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 일가 사익 추구로 기업 가치 훼손

"한국 증시 만성적 저평가도 재벌 때문"

한국 지배구조 점수 아시아 12개국 중 9위

세계적인 추세인 ESG 경영에도 역행

“코리아 디스카운트, 가치주인가 가치 함정인가?”

미국의 경제전문 방송 CNBC가 지난 27일 보도에서 한국 재벌기업의 지배구조와 한국 증시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헤치며 던진 질문이다. CNBC는 한국 기업의 가치를 훼손하고 한국 증시를 만성적인 저평가에 빠뜨린 원인으로 북한 관련 지정학적 위험과 외국인 투자자 참여 제한 등과 더불어 재벌 기업을 꼽았다. 

 

 CNBC 방송 화면 캡처. 시민언론 민들레

한국에서 시장 영향력이 큰 재벌기업은 일반적으로 창업자 일가가 지배하는 가족 소유의 대기업으로 삼성전자와 LG, SK, 현대차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재벌기업은 한국 경제를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CNBC에 따르면 삼성과 그 계열사가 지난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한 비중은 22.4%에 달했다. 문제는 이런 재벌기업이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타이거 펀드 매니지먼트의 제레미 탄 최고경영자(CEO)는 “재벌들은 복잡한 기업 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이는 지배구조와 투명성, 주주 권리 측면에서 형편없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퍼스트 플러스 자산운용의 주식 투자 부문 책임자인 지앙 장도 비슷한 견해를 피력했다. 재벌이 총수 가족 소유 구조로 돼 있어 주주나 투자자들이 회사의 전략적 방향에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재벌 총수 일가가 회사의 지배적 지분을 보유하고 있어 핵심 사업과 관련이 없거나 손실을 초래하는 사업을 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주주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 9월 공정거래위원회가 세아그룹 계열사인 세아창원특수강에 과징금을 부과한 사건은 CNBC가 제기한 문제점의 사례가 될 수 있다. 세아그룹 소속 세아창원특수강은 총수 일가 지원을 위해 헐값으로 계열사에 제품을 공급했다가 적발됐다. 세아창원특수강은 세아그룹의 또 다른 계열사인 CTC에 스테인리스 강관을 시장 시세보다 낮은 가격으로 공급했다. CTC는 총수 일가가 100% 지분을 보유한 개인 회사의 자회사다. 총수 일가를 부당 지원하기 위해 세아창원특수강을 희생시킨 셈이다.

 

 자료 : 공정거래위원회. 세아그룹 내부부당지원 구조도
 자료 : 공정거래위원회. 세아그룹 내부부당지원 구조도

경제개혁연대는 최근 세아그룹의 상표권 거래와 관련해 사업 기회 제공 의혹이 있다며 공정위에 정식 조사를 요청했다. 세아그룹 상표권 소유자는 세아홀딩스와 세아제강지주 2개사로 이들이 세아그룹 대표상표권을 각각 50%씩 가지고 있다. 두 회사에 상표권 사용료를 지급하는 계열사는 세아제강과 세아베스틸 등 13개 계열사로 작년 말 기준 상표권 사용 거래액은 총 57억3000만 원에 달한다.

세아그룹의 대표상표권은 세아제강지주가 100% 보유하고 있었는데 2016년 말 상표권의 50%를 세아홀딩스에 넘겼다. 상표권 양도 이유와 거래금액 등이 투명하지 않아 세아홀딩스에 부당한 이익제공 가능성이 있다는 게 경제개혁연대 주장이다. 세아홀딩스는 총수 일가 지분율이 66.93%로 공정거래법 제47조 제1항 제2호가 규정하는 사익 편취 규제 대상 기업에 해당한다. 경제개혁연대가 제기한 의혹이 사실이면 계열사의 상표권 사용료가 총수 일가 회사의 ‘쌈짓돈’으로 전락한 셈이 된다.

세아그룹처럼 총수 일가의 지배력 강화와 사익 편취 행위는 다른 재벌기업도 쉽게 빠질 수 있는 유혹이다. 이처럼 기업 가치를 훼손시킬 수 있는 재벌의 지배구조는 한국 증시가 실제 가치보다 저평가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의 원인 중 하나다. CNBC에 따르면 코스피 전체의 주가순자산비율(PBR)은 0.92에 불과하다. PBR은 기업이 보유한 자산 등 장부 가격 대비 주가 비율을 뜻한다. 통상적으로 PBR 1 미만이면 주가가 적정가치보다 낮다고 본다.

 

서울 남산에서 바라본 주요 기업체 건물.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 남산에서 바라본 주요 기업체 건물. [연합뉴스 자료사진]

실제 가치보다 주가가 저렴하니 한국 주식을 가치주로 볼 수 있다. CNBC도 주가가 중장기적으로 적정가치를 찾아간다고 보는 투자자라면 한국 증시를 ‘가치주’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주주와 투자자 이익을 중시하지 않는 한국의 재벌기업은 투자자들을 ‘가치 함정’에 빠뜨릴 수 있다고 CNBC는 경고했다. 주식이 저평가돼 싸게 보이지만 코리아 디스카운트 탓에 주가가 더 하락하거나 정체될 수 있다는 의미다.

아시아기업지배구조협회(ACGA)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국의 기업 지배구조 점수는 52.9점으로 12개국 중 9위였다. 상위권인 호주, 홍콩, 싱가포르는 물론 대만과 말레이시아, 일본, 인도, 태국보다도 낮다. 총수 일가가 경영권을 독점하고 이사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벌기업의 전 근대적인 지배구조는 세계적 흐름인 ESG(환경, 사회적 책임, 투명한 지배구조) 경영에 역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총수 일가가 아닌 유능한 전문경영인이 경영을 맡고 이사회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기업 지배구조를 바꿔야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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