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가 구르다 날듯이 사람도 생각하다 초월
하느님과 얼로 뚫리면 그게 바로 엉큼한 사람
ㄱ과 ㄴ 사이 가온찍기(ㆍ)는 곧 만상시원 태극
“밑(발, 백성)을 모르면 위(머리, 지배자)가 될 수 없다.”
“내 몸은 수레지만 내 정신은 속알이다. 우리는 영원한 속알을 실은 수레지기로 자기 긋 머리를 밝히고 나가면 된다.” -『다석어록』
1955년 다석 류영모는 『새벽』 7월호에 「제소리」를 실었다. 깨달은 이의 소리가 제소리다. 제소리 내지 못하면 헛소리다. 철학하는 이는 제소리를 울려야 한다. 그이는 「제소리」에 말하기를 “ㄱ 꼴은 천생(天生) 그늘! 그윽함을! 사람의 거처(居處)의 상부곡선(上部曲線)을 현시(現示)한 것은 분명(分明)합니다. ㄴ은 집은, 자리는, 신발은, 슬립퍼는, 거루배는, ―하고, 크나 적으나 땅에 닿는데다 ㄴ 비슷한 기구(器具)를 쓰는 사람이라.”고 했다. 기윽은 앞에서 살폈으니 니은을 살펴보자.
‘니은’을 다시 또박또박 읽어보자. “ㄴ은 집은, 자리는, 신발은, 슬립퍼는, 거루배는, ―하고, 크나 적으나 땅에 닿는데다 ㄴ 비슷한 기구(器具)를 쓰는 사람이라.” 니은은 길을 가는 이다. 발자국 없이 걷는 이요, 거룻배 타는 이요, 땅에 닿는 데를 누비는 이다. 하늘에서 온 얼로 깬 ‘니은’은, 땅이 하늘을 받듦이다. 그런 삶을 산 참사람이 떠오르는가?
니은, 길을 가 걷는 얼
『다석어록』에 이런 말이 남아 있다. 1957년에 하신 어록이다. 글을 보면서 ‘니은’의 삶을 산 사람을 한 번 꿍꿍해 보자. “똥오줌으로 가득 찬 이 세상 더러운 땅 예토(穢土)를 넘어서야 깨끗한 나라 정토(淨土)에 이른다. 정토가 하늘나라요 니르바나 나라이다. 하늘나라에는 가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이다. 깨달으면 ‘있다시 온이’ 여래(如來)가 된다. 여래란 있어서 있는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얼나를 깨달았다는 말이다. 얼의 나라에는 늙음도, 앓음도, 죽음도, 괴롬도 없다. 영원한 생명의 사랑이 있을 뿐이다. 몸나가 없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 앞에는 얼나가 있다.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 제계(彼岸)다. ‘제계 가온’(歸一) 이것이 사람이 나아가야 할 길이요 이루어야 할 참이다. 제계 가온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요 얼나를 깨달음이다. 하늘나라는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자각(自覺)과 천국(天國)이 둘이 아니다. 얼나와 하느님은 하나이다. 사람은 식색(食色)의 수성(獸性)을 지닌 제나(自我)를 넘어서야 한다. 식색의 제나를 넘어서지 못한 사람은 아직 얼나가 다스리는 의식인 정신(情神)이 없다. 정신은 얼나가 제나의 수성을 다스릴 때 정신이 나타난다. 땅에 하늘나라가 임한 것이다. 정신의 세계만 자성존지(自性尊持)하는 나라이다.”
땅에 하늘나라가 임해야 하리라. 깨끗한 나라 정토가 이곳에 임하도록 산 이가 있었다. 하늘나라는 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 여기에 깨닫는 것이라고 일러준 이가 있다. 사람에 하늘이 깨어나니 ‘모신 하느님’(侍天主)이요, 본디 있는 그대로 오시니 온새미로 ‘있다시 온이’(如來)요, 하느님 계신 곳이 늘 이제 여기라며 ‘제계 가온’(歸一)의 길을 간 이가 있었다. 한 평생을 발로 누비며 떠돌아 다닌 이가 있었다. ‘니은’의 삶을 산 이는 부처요, 예수다. 하나 한꼴로 붓다예수이거나, 예수붓다이다. 아주 가까이는 수운의 뜻으로 얼을 깬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1827~1898)이 있다.
한 발을 내밀어 몸이 가야 때가 온다. 그것을 진일보(進一步)라 한다. 다석은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해야 빈 데 갈 수 있다고 한다. 간두(竿頭)에도 매달려 있는 한 빈 데 갈 수 없다.”고 했다. 한걸음에 멈추면 안 된다. 더 걷고 걸어야 한다. 저절로의 ‘높’을 우러르며 ‘낮’게 흘러야 한다. ‘하늘땅’(天地)에 어울린 ‘땅하늘’(地天)이 하나로 맞아 돌아가는 그 한 둥긂의 가온에 ‘긋’으로 솟나야 한다. 몸은 난 자리에 머물러 살기도 하고, 난 자리를 박차고 든 자리로 가 머무르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난 자리를 박차고 든 자리도 없이 헤아릴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높오른 땅들을 뛰넘는다. 얼어붙은 바다조차도 훌쩍 건너뛰었다. 그렇게 쉬지 않고 가오는 이들이 분명히 있다.
난 자리에 머물러 산 이들은 아프리카 니그로이드요(이제는 그들도 이곳저곳으로 자리를 옮기고는 있다), 난 자리를 박차고 든 자리로 가 머무른 이들은 유럽의 코카소이드요(이들도 이제는 이곳저곳으로 자리를 옮겨 다닌다), 난 자리를 박차고 든 자리 없이 강 건너 산 넘어 높오른 땅들을 뛰넘은 이들은 몽골로이드다(수천수만 년간 이들은 강물처럼 흘렀다). 아메리카 인디언을 아메린드(Amerind)라고도 하나 이들은 몽골로이드로 분류된다. 그 밖에 오스트랄로이드가 있고 태평양 섬에 사는 원주민들이 있다.
몽골로이드. 그들을 일러 문 없이 가오며 이어지는 무지개라 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무지개야말로 그들이 가오는 하늘땅 사이의 문이라고 해야 하리라. 실제로 몽골 사람들은 한국을 일러 ‘솔롱고스’라고 부른다. 그 말뜻은 “무지개”이다. 왜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을까? 왜 그들은 떠나간 이들의 저 먼 곳을 무지개 닿는 곳으로 보았을까? 여기와 저기를 하나로 잇는 동그란 무지갯빛을 왜 문(門)으로 생각했을까? 다석은 “머무를 것 없는 것이 참나인 얼나다. 예수도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한 18:36)라고 했다. 얼나는 무소부재(無所不在)한데 시간·공간 내에 제한을 받으면서 묵을 까닭이 없다. 묵지 않는다는 것은 시간·공간에 갇히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오고 갈 필요도 없고 나고 죽을 까닭도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사람은 제 집을 떠나서 나그네가 되어 애쓰고 고생하며 생각하는 데서 철이 나고 속알이 영근다.” _ 『다석어록』
“살기는 너른 데서, 가기는 환히 넓은 길로, 뜻대로 되면 씨알과 함께 가고 뜻대로 안 되면 나 혼자 가련다.” _ 다석 류영모가 맹자의 글을 우리말로 푼 것이다.
인류가 아프리카를 벗어나 다른 대륙으로 이주를 시작한 것은 대략 6만~7만 년 전이다. 그들 중에서 산맥(山脈), 고원(高原), 동토(凍土)를 지나 계속 걸어간 인종은 몽골로이드(黃人)뿐이다. 게다가 4만 년 전 바이칼호 근처에서 혹독한 추위를 견딘 이가 북방계 ‘신몽골로이드’라고 할 수 있다. 그들 중에서 한반도로 내려온 한국인은 세계에서 눈이 가장 작고, 털이 없으며, 두상과 치아가 가장 크다. 나그네는 떠도는 사람이요, 여행자요, 방랑자이다. 그이는 ‘나간 사람’이다.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박목월)라 했으니 그이는 “문지방을 넘어 방에서 뜰로 나가고, 뜰에서 빗장을 풀고 문밖으로 나가는 사람”(이어령)이다. 가고 가면서, 나가는 사람들은 새로 길을 터 여는 이들이다. 딛고 디디면서 어딘가에 다다르기를 바라는 이들이다. 그들은 밟고 디디면서 익히고 닦아갔다. 가득가득 익어가고 또 밟아가는 ‘걷기’에 그들의 실천행(實踐行)이 있었다.
동아시아 문명의 사유에는 이렇듯 무지개가 있다. 아프리카에서 유럽을 지나 유라시아 대륙을 걸어 온 이들의 발바닥에는 ‘늘’이 있었다. ‘늘’을 타고 건너가는 사람들은 때 사이 ‘새’(間)를 타고 가는 이들이요, 글월 밀어 믿고 밑을 터 여는 이들이다. 때(時) 사이 새에 빛무리가 있고, 빔(空) 사이 새에 무지개가 있다. 사람은 ‘때빔’(時空)을 살지만 ‘맘얼’(心靈)은 ‘때빔’에 붙잡히지 않고 갇히지도 않는다. 다비드 르 브르통은 『걷기예찬』에서 “걷는 사람은 시간의 부자다. … 그는 자기 자신의 하나뿐인 주인이다. … 더 이상 시간을 지킬 필요가 없이 보내는 삶, 그것이 바로 영원이다.”라고 했다. 가고 가도 늘 그 자리인 사람. 그가 곧 걷는 사람이요, 나간 사람이다. 그의 방은 지구요, 그의 집은 우주다.
길 가 걷는 몸은 발자국을 남긴다. 길 가 걷는 맘은 ‘싶뜻’(欲心)이 자국을 남긴다. 길 가 걷는 얼은 자국이 없다. 몸으로 가오는 나그네는 하룻길이 바쁘고, 맘으로 가오는 나그네는 열흘길이 바쁘다. 얼로 가오는 나그네는 텅 빈 우주 길이다. ‘가온길’(中道)을 품고 가는 길은 가도 가도 그 자리다. 늘 나고 나면서 난데로 돌아가는 나그네의 길은 ‘너나․없:비롯’(始․無:始)이요, ‘마침․없:긑’(終․無:終)이다. 그 자리가 곧 이 자리라는 이야기다.
기윽니은, 하나로 한꼴
니은 디읃(디귿) 티읕 된디읃(쌍디귿) 그리고 리을. 된디읃 또는 쌍디귿은 조선에서 ‘띠으ퟍ’이라 불렀다. 느드트뜨르, 니디티띠리로 소리 낼 수 있을 터인데, 느드트는 위로 오르는 소리다. 니은(ㄴ)이 하늘을 이면 디읃(ㄷ), 니은(ㄴ)에 니은(ㄴ)을 쌓고 하늘을 이면 티읕(ㅌ)이다. 기윽을 쌓아서 키읔을 만들듯이, 니은을 쌓아서 티읕을 만든다. 쌓아서 만드니 트고 터지는 뜻을 가진다. 거센소리는 위로 트고 터져서 커지는 소리라면 된소리 된디읃(ㄸ)은 두터워지는 소리다. 땅을 ‘딱딱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사람도 두터워지면 똑똑하고 똘똘해진다.
다석은 말하기를 “깨달은 다음에는 자기의 깨달은 생각을 나타내 보이는 실천이 따른다. 그 실천이 디긋 디긋이다. 디긋이란 딱딱한 땅을 딛고 사는 우리의 긋을 말한다. 머리를 하늘에 두고 곧곧하게 땅을 딛고 반드시 서야 우리는 산다. 곧이 곧게 하늘을 그리워하는 것이 정신이다. 정신의 생명은 정직(正直)이다. 정직하게 살려면 역시 하늘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정(正)은 바로 반듯이요, 올곧음이다. 하나(一)에 발 딛고(止) 똑바로 서라는 것이다. 곧이 곧게 하늘을 그리워하는 것이 니은(ㄴ)이다.
ㄴ : 나, 나다, 나타나다, 날다, 넓다, 나그네, 느리다
ㄷ : 딛다, 돋다, 돌다, 디긋 디긋, 두드러지다
ㅌ : 텅(虛), 텅텅, 트다. 터지다. 태우다, 통통하다
ㄸ : 땅, 딱딱하다, 뚱뚱하다, 똑똑하다, 똘똘하다
니은은 나고(生) 나는(飛) 참나다(吾). 나로 나날 내면서 난다. 그이는 “나는 생각한다. 나를 위해 생각한다. 생각의 중심이 나다. 나는 있다. 나는 참이다. 이 나는 예에 있는 나가 아니라 계에 있는 나다.”(『다석어록』)라고 했다. 예는 이곳의 땅이요, 계는 저곳의 하늘이다. 예에 있는 내가 계에 있는 나로 날기 위해서는 제나․거짓나를 없애야 한다. 그래야 ‘나없’(無我)에 들어 텅 빈 빈탕의 참나가 드러난다.
그이는 또 이렇게 말했다. “손에 창을 들고 있는 회의문자가 아(我)자이다. 아(我)는 반드시 적수(敵手)가 있는 앞에서 쓴다. 적국(敵國)이 없으면 아방(我邦)이라 하지 않고 오방(吾邦)이라 한다. 적수가 없을 때는 아(我)아닌 오(吾)를 쓴다. 아(我)는 탐·진·치 수성(獸性)을 지닌 제나(自我)를 말한다. 신앙이란 거짓나인 제나를 없애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我)가 없는 무아(無我)가 되어야 한다. 무아(無我)가 되면 배타적인 것이 없어진다. 수성(獸性)이 없어지는 것이 무아(無我)이다. 그래서 석가·노자·예수가 끔찍이도 제나는 있어서 안 된다고 했다. 공자(孔子)까지도 제나가 있으면 안 된다고 했다. 거짓나인 제나(自我)가 없어질때 참나가 드러난다. 참나인 얼나가 독립·자유·평등의 나이다.”(『다석어록』)
기윽니은 한꼴에 ‘나없’의 무아(無我)가 숨 돌린다. 기윽니은은 하나로 한꼴이다. 그 한꼴에 하늘아(⋅)를 탁 찍으면 ‘가온찍기’다. 곧 ‘나없’(無我)이다. ‘나없’에 참나다. 이 참나로 깨달은 뒤에는 ‘가온찌기’로 살게 된다. 디긋 디긋의 삶이다.
기윽과 니은이 아니라 그냥 기윽니은(ㄱㄴ)이다. 움쑥(陰)과 불쑥(陽)이 아니라 그냥 움쑥불쑥(陰陽)이다. ‘과’를 넣으면 나누고 쪼개는 것이요, ‘과’를 빼고 붙이면 그냥 그것이 한꼴이라는 이야기다. 말의 순서가 기윽니은일 뿐 그것은 그저 한꼴로 돌아가는 하나다. 마찬가지로 말의 순서가 움쑥불쑥일 뿐 그것은 그저 한꼴로 돌아가는 하나다. 그것이 하나 한꼴이라는 참올(眞理)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그런 다음 하나씩 따로 말해야 할 때를 가려서 ‘과’를 넣어도 될 터이다.
다석 류영모는 “하늘과 땅을 달리 보려는 것은 하늘과 땅에 대한 추상이 다를 때에 한한다. 하늘과 땅은 그대로 하늘땅(天地)이다. 우주 간에는 그런 구별이 없다. 그러나 같이 할 때에는 하늘땅이 같은 것 같이 같아야 하고 달리할 때는 하늘과 땅처럼 달라야 한다.”(『다석어록』)고 했다. 하나 한꼴이라는 눈으로 기윽니은이 그대로 돌아가는 ‘가온’도 보아야 한다. 가고오는 가오는 그 ‘가온’에 하늘을 탁 찍어야 ‘모신 하늘님’으로 가온찍기다. 이때 하늘은 뜨거운 산알의 불숨이다.
노자 늙은이(老子)가 말한 “무명천지지시(無名天地之始)”를 풀때는 반드시 “이름 없에 하늘땅이 비롯고”로 해야 알맞다. 하늘땅이 한꼴로 비롯했기 때문이다. 그 둘은 하나다. 또 ‘이름 없에’라고 해야지, ‘이름 없에서’라고 하면 맞지 않다. ‘~에’, ‘~에서’는 뜻이 다르다. ‘~에’는 바로 거기 그 자리이고, ‘~에서’는 이미 거기 그 자리를 벗어났다. 쪼개졌다. ‘이름 없’ 바로 그 자리에 비롯해야 쪼개지지 않은 하늘땅이다. 하나 한꼴이다. 한꼴로 났다.
~에, ~데 : ‘그 자리’를 뜻한다. 바로 거기, 그 자리에.
~에서, ~데서 : 벗어나기 시작한 자리를 뜻한다. 거기서 여기저기로.
‘없’ 그 자리에 하늘땅이 비롯한다. ‘없’ 그 자리는 쪼개지지 않는다. 씨알 글씨도 그런 뜻을 가진다. 기윽 하늘(ㄱ)이 나고, 니은 땅(ㄴ)이 났다. 나고 났다. 나고 난데에 하늘땅이요 기윽니은이다. 이름 없에 하늘이 비롯해 기윽(ㄱ)이 났다. 이름 없에 땅이 비롯해 니은(ㄴ)이 났다. ‘없’을 일러 하늘땅의 비롯이라 한 까닭을 알아차려야 한다. 하늘땅 내리오름의 기윽니은(ㄱㄴ)은 본디 미음(ㅁ)으로 감아 돌아가는 한꼴이다. 한가지다. 하늘땅, 기윽니은 이 둘은 함께 나와서 달리 이를 뿐이다. 감아 도는 미음(ㅁ)이 뭇 야묾의 오래(門)이다. 밑둥 닿소리 다섯은 다 그 뜻이 있다.
⋅기윽(ㄱ)은 하늘이 땅 그리워 내리는 얼이요, 나무(木)다.
⋅니은(ㄴ)은 땅이 하늘 그리워 솟는 얼이요, 불(火)이다.
⋅미음(ㅁ)은 땅에 하늘이, 하늘에 땅이 하나로 도는 마음자리 얼이요, 흙(土)이다.
⋅시읏(ㅅ)은 씨알 솟는 얼이요, 쇠(金)다.
⋅이응(ㅇ)은 가없이 큰 우주 얼이요, 물(水)이다.
하늘이 땅 그리워 내린 기윽(ㄱ), 땅이 하늘 그리워 높인 니은(ㄴ). 이 둘이 한꼴로 소용돌이 일으키며 숨 돌리니(氣運) 텅 빈 가온에 우주 씨알이 튼다. 숨(息)․김(氣)․힘(力)․알짬(精)․빛살․해숨(易)이 그 돎에 있다. 가온찍기 아닌가!
가온찍기, 하나 한꼴에 삼태극이 숨쉬고
가온찍기는 다석이 몸․맘․얼 닦아감(修行)을 한꼴로 드러내고 나타낸 씨알 글꼴이다. 그이는 늘 이 글꼴을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오늘살이’ 살았다. 글꼴에 몸․맘․얼 닦아감의 뜻을 그대로 심어서 크게 밝힌 것이다.
그이는 풀어 말하기를 “기윽(ㄱ)은 니은(ㄴ)을 그리고, 니은(ㄴ)은 기윽(ㄱ)을 높이는데 그 가운데 한 점을 찍는다. 기윽과 아오(⋅)라는 한 점과 합치면 ‘①’이 되어가고 영원히 간다. 아오(⋅)의 오와 니은이 합치면 ‘②’가 된다. 가고가고 영원히 가고, 오고오고 영원히 오는 그 한복판을 탁 찍는 가온찍기야말로 진지를 깨닫는 순간”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기윽니은이 하나 한꼴로 영원히 가고오고 가오는 가온의 한복판에 하늘 숨을 탁 찍으라는 것이다.
아래 그림3)은 다석이 그리는 가온찍기다.
다석은 1955년 4월 26일부터 1974년 10월 18일까지 『다석일지(多夕日誌)』를 썼다. 책이 아니라, 날마다 나날 내고 나날 낳고 나날 돋는 생각을 그날그날 쓴 날적이 글이요, 날적이 그림이다. 『다석일지』는 그이가 하늘로 돌아간 뒤에 제자들이 묶었다. 묶어 놓고 보니 날적이 속 글씨가 다 한문이 아니면, 바른 소리 씨알 글꼴이었다. 하늘 여는 깊은 소리 하늘아(․)가 콕 박힌 글씨들은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읽기조차 쉽지 않았다.
다석이 그리고 쓴 가온찍기 글꼴. 하늘땅(ㄱㄴ)이 서로 내리 오르는 가운데에 하늘 여는 깊은 소리 하늘아를 콕 찍었다. 우주가 가없이 크게 숨 돌리는 소용돌이 한 긋(點)이다. 그이는 “가온찍기의 한 긋만이 진실한 점(點)이다. 이 점에서 착한 선(線)이 나오고 아름다운 면(面)이 나오고 거룩한 체(體)가 생긴다.”고 했다. 그이는 씨알 글씨가 살아있는 글꼴이라고 생각했다.
가온찍기 글꼴은 감은사(感恩寺) 태극무늬에서 첫 꼴을 살필 수 있다. 감은사는 신라 682년에 섰다. 1959년 1차 발굴 때는 동편이, 1979년 2차 발굴 때는 서편이 발굴되었다. 서편에 태극무늬와 삼각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이 태극무늬는 송나라 사람 염계 주돈이(濂溪 周敦頤, 1017~1073)가 『태극도설(太極圖說)』에 그린 것보다 388년이 앞섰다.
나선은하는 우주의 생명운동이 볼텍스(Vortex) 소용돌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가온찍기는, 무늬로 말하면 세큰극(三太極)의 태극무늬요, 움직임 꼴은 우주가 돌아가는 소용돌이 같은 것이다. 다석이 남긴 씨알 글씨를 살필 때는 반드시 ‘살아 움직이는 글꼴의 산 뜻’으로 풀어야 뚫린다. 글씨 하나하나가 살알(細胞)이요, 산알(生靈)이기 때문이다.
아래 그림4)는 다석의 가온찍기가 삼태극, 감은사 태극무늬, 우주의 볼텍스 운동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니은, 하늘 그리워 받듦
니은은 땅이 하늘 그리워 오르는 ⬑ 꼴로 ‘ㄴ’이다. 다석은 ‘니은은 기윽을 높인다.’고 했다. 그것은 땅이 하늘을 그리워해 높이는 것이기도 하고, 기윽이 내려주는 것을 니은이 거스르지 않고 받드는 것이기도 하다. 기윽은 하늘이요, 니은은 땅이다. 땅이 하늘을 받는다. 이 세상의 잘몬(萬物)은 다 땅으로부터 그 사랑에 힘입어 태어난다. 숨 돌리며 온갖 짓됨을 바꾸어 펼치는 ‘해숨’(易)에 이르기를 땅은 다함이 없다고 하였다.
옛조선(古朝鮮)의 온씨알(百姓)들은 하늘땅이 돌아가며 뒤바꾸는 ‘해숨’을 살펴서 여름질(農事)에 힘썼다. ‘해숨’은 하늘 건(乾)의 네 가지 올 바탕으로 으뜸․열림․거뜬․곧음(元亨利貞)을 말한다. 여기에 여름질의 한 다스림이 있다.
⋅으뜸(元)은 잘몬의 비롯(始)으로 봄(春)에 속하고 언(仁)이며 새(東).
⋅열림(亨)은 잘몬이 자람(長)으로 여름(夏)에 속하고 차림(禮)이며 마(南).
⋅거뜬(利)은 잘몬의 이름(遂)으로 가을(秋)에 속하고 옳(義)이며 갈(西).
⋅곧음(貞)은 잘몬의 이룸(成)으로 겨울(冬)에 속하고 슬기(智)이며 노(北).
학산도 『훈민정음의 구조원리-그 역학적 연구』에서 기윽(ㄱ)이 무엇인가를 위에서 내려주는 것이라면 니은(ㄴ)은 그것을 순히 받드는 뜻을 나타낸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하늘을 받드는 땅이요, 하늘걸림(乾卦)의 네 가지 속알(德) 가운에 열림(亨)에 들어맞는다고 보았다. 그 까닭은 으뜸(元)에서 내려준 ‘언(仁)’을 열림(亨)에서 잘 차리어(禮) 올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우리말에 나다(生), 날다(飛), 너끈하다, 넓다, 녹다, 느리다 등의 말이 니은으로 시작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라 썼다
사람은 니은을 타고 가야 한다. 다석이 “비행기가 활주로를 굴러가다가 날아오르듯이 사람은 생각으로 추리(推理)하다가 초월하게 된다. 그리하여 영원한 세계로 직입(直入)하여 직관(直觀)하게 된다.”라고 말했듯이 늘 하늘의 얼줄을 붙잡고 날아 올라야 한다. 오죽하면 다석은 “나란 하느님과 얼로 뚫리는 영통(靈通)·내통(內通)한 엉큼한(mahatma)사람이 돼야 한다. 하느님하고는 줄곧 얼이 뚫려야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엉큼하게 된다.”고 했겠는가!
- 우리말 풀이 -
제소리 : 제가 내는 소리. 참 깬 이의 소리를 뜻한다.
있다시 온이 : 여래(如來)의 우리말 풀이다. 다석이 그리 썼다. ‘있’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뜻한다. 온새미로의 존재다.
제계 가온 : 다석이 말하기를 “‘계’는 아버지 계시는 데다. ‘계’는 절대이라 모든 것이 그 속에 다 들어 있다. ‘계’는 내재인지 초월인지 모르는 그 둘이 합한 곳이다. 스승께 얼마 동안 못가뵈어 죄송하다는 생각으로 스승을 찾아가 듯 ‘제계’로 가야 한다.”고 했다. 하나로 돌아가는 일이니, ‘귀일’(歸一)을 뒤에 붙였다.
가온길 : 다석은 ‘중’(中)을 ‘가온데’ 또는 ‘줄곧 뚫림’이라고 말했다. 중도(中道)는 우리말로 ‘가온길’이다.
나없 : 무아(無我)의 우리말 풀이다. 다석은 “완전히 내가 없어져야 참나다. 참나가 우주의 중심이요, 나의 임자다.”라고 말했다. ‘없’에 들어야 참나가 드러난다.
없 : ‘없음’이 아니라 그냥 ‘없’(無)이라고 해야 한다.
오래 : 문(門)의 우리말이다. 조선시대까지 썼다. 지금은 제주에 ‘올레’로 남아 있다.
오늘 : 다석은 ‘오! 늘~’로 풀었다. 다석은 “하루하루가 다 영원한 이제다. 오늘이 늘이다. 하루가 영원이란 말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생사를 ‘깨․끝’(覺․終)이라고 한다. 깨어 시작하고 끝내어 마치기 때문이다. 인생은 언제나 ‘깨끝’해야 한다. ‘깨끝’은 나와 남이 없다.”고 했다.
언 : 인(仁)의 우리말 풀이다. ‘어짊’을 ‘언’으로 푼 것이다.
- 참고문헌 -
류영모 글, 다석학회 엮음, 『다석일지』, 동연, 2024
류영모 말씀, 박영호 엮음, 『씨의 메아리 다석어록: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 홍익재, 1993
박영호 엮음, 『다석 류영모 어록: 다석이 남긴 참과 지혜의 말씀』, 두레, 2002
박영호 엮음, 류영모 글, 『다석 류영모 어록: 제나에서 얼나로』, 올리브나무, 2019
박영호 지음, 『다석전기-류영모와 그의 시대』, 교양인, 2012
이정호 지음, 『훈민정음의 구조원리-그 역학적 연구』, 아세아문화사, 1975
편저자 주요한, 『새벽』, 새벽사(발행인 주요한), 1955년 7월호
다비드 르 브르통, 『걷기예찬』, 현대문학, 2002
김성환, 유안, 『회남자-고대 집단지성의 향연』, 살림,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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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석 류영모의 한글철학' 연재를 시작하며
- K-열풍에 못 미치는 한국어 교육
- [다석의 한글철학 ④] ㄹ, 땅하늘이 너울나울 춤춘다
- [다석의 한글철학 ⑤] 하나둘셋에 다사리는 한울이다
- [다석의 한글철학 ⑥] 미음(ㅁ), 처음이 비롯하는 ‘맨’이다
- [다석의 한글철학 ⑦] 비읍(ㅂ), 바닥에 비롯하는 하늘
- [다석의 한글철학 ⑧] 시읏(ㅅ), 뚝 떠 솟구치다
- [다석의 한글철학 ⑨] 치읓(ㅊ), 참에 홀로 깨어나!
- ⑩ 이응(ㅇ), 한 둥긂의 ‘없’이다
- [다석의 한글철학⑪] 히읗(ㅎ), 홀로 솟은 길
- [다석의 한글철학 ⑫] 아오(⋅), 하늘이 열리다
- [다석의 한글철학 ⑬] 피돌기에 숨 돌리는 ‘밝숨’(內丹) 닦기
- [다석의 한글철학 ⑭] 세상을 짚고 일어설 발
- [다석의 한글철학 ⑮] 으(ㅡ), 숨 돌리는 땅
- [다석의 한글철학 ⑯] 맨첨에, 긋 끝 나 말씀
- [다석의 한글철학 ⑰] ‘함께’는 없에 돌아가는 얽힘
- [다석의 한글철학 ⑱] 큰 슬기 졔 건넴 ᄆᆞᆷ줄, 반야심경
- [다석의 한글철학 ⑲] 너나 없 비롯, 하나둘셋
- [다석의 한글철학 ⑳] ᄒᆞᆫᄋᆞᆯ 댛일쪽 실줄, 천부경
- [다석의 한글철학 ㉑] 참에, 하! 늘 ‘나라’ 다!
- [다석의 한글철학 ㉒] ‘ᄋᆞᆷ’에 ‘ᄀᆞᆷ’이요, 곰에 검(神)이다
- [다석의 한글철학 ㉓] 태극도설(太極圖說) 한글풀이
- [다석의 한글철학 ㉔] 크다, 바뀜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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