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천만원' 진술 변경, 형량 거래 가능성

유 "남욱에게 받은 것"…1분 뒤 "잘 몰라"

유 "1천인지 5백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뇌물 수수'에서 '공여'로…공소시효 넘어가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이 9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정진상 전 민주당 대표실 정무실장 공판에 출석하며 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3.6.9. 연합뉴스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이 9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정진상 전 민주당 대표실 정무실장 공판에 출석하며 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3.6.9. 연합뉴스

정진상 전 민주당 대표실 정무실장에 대한 뇌물 혐의가 근본부터 허물어졌다.

"명절 떡값을 줬다"는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이 ’혐의의 기초 사항’인 ’금액과 출처’에 대해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혐의에 대한 ’입증’의 단계가 아닌 ’주장’의 단계부터 허물진 것을 뜻한다.

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정 전 실장에 대한 13차 공판에서 유 전 본부장은 "2013년 추석과 2014년 설날에 ’명절 떡값’ 1천만원을 남욱에게 받아서 준 게 맞느냐"는 정 전 실장 측 변호인의 질문에 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 질문은 뭔가 새로운 것을 확인하려는 심각하고 예리한 질문이 아니라, 마치 재판 첫 단계에서 이름·생년월일·주소 등을 묻는 ’인정신문’처럼 혐의의 기초적인 사항을 확인하는 질문에 불과한 것이었다.  

유 "남욱에게 받은 것"…1분 뒤 "잘 몰라"

이날 열린 공판은 유 전 본부장의 갑작스런 입원으로 세 차례 연기된 뒤 3주 만에 열린 공판이었다. 입원 직전 "2013년 설 전에 남욱으로부터 받은 2천만원 중 1천만원은 정진상에게 준 게 맞는데, 나머지 1천만원은 김용을 줬는지 내가 썼는지 잘 모르겠다"는 폭탄 진술로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의 혐의를 흔들어놓은 유 전 본부장이, 3주 만에 열린 공판에서 정진상 전 실장에 대한 혐의도 기초부터 흔들어놓은 것이다. 

이런 상황은 정 전 실장 변호인이 지난 공판에서 있었던 2013년 설 떡값 진술을 상기시킨 뒤  2013년 추석과 2014년 설 떡값에 대해 확인하는 과정에서 시작됐다. 

변호인(이하 ’변’) 13년 추석, 14년 설 정진상에게 준 1천만원 떡값은 남욱에게 받아서 준 건가요?

유동규(이하 ’유’) 네.

김용은 안 줬나요?

언제요?

떡값 줄 때 정진상은 줬는데 김용은 안 줬어요?

김용에게 명절 떡값 줬습니다. 

한 번은 줬는지 안 줬는지 모른다고 증언한 것 아닌가요?

검사 설, 추석 등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질문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명절이 세 번입니다. 13년 설 빼고, 13년 추석과 14년 설 각 1천만원 씩 2천을 남욱에게서 받은 돈으로 줬다는 거죠?라고 물으니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맞습니까?

(갑자기 한참을 생각하다) 13년 설은 남욱한테 받은 게 확실하고요…

이후 유 본부장은 무슨 이유인지 답변을 하지 못한 채 침묵을 이어갔다. 그러자 재판장이 질문을 시작했다. 

재판장(이후 ’재’) 당시 남욱 이외에 업자에게 명절이라고 2천이나 1천 받을 루트가 있었나요?

다른 사람은 없고, 돈을 빌렸을 사람은 있습니다. 빌린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 

13년 설에 2천을 남욱에게 받아서 떡값을 주고, 13년 추석 때는 재원이 어디였는지 기억하나요?

추석마다 제가 조금이라도 챙겨줬고요. 늘 챙겨줬습니다. 

아니, 그 얘기가 아니라, 누구한테 받았는지 재원을 묻는 겁니다. 

하도 여러 번이라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납니다. 

정 전 실장 변호인은 2022년 10월 13일자 유 전 본부장의 검찰 피신조서에서 "2013년 설과 추석, 2014년 설에 남욱에게서 1천만원을 받아 정진상에게 줬다"고 진술한 부분을 제시해, 검찰 최초 진술에서 "남욱에게 받았다"고 진술하고 이날 법정에서도 그렇게 답변했다가 곧바로 "기억 안 난다"고 진술을 바꾼 것을 확인시켰다.

 

정진상 전 더불어민주당 당대표실 정무조정실장이 9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2023.6.9. 연합뉴스
정진상 전 더불어민주당 당대표실 정무조정실장이 9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2023.6.9. 연합뉴스

유 "1천인지 5백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유 전 본부장이 혐의의 근본을 흔드는 태도를 보이자 정 전 실장 변호인은 "1천만원 준 것은 맞냐?"고 묻기 시작했다. 이것은 어떤 중학생이 인수분해 문제를 풀지 못하고 쩔쩔 매자 "너 혹시 구구단은 아니?"라고 묻는 차원의 질문이었다. 

13년 추석에 1천만원 준 거 맞아요?

맞을 겁니다. 

맞을 겁니다가 아니라요. 기억이 안 나면 안 난다고 답을 해야죠. 생각이 아니라 기억을 묻는 겁니다. 

유동규는 다시 답변을 못한 채 침묵을 이어갔다. 재판정에는 팽팽한 정적이 흘렀다. 한참을 기다린 뒤 재판장이 입을 열었다. 

(속기사에게) ’한참 생각하다 답변 못함’이라고 기록해주시고, 변호인 질문 계속해주세요. 

14년 설은 어떤가요? 1천만원 확실한가요?

제가 1천만원씩 봉투에 넣어서 준 것은 확실합니다. 

제가 여쭤본 거는 14년 설이 맞는가예요. 정확하게 기억나시는지.

14년 설에… 설마다 제가 5백이든… 여러 번이라서, 제 돈으로 줄 때도 있고, 챙겨서 줄 때도 있어서 정확하게, 준 것은 맞는데요, 1천씩 준 거는…

1천인지 5백인지는 기억나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이상입니다. 

’물적 증거’는 전혀 없이 오로지 ’유동규 진술’이 유일한 증거로서 ’유동규 진술의 신빙성’이 핵심적인 심리대상인 이 재판에서, 단순히 확인차 물어본 기초적인 내용에 대해 유 전 본부장이 한참을 침묵을 지키다가 끝내 답변을 하지 못한 것은, 해당 혐의 자체가 부인되는 것은 물론 다른 혐의들에 대한 심리에도 크게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남욱 변호사가 1일 오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의 불법 대선자금 수수 관련 1심 속행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2023.6.1. 연합뉴스
남욱 변호사가 1일 오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의 불법 대선자금 수수 관련 1심 속행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2023.6.1. 연합뉴스

'뇌물 수수'에서 '공여'로…공소시효 넘어가

정 전 실장 변호인은 "2013년 4월 16일 모 유흥주점에서 남욱에게 9천만원을 받아 미리 와있던 정 전 실장에게 전달했다"는 혐의도 검찰의 회유에 따른 허위 진술일 가능성도 제시했다. 

증인이 정진상에게 9천만원을 전달했다고 최초 진술한 게 언제인지 기억나시나요?

잘 기억 안납니다. 

조서 상으로는 22년 11월 22일입니다. 진술을 변경하게 된 여러 계기가 있었다고 했죠? 진술을 번복하기 시작한 22년 9월 이후 별다른 진술 변경이 없다가 2개월이 지난 11월이 돼서야 정진상에게 9천만원을 줬다고 진술했습니다. 왜 그랬죠?

사실대로 다 얘기하려구요. 

증인이 11월 22일 진술할 때 검사와 어떤 대화를 했는지 기억나나요?

대화는 기억 안 나는데 조서에 있는대로 얘기했을 겁니다. 

22년 11월 22일 피신조서를 제시합니다. 이때 보면 증인은 바로 전날인 22년 11월 21일 남욱의 법정 진술을 보고 정진상에게 9천 준 것이라고 진술한 것으로 보이는데 맞나요? 여기 보면 검사 질문이 "대장동 공판에서 남욱은 피의자가 일식집에서 9천 받아 다른 방에 있는 형들에게 전달했다고 증언했는데, 증인도 공판에 참석했지요?"라고 돼있습니다. 

네.

이 얘기는 뭐냐면 전날 남욱의 증언을 보고 검사가 거기에 맞게 제시하니까 정진상에게 9천 줬다고 진술한 거 맞죠? 자발적으로 기억해내서가 아니라 전날 남욱의 증언을 듣고 검사로부터 질문받고 시인하듯이 진술한 거 아니냐는 얘깁니다. 

사실 그대로 말씀드린 겁니다. 

증인이 남욱으로부터 9천 받은 것은 분명하죠?

네.

2014년 4월 유 전 본부장이 남욱 변호사로부터 9천만원을 받은 것은 유 전 본부장의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돼있는 사안이다. 유 전 본부장은 이것을 "정진상에게 줬다"고 진술함으로써 ’뇌물수수자’에서 ’공여자’로 위치가 바뀌었다. 뇌물수수는 공소시효가 10년인 반면 뇌물공여는 7년으로, ’뇌물수수’가 ’뇌물공여’로 바뀌면서 공소시효를 넘기게 됐다. 

유 전 본부장이 뇌물수수로 기소돼있는 대장동 재판에서는 대대적인 공소장 변경이 예정돼있다. 이 공소장 변경에 ’9천만원 뇌물수수’ 혐의가 포함되어 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공소장 변경으로 이 혐의가 제외될 경우 이로 인한 처벌에서는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소위 ’심경 변화’가 있은 후 두 달이 넘도록 아무 얘기 없다가, 대장동 재판에서 9천만원에 대한 남욱의 진술이 있은 다음 날 검찰이 유 전 본부장을 조사하면서 이를 언급하고, 유 전 본부장이 곧바로 "정진상에게 준 것"이라고 진술을 바꾼 것은 이와 같은 ’형량 거래’의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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