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돌 기획 ‘식민사학서 시민사학으로’ ④
민족주의 대 끊기고 사회주의 사라진 세상에 '깃발'
박창암의 비수, 임종국의 돌팔매에도 '주류' 자리에
윤내현·최재석 학문비판은 '비주류' 딱지붙여 외면
최태영 "이병도만 설득하면 회개할 줄 알았다" 통탄
민주화 뒤 활기 띤 시민사회 자발적 역사 연구로 균열
광복 80돌이 됐건만 대한민국 역사는 여전히 '식민사학'의 주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뉴라이트와 극우 파시즘의 변이과정을 거치면서 21세기 한복판에도 아스팔트 위를 배회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엉킨 실타래일까? 인문연구가 이병권 씨가 멀리 에도 막부시대에 파종돼 메이지시대 인공재배된 식민사학이 어떻게 '친일'의 뇌리에 이식됐는지 돌아보았다.
게재 순서는 ① 에도 막부가 준비한 '미래' ② 과학 위장한 실증주의 사관 ③ '제국주의 사생아' 조선사편수회 ④ 첫 단추부터 잘못 꿴 '해방 이후' ⑤ 되살아난 유령1, 동북아 역사지도 ⑤ 되살아난 유령2, 전라도 천년사 ⑥ '시민사학'으로 광복 백주년 준비하자
해방공간, 세 갈래로 나뉜 역사인식
일제강점기를 관통하면서 한국 역사학에는 세 가지 뚜렷한 서술 흐름이 형성되었습니다. 세 흐름은 단순한 학문적 해석 차원을 넘어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의 정체성 문제와 진정한 자주독립, 자유와 평등을 향한 역사 인식 문제와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첫 번째 흐름은 박은식(1871~1925)과 신채호(1880~1936)를 대표로 하는 민족주의 사학입니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역사적 주체성을 강조하며 특히 일제의 역사 왜곡에 맞서 독립 정신을 북돋는 역사 해석에 힘썼습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신채호는 『조선상고사』를 통해 민족의 자주성과 독립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두 번째 흐름은 마르크스주의 사관에 입각한 사회경제사학으로, 백남운(1894~1979)이 대표적입니다. 그는 『조선사회경제사』에서 우리 사회 발전 단계를 유럽 사회 발전과 비교, 분석했고 조선이 자생적인 발전 동력을 지녔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 흐름은 일제 식민사관에 대한 이론적 반론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닙니다. 세 번째는 일제의 식민사관입니다.
일본이 조직한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조선 지식인들은 이마니시 류 등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조작하고 왜곡한 식민사학의 흐름을 수용했습니다. 이병도와 신석호가 대표적 사례로, 두 사람은 조선사편수회에서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 류 등의 지도를 충실히 받으며 식민주의 역사 서술을 습득했고 해방 후 이를 대한민국의 학문 체계로 정착시키는 데 앞장섰습니다.
해방 이후 상황은 복잡했습니다. 민족사학의 핵심 인물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사회경제사학을 주창한 백남운 등은 월북했습니다. 남한 역사학계에서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한 사회경제학파는 사실상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집니다. 이러한 ‘공백’ 속에서 식민사관을 계승한 이병도와 신석호가 각각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를 중심으로 역사학계를 장악했습니다. 이병도는 학술원을 비롯한 공식 학술기관을 장악하며 실증주의 역사학을 체계화했고, 신석호는 초대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임명돼 1969년까지 중등 교육과 국정교과서 서술 체계를 사실상 독점했습니다. 두 사람은 해방 이후 진단학회를 설립, 민족정기를 되살리고 식민사관을 청산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총독부의 사관을 계승, 강화하는 데 더 기여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역사학계에 신민족주의나 문화주의적 접근방식도 제기되었으나, 이 역시 실증사학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머물며 식민사학의 극복이라는 시대적 과제 해결과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였습니다.
일제 땐 총독부에, 해방 뒤엔 독재정권에 ‘부역’
이 같은 구도에 도전장을 던진 인물이 바로 임종국(1929~1989)입니다. 문학평론가이자 재야 지식인으로 1970년대에 이병도와 신석호를 ‘식민사학의 거두’라 명명하며 정면으로 비판했습니다. 대표 저작 『친일문학론』과 『한국친일인명사전』(초판 구상)을 통해 친일 지식인의 실체를 폭로하고, 식민 잔재 청산의 필요성을 환기시켰습니다.
그러나 임종국은 문학 중심 비평가였기에 임나일본부설,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 낙랑 평양설 등 식민사학의 핵심 논제에 대한 체계적 분석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의 비판은 윤리적·도덕적 시각과 민족정체성 회복에 기반한 것이어서 이론적 분석이 부족하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1980년대 들어 <창작과비평> <역사비평> 등 학술 잡지가 창간되면서 식민사관 비판이 본격화되었으나 여전히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임종국 선생은 후대까지 많은 지식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며 친일 인명사전 발행과 민족문제연구소 건립으로 이어지는 데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학술적으로 1차 사료에 근거한 보다 구조적인 비판은 1990년대 들어 윤내현(1939~2025)과 최재석(1930~2016), 두 학자의 등장 이후에 가능해졌습니다.
1980년, 일본 도쿄에서 발간되던 잡지 『역사와 현대(歴史と現代)』에 실린 한 편의 논문은 당시까지 한국 국사학계에서 거의 성역이었던 이병도의 학문적 권위는 물론 친일의 주역이라는 측면에서 이병도와 식민사학 전반에 심각한 손상을 입히기 충분한 사건이었습니다. 글쓴이는 박창암(朴蒼巖, 1923~2003)으로 일제강점기 만주의 간도특설대 하사관 출신이며 해방 후에는 군에서 활동한 경력을 갖고 있습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직후 혁명검찰부장을 맡는 등 박정희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런 배경을 가진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박창암이 이병도를 공개 비판한 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이었습니다. 발표 지면이 일본 잡지였다는 점에서 충격이 컸습니다.
당시까지 국사학계와 역사 관련 언론, 잡지 등은 사실상 이병도와 신석호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병도는 일제에 이어 이승만, 박정희 독재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박정희 시대에는 문교부(현재 교육부) 장관까지 역임했죠. 전두환이 11.11 군사구테타를 통해 집권하던 시기에는 국보위에 참여하는 등 권력의 동향에 늘 민감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이병도가 일본 잡지에 자신의 감추었던 과거 행각이 드러남에 따라 허를 찔리게 된 것입니다. 이 기고문은 국사학계에 음으로 양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임종국, 박창암 ‘매’를 들다
박창암이 기고문에서 제기한 요지는 이병도가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활동하며 단군을 역사가 아닌 신화로 격하하고, 고조선을 축소·삭제하는 작업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박창암은 조선사편수회 회의록과 관련 문건을 실증적으로 제시했습니다. 또 장도빈(張道斌, 1888~1963)의 증언을 인용해 이병도가 학생들에게 “단군은 실존 인물이 아니며, 한국인은 단일민족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펼쳤다고 지적했습니다. 단순한 과거 행적 비판을 넘어 이병도의 역사학 자체가 일제의 식민지 통치전략과 긴밀히 연동된 구조물임을 규명한 것으로 큰 의의를 지닙니다.
해방 후 국사학계에서 실증주의 사학의 대가로 추앙받던 이병도의 권위에 균열을 낸 최초의 구체적 문제 제기였습니다. 1970년대 임종국이 『친일문학론』 『친일파 100인선』 등을 통해 친일 지식인의 행적을 폭로한 바 있지만 유신체제 하 반공 이데올로기와 국가주의가 팽배한 분위기 탓에 학계와 언론, 교육 현장에서 크게 수용되지 못했습니다. 이병도는 박정희 정권에서 국정교과서 편찬 기준을 제시했고 교육부 장관까지 역임하며 학문적·정치적 권위를 갖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박창암의 논문이 1980년에 등장한 것은, 이병도의 학문이 단순한 실증주의가 아니라 식민지배 논리를 재생산하는 권력 기반의 학문임을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1980년은 5·18 광주항쟁 직후 민족정체성과 역사 인식에 대한 사회적 재검토가 활발히 이루어지던 시기였습니다.
박창암의 글은 단순한 이념 논쟁을 넘어 식민사관의 실체를 해체한 사건으로 학계와 시민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민족사학 진영은 이를 계기로 이병도의 고대사 축소, 단군 신화화, 한사군 중심주의 등을 식민사관의 핵심 요소로 규정하고 본격적인 반론에 나섰습니다. 윤내현, 최태영, 안재호, 이덕일, 김병기 등 연구자들이 이병도 사관 구조와 한계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며 대응했습니다. 이병도가 1986년 “단군은 실존 인물이었다”라고 입장을 바꾼 것은 이러한 비판이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결과로 해석됩니다. 식민사관 비판은 이후 교과서 개정 운동, 친일 인명사전 편찬, 대중 역사서 출판 등 다양한 영역에서 제도적 담론으로 확장되었고, 박창암의 글은 그 흐름을 본격화시킨 결정적 출발점으로 평가받습니다. 요컨대, 1980년 박창암이 일본에서 발표한 논문은 한국 근현대 지식구조 내부에서 ‘식민 잔재’가 어떤 방식으로 권력화·재생산되었는지 고발한 실증적 문서였으며 단순한 외곽 반론이 아니라 이병도의 역사학이 지탱하던 체제 내부 권위를 흔드는 계기가 됐습니다.
윤내현은 단국대학교에서 오랜 기간 역사학 교수로 재직하며, 방대한 중국 사료와 고고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식민사학 근거를 조목조목 반박한 인물입니다. 특히 임나일본부설 부당성, 낙랑군 위치 논쟁, 삼국사기 초기 기록 신뢰성 문제와 관련해 독창적 해석을 제시하며 기존 국사학계가 유지했던 이병도, 신석호 류의 식민사학 흐름을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그러나 ‘단국대 출신’ ‘북한 사료 인용’ ‘학계 비주류’라는 이유로 학계에서 배제되어 오랜 기간 ‘비정통’으로 낙인찍힌 채 고독한 연구활동을 해야했습니다.
사회학자, 법학자 연구엔 '비역사학자' 딱지
최재석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출신으로, 박사학위 취득 후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 왕성한 저술활동을 했습니다. 최재석 교수는 사회학자임에도 가족관계 연구를 확장하여 한국의 역사, 특히 고대사 탐구를 이어감으로써 고대사 분야에서 탁월한 연구 업적을 쌓게 됩니다. 역사학자가 아님에도 식민사관의 사상적 뿌리와 반도사관 구조를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특히 일본 일본서기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한국 고대사를 근본부터 어떻게 왜곡했는지를 탐구했습니다. 고대 낙랑의 위치,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에 대한 반박과 함께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했습니다. 국사학계가 철저히 식민지적 사관에 갇혀 있다고 보고 사회과학적 방법론으로 이를 해부했습니다.
그러나 최 교수는 ‘비역사학자’라는 이유로 작고할 때까지 국사학계로부터 철저히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비주류’ ‘비역사학’이라는 딱지가 이들을 학계에서 밀어내는 가장 위협적인 무기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의 연구는 1990년대 이후 식민사학 인식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1990년대 들어 많은 지식인이 중국으로 유학, 방대한 중국사료와 중국의 연구성과를 동원해 식민사학의 허상과 허풍을 입증하기 시작했습니다. 국내에서는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로 만들어진 공간에서 한계와 논란에도 불구하고 식민사학의 허구성을 입증하는 노력이 본격화됩니다.
이 대목에서 최태영(1900~2005) 선생을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는 1980년대 이후 식민사학을 비판하고 그 대안을 학술적으로, 사회적으로 추진한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합니다. 1900년 민족의 명산으로 꼽히는 구월산 부근의 황해도 은율군 문화현 출신입니다. 최 박사는 자신의 회고록이자 역사연구서인 《인간 단군을 찾아서》(학고재, 2000)에서 어린 시절, 구월산 삼선사(三仙寺)에 자주 올라 잠시 머물렀던 기억을 남겼습니다. 이병도조차 그 가치를 인정했던 《규원사화》를 비롯한 고서에 따르면, 삼선사는 환인–환웅–단군을 삼신의 계보로 모신 일종의 사당이었습니다. 특히 환웅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홍익인간’을 실천하는 신교(神敎)의 본령을 이어받았다는 점에서 삼신은 단군조선 건국 이념의 신학적 기반으로 해석됩니다.
구월산 삼선사가 보존한 '단군'
삼선사에 관한 기록은 《세종실록》 40권에도 실재합니다. 세종 10년 6월, 황해도 관리 유관이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구월산 허리에 신당(神堂)이 있는데 세워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그 북면에 환웅천왕, 동쪽에 환인천왕, 서쪽에 단군천왕을 모셨다. 문화현 사람들은 이를 삼성사(三聖祠)라고 일컬으며 산 아래 마을을 성당리(聖堂里)라고 한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도 유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월산 삼선사에 관한 관심과 기록이 조선조 내내 이어졌던 것입니다.
성종 대에는 봄, 가을에 관리를 보내 제사를 지냈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42권 문화현 관련 글에는 “삼성사(삼신사와 같은 의미)는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의 제사를 지내는 사(祠)이다.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며 가뭄이 들 때 빌면 효험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 박사는 단군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19세였던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3개월 옥고를 치르고, 일본 메이지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법학을 전공합니다. 1924년 귀국하여 보성전문(고려대학교 전신)에서 교수를 지내고 이후 모교 경신학교 교장에 취임합니다. 1938년 경신학교를 인수하여 직접 경영하면서 일제 탄압이 극심하던 시기에 황국사관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려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기미가요 제창, 신사참배, 창씨 개명을 기피하며 학생들과 함께 조선인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 했다고 회고합니다.
해방 이후 최 박사는 우리나라 민법과 형법의 기틀을 다지는 한편, 서울대학교 법대 대학원장을 지내며 후학 양성에 몰두합니다. 정년퇴직 뒤에는 한국 역사학이 식민사학에서 전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하며 본격적으로 한국 상고사에 연구에 몰입합니다. 『한국 상고사 입문』(1989, 이병도 공저), 『인간 단군을 찾아서』(2000)(회고록 겸 역사연구서),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2002, 102세의 나이에 출판)를 집필합니다. 식민사학 청산을 생애 마지막 과제로 여겼던 최태영 선생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은 아이러니하게 식민사학의 태두이자 자신의 오랜 지인이었던 이병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최 박사가 선택한 식민사학 극복의 제1과제는 식민사학의 대부 이병도를 설득하여, 이병도로 하여금 자신의 과오를 인정케 하고 우리 역사에서 일제가 찬탈한 단군과 단군조선 등 고대사를 복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부터 가깝게 지낸 사이였고, 서울대에서 같이 교수 생활을 했으며, 함께 학술원 회원이기도 했기에 인연이 깊었습니다. 최 박사의 회고에 따르면 마침 병 중에 있던 이병도를 찾은 자리에 의사 타진을 하였고, 반응이 나쁘지 않자 이후 집중적으로 설득에 나섰다고 합니다. 이병도가 생을 마감하기 전에 단군 역사가 실재했다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기로 3년여 동안 설득했다고 합니다.
최태영 박사가 이병도를 설득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역사적 근거는 이른바 ‘세년가(世年歌)’였다고 합니다. 세년가란 역대 왕조 시대에 왕의 치적을 노래로 지어 후대에 전달한 것을 말합니다. 주로 음력 8월 15일 단군과 조상 제사를 지내면서 모인 사람들에게 노래로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같은 조상을 모신 자손 사이에 공유 의식을 높이는 방편으로 사용됐습니다. 노래 가사는 세월이 지남에 따라 거대한 ‘역사의 전달자’가 되었고, 사람들은 세년가를 지역마다 별도로 기록하고 보관하였다고 합니다.
최 박사는 앞서 언급한 《세종실록》에서 유관이라는 황해도 관리가 세종에게 올린 상소에서 단군 시대부터 전하는 ‘세년가’의 존재에 대해 보고받은 내용에 주목했습니다. 《세종실록》에는 이후 세년가에 대한 기록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세종은 치세 18년(1436) 왕명으로 윤회, 권제 등이 편찬한 역사 서사시 가사를 엮어 《동국세년가》를 편찬하게 합니다. 책의 상책에는 중국의 역대 역사를 노래한 《역대세년가》를, 하책에는 우리 역사, 즉 단군조선에서 고려 말까지를 노래한 《동국세년가》를 각각 수록하였습니다.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최 박사는 1521~1524년 영천 군수로 재직했던 유희영이 이 지방에서 내려오던 세년가를 목판 인쇄로 간행한 《표제음주동국사략》을 찾아냈습니다. 일본 가고시마현 다이마에 있는 단군사당 ‘교구산구’에 보존되어 있던 세년가도 발견하게 됩니다. 단군사당을 지키던 조선 도공 14대 심수관을 방문했다가 찾은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은 자신들의 조상을 잊지 않기 위해 단군사당을 짓고 노래를 지어 후대에 전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찾아낸 ‘세년가’의 역사와 근거자료를 이병도가 차마 부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병도는 자신이 단군을 역사적 실재로 인정한 주요 근거로 세년가를 들었습니다.
이병도 단군조선 인정에 후학들 '노망'
1986년 10월 9일 최 박사의 3년여에 걸친 이병도 설득의 대미가 장식됩니다. 조선일보 1면에는 이병도의 이른바 ‘전향 선언’ 기사와 장문의 기고문이 실립니다. ‘단군조선(檀君朝鮮)은 사실(史實)…고대사(古代史) 복원해야’라는 제목과 ‘이병도 박사, 신화(神話) 규정 잘못… 교과서 보완 시급’이라는 부제가 달립니다. 이어진 이병도의 기고문은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병도는 ‘역대왕조(歷代王朝)의 단군(檀君) 제사는 일제(日帝) 때 끊겼다’는 기고문 제목에서부터 자신이 일제 식민사학 스승들로부터 물려받아 목청 높이 주장했던 단군 신화설을 완전히 부정합니다. 《삼국유사》의 단군 기록은 모조리 조작이라고 주장했던 일제 식민사학 스승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고, 《삼국사기》는 물론 중국의 고서와 비교해 볼 때, 《삼국유사》에 언급된 단군 기록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선언합니다. 조선 세종조와 성종조에 구월산 삼신사에서 정기적으로 단군 제사를 지냈던 사료를 근거로 제시합니다. 또한 앞서 최 박사가 발굴한 세년가 기록을 근거로 단군은 우리의 조상이자 실존 인물이었고, 단군조선은 실재했던 역사라고 강조합니다.
최 박사는 회고록에서 이병도만 ‘회개’ 시키면 식민역사학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으로 착각했다고 술회합니다. 이병도의 폭탄선언은 역사학계에 엄청난 회오리를 몰고 왔지만, 수년 후 이병도의 작고와 함께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게 됩니다. 이병도를 태두라 칭송했던 제자들은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병도의 전향 선언을 ‘노망난 행동’ 또는 ‘최태영의 강압에 못 이긴 결과’로 폄하했다고 합니다.
역사는 하나의 계기가 다른 계기로 이어지고, 각 계기의 연결 고리가 단단해질수록 장강의 흐름을 막거나 뒤집기도 합니다. 이병도가 쌓아 올린 식민사학의 장탑은 여전히 강단사학계에 남아 있고 더구나 매우 견고해 보입니다. 자신들의 단단한 카르텔로 강단을 수호하며 특히 고대사를 중심으로 식민사학적 해석에 어떠한 도전도 용납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쌓아올린 ‘거탑’은 이미 균열이 시작됐습니다. 얼핏 강고해 보이는 식민사학의 틀을 깨는 것은 걸출한 학자의 영웅적 행위로 종결될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민의 치열한 역사 인식과 역사 해석을 독점하는 기득권 식민사학에 대한 줄기찬 도전, 광장의 왕성한 토론으로 극복될 것이라고 봅니다. 이제 그 극복과 회복, 시민의 눈높이로 이해하는 역사의 진실을 써 내려가는 서술의 시간이 그리 멀지 않았다고 봅니다. 민주공화정을 이끄는 시민의 치열한 역사의식만이 해방 80년이 되도록 강고히 자리 잡은 식민사학의 허상을 하나씩 역사의 뒤안길로 보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문헌
박은식, 『한국통사』, 신서원, 2004년 (초판 1915년)
신채호, 『조선상고사』, 역사비평사, 2003년 (초판 1924년)
백남운, 『조선사회경제사』, 한길사, 1987년 (초판 1930년대)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민음사, 1993년
임종국, 『친일문학론』, 창작과비평사, 1974년
박창암, 「이병도와 조선사편수회」, 『역사와 현대』 제51호, 1980년
최태영, 『인간 단군을 찾아서』, 학고재, 2000년
윤내현, 『한국 고대사의 진실』, 역사비평사, 1997년
최재석, 『반도사관의 비판과 극복』, 학고재, 1999년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근현대사자료총서』, 국사편찬위원회, 2005년
세종실록,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2000년
동국세년가(목판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436년 (세종 18년 편찬)
김용구, 『한국 현대 역사학의 형성과 전개』, 소명출판,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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