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돌 기획 ‘식민사학서 시민사학으로’ ⑥

우리 근대 역사학 원점 식민사관이 아닌 민족사관

지금 시대정신은 민족자결→공화, 저항→책임의식

지배질서 두둔한 강단학계 폐쇄적 카르텔 해체를

다양한 관점, 해석이 공존하는 건강한 담론장으로

광복 80돌이 됐건만 대한민국 역사는 여전히 '식민사학'의 주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뉴라이트와 극우 파시즘의 변이과정을 거치면서 21세기 한복판에도 아스팔트 위를 배회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엉킨 실타래일까? 인문연구가 이병권 씨가 멀리 에도 막부시대에 파종돼 메이지시대 인공재배된 식민사학이 어떻게 '친일'의 뇌리에 이식됐는지 돌아보았다. 

게재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 에도 막부가 준비한 '미래' ② 과학 위장한 실증주의 사관 ③ '제국주의 사생아' 조선사편수회 ④ 첫 단추부터 잘못 꿴 '해방 이후' ⑤ 되살아난 유령1, 동북아 역사지도 ⑤ 되살아난 유령 2, 전라도 천년사 ⑥ '시민사학'으로 광복 백주년 준비하자

 

광복절을 앞둔 4일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에 독립운동가 남상락 자수 태극기가 걸려있다. 2025.8.4. 연합뉴스
광복절을 앞둔 4일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에 독립운동가 남상락 자수 태극기가 걸려있다. 2025.8.4. 연합뉴스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투스(Herodotus, BC 484경–425경)는 『히스토리아(Histories)』에서 “왜 그리스와 페르시아는 전쟁을 벌였는가?”라는 문제의식으로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그 뒤를 이은 투키디데스(Thucydides, BC 460경–400경) 역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왜 일어났는가?”와 “전쟁과 권력은 인간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질문을 바탕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집필했습니다. 그는 명확히 말합니다. “이것은 일정 시기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이 변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반복될 사건들을 이해하기 위한 영구적 가치의 기록이다.”(『펠로폰네소스 전쟁사』 I권 22장). 투키디데스는 제1권 22장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발발 배경과 그 중요성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전쟁이 단순한 지역 분쟁이 아니라 그리스 세계의 정치적, 군사적 균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사건임을 강조합니다. 이 장에서는 전쟁의 원인과 그로 인한 결과를 깊이 있게 분석하며, 전쟁의 전개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서는 복잡한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가져올 것임을 예고합니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단순한 과거 기록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 행위 분석으로서의 역사라는 점에서, 역사가의 관점과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곧 역사학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비판적 인식입니다.

동양에서도 이와 유사한 접근이 존재했습니다. 중국 사마천(司馬遷, BC 145?~86?)은 『사기(史記)』에서 단순한 제왕 연대기를 넘어서 “하늘의 이치(天道)와 인간의 행위(人事)”를 통찰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태사공 자서』에서 “진실을 기록해 후세에 전하겠다”고 밝히며, 역사서를 인간과 권력, 도덕과 현실을 성찰하는 장으로 삼았습니다. E. H. 카(E. H. Carr, 1892–1982) 역시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1961)에서 역사는 과거 사실의 단순한 수집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사고 활동’임을 강조했습니다.

한국 근대 역사학의 출발점은 어디일까요. 일부에서는 한국 근대 역사학의 시작을, 메이지 시대 일본이 랑케(Ranke)의 실증주의 역사학을 수용한 이후 조선에 전해진 ‘실증사학’에서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사학은 과거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역사가의 체계적 인식과 시대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과거와 현재의 끊임 없는 대화라는 관점에서 타국 중심의 인식만으로는 진정한 역사학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데라우치 초대 총독의 말. 일제는 식민지배 초기부터 통치 이데올로기 확보 차원에서 조선사 왜곡에 착수했었다. 2025.8.6. [KBS 역사스페셜 화면 갈무리] 시민언론 민들레 
데라우치 초대 총독의 말. 일제는 식민지배 초기부터 통치 이데올로기 확보 차원에서 조선사 왜곡에 착수했었다. 2025.8.6. [KBS 역사스페셜 화면 갈무리] 시민언론 민들레 

따라서 한국 근대 역사학의 출발점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독립이라는 시대정신을 구현하고자 했던 민족사학에서 찾아야 합니다.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이상룡(李相龍, 1858–1932), 김교헌(金敎獻, 1869–1923) 등 사학자들은 피억압 민족의 정신적 독립을 역사 서술을 통해 실현하려 했습니다.

‘민족주의(nationalism)’는 정치적·문화적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갖습니다. 일반적으로 국민국가 형성과 통합을 지향하는 정치 이념(state nationalism)과, 언어·혈연·문화·역사 등 공유된 정체성에 기반해 독립과 자결을 추구하는 운동(ethnic nationalism)으로 구분됩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시민적 민족주의(civic nationalism)와 민족 정체성 기반 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가 혼재하여 발전했습니다.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 1936–2015)은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 1983)』에서 민족(nation)을 실체가 아닌 “상상된 공동체”로 보며, 민족이 근대 자본주의, 인쇄 자본, 국민국가 형성과 함께 등장한 산물이라고 설명합니다. 반면, 앤서니 스미스(Anthony D. Smith, 1939–2016)는 『민족과 민족주의(Nationalism, 2001)』에서 민족주의가 단순한 근대적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전근대의 ‘에트니스(ethnies)’와 역사적 연속성을 지닌다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에트니스’는 공통의 이름, 조상 신화, 공유된 역사적 기억, 독자적 문화 요소, 특정 영토와 연계된 집단 연대 의식을 갖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어니스트 겔너(Ernest Gellner, 1925–1995) 역시 『민족과 민족주의(Nations and Nationalism, 1983)』에서 산업사회와 민족의 긴밀한 관계를 분석하며, 민족주의를 근대 산업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필연적 구조로 보았습니다.

 

사도광산을 대표하는, 아이카와 금은산에 메이지시대 이후 건설된 갱도. 구불구불하고 좁은 에도시대 갱도와 달리 비교적 넓게 매끈하게 뚫려 있다. 사도광산에는 2000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조선인이 태평양전쟁 기간 일제에 의해 동원돼 가혹한 환경에서 강제노역했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사도광산을 대표하는, 아이카와 금은산에 메이지시대 이후 건설된 갱도. 구불구불하고 좁은 에도시대 갱도와 달리 비교적 넓게 매끈하게 뚫려 있다. 사도광산에는 2000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조선인이 태평양전쟁 기간 일제에 의해 동원돼 가혹한 환경에서 강제노역했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한국에서 ‘nationalism’을 ‘국가주의’가 아닌 ‘민족주의’로 번역한 것은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식민지 상황과 직결됩니다. 조선은 독립된 국가가 아니었기에 현실적으로 민족 정체성에 기반한 독립운동이 이루어졌습니다. 신채호는 “역사는 곧 민족의 생명”이라고 강조하며, 박은식은 ‘국혼(國魂)’ 개념을 통해 민족정신이 살아 있다면 국가 회복이 가능함을 주장했습니다. ‘국가주의(statism)’가 파시즘·전체주의와 연결되는 반면, ‘민족주의’는 일본 제국의 침탈과 내선일체 정책에 맞서는 정체성의 상징으로 기능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주의는 과거 식민지 독립운동의 상징에서 유럽에서 제국주의·파시즘과 결합한 배타적·공격적 이념으로 변모했습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코소보 내전 등이 민족주의적 충돌의 사례로 분석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일부 지식인들은 민족주의를 시대착오적·폐쇄적 개념으로 기피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저항적 민족주의의 역사성을 간과하는 태도입니다. ‘민족’을 강조하는 것만으로 시대착오적이라는 결론은 지나치며 이러한 기피 현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말한 “나라는 망해도 역사는 망하지 않는다. 역사는 곧 민족의 혼이다”라는 선언은 당시의 절실한 문제의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시대정신은 민족보다 시민, 자결보다 공화, 저항보다 책임의식이라는 보다 폭 넓은 관점을 요구합니다.

역사학은 과거 기록을 넘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나침반입니다. 오늘날 한국 역사학은 일부 지식인 카르텔의 독점적 담론에 갇혀 있으며, 뉴라이트와 식민사학의 그림자가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러한 구조는 지배 질서를 합리화하고 대중 저항 의지를 약화시키는, 이데올로기의 오랜 기제가 작동한 결과입니다.

제가 제안하는 시민사학은 민주공화정 헌법 정신을 충실히 반영하며, 지식 독점에 기반한 역사학이 아니라, 시민이 참여하고 만들어가는 역사학을 의미합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정신으로 시작된 민족사학의 가치를 계승하되, 그 주체를 ‘시민’으로 확장하는 것입니다. 시민사학은 시민 개개인이 자신의 삶과 공동체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탐구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됩니다. 특정 이념이나 세력에 의한 편향적 역사관을 배제하고, 다양한 관점과 해석이 공존하는 건강한 역사 담론의 장을 열어야 합니다.

 

‘독도 일출’ (김천일 작) ▲작가의 말 “독도에서 맞이한 일출의 황홀한 기억을 그림에 담은 것입니다.”
‘독도 일출’ (김천일 작) ▲작가의 말 “독도에서 맞이한 일출의 황홀한 기억을 그림에 담은 것입니다.”

학교 교육, 시민 강좌, 지역 커뮤니티, 디지털 플랫폼 등에서 시민들이 역사에 직접 접근하고 재구성할 수 있도록 지원함으로써 ‘역사 카르텔’ 해체와 시민사학의 확산이 가능합니다. 시민사학은 민주주의 심화, 시민 자존감 향상, 건강한 공동체 의식 함양에 기여하며 민주공화정의 주춧돌 역할을 수행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시민사학의 여섯 가지 기준은 이렇습니다.

첫째, 민주공화주의 원리에 입각한 역사 인식과 서술입니다. 시민이 역사의 주체이며, 공정한 시스템을 통해 역사 담론이 운영되어야 합니다.

둘째, 시민적 감수성과 책임의식 반영입니다. 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등 다양한 집단을 포용하며 민주주의 가치를 역사 서술에 반영해야 합니다.

셋째, 권력의 감시자·역사의 비판자 역할입니다. 검찰 권력, 사법 카르텔, 독점 자본 등 민주공화정 시민의 자유와 행복을 가로막는 기득권세력에 대한 비판적 기록이 시민사학의 주요 역할입니다.

넷째, 민족사학의 공과에 대한 균형적인 평가입니다. 신채호·박은식의 업적은 여전히 유효하나, 단일 민족 중심에서 다양한 시민 주체로 전환해야 합니다.

다섯째, 대한민국 헌법 정신 반영입니다. 3.1 독립운동, 임시정부 법통, 4.19 민주이념, 평화적 통일 정신, 5.18 민주화운동 정신을 현대사의 기준으로 이어받습니다.

여섯째, 진정한 역사학 기관이 필요합니다. 현 정부 산하 역사기관의 정체성과 연구 성과를 재검토하고, 시민 역사학을 제도적으로 발전시킬 새로운 기구를 발족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침내 식민사학의 그늘을 벗어나 광복 백주년을 맞을 준비가 됩니다. 

시민사학은 특정한 방식에 고정된 모델이 아니라, 시민 각자가 역사적 질문을 던지고, 타자와 공론장에서 성찰하며 나누는 열린 과정입니다. 이는 앤더슨이 말한 “상상의 공동체”를 시민 공동체로 재구성하고, 겔너가 강조한 근대 국가와 문화적 동질성 상호작용을 민주적 제도 속에서 재구성하며, 스미스가 지적한 역사적 뿌리 위에 시민 정체성을 심는 작업입니다. 민주공화정의 현장에서, 역사는 지금도 시민에 의해, 시민을 위하여 다시 쓰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광복 80주년을 맞아 7부작 칼럼을 통해 근대 이후 우리 역사학의 맥락을 짚어보고, 극복해야 할 현주소를 돌아봤습니다. 제 의견에 동의하는 분도, 그렇지 않은 분도 계실 것입니다. 부족한 글에 보여주신 관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시민사학에 대한 논의가 비난이나 배척이 아닌, 시대정신과 근거 있는 담론 속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길 기대합니다. <끝>

 

일본제국 강점에서 미군 점령으로..  일제로부터의 해방 직후 풍경
일본제국 강점에서 미군 점령으로..  일제로부터의 해방 직후 풍경

참고문헌

신채호. (1931). 『조선상고사』.
박은식. (2019). 『한국통사』. 아카넷.
Anderson, Benedict (1936–2015). (1991). 상상의 공동체: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 정종수 역, 나남출판. (원제 Imagined Communities, 1983)
Gellner, Ernest (1925–1995). (1983). 민족과 민족주의. (국내 번역본)
Smith, Anthony D. (1939–2016). (2012). 민족의 인종적 기원. 강철구 외 역, 용의숲. (원제 The Ethnic Origins of Nations, 1986)
김인중. (2011). “민족과 민족주의 − 겔너와 스미스를 중심으로”. 숭실사학.
신용하. (2022). “민족과 Ethnicity의 사회학적 개념과 이론의 분화”. 대한민국학술원 논문집, 61(1), 347–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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