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찾고자 하거던 문을 두드리시오.”
류영모가 집 대문에 붙여 놓은 말이다.|
“그는 어제를 사는 것도 아니고 오늘을 사는 것도 아니고 내일을 사는 것도 아니다. 그는 하루를 산 것 뿐이다. ”
- 김흥호, 「유영모 선생님」에서
치읓(ㅊ)을 첫소리로 가진 ‘참’ 글꼴 하나를 풀어 밝힌다.
다석은 오직 ‘참’ 하나를 꿍꿍했다. 낮낮은 자리로 깊숙이 파고든 꿍꿍(想像). 그 꿍꿍이에 숨길 닿은 빛샘 하나가 높높이 솟구쳤다. 미리내 맑은 참의 빛샘이다. 샘 솟는 말숨이 빛 소나기로 쏟아졌다. 숨이 올발라 ‘말슴’(言立)되니 깨끗하다. 깨어난 자리에 산알 빛 맴도는 ‘끗’(極)이다. 그야말로 까마득하게 빙빙빙 빟 돌아가는 ‘깨끗’이다. 아득히 감아 돌아가는 빛(玄)이요, 깊고 그윽하게 멀어지는 빛(幽)이다. ‘참올’(眞理)에 흩날리는 빛이랄까!
씨앗이 ‘씨’ 깨고 ‘앗’(•) 틔운다. 움 솟나니 텅 비었다. 그 자리에 ‘참’이다. 뿌리 알에 푸른 싹 웋이면 씨는 온데간데없다. 껍데기도 남지 않는다. 쑥쑥 자라고 크면서 껍질과 제 어린 싹까지 야금야금 먹어치운다. 저가 저를 먹고 자라니, ‘있없’(有無) 한꼴(一心)이다. 늘 ‘앞꼴’(以心)은 ‘뒷꼴’(傳心)의 산 먹이다. 꼴은 나날이 죽고 산다. 앗은 나죽지 않는다. 앗은 본디 있는 그대로의 숨이요, 빛이요, 힘이다. 나날이 뒤바뀌는 꼴짓에 숨빛 틔우는 ‘앗숨’이 그대로 낼 뿐이다. 열매가 영글어 뚝 떨어질 때 다시 ‘앗’ 씨알이다.
본디, 씨·껍질·껍데기·꼴은 날마다 나죽는다.
나죽으니 몸이 성하다.
본디, 알·앗·숨·빛은 늘 살아서 이어 잇는다.
나죽지 않고 이으니 맘이 놓인다.
나날이 죽고 살아야 있는 그대로의 스스로가 예 솟는다.
꺼지지 않는 바탈(天性) 불꽃이 환하다.
사람들은 씨·껍질·껍데기·제 꼴값에 목맨다.
구린내가 진동한다.
사람들은 알·앗·숨·빛 따위 눈 안에 없다.
먼지로 뒤범벅이다.
제 몸뚱이에 끈질겨서 가만있지 못하고 나뒹군다.
천근만근이다.
예수를 파보라. 시원하게 텅 비었으리라. 붓다를 파보라. 반짝이는 빛구슬이리라. 예수붓다의 자리에 흙 묻은 씨앗은커녕 뿌리도 꼴도 하나 없다. 그들은 빛의 씨앗이요, 빛숨의 나무요, 스스로 힘솟는 ‘참’이다. 없이 계시니, 결코 나죽지 않는다. 노자 늙은이(老子)는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게 ‘목숨’이라 했다. 그 숨이 앗이요, 참이다. 씨 깨고 앗 틔워야 거듭나서 숨 돌린다. 그저 산알의 텅 빈 자리에 빛구슬이다. 반짝반짝 흐르는 미리내(龍川:은하수)다.
학산 이정호는 『주역정의-그 정역적 의의』(아세아문화사, 1980)에서 용(龍)이란 한자의 오른쪽 부수를 “뿔달린 역(易)”이라면서, “그러므로 용(龍)은 다름 아닌 역(易)이요, 역(易)은 변화(變化)를 맡은 용(龍)인 동시(同時)에 변화(變化)를 나타내는 일월(日月)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월위역(日月爲易)이라고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붓다는 빛숨이니, 곧 빛이요, 미르다. 용(龍)의 꼴은 빛숨을 입은 껍데기일 뿐이다. 예수붓다는 꼴짓에 있지 않다. 그 속알 빛이 예수붓다다. 영글고 영글어 ‘꽃내’(香氣)나는 말숨으로 ‘앗’ 틔우는 여름지기(農夫)다.
숨 하나를 ‘늘삶’으로 이어이어야 나날이 ‘참’ 솟으리라. 늘 바뀌고 달라지는 변화무쌍의 스스로 그러함이 본디 그대로 얼·숨·김(氣)의 하늘바탈(天性) 길이다. 길이 본받은 제절로의 ‘늘길’(常道)은 언제나 변화무쌍을 멈추지 않는다. 변화무쌍이야말로 변화무쌍하지 않는 길의 ‘참바탈’(眞性)이다. 바로 이 변화무쌍이 불변(不變)의 ‘참올’(眞理)이란 이야기! 쉬지 않고 늘 바뀌어 달라지니 텅 비어 ‘있없’(有無) 하나로 빙그레 솟는 ‘오늘’이다. 오늘이 가없고 밑 없는 한늘의 ‘푹늘’(襲常)이다. 용(龍)의 빛 비늘로 지은 집집 우주 고치 속 ‘숨빛’ 가득한 오늘이랄까. 오늘 하루에 늘로 ‘참’이 깨, 끗(極)으로 솟은 자리, 깨․끗․이!
다석이 묻는다. “예수는 어디 있어. 내 마음 속에 있지. 석가모니는 어디 있어. 내 마음 속에 있지. 도덕은 어디 있어. 내 마음 속에 있지. 인격은 어디 있어. 내 마음 속에 있지. 정치는 어디 있어. 내 마음 속에 있지.”(『다석일지』제4권, 동연, 618쪽)라고. 이때 그이가 말하는 마음은 ‘ᄆᆞᆷ’이라는 글꼴이다. 그이는 ‘맘’과 ‘ᄆᆞᆷ’을 가려서 써야 한다고 했다. 가온(中)에 솟구친 얼숨은 끝끝내 그 자리를 지킨다.
예수가 말하기를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가 12:49), “아마도 사람들이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리라. 그들은 내가 이 땅에 불과 칼과 전쟁이라는 분쟁을 주러 왔음을 모르도다. 이는 한 집에 다섯이 있음이니, 셋은 둘을 대적하겠고 둘은 셋을 대적하며 아버지는 아들을 또 아들은 아버지를 대적하리라. 그러고서 그들은 홀로 되리라.”(도마 16)라고 외쳤다. 왜 칼이요, 불이요, 전쟁일까? 세상은 잘난 꼴 드러내는 ‘제뵘이’, 저만 옳다는 ‘제옳건이’, 저만 보라는 ‘제봐란이’, 제 짓만 자랑하는 ‘제자랑이’들로 우글거리기 때문이다.
‘씻어난이’(聖人)는 제 넘침을 버리고, 제 늘림을 버리고, 제 넉넉(큼)을 버린다. 넘침은 너무 지나침이요, 늘림은 쓸몬(財貨) 자랑질이요, 넉넉은 잘난 건방짐이다. 스스로 내리고 버리고 잃으니 저절로 텅 비워져 ‘참’이다. 하고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싹 다 버리고 비워서 맑고 시원해지는 ‘참’이다. ‘씻어난이’의 씻어남은 그래서 거룩한 나날로 거듭나는 삶이다.
‘참’은 다석에게 오롯한 ‘하나’(一)요, 땅하늘이 한꼴로 치솟는 ‘올’(理)이요, 저절로 생각나는 ‘숨’(氣)이다. 언젠가 다석은 ‘말슴’ 좇아 집으로 찾아온 제자 박영호에게 “생각이 납니까?”라고 물었다. ‘저절로 생각이 솟느냐.’고 물은 것이다. 박영호는 순간 어리둥절했으나 무슨 말인지 파악하고 “선생님 강의를 들으면 생각이 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스승은 “그러면 됐습니다.”라고 받았다. 생각은 억지로 나지 않는다. 일부러 시켜서도 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내서도 안 된다. 저절로 나야 한다. 그래야 참이 솟아 오른다. 참을 찾아 예는 길은 그래서 늘 이제 여기로 가오는 가온(中)에 뚫리는 길이다.
제자 김흥호는 “선생님은 누구보다도 참을 좋아했다.”라고 하면서 ‘참 찾아 예는 길’를 알린다. 다석이 낸 ‘참’의 말숨은 이렇다.
참 찾아 예는 길에 한참 두참 쉬잘 참가
참참이 참아 깨 새 하늘끝 참 밝힐거니
참든 맘 찬 뵌 한아침 사뭇찬 참 찾으리.
-『다석일지』제4권, 동연, 643쪽.
김흥호는 “언제나 가볍게 걸으시는 선생님 그리고 주무실 때는 우주의 기운을 통째로 몰아다 마시는 것 같은 선생님, 선생님은 가끔 성신을 숨님이라고 한다. 우리는 선생님 자신이 숨님인 것 같다. 숨어서 말숨 쉬는 숨님, 이것이 선생님을 제일 잘 표현했을 지도 모른다.”(『다석일지』제4권, 동연, 673쪽)라고 했다. 시는 이렇게 풀었다. “인생은 한참 두참 쉬는 참 없이는 참 삶을 이룩할 수가 없다”라면서 “탈바꿈을 할 때마다 언제나 불안이 따르고 위험이 따른다. 정말 참참이 참고 견디고 아프고 고단하고 어려운 고비를 참아 넘기지 않으면 정말 깨닫고 정말 새 사람이 되는 하늘의 영광은 참 밝힐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런 뒤에 “찬 비 한 아침 사무친 참을 찾은 이만이 참을 삼키고 참이 되리니 이런 사람만이 진리를 깨닫고 생명의 충만으로 넘쳐 사무치게 될 것이다. 선생님은 언제나 생명에 넘쳐흘렀다. 누구든지 선생님을 본 사람은 ‘참사람이다’라는 인상을 받았다.”라고 밝힌다.
다석의 시는 여러 갈래로 풀릴 수 있다. ‘예는 길’의 ‘예다’는 ‘가다’를 예스럽게 이르는 말이니, ‘가는 길’을 뜻한다. ‘누비다’의 뜻도 있다. ‘예’는 ‘여기’다. 그러니 ‘예는 길’은 여기로 난 길이다. ‘한참’은 ‘꽤 오랫동안’의 뜻. ‘큰참’(大眞)으로 풀 수도 있다. 세 번째 줄의 ‘뵌’은 내가 보는 ‘봄’이 아니라 그냥 보여서 보이는 ‘봄’으로 풀어야 알맞다. 참이 든 참든 맘은 ‘ᄆᆞᆷ’이다. 가득 찼으니, 저절로 드러나는 ‘뵘’이다. 그렇게 뵈는 ‘한아침’은 큰 처음이요, 크게 솟은 아침이다. 바로 그 자리에 사뭇찬 참이 있다. 우리말 ‘사뭇’은 “거리낌 없이 마구”와 “내내 끝까지”의 뜻을 가지니, 큰 처음의 자리에 그러니까 크게 솟는 자리에 거리낌 없이 내내 끝까지 차고 넘치는 참이다. 스스로 있는 참, 그 참을 찾아야 하리라.
학산 이정호가 밝힌 치읓(ㅊ)의 역학적 의의(意義)는 이렇다. “ㅈ이 머무는 듯 주춤거려 지회(遲回) 반환(盤桓)하는 생명의 수난(受難)이라면 ㅊ은 그 고난(苦難)을 통쾌하게 이겨내고 쾌재(快哉)를 부르며 하늘길을 향하여 맥진(驀進)하는 대축괘(大畜卦) 상구효(上九爻)의 ‘하늘길을 메었으니 도(道)가 크게 행함’을 상기시키는 상(象)이라 하겠다. 세상에서는 흔히 뜻만 있으면 일이 마침내 이뤄진다고 한다. 그러나 이 새 생명이 처해 있는 환경은 뜻과 같이 그렇게 순평(順平)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비바람 몰아치는 추위와 더위, 우레와 번개치는 장마와 가뭄 같은 견디기 어려운 역경(逆境)이 있는 것이다. 이 역경을 ‘강건(剛健)하고 독실(篤實)하고 빛이 나서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하는’ 반환자(盤桓者)의 정지(正志)로 힘차게 뚫고 나간다면 내종(乃綜)에는 ‘하늘길을 메었다!’는 승리의 고함(高喊)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역(易)은 수(數)를 거스리는 것이라’고도 하고 또 ‘역(易)은 거스려 자라니 거스리기를 다하면 돌이키는 법이라고’도 한 것이다. 우리말에 차다(滿) 참(眞) 쳐든다 치솟다 등이 다 ㅊ으로 시작되는 사실은 신기(神奇)한 일이다.”
다석은 YMCA 연경반 강의를 하다가 종종 ‘없’(舞)에 들기도 했다. 그이의 말숨은 늘 한 꼴로 열린 한늘(宇宙)의 ‘길’(道)이요, 텅 빈 빈탕의 ‘없’(無)이었으니까. 제자 박영호는 ‘다석 류영모의 YMCA 연경반 35년’을 이렇게 기억한다.
“강의에서는 선생의 해박한 지식과 독창적인 생각, 그리고 오랫동안 쌓은 경험이 조화를 이루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영감이 샘솟아 신명이 나면 자작한 시조나 한시에 가락을 붙여서 노래처럼 읊었다. 때로는 맹자(孟子)의 말처럼 수지무지족지도지(手之舞之足之蹈之)하여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기도 하였다.”
참(眞)에 올(理)이 바로 서야 올바르다. 올이 바로설 때는 춤이 저절로다. 다스림이 올바르니 참이다. ‘홀로’(하나)에 ‘서로’(셋)가 소용돌이로 치솟는 올이요, 춤이다. 용오름으로 휘돌아가는 가온(中)의 올은 텅 비었다. 텅 비어서 짱짱하게 차고 넘치는 참(滿)이다. 가없이 둥그레지는 한 둥긂(一圓:弓弓)이랄까. 노자 늙은이가 “하늘길(天道)은 그 활 벌리는 것 같을까!”(77월)라고 했듯이 참올(眞理)은 빈탕을 크게 벌린 ‘하늘길’이다.
활 시위를 부려 놓으면 ‘부린 활’(弛弓)이요, 궁대에 넣어 두었다가 꺼내서 시위를 고자에 걸면 ‘얹은 활’(張弓)이다. 시위 거는 걸 ‘활을 얹는다.’라고 한다. 그이는 부린 활을 꺼내 활 끝의 위는 누르고 아래를 들어 시위 거는 그 ‘얹음’에 하늘길(天道)이 있다고 말했다. 시위는 바르르 춤을 춘다. 높은 것은 누르고 낮인 것은 들어야 ‘하늘길’이다.
하늘길은 그 활(弓)이요, 그 활에 궁궁(弓弓)이다. 길 나니 하나요, 하나 나니 둘이다. 시위 거는 길에 하나다. 그 하나에 한 둥긂이 바로 선다(影動天心月). 그늘(陰)에 볕(陽)이 서고, 볕에 그늘이 서듯! 땅하늘의 ‘흰그늘’이다. 흰그늘(日影)에 산알 숨이 솟는다. 둘 나니 셋이요, 셋 나니 잘몬(萬物)이다. 잘몬 그늘을 지고, 볕을 품에 안는다. 활 뒤를 앞으로 당겨 품에 안는다. 두 활(弓弓)이 ‘맞둘’로 한 둥긂이다. 가온에 빈 뚫린 둥긂이다. 비어 뚫린 ‘온숨’(正易)으로 고르다.
뒷하늘(後天)을 여기로 당겨야 앞하늘(先天)이 지금이다. 앞글에서도 한 번 살폈었다.
궁궁은 없극(無極)으로 한 둥긂(一圓)이다. 가없는 둥긂에 움쑥불쑥 돎(乙乙)이 곧 큰극(太極)이니 좋음이 한 둥긂에 있다(利在弓弓). 한 둥긂에 속알 돌리는 가온찍기가 올발라야 좋다. 땅구슬 지구에 불숨이 돌고 돌아야 좋지 아니한가. 네녘(四方)을 품에 안고 열녘(十方)으로 돌아가는 불숨(變易之理). 씨알이 불숨을 틔워야 ‘늘’이다.
활 벌림은 빈탕(虛空)을 크게 벌리는 일이다.
집집 우주가 짱짱하게 숨 돌려 돌아가는 길이다. 궁궁을 이룬 자리는 때빔(時空)이 하나로 뛰넘는 자리다. 그 자리가 ‘늘’이다. 하나 가득 밀고 썰되 다함없이 되는 세웃이 솟는다(一積十鉅無匱化三). 노자 늙은이 53월에 “큰 길(大道)이 너무도 맨(夷)”이라 했다. 이(夷)는 동이(東夷)다. 이(夷)는 또 큰 활이니 그로부터 궁궁을을의 비롯이다. 이(夷)에 궁궁을을이요, 궁궁을을에서 무름(弱)이다. 부드럽고 무른 것이 굳셈을 이긴다(柔弱勝剛强).
큰바람(颱風)의 눈은 우주가 돌아가는 소용돌이(vortex) 길이다. 그 소용돌이 길이 몸에 올발라야 몸이 성하고, 맘에 올발라야 맘이 놓이고, 얼에 올발라야 ‘얼빛’이 치솟는다. ‘얼빛’이 참이다.
나(我)는 먼저 나(吾)로 깨어야 한다. 나(吾)는 나(我)를 벗어야(喪) 한다. ‘나없나(吾喪我)’로 거듭나야 한다. ‘온뿌리제꼴’(本來面目)로 하늘의 얼줄을 받아 태어난 이가 첫 사람의 나(吾)다. 하늘 받아 하나로 하시는 바탈(本性:天性)이 참으로 맑고 맑은 빈탕이다. 그 ‘나’는 흐르는 물 같아서 ‘썩잘’(上善)이다. “썩잘은 물과 같다(上善若水)”고 하지 않았던가. 물은 스스로 저절로 있는 그대로 움직일 뿐 어떠한 의식도 분별심도 갖지 않는다.
‘하고잡’(欲望)에 사로잡힌 제나가 문제다. 다석은 “이 상(常)놈. 심상(尋常)하게도 무상(無常)한 물신(物神). 이상(異常)하게도 비상(非常)한 정신(精神)”이라 했다. ‘늘(常)’은 스스로 저절로 있는 그대로의 ‘함없(無爲)’이다. ‘한다’는 의식이 없는 ‘하지 않음의 함’이 늘이다. 하되, 함의 마음을 두지 않아야, 함이 자유롭다.
심상은 보잘 것 없음이요, 무상은 덧없음이다. 그러니 물신은 덧없고 보잘 것도 없다. 이상은 보통이 아니요, 비상은 예사롭지 않으니 정신이란 늘 예사롭지 않아야 한다. 참의 얼나로 환하게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다.
참의 마루에 서야 빈탕이 잡힌다. 첫극 막극 없이 돌아가는 마루는 시작도 끝도 없어서 나날이 ‘극’(極)이다. 이어이어 예 여기로 닿는 ‘없꼭대기’(無極)이다. 말씀의 얼줄이 오르내리는 마음 한 가운데 가온찍기 한 점의 ‘없이 계시는 얼’이다. 어안이 올바로 똑바로 서야 얼줄이 잡힌다. 얼줄 끊어져 얼빠지면 혼줄 난다. 자칫하면 혼줄도 끊긴다. 도무지 돌파구가 없다. 참의 고갯마루에 하늘 바라고 곧이 서야 한다.
곧이 곧장 넘는 몸은 비우고 비워야 가볍다. ‘참나’(大我:眞我)로 넘는 고개는 ‘제나’(小我)를 벗어야 시원하다. ‘제나’로는 결코 넘지 못하는 것이 참의 얼 고개다. 얼 마루는 빈탕의 ‘없꼭대기’라 참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곤두 설 수 없다. 참을 이룬 얼빛의 오롯한 하나 하실 님이 계 계셔 이루고 내신다. 다석 류영모는 “계 섬김을 기대어 비오니, 나들이 제계 듦”으로 기도했다. ‘계’와 ‘제계’는 하늘이요, 피안(彼岸)이다.
나(吾)로 일을 이뤄야 ‘참나’(진我)가 되고 나들이 할 수 있다. 일 이룬 참의 나는 스스로 저절로 흐르니 ‘함없 함’(爲無爲)으로 늘 늘 늘이다. 하루하루, 오! 늘살이로 깨어 곧이 딛고 닿는 깨달이의 오롯한 으뜸의 삶이다.
다석 류영모가 바꾼 우리말 뜻을 꿍꿍하다 보면, 불현 듯 알아 차려지는 일들이 솟아나곤 한다. ‘있다시 온’과 ‘옛다시 가온’도 그렇다.
‘있다시 온’은 불교의 ‘여래(如來)’를 바꾼 것이고, ‘옛다시 가온’은 ‘선서(善逝)’를 바꾼 것이다.
부처를 부르는 열 가지 이름이 있다.
여래(如來), 응공(應供), 정변지(正遍知), 명행족(明行足), 선서(善逝), 세간해(世間解), 무상사(無上士), 조어장부(調御丈夫), 천인사(天人師), 불세존(佛世尊)이 그것이다.
그 중 ‘여래’와 ‘선서’를 우리말로 바꾼 것.
왜 ‘있다시 온’과 ‘옛다시 가온’으로 바꾸었을까?
다석 류영모로부터 ‘마침보람’(卒業狀)을 받은 박영호는 『다석전기-류영모와 그의 시대』(2012, 교양인)를 펴냈다. 다석 류영모를 이해하는데 이만한 책이 없다. 이 책 513쪽에 이런 글이 있다.
“‘옛다시 가온’이란 석가의 10개의 존칭 가운데 하나인 ‘잘 간다’는 뜻의 ‘선서(善逝)’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여래(如來)를 ‘있다시 온’이라 하였다. ‘있다시 온’은 하늘에 있는 본디의 나가 그대로 왔다는 뜻이다. ‘옛다시 가온’은 예(여기)의 것을 다 잘 여의고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여래(如來)는 ‘여실히 오는 자’ 또는 ‘진여에서 오는 자’를 뜻한다.
산스크리트어 따타가따(tathāgata)를 뜻글로 바꾼 것이다.
그런데, 본디 그 나랏말을 따라가면,
따타(아) 가따(tathā+gata)로 보느냐,
따타 아가따(tathā+āgata)로 보느냐, 에 따라 뜻이 다르다.
따타아(tatha-)는 ‘여시(如是)’ 또는 ‘여실’(如實)로 바꾸었다.
여시․여실은 우리말로 ‘있는 그대로의 꼴’을 뜻한다.
따타(tatha)는 ‘진실’(眞實)로 바꾸었다.
진실은 우리말로 ‘참 올바르다’는 뜻이다.
가따(gata)는 ‘가다[逝]’는 뜻이고,
아가따(agata)는 ‘다다르다’, ‘오다’라는 뜻이다.
불교에서는,
따타(아) 가따
따타 아가따
이 두 말의 뜻이 여래(如來)에 다 들어있다고 본다.
여(如)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眞如), 진리 그 자체’를 뜻한다.
‘여(如)로부터 온다’는, 따타 아가따 ⇒ 따타아가따
‘여(如)에로 간다’는, 따타(아) 가따 ⇒ 따타가따
여래(如來)에 다 있다.
여(如)는 ‘참’(眞)이다.
깨달은 이 곧 ‘참사람’(眞人)으로
때 낀 적 없는 ‘있’(存在)이다.
그 맑고 순수한 ‘있’이 이제 여기 다시 오시니
여래(如來)를 ‘있다시 온’으로 푼 것이다.
‘따타아가따’는 ‘있다시 온’이다.
여기를 줄여 ‘예’라 한다.
‘지금 여기’라 말해보라. 말을 내뱉는 그 틈에
곧장 ‘옛’이 되어버린다. 지나가 버렸잖은가.
선서(善逝)는 ‘잘 간다’는 뜻이니
‘옛다시 가온’으로 푼 것이다.
‘따타가따’는 ‘옛다시 가온’이다.
지금 여기 이 자리
‘늘’이라는 이 자리는
‘있다시 온’으로 오시고
‘옛다시 가온’으로 돌아가시는
가고 가고 오고 오는
가온찍이>가온찍기>가온찌기
바로 그 자리 ‘긋’이다.
‘있다시 온’에 ‘옛다시 가온’이다.
가고 오는 자리다.
두 뜻은 다른 게 아니다.
한꼴로 한가지다.
우리 모두는 그 틈에 산다.
가고 오는 그 틈에 산다.
그 틈에
오롯한 하나로
숨 틔워야
솟는다.
몸숨도 아니고
맘숨도 아니고
‘얼숨’이다.
이 몸에 ‘얼숨’ 솟아야
참이다.
시원시원하잖은가!
- 참고문헌 -
류영모 글, 다석학회 엮음, 『다석일지』, 동연, 2024
박영호 지음, 『다석전기(류영모와 그의 시대)』, 교양인, 2012
류영모 말씀, 박영호 엮음, 『씨의 메아리 다석어록: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 홍익재, 1993
박영호 엮음, 『다석 류영모 어록: 다석이 남긴 참과 지혜의 말씀』, 두레, 2002
박영호 엮음, 류영모 글, 『다석 류영모 어록: 제나에서 얼나로』, 올리브나무, 2019
이정호 지음, 『훈민정음의 구조원리-그 역학적 연구』, 아세아문화사, 1975
이정호 지음, 『주역정의-그 역학적 의의』, 아세아문화사, 1980
경향신문, “김종길의 다석 늙은이(老子) 읽기”, 2021~202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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