량성희 공연 "조선 클래식 정수 보여줄 것"
남북 음악 교류사에 새로운 전환점 기대
민족악기의 현대화 상징, 풍부한 표현력
조선(북)에는 전통음악이 없다. 그렇다. 조선(북)에서 전통음악은 사라졌다. 한국이 전통음악을 보존하는 정책으로 일관하는 동안, 조선(북)에서는 현대적 미감에 맞는 혁신의 길을 걸었다. 한국이 말하는 전통음악이 사라지고, 종래의 기성 음악 형식과 종류들에서 얽매이지 않는 “우리(조선)식 고전음악” 즉 “조선(NK) 클래식”이 생겨난 것이다.
그 방향은 크게 3가지로 나타났다. 첫째는 소수의 전문가나 애호가 중심의 음악이 아니라 인민대중이 이해하고 즐기며 그들의 정서와 기호에 맞는 음악을 만드는 것이다. 둘째는 기악 부문에서 지난 시대의 진부한 음악 형식의 틀에서 벗어나 인민대중이 이해할 수 있도록 대중화하였다. 셋째는 관현악의 경우 인민들이 사랑하는 고유의 민족(개량)악기를 기본으로 하여, 그것을 시대의 요구에 맞게 발전시키고 양악기도 배합 복종시켜 관현악의 자주적이며 독창적인 길을 개척하는 것이다.
서양음계를 수용해 현대화한 조선(북)의 “민족음악” 즉 “조선 클래식”의 성립에는 당연히 악기의 현대화가 전제가 되었다. 전통 악기가 가지는 결함을 개선하여 전통음악을 현대화하고 동시대 사람들의 정서를 표현하게 하였다. 이는 조선(북) 음악을 한국음악과 구별하는 명증이며, 동시에 자신만의 고유성과 정체성 및 특징적인 음악 형식을 갖춘 로컬리티에 성공한 경우이다.
그 배경에는 김일성 주석이 있다. “우리의 민족음악을 현대화하기 위하여서는 악기를 더욱 발전시키는 문제도 고려해야 합니다… 옛날 그대로의 조선 악기를 가지고는 민족음악을 현대화할 수 없으며 우리 시대 인민들의 정서를 충분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김일성저작선집 제4권, 154쪽)라는 교시에 이어서, “우리나라에서는 마땅히 민족악기가 위주로 되어야 합니다”(사회주의문학예술론, 536쪽)고 강조했다. 시대의 요구와 인민의 지향에 맞게 민족악기를 적극적으로 내세워 민족기악 소품들을 장려하라는 주문이다. 그 결과 전통악기의 특성과 민족음악 발전에서 민족악기의 역할을 분석하여 민족악기의 현대화가 진행이 되었다. 민족(개량)악기를 본위로 한 조선식 “배합관현악”의 구현도 병진하였다.
조선(북)에서 자기만의 음악과 이를 위한 악기의 개량이 시작된 것은 1951년 12월 12일이다. 세계청년예술축전의 참가자들과의 접견 자리에서 김 주석이 “민족악기를 광범위하게 발전시킬 것”을 강령적 지침으로 발표한 것이다. 1962년 3월 11일 인민군협주단의 《혁명을 위하여》 연주를 치하하면서 “음악에서 주체를 세울 것”을 거듭 강조하였다. 1969년 8월 15일 민족(개량)악기로 편성된 배합관현악의 연주를 감상한 김 주석은 “우리 악기는 사람의 상상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소리”라면서 “인간 내면의 아름다움을 펼쳐줄 수 있는 기적 같은 악기”라고 민족악기를 평가했다. 1972년 12월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 시연회에서는 개량한 해금속 악기의 전시가 있었는데, 공연 관람 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악기의 재료와 형태에 대한 품평도 있었다.
관련해 조선(북)에서는 1963년 개량(민족)악기전시회가 열렸고, 1968년 문화성 산하의 악기공업관리국 내에 평양 “국립악기연구소”를, 각도에 지역별 악기연구소를 설립하였다. 평양음악대학에 악기제작학부를 개설하고 평양민족악기공장을 설립했다. 전국적으로 개량악기 시청회, 합평회, 연구 토론회를 조직해, 여기서 얻은 성과와 경험을 사업에 반영하였다. 2013년 평양악기전시회(전 전국악기품평회)를 개최하여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조선(북)은 5음계의 제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12율 반음체계를 기준으로, 서양의 음계를 도입하였다. 본래의 전통악기가 가진 우수한 민족적 특성을 살리면서 부족한 부분을 갱신하는 원칙 아래에서 악기 현대화 사업을 추진했다. 당연히 그 연주법 역시 혁신하여 현대적인 미감에 맞는 혁명적인 것, 전투적인 것, 서정적인 것, 낙천적인 것, 격동적인 것, 장엄한 것, 부드럽고 우아한 것 등 다양한 양상의 감정과 정서를 연주 형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연주법의 탐구와 그 실천이 이루어졌다. 물론 그 바탕에는 “민족적 특색”을 가져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이렇게 시작한 조선(북)의 “자기(주체)화”와 악기 개량 사업은 1980년대에 1차 마무리가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표현 능력을 확대하기 위해 음구가 많아졌고 음역이 확대되었으며, 음량이 풍부해지고 음색이 맑고 부드러워졌다. 또한 서양의 12 평균율에 맞게 개조하여, 반음의 이행을 자유롭게 하였고 앙상블의 효과를 높였으며, 서양악기와의 협연도 가능하게 하였다. 그 결과 관현악단의 편성 역시 서양악기와 개량악기가 대등하게 혼재한 “민족배합관현악” 방식을 취하고 있다.
개량에 성공해 현대화한 대표적인 민족악기는 장새납과 소해금이다. ‘삼죽’ 중 현재까지 전해지는 ‘대함’을 개량한 저대와 태평소와 비슷한 새납을 개량한 “장새납”이 관악기에서 대표적이다. 현악기에서는 해금을 개량한 해금속 악기들이 대표적이다. 여기에는 바이올린의 역할을 하는 ‘소해금’, 비올라의 역할을 하는 ‘중해금’, 첼로의 역할을 하는 ‘대해금’, 콘트라베이스의 역할을 하는 ‘저해금’이 있다. 이중 “조선민족악기의 꽃”이라 불리는 “소해금”이 독주 악기로도 유명하다.
중국의 《진양악서》 (陳暘樂書, 1104년)에서는 해금이 만주의 요서 지방에서 거주하던 몽고족의 하나인 해족으로부터 기원한 악기라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명칭도 ‘해(奚)족의 악기(琴)’인데, 고려 시대에 한국으로 유입이 되었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악기들이 아시아 전역에 있는데, 몽고의 마두금, 중국의 얼후(二胡), 일본의 코큐(胡弓), 태국의 소우(So u), 인도의 사랑기(Sarangi ) 등이 그것이다.
이 해금이 조선(북)에서 바이올린을 모델로 현대화가 되었다. 바이올린은 15세기경 이탈리아 북부에서 레벡(Rebec)·비올(viol) 등의 현악기가 바탕이 되어, 17세기를 지나면서 현대적 형태로 정립된 악기이다. 현을 쓰는 악기의 기원은 9세기경 비잔틴 리라(Byzantine lyra)로 보는데, 1현 악기인 구슬레(Gusle)도 있었다. 여기에 십자군 전쟁과 몽골의 유럽 정복기에 동서양 문화의 직접적인 교류가 바이올린의 역사에서도 영향을 주었다는 견해에 따른다면 (소)해금의 현대화 과정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소해금은 전통악기인 해금의 청경한 음색과 독특한 음향을 가지면서 현과 현동 등이 개량되어, 전통적인 음악뿐만 아니라 현대적 음악까지 소화하는, 풍부한 표현력을 가진 악기로 발전했다. 기존 2줄의 해금에 비해 개량된 악기인 소해금은 현이 4줄로 늘었다. 연주 역시 기존에 활을 안쪽으로 넣고 마찰로 소리를 내는 해금에 비해, 소해금은 연주 시에 첼로처럼 현 위에 놓고 연주한다.
처음에는 음량과 음정의 확대, 원할한 연주(legato)와 튕기는 연주(Spiccato)의 해결, 보다 섬세한 연주와 보다 맑고 아름다운 음색 등을 위해 1960년대 중반에 3현으로 바뀌었고, 1960년대 후반에 4현 악기로 발전해 1980년대에 완성이 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우아하고 처량한 음색과 아름답고 부드러운 소리로, 주선율을 담당하고 있는 악기로 거듭났다.
소해금 소리는 기본적으로 맑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미” 줄은 맑고 선명하다. “라” 줄은 맑고 부드럽다. “미”와 “라” 줄에서는 처량한 소리와 맑고 구성진 소리를 잘 살릴 수 있다. “레” 줄은 부드럽고 우아하다. “솔” 줄은 연하고 부드러우면서 은근하다. 연주 시에 민족적 특성에 맞게 민요 조식의 일정한 계단음이 미분음적으로 약간 낮거나 높아진 소리를 내는 ‘미분음’을 사용하여 민요적 느낌을 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솔(G⁻¹)에서 시(B⁺³)의 음역대를 가진 소해금은, 조율 시 개방현 상태로 해서 각 줄을 완전 5도 간격(아래서부터 솔1, 레1, 라1, 미2)으로 맞추는데, 조성은 “씨♭”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실음보다 장2도 높게 표기하는 “이조” 악기이다. 조선(북)의 매체에서는 "소해금은 고음 악기로서 민족적 정서가 풍기는 아름다운 음색을 가지고 있으며 연주법이 매우 다양하고 형상력이 풍부하다"고 밝히고 있다.
조선(북)에서 소해금 연주자로 유명한 이는 공훈배우 남은하이다. 남은하의 천재성은 유치원 시절부터 나타났다. 음악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과 특출난 감각 그리고 풍부한 감정 표현 등으로 일찍부터 교원과 관계자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사리원예술학원 재학 시에 전국 민족기악개인경연대회에서 1등을 하여 예술 영재로 주목을 받았다. 김원균명칭평양음악대학 재학 시절 전례를 깨고 2학년 학생 신분으로 참가한 “2.16예술상”에서 1등의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소해금 연주자로서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졸업 후 주요 예술단체로 배치가 되어 실력과 명성을 쌓았다. 소해금 독주 《혁명을 위하여》, 소해금 독주와 장고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민족기악 2중주 《아리랑》 등이 그녀의 대표적인 ‘연목’(repertory)이다. 그녀는 평양 국립민족예술단의 소해금 독주자이자 악장으로서로 최정상의 위치에 있다.
한편 소해금은 해외동포 음악계에서도 널리 사랑을 받는 악기로, 일찍부터 조선(북)과 교류가 깊었던 “조선족” 중국 동포사회와 “조선적” 재일 조선인 사회에서 계승 발전해 오고 있다. 한국의 이승만 박정희 정권이 기민정책으로 재일 조선인 사회를 외면한 것과 달리, 조선(북) 정부는 1954년 8월 20일 당시 외상인 남일의 명의로 “재일 조선인들은 조선(북)의 해외공민이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재일 조선인의 민족권 수호를 후원하기 위해 민족교육과 민족예술에 대한 다각적인 교류와 지원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소해금도 재일조선인 음악계의 대표적인 조선민족악기로 자리를 잡았다.
그 계기는 1966년 5월 4일 도쿄도 아라카와구(荒川区)에 소재한 조선제1초중급학교에서 열린 민족악기 전달식이었다. 조선(북)에서 가야금, 양금, (소)해금, 피리, 장새납 등 22종 97점에 달하는 민족악기를 보내온 것이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매년 이어지고 있는 재일 조선학교에 대한 교육비 원조와 더불어 재일 조선인 음악가들의 양성을 포함한 조선(북)의 교육과 지원은 제도화되어서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 그 중심에 동경도 소평(小平)시에 위치한 조선(북) 유일의 국립해외예술단인 금강산가극단의 역대 소해금 연주자들이 있다.
이번 '량성희 소해금 독주회'가 기다려지는 이유도 바로 소해금으로 연주하는 조선 클래식의 정수를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량성희는 평양음악대학을 수료하고 금강산가극단에서 11년간 악장으로 활동을 하였다. 2016년에는 조선(북) 최고 권위의 전문가 콩쿨인 <2.16예술상>에서 최고상을 수상하였다. 2018년에는 평양 4월의봄 국제친선축제에서 은상을 수상하여 그 실력을 입증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2013년부터 거의 매해 평양대극장에서의 광명성절 공연, 인민예술축전 등에서 독주를 하였다.
그런 그녀가 “조선 클래식의 1번수”가 되어 한국에서 첫 공연을 가진다. 2025년 11월 25일과 26일 저녁 7시30분, 토마토홀에서 열린다. 국내 초연하는 조선 오페라 <꽃파는 처녀>의 OST “리별의 시각은 다가오는데” 등과 소해금의 대표적인 명곡인 “종다리”와 “봄맞이“ 그리고 서양의 클래식 명곡 등 총 11곡을 선보인다. 전통음악의 범주에서 지지부진했던 남북 음악 교류사에 새로운 전환이 될 ”조선 클래식“ 연주회로서 그 의의가 크다. ”인간의 소리에 가장 가깝다“는 소해금의 진정한 사운드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귀한 콘서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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