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쿠팡 김범석 의장’ 사례 들며 거듭 요구
재벌 총수 일가 일감 몰아주기 등 불법 여전
회사기회유용 등 사익편취 수법도 교묘해져
쿠팡처럼 외국 국적자도 기업 실제 지배하면
총수로 지정될 수 있게 오히려 규제 강화해야
쿠팡 창업자인 김범석 이사회 의장이 올해도 대기업 총수(동인일) 지정에서 제외됐다. 재계와 보수언론은 이런 내용의 공정거래위원회 발표가 나오자 국내 기업 역차별 문제를 내세워 총수 지정제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국내 대기업 총수는 동일인으로 지정돼 과도한 규제를 받는 데 반해 김 의장은 쿠팡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면서 국적이 미국이라는 이유로 특혜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동인일 지정제가 도입됐을 당시인 1980년대 중반과 현재 대기업 지배구조가 바뀌어 시대착오적 제도가 됐다는 것도 폐지론자들이 제시하는 근거다. 하지만 일감 몰아주기와 회사기회유용 등 재벌기업 총수 일가의 사익편취 행위가 여전하고 그 수법이 더 교묘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동일인 지정제 폐지 주장은 억지에 가깝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15일 발표한 ‘2024년도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을 발표했다. 지난해 12월 입법예고를 거쳐 개정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시행령이 처음 적용됐다는 점에서 관심이 컸다. 개정 시행령은 기업집단을 사실상 지배하는 자연인을 동일인으로 보는 일반 원칙을 유지하되 ‘예외 조항’을 충족하면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공정위는 △동일인이 자연인이든 법인이든 기업집단 범위가 같고 △기업집단을 사실상 지배하는 자연인이 최상단 회사를 제외한 국내 계열회사에 출자하지 않으며 △해당 자연인의 친족이 국내 계열회사에 출자하거나 임원으로 재직하는 등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자연인 및 친족과 국내 계열사 간 채무보증이나 자금 대차가 없는 경우를 예외 조항으로 뒀다. 하지만 이런 시행령 개정안이 공개됐을 때부터 공정위 스스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는 지적이 나왔다.
결국 이런 우려가 적중해 김 의장이 총수 지정을 피하면서 시행령을 개정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셈이 됐다. 쿠팡은 지난 2021년 자산 5조 원 이상의 공시대상기업집단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국내 대기업과 달리 동일인이 자연인 김 의장이 아닌 쿠팡 법인으로 지정되며 역차별 논란이 불거졌다.
이에 대해 공정위는 김 의장처럼 국적이 외국인일 때 동일인으로 지정할 수 있는지에 관한 규정이 없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그런데도 재계 반발과 여론의 요구가 거세지자 지난해 시행령 개정을 통해 국적 차별 없이 적용할 기준을 마련했다. 그러나 김 의장이 예외 조항을 모두 충족하며 시행령 개정의 의미가 희석되고 말았다.
공정위는 “특정 기업집단의 이해에 따라 시행령 개정이 추진됐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며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해도 친족의 계열사 출자와 경영 참여가 없고, 계열사와의 채무보증이나 자금 대차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구조상 사익편취 유인이 현저히 적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하면 총수 일가를 뜻하는 ‘특수관계인’을 지정할 수 없어 사익편취 행위에 대한 규제 공백이 발생할 소지가 있다.
더 큰 문제는 김 의장 사례를 들어 재벌 총수 일가의 사익편취 행위를 막는 동일인 지정제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다. 재계 의견을 대변하는 한국경제인협회는 홍대식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에 의뢰해 작성한 ‘기업의 지배구조 자율성 확보를 위한 공정거래법상 대규모 기업집단 규제 개선방안’ 보고서를 지난 9일 발표했다. 기업집단의 동일인을 자연인인 ‘기업 총수’가 아닌 ‘핵심 기업’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보고서는 총수 지정제가 도입된 40년 전과 달리 창업주 개인이 순환출자형 또는 피라미드형 기업집단 형태로 기업을 운영하며 이를 경영권 승계에 악용하지 못한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지금은 기업의 자율적인 지배구조 개선이 강조되고 있는 데다 지주회사 구조를 가진 기업은 최상위 회사 등 핵심 기업을 중심으로 기업집단의 범위를 충분히 획정할 수 있는 것이다.
보고서는 또 현행 동일인의 친족 범위는 혈족 4촌, 인척 3촌인데 이 또한 너무 넓다고 지적한다. 동일인의 배우자, 직계 존비속 및 동거 친족으로 한정하는 게 적절하다는 이야기다. 친족 간 유대 정도가 약해지고 있어 시대 변화에 맞춘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도 짚었다.
경제신문 등 보수언론들도 이런 재계 요구에 발맞춰 동일인 지정제 폐지를 주장한다. 일부 언론은 한술 더 떠 총수 지정제가 한국 대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혁신기업으로 성장하는데 발목을 잡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재벌기업 총수 일가의 사익편취 행위를 감시할 필요성은 줄지 않고 있다. 공정위가 작년 12월 발표한 ‘공시대상기업집단 내부거래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22년 한 해 동안 총수가 있는 상위 10대 기업집단의 내부거래 금액은 196조 4000억 원으로 전년보다 40조 5000억 원 증가했다.
내부거래가 늘어날수록 총수 일가의 사익편취 등 부당 거래 가능성은 커진다. 이런 점에서 총수 지정제 같은 규제가 필요한 것이다. 교묘한 방식으로 계열사의 기회를 유용하는 등 사익편취 수법이 진화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도 총수에 대한 규제를 오히려 강화해야 한다.
한국 증시 저평가(코리아 디스카운트) 원인이 일반주주보다 총수 일가의 이익을 우선하는 의사결정 구조, 즉 한 쪽으로 기울어진 기업지배구조라는 점도 총수 지정제가 필요한 이유다. 쿠팡 사례를 들어 제도를 무력화할 게 아니라 김 의장 같은 경우도 총수로 지정될 수 있도록 규정을 손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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