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막부가 준비한 '미래', 조선을 세세히 살펴라
문화적 우월감에 안주했던 조선, 일본 의도 몰랐다
되레 일본서 더 탐독한 '징비록'…전략적 자산 승화
노론이 독점한 '성리학 유일체제' 외부 변화 무관심
광복 80돌이 됐건만 대한민국 역사는 여전히 '식민사학'의 주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뉴라이트와 극우 파시즘의 변이과정을 거치면서 21세기 한복판에도 아스팔트 위를 배회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엉킨 실타래일까? 인문연구가 이병권씨가 멀리 에도 막부시대에 파종돼 메이지시대 인공재배된 식민사학이 어떻게 '친일'의 뇌리에 이식됐는지 돌아보았다. 최근의 '한국사 역사지도', '전라도 천년사' 논란을 되짚으며, 대안으로 '시민사학'을 제안한다.
게재 순서는 ① 에도 막부가 준비한 '미래' ② 과학 위장한 실증주의 사관 ③ '제국주의 사생아' 조선사편수회 ④ 첫단추부터 잘못 꿴 '해방 이후' ⑤ 되살아난 유령1, 동북아 역사지도 ⑤ 되살아난 유령2, 전라도 천년사 ⑥ '시민사학'으로 광복 백주년 준비하자
새로운 역사인식의 출발점에 서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하면서 내란의 전모가 하나둘 드러나고 있습니다. 내란의 수괴 윤석열은 다시 구속되었고, 공범들은 세 갈래 특검 앞에서 진실을 회피하려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폭주를 지탱했던 세력은 여전히 건재합니다. 사법부를 무력화하고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광장을 점령했던 이들은 지금도 숨을 고르며 재기를 노리고 있습니다. 특검이 몇몇 주범을 단죄한다 해도 여전히 강고한 15~20%의 극우 세력은 인식을 바꿀 의지가 없어 보입니다.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을 지지하지 않았던 51%의 전체는 아닐지라도. 그들의 ‘인식 체계’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해체된 적이 없었고, 치명적인 충격을 받은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사고 뿌리는 뉴라이트입니다. 분단 뒤 반공 이데올로기에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와 식민지근대화론을 결합한 극우 이념은 한국 보수 전체를 흡수하였고, 결국 이명박·박근혜·윤석열 정권을 탄생시켰습니다. 윤석열 정부에 이르러서는 ‘리박스쿨’이라는 형태로 초등학생부터 노년층까지 전 국민을 대상으로 극우 교육을 국비로 시스템화하려는 시도까지 감행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뉴라이트를 비판하고, 독립기념관을 포함한 5대 국책 역사기관 수장 교체를 요구하며, 리박스쿨 관련자들의 처벌과 철거된 독립운동가 흉상의 복원을 외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은 곪아 터진 상처를 일시적으로 소독하는 데 불과합니다. 몸속 깊이 파고든 병의 근원을 도려내지 않는 한 이들은 언제든 다시 광장을 점령하고, 왜곡된 역사관과 인간관, 세계관의 흉기를 휘두를 겁니다.
저는 병의 뿌리를 해방 80년이 지난 지금까지 건재한 ‘식민사학’에서 찾습니다. 일제는 조선을 침략하기 오래전부터, 조선 정복을 정당화할 역사학을 준비했습니다. 1925년 조선총독부 산하에 설치된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왜곡된 『조선사』를 완성했지만, 이는 단지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해방 이후’입니다. 조선사편수회 출신 이병도(서울대), 신석호(고려대) 등이 해방 후 국사학계를 주도하며 식민사학의 틀을 고스란히 계승한 것입니다. 식민사학의 유산이 지금까지도 교과서를 통해 반복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식민지근대화론’이라는 궤변이 여전히 유포되는 배경입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야 할까요?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식민사학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재를 지배하는 ‘해석 틀’이며, 우리가 계속 건설하려는 민주공화국의 정체성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식민사학의 구조를 정면으로 해부하고 그 잔재를 철저히 걷어내야, 우리는 비로소 뉴라이트의 허구적 역사 왜곡을 분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민주공화정을 지켜내고 완성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해방 80주년입니다. 저는 이 글에서 일본이 오랫동안 식민사학을 어떻게 준비했고,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조선을 어떻게 무력화했으며, 그 유산이 오늘날 우리 사회를 어떻게 좀먹고 있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적 토대였던 민족사학을 계승하여 ‘시민사학’으로 발전시키자고 제안하려 합니다. 시민사학이야 말로 민주공화정에 걸맞는 시민의 역사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역사 여행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이 조선을 집요하게 탐구하기 시작했던 에도막부 시절에서 시작합니다.
임진왜란서 교훈 얻은 에도막부
에도막부(江戶幕府, 1603~1868)는 임진왜란의 참혹한 실패를 뼈저리게 기억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가 일으킨 조선 침공과 미완의 대륙 원정은 막대한 자원 손실과 국내 혼란만 남긴 채 끝났습니다. 이후 정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는 그 실패로부터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조선과 그 주변 국제 질서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라는 인식에서 출발했습니다. 막부는 이후 조선에 관한 정보 수집과 분석을 체계적으로 시작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막부가 철저한 쇄국(鎖國)정책을 펴며 유럽 열강은 물론 중국과의 직접 교류까지 제한하면서도, 유독 조선과의 교류만은 예외로 두었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외교적 예의의 차원이 아니라, 조선을 구체적으로 탐구하고 연구하기 위한 전략적 목적에서 비롯된 조치였습니다.
막부는 조선통신사를 공식적으로 총 12차례 접촉(1607~1811)했고, 통신사 수행원뿐만 아니라 쓰시마 상인, 규슈 무역업자, 포로 출신 귀환자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조선에 관한 정보를 입체적으로 수집했습니다. 쇄국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조선과의 교류를 지속한 배경에는 이러한 전략이 숨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조선래빙기(朝鮮來聘記, 1711)』『조선통신사행록(1748)』 등 막부나 번(藩) 단위에서 작성한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훗날 메이지 유신과 조선 침략 정책을 설계하는 기초 자료로 활용됩니다. 특히 구로다번(黑田藩)과 쓰시마번(對馬藩) 등은 조선의 정치, 군사, 제도, 풍속, 사상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자료를 다수 축적했습니다.
조선은 어땠을까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748)』에는 “왜국(倭國)이 예절을 두루 갖추어 사신을 맞이하고, 우리 문화를 크게 흠모한다(倭國待禮甚謹 慕我文物極大)”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조선이 일본의 전략적 의도를 간파하기는커녕 조선 문물의 우월성에 안주한 태도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전에도 일본과 외교 접촉이 매우 빈번했습니다. 태종 시기 이후, 15세기부터 임진왜란 직전까지 조선은 일본에 회답사, 통신사를 66차례 이상 파견했고, 일본 역시 60여 차례 사신을 보냈습니다. 에도막부 시기의 12차례 접촉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을 실질적으로 연구하거나, 국방·외교적 위협으로 인식하여 대응 전략을 수립하지 않았습니다. 무역과 문화 교류를 그저 평화의 징표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점을 가장 뼈저리게 통탄한 인물이 바로 유성룡(柳成龍, 1542~1607)입니다. 그는 『징비록(懲毖錄)』 서문에서, 신숙주(申叔舟, 14171475)가 일본 사행을 마친 후 성종에게 올린 상소에서 “왜국은 호시탐탐 도발할 야심이 있으니 대비하라”고 한 경고를 인용하며 “그러나 대비하지 않아(竟不之備), 결국 이런 화를 당하였다”라고 한탄합니다.
더욱 아이러니한 점은, 유성룡의 『징비록』을 정작 조선보다 일본이 오히려 널리 필사, 간행하며 경계의 교훈으로 삼았다는 사실입니다. 1678년 일본에 사행한 조선 사신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수행원 송명흠(宋命欽)은 『연행일기』에 “일본 사람들이 『징비록』 필사본을 널리 구해 읽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임진왜란의 실패를 철저히 복기하며 후일을 도모하고 있었던 겁니다. 반면 조선은 정작 자국의 피해를 전략적 자산으로 승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정조와 함께 사라진 '개혁의 꿈'
조선의 부국강병을 향한 마지막 개혁의 꿈은 정조(1776년~1800년)의 급작스러운 사망(1800)과 함께 결정적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어린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가 섭정하면서 조선의 개혁정치는 사실상 중단되었습니다. 특히 노론세력의 핵심이었던 심환지(沈煥之, 1730~1802)는 정조의 정책에 협조하는 태도를 취하며 정조와 수십 통의 편지를 교환한 인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정순왕후와 함께 ‘정조 독살설’과 관련해 거론되는 인물입니다. 정조는 24년 간의 재위를 통해 노론을 억누르고 남인과 소론을 중용하며 개혁정치를 이끌었습니다. 숨죽이고 있던 노론은 정조 사후 급반전을 이루며 정권을 장악, 조선은 사실상 일당독재 체제로 바뀝니다. 수원화성으로의 천도를 비롯해 모든 개혁정책이 무위로 돌아갑니다.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은 실각·귀양·처형의 운명에 처합니다. 그리하여 확립된 성리학 유일체제는 왕권을 형식화하고, 붕당을 실질적 정권 운영 기구로 전락시켰습니다. 탐관오리의 부패와 가렴주구가 일상이 되는 기나긴 정체기를 야기했습니다. 개혁 동력은 완전히 소멸되었고, 국가는 점차 내우외환 속에서 방향을 잃게 됩니다.
특히 1801년 신유박해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천주교에 대한 종교적 탄압인 동시에, 실학과 개혁을 추구했던 정조의 인맥을 대거 숙청한 ‘정치적 테러’였습니다. 천주교 신자였던 정약종이 처형되고, 정약용이 유배되었으며, 이들의 사상적 기반인 서학과 실학의 전통은 철저히 배척당했습니다.
이러한 폐쇄성과 경직성은 외교와 국방에도 심각한 폐해를 낳았습니다. 성리학 유일체제 하에서 사상적 다양성은 철저히 봉쇄되었고, 서구 열강 및 일본의 변화를 읽어내고 대응하는 인식 체계도 붕괴되었습니다. 관료 사회는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 수집과 분석을 하기는커녕 의례와 형식 논란과 권력투쟁에 몰두했습니다.
어찌 보면 조선이 19세기 중반 이후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1876년, 강화도 앞바다에 정박한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의 무력시위에 굴복해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선은 본격적인 개항의 시기로 들어섭니다. 이 과정에서 어떠한 외교적 주도권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조약의 주요 조건들은 일본의 일방적 요구에 굴복하는 형태로 관철되었습니다. 조선은 이미 국가적 위기의 전조를 여러 차례 목도하고 있었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복기하거나 전략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과거의 침략 전쟁에서 얻어야 했던 교훈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고, 유럽 열강의 아편전쟁과 같은 사건도 조선에서는 거의 논의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구 문명을 적극적으로 흡수하며 군국주의적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을 때, 조선은 여전히 성리학적 질서 속에서 국정 운영의 타성에 빠져 있었습니다.
요컨대, 조선 후기의 개혁 좌절과 쇄국적 사고는 20세기 초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국권 피탈이라는 비극적 결말로 직결되었습니다. 조선의 자생적인 근대화 동력은 정조와 함께 꺼졌습니다. 이후 오로지 외부의 충격에 흔들리는 수동적 객체로 전락한 것입니다. 조선의 새로운 동력은 더 이상 집권 국왕이나 특정 엘리트에게서 기대하기 어렵게 됩니다. 국권상실의 시기, 외세에 맞서고 국가를 개조하려는 노력은 민초(民草)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등불을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서 발견합니다.
참고자료
¹ 『조선통신사행록(朝鮮通信使行錄)』, 『조선래빙기(朝鮮來聘記)』, 『일본외교문서집(日本外交文書集)』
² 『승정원일기』 영조 24년(1748) 7월 20일자 기록
³ 『조선왕조실록』 태종·세종·성종·중종·명종조 사신래왕 관련 기사
⁴ 유성룡, 『징비록』 서문 — 신숙주의 상소를 인용하며 “然嗚呼 竟不之備 而遭斯患也”
⁵ 송명흠, 『연행일기』(1678) — 일본 사행 중 일본인들이 『징비록』필사본을 널리 읽는 것을 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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