예수 이전에도 세례자 요한이나 또 이런저런 자칭 예언자들에게 비슷한 태도를 보였다. 500년 넘게 식민지 통치에 시달려온 유다인은 식민지 지배를 끝장내고 독립과 해방을 가져다줄 인물을 오래도록 애타게 기다려왔다.

예수를 문맹이라 비판한 일부 유다인들과 예수의 항변

그런 유다인은 나자렛 예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예수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유다인도 드물지 않았다. 그들이 예수를 비판하는 근거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유다인은 예수의 학력이 부실하다고 비판했다. 내세울 만한 학력이 없던 예수는 하느님을 인용하여 그 비난에 대항했다. 하느님을 아는 것보다 더 큰 학력이 세상 어디에 또 있는가.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애쓰는 사람은 거짓 없고, 정직하다. 자기 영광과 욕심을 버리면 눈과 마음이 열린다. 예수는 유다인이 존경하는 모세를 인용하여 자신을 비난하는 유다인에게 맞섰다. 모세가 전해준 율법을 지키지도 않는 유다인이 율법을 잘 실천하는 예수를 어떻게 비난하냐는 것이다.

둘째, 유다인은 예수가 미쳤다고 주장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예수를 유다인은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느님이 보낸 사람은 안식일을 위반할 리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는 안식일에 율법을 어기면서 할례가 허용되었다면, 안식일에 치유도 허용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안식일에 치유 행위가 하느님의 창조 정신에 더욱 어울리지 않느냐는 항변이었다.

셋째, 유다인은 예수의 출신 지역을 트집 잡았다. 진짜 메시아는 어디 출신인지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다는 생각이 유다교에 있었다. 예수는 갈릴래아 출신임을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으니, 예수는 진짜 메시아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예수는 하느님 출신이라는 논리로 그들에게 맞섰다.

 

지귀연 판사(왼쪽)와 조희대 대법원장. 연합뉴스 자료사진 편집
지귀연 판사(왼쪽)와 조희대 대법원장. 연합뉴스 자료사진 편집

지금 한국에서 진짜 문맹은 검사, 판사, 변호사

유다인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꺼낸 이유를 나는 ‘지식인은 누구인가’ 주제와 연결하여 논의하고 싶다. 지식인은 누구인가를 말하려면, 문맹은 누구인가부터 먼저 말해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은 누구이고, 문맹은 누구인가.

한국에서 문맹의 대명사는 검사, 판사, 변호사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 그럴까. 그들은 언어의 형식인 글씨는 읽을 줄 알아도 언어의 내용인 진실을 읽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외국어 열 개를 해독하는 사람이더라도 그가 진실을 외면한다면, 그 사람은 문맹이다.

브라질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는 말했다. “지식인은 학교를 오래 다닌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는 사람을 가리킨다.”

지금 한국에서 학교를 오래 다녔음에도 가장 부패하고 부도덕한 집단은 누구일까? 검찰일까, 법원일까? 막상막하 아닐까? 지금 검사, 판사, 변호사는 민주 시민들에게 가장 비난받는 사람들이다. 그들 사이에 공통점이 하나 있다. 군중을, 백성을, 국민을 개돼지로 본다는 사실이다. 가난한 사람을 편들지 않고 개돼지로 보는 사람이 곧 문맹이다.

 

천대엽 법원행정처장과 각급 법원장들이 12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전국법원장회의 임시회의에서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2025.9.12. 연합뉴스
천대엽 법원행정처장과 각급 법원장들이 12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전국법원장회의 임시회의에서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2025.9.12. 연합뉴스

예수야말로 가난한 사람들 편든 진정한 지식인

예수는 글자를 읽지도 못했고, 쓰지도 못했던 문맹이었다는 의견이 요즘 성서학계에 있다. 예수가 정말로 글자를 읽지도 못했고, 쓰지도 못했다고 치자. 그럼 예수는 문맹인가?

글자를 읽고 쓸 줄 안다고 지식인이 아닌 것처럼, 글자를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고 문맹인 것은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는 예수야말로 진짜 지식인이다. 예수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는 사람은, 글자를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고 하더라도, 모두 어엿한 지식인이다.

조작 수사 하면서 사람의 배를 가른다고 협박하는 검사들, 엉터리 판결을 하면서 양심선언 하나 할 줄 모르는 대법원 판사들, 사악한 세력의 하수인으로 사는 변호사들이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문맹 아닐까?

참을 수 없이 초라한 그들의 몰골을 두 눈 부릅뜨고 똑바로 보자. 불의에 복무하는 저들이 추한 문맹이라면, 불의에 저항하는 우리는 훌륭한 지식인이다! 악의 세력을 편드는 사람은 누구나 문맹이다. 악의 세력에 저항하는 사람은 누구나 지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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