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돌 기획 ‘식민사학서 시민사학으로’ ③

총독부 정무총감이 산파역을 맡은 '조선사편수회'

"조선인은 외세 의존적인 민족" 식민 통치 정당화

단군조선 신화화·발해사 분리·임나일본부설 유포

'과학적 사료비판' 표방, 체계적으로 한국사 조작

이병도·신석호, 해방 뒤 식민사관 고스란히 계승

데라우치 초대 총독의 말. 일제는 식민지배 초기부터 통치 이데올로기 확보 차원에서 조선사 왜곡에 착수했었다. 2025.8.6. [KBS 역사스페셜 화면 갈무리] 시민언론 민들레 
데라우치 초대 총독의 말. 일제는 식민지배 초기부터 통치 이데올로기 확보 차원에서 조선사 왜곡에 착수했었다. 2025.8.6. [KBS 역사스페셜 화면 갈무리] 시민언론 민들레 

광복 80돌이 됐건만 대한민국 역사는 여전히 '식민사학'의 주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뉴라이트와 극우 파시즘의 변이과정을 거치면서 21세기 한복판에도 아스팔트 위를 배회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엉킨 실타래일까? 인문연구가 이병권 씨가 멀리 에도 막부시대에 파종돼 메이지시대 인공재배된 식민사학이 어떻게 '친일'의 뇌리에 이식됐는지 돌아보았다. 

게재 순서는 ① 에도 막부가 준비한 '미래' ② 과학 위장한 실증주의 사관 ③ '제국주의 사생아' 조선사편수회 ④ 첫 단추부터 잘못 꿴 '해방 이후' ⑤ 되살아난 유령1, 동북아 역사지도 ⑤ 되살아난 유령2, 전라도 천년사 ⑥ '시민사학'으로 광복 백주년 준비하자

 

1915년 10월, 일제가 한일병합 5주년을 기념해 경복궁에서 연 조선물산공진회 때 근정전 앞에 내걸린 일장기.   나무위키
1915년 10월, 일제가 한일병합 5주년을 기념해 경복궁에서 연 조선물산공진회 때 근정전 앞에 내걸린 일장기.   나무위키

1919년 한반도 전역을 뒤흔든 3.1 독립만세운동은 일제의 식민 통치 방식에 중대한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총칼에 의한 무단통치 대신, 일본은 영구적인 식민지 지배를 꾀하며 조선인의 정신구조 자체를 바꾸는 ‘문화정치’ 전략을 전면화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일본 메이지 시대에 체계화된 식민사학의 한국사 적용이 있었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한 조직이 바로 조선총독부 산하의 ‘조선사편수회’였습니다.

"조선사 장악하라" 총독부의 지령 

1925년 4월 25일, 조선총독부는 칙령 제218호에 따라 조선사편수회를 공식 출범시켰습니다. 이 조직은 이미 1923년부터 ‘조선사편찬위원회’라는 명목 아래 사전 작업을 진행해 왔으며, 본격적인 편찬은 다나카 고사이(田中光哉, 1876~1934) 정무총감 주도로 추진되었습니다. 당시 정무총감은 총독부 내 2인자급으로, 이는 조선사편수회가 단순한 학술기관이 아니라 총독부의 핵심 통치 전략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총독부는 이 편찬 작업을 통해 조선인을 ‘역사적으로 열등하고 분열적인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려 했습니다. 구체적인 역사 왜곡 전략은 네 가지로 요약됩니다. △ 역사 왜곡 교육을 통해 식민통치를 ‘역사적 필연’으로 합리화(식민지 통치 정당화) △ 조선사를 총독부의 관점에서 재구성하고, 이를 통해 지배 논리를 직접 주입(조선사 장악) △ 조선인의 민족 정서를 약화하고 황국신민화 정책에 부합하는 역사 인식 강화(동화 이데올로기 주입) △조선인의 무능성과 내분을 강조하여 타율성과 외세 의존을 역사적으로 고착화(조선 민족의 부정적 이미지 구축) 이러한 편찬 목표는 메이지 시대 일본 학계에서 발전한 식민사학의 왜곡 프레임과 직결되며, 앞선 칼럼 2편에서 제시한 ‘식민사학 5대 왜곡 구조’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우중에도 많은 시민들이 106주년 3.1절을 맞아 서대문형무소를 찾았다. 대형 태극기 앞 기념촬영 순서를 기다리는 시민들.  2025.3.1. 황의원 시민기자
우중에도 많은 시민들이 106주년 3.1절을 맞아 서대문형무소를 찾았다. 대형 태극기 앞 기념촬영 순서를 기다리는 시민들.  2025.3.1. 황의원 시민기자

조선사편수회는 철저히 일본인 학자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조선인 연구자는 보조적 역할에 제한되었습니다.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1931)는 고조선을 부족 연맹체로 격하한 ‘국가성 부정’ 이론 제창했고, 츠카모토 세이지(塚本誠二, 1894~1972)는 고구려·백제를 중국·일본 영향권으로 왜곡했습니다. 마루야마 마쓰노리(丸山松乃利)는 발해사를 한국사에서 분리했고, 구로이타 가쓰미(黒板勝美, 1874~1946)는 ‘고적 발굴’을 통해 조선인의 타율성 강조했습니다. 이나바 이와키치(稲葉岩吉, 1876~1940)는 조선인을 게으르고 무능한 민족으로 묘사했으며 쓰에마스 야스카즈(末松保和, 1904–1992)는 임나일본부설 중심의 고대사 왜곡 논리를 생산했습니다. 이들은 ‘과학적 사료 비판’을 표방했으나, 실상은 일본의 식민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한국사를 조직적으로 왜곡했습니다.

조선사편수회는 1938년 총 25권으로 구성된 『조선사』를 완간하였고, 이는 식민사학의 결정판이자 일제 통치의 역사 교육 지침서로 기능했습니다. 총독부는 이를 각급 교육기관에 활용해 조선인의 민족정체성과 저항의식을 해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이 『조선사』의 식민사관은 이병도와 신석호 같은 조선사편수회 출신 학자들에 의해 그대로 계승되어, 서울대 등 학계는 물론 교과서와 국사 편찬 제도까지 장악하게 됩니다.

단군 내세운 최남선의 친일

최남선은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언론과 문학에서도 큰 족적을 남겼지만, 193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의 식민지 문화정책에 포섭되며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는 조선사편수회 참여를 ‘단군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항변했지만, 실제로는 일제의 회유책에 따른 ‘지식인 포섭’의 일환으로 보는 평가가 우세합니다.

광복절을 앞둔 4일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에 독립운동가 남상락 자수 태극기가 걸려있다. 2025.8.4. 연합뉴스
광복절을 앞둔 4일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에 독립운동가 남상락 자수 태극기가 걸려있다. 2025.8.4. 연합뉴스

만주 침략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징병과 전쟁 협조를 적극적으로 선전하며 ‘황국신민’으로서의 충성을 고취했습니다(문화일보, 1989년 8월 15일). 해방 후 반민특위(1948~1949)에 기소되었으나 이승만 정권의 방해와 반민특위 해산으로 인해 법적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여론의 손가락질과 역사적 책임론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동일한 식민지 시기를 살았어도 모든 지식인이 같은 입장을 취한 건 아니었습니다. 상황 논리가 아닌, 개인의 선택과 철학이 역사의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제가 중용한 사학자, 이병도

이병도
이병도

대한민국 현대 역사학계는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관을 직·간접적으로 계승한 구조 위에 세워졌으며, 그 중심에는 이병도(李丙燾, 1896–1989)와 신석호(申奭鎬, 1904–1981)가 자리했습니다. 조선사편수회에서 밥을 벌었던 이들이 대한민국 학계를 주름잡은 것 자체가 역사의 아이러니였습니다. 이병도는 1927년 참사(參事)로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 18년 동안 재직했습니다. 조선사편찬위원회 편찬위원으로 실질적인 책임자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총독부는 외형상 일본인 책임자를 앞세웠지만 역사 편찬과 조직 운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신석호는 1930년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간 뒤 1937년까지 조사관(調査官)으로 사료 조사와 정리, 집필 등을 했습니다.

이병도는 해방 뒤 국사학계의 제왕이었습니다. 매국노 이완용과 인척 관계에 있는 명문가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한 후 조선사편수회에서 식민사학 정립에 핵심 역할을 했습니다. 해방 뒤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초대 교수로 부임하였고,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위원장 대리, 고문 등을 맡아 대한민국 정부의 역사 편찬사업에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국사대관』(1948)과 『국사대사전』 편찬을 주도하면서 조선사편수회의 관점을 체계화, 국사 교육의 표준으로 정립했습니다. 특히 박정희 정권기에는 자신의 역사 인식을 국정 국사 교과서에 반영했습니다. 학계·교단·출판계를 장악한 구조적 카르텔의 정점에 오른 겁니다. 또한 교육부, 문교부, 문화공보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군사독재 체제 정당화의 역사적 논리를 제공, 국민훈장 동백장(1962)과 무궁화장(1972) 등 다수의 훈장을 받았습니다. 단순한 학문적 공로 이상의 정치적·이념적 협조에 대해 ‘훈장 정치’라는 비판도 제기됩니다.

 

평양 시내에 내걸린 광복절 기념 벽화. 2024.8.15. AP 연합뉴스 
평양 시내에 내걸린 광복절 기념 벽화. 2024.8.15. AP 연합뉴스 

국정 교과서의 설계자, 신석호

신석호는 이화여자대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초·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집필에 핵심 역할을 했습니다. 단군의 신화화와 낙랑군 평양설, 기자조선 정통론, 신라 중심 통일사관 등을 통해 식민사관의 골격을 교과서에 재현했습니다.

신석호
신석호

특히 1974년부터 시행된 국정교과서 제도 아래서 사실상 단독 책임 집필자로 역사 교육의 방향을 좌지우지했으며, 20년 가까이 국사편찬위원장(1955~1974)으로 재직하며 중추 역할을 했습니다. 대한사학회 회장, 한국고대사학회 창립자 등 학문 단체에서도 중심인물로 활동했습니다. 신석호가 주도한 교과서 서술에는 조선사편수회의 논리를 계승한 역사관이 명확히 반영되었습니다. 낙랑군 평양설을 정설로 정착시켜 한사군의 중심을 한반도 내로 고정함으로써 고대사의 자율성과 독자성을 약화시켰습니다. 그의 기자조선 정통론은 중국 문명의 도입을 통한 문명화론의 서사를 탄생시켰고, 단군을 신화화함으로써 국가 형성 단계의 자생성을 희석시켰습니다. 또 발해를 제외하고 신라를 유일한 통일국가로 규정, 남북 역사 단절을 고착화했습니다.

신석호 역시 박정희,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훈장을 많이 받았습니다. 국가 권력에 협조하면서 자신의 역사 해석 틀을 공고히 했습니다. 교과서뿐 아니라 고등고시, 학계, 언론계에까지 영향력을 확장했습니다.

독재정권의 상찬과 '강단 권력'의 세습

이병도와 신석호는 제자들을 중심으로 서울대, 고려대, 이화여대 등에서 학문 권력을 구축하였습니다. 국정교과서 집필, 교육과정 심의, 출제위원 등을 맡는 주요 보직을 독점한 거죠. 그들은 자신들의 계보를 ‘정통사학’으로 규정하며, 신채호·정인보·백남운 등의 역사 연구를 ‘비정통’으로 낙인찍고 주변화시켰습니다. 학술 토론과 검증 없이 특정 계보 중심의 역사 인식을 고착화시켰고 비판을 억압하는 기제로 기능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조야말로 식민사관의 가장 끈질긴 잔재입니다.

식민사학은 단지 과거의 유산이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 있는 ‘지식 권력 구조’입니다. 민주공화국은 이러한 지식 독점을 해체하고 시민사회의 역사 주권을 회복해야 합니다. ‘정통사학’이라는 이름으로 제도화된 식민사관의 틀을 전면 재검토하고 역사학이 국가 권력의 도구가 아닌, 시민사회의 성찰 도구로 기능해야 할 때입니다.

 

제79주년 8·15 광복절인 15일 오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광복회 주최 광복절 기념식에서 김갑년 광복회 독립영웅아카데미 단장이 축사하고 있다. 2024.8.15. 연합뉴스
제79주년 8·15 광복절인 15일 오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광복회 주최 광복절 기념식에서 김갑년 광복회 독립영웅아카데미 단장이 축사하고 있다. 2024.8.15. 연합뉴스

참고문헌

김동춘, 『한국 근현대사와 식민주의』, 창비, 2015.

박은식, 『한국통사』, 민족문화추진회, 1978.

이병도·최태형 공저, 『조선상고사』, 민족문화사, 1987.

한겨레, ‘육당 최남선·이광수·홍명희, 개화기 문화·언론운동 3대 천재’, 2003년 5월 22일.

문화일보, ‘최남선 친일행적 재조명

『일제강점기 식민사학 연구』, 역사비평사, 2008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성격과 연구동향」,  『한국근현대사연구』, 제41집, 2010년, 21-44쪽.

「조선사편수회와 일제 식민사학 연구」, 『역사비평』, 년 3월호.

「칙령 제218호 조선사편수회 설치에 관한 건」, 19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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