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나니, 하나(道生一).
하나 나니, 둘(一生二).
둘 나니, 셋(二生三).
셋 나니, 잘몬(三生萬物).
- 다석이 한글로 푼 노자 늙은이는 42월(章)
이응에 덧붙이는 뱀발(蛇足)이다. 이응이 된이응이라 불리는 여린히읗을 내고 여린히읗이 히읗을 내는 까닭이다. 학산은 『훈민정음의 구조원리』에서 히읗 제자(制字)의 기원(起源)을 “‘허’(虛)자(字)의 초발성(初發聲)인 ㅎ은 그 소리가 ㆆ보다 거세므로 ㆆ위에 종점(終點)을 더하여 만든 것이니 후음(喉音)이며 ㆆ과 같이 ‘상형이자방고전’(象形而字倣古篆)이다.”라고 하였다. 본디 이 글은 『훈민정음해례본』의 것이다. ‘허’(虛)의 첫소리라고 하였으나, 그 뜻은 ‘빔’이다. 텅 빈 빈탕의 ‘빟’를 뜻한다. 그 뜻에 하늘이 있다.
학산은 이어서 히읗의 역학적 의의(易學的 意義)를 말한다. “ㅇ이 ㆆ에서 약간(若干)의 저항(抵抗)을 받아 그 소리가 막히고 체(滯)하였다가 위아래로 김(聲氣)이 통하는 바람에 그 소리의 기운이 완전히 음질화(音質化)하여 ㅎ으로 되는 것이니, 그 소리는 탄식성(歎息聲) 같기도 하고 감탄사(感歎詞) 같기도 하다. 이것은 마치 ㅅ이 ㅈ의 장애(障礙)를 극복하고 ㅊ으로 뚫고 나가 승리의 개가(凱歌)를 울리는 것과 방불(彷佛)하다 하겠다. 지옥에서 연옥을 거쳐 천국에 도달하면 그 휘황찬란(輝煌燦爛)한 천상의 평화롭고 행복된 광경에 경이(驚異)하고 감탄하여 문득 기성(奇聲)을 발할 것이다. 우리말에 하나 하늘 하다(多ㆍ大) 후유(歎息聲) 등이 다 ㅎ으로 시작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 된다. ㅎ를 병서(竝書)하면 ㆅ이 되니 ‘홍’(洪)자의 초발성이다.”라고 썼다.
하나 하늘 하다
학산이 히읗의 속뜻(意義)을 풀어 말하면서 우리말에 ‘하나 하늘 하다(多ㆍ大)’가 다 히읗으로 시작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생각이 잇달아 줄기를 낸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글쓴이는 『천부경(天符經)』의 첫 글씨가 ‘하나’(一)로 시작되는 것을 떠올렸다. 다석 류영모는 그 ‘하나’를 ‘ᄒᆞ실’로 풀었다. 글월을 만들면, ‘하나 하늘은 하실이다.’라고 할 수 있다.
하나 하늘은 하실이다!
하나는 하늘로 늘 하시니 ‘ᄒᆞ실’이라 한 것이다. ‘ᄒᆞ실’에서 가장 굳게 얽어 잡아야 하는 것은 하늘아 ‘ᄒᆞ’이다. 이 글씨가 ‘하나’를 뜻하고 ‘하늘’을 뜻하며 ‘온통’을 뜻하기 때문이다. 『천부경』의 시작과 끝은 바로 이 ‘ᄒᆞ’에 있다. 히읗에 하늘아(․)가 붙었다. 하늘아는 하늘 숨으로 부를 수 있다. 숨돌리는 ‘아오/오아’이기 때문이다. 『천부경(天符經)』의 글월 몇 개를 빗대어 히읗을 풀어 본다.
․ 첫소리 ‘ㅎ’에 붙은 하늘아 하늘 숨은 ‘ㅎ’을 살아있는 글씨로 한 없이 숨 돌린다.
․ 하늘아 하늘 숨은 첫소리가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뒤흔들어 살아 숨 쉬게 한다. 마치 어미가 아들에게 숨을 불어 넣듯이, 끊임없이, 쉼 없이 숨 돌린다.
․ 수운은 ‘ᄒᆞᄂᆞᆯ님’이라 했다. ‘ᄒᆞ’은 거룩한 검님이시다.
히읗에 하늘아가 붙었으니 쉼 없이 춤추는 하나로 ‘ᄒᆞᄂᆞ’다. ‘ᄂᆞ’는 ‘ᄒᆞ’가 늘 남이다. ‘ᄂᆞ’는 나고 나는 냄이다. 그러므로 ‘ᄂᆞ’는 사랑이다. 하늘 여는 깊은 소리 하늘아가 붙은 글씨는 쉼 없이 숨 쉬며 느릿느릿 춤추는 ‘숨돎’(氣運)이다.
추어 추는 춤 하나로 늘 하시니 우리는 그것을 ‘하늘’이라 부른다. 하늘은 하늘하늘하잖은가. 하늘하늘하여 다 하시는 온통이니 ‘ᄒᆞ실’이라 하는 것이다. 하늘아는, 하늘을 모시고(ㅗ) 하늘을 여는(ㅏ) 소리로 ‘오아’(․) 한소리다. ‘ᄒᆞ실’은 그래서 ‘ᄒᆞᆫ’이다. 가없이 크다는 이야기다. ‘ᄒᆞᆫ’을 보면 아래아가 히읗과 니은 가운데 씨알로 콕 박혀 돌아간다. 그러니 ‘ᄒᆞᆫ’은 크고 크고 또 큰 큼이다. 아주 크고 가장 크다(最大). 밑 없이 끝없이 크다(無窮大). 가없이 큰 그것이 바로 집집 우주다.
ᄒᆞᆫ의 뜻을 더 살펴 보자.
ᄒᆞᆫ은 쪼개질 수 없는 오롯한 하나다(唯一). 가장 높고 가장 크고 끝없이 크며 오롯한 ᄒᆞᄂᆞ이니, 그 이름을 ᄒᆞᄂᆞᆯ님(大一神)이라 했다. ᄒᆞᆫ은 온갖 것들을 하나로 꿰뚫는다(統一會通). 하나에 곧 모든 것들이 있고(一卽多), 모든 것들이 곧 하나에 있다(大卽一). 한 길에 온갖 꼴이요(一途萬象), 온갖 산 것들이 한울이다(萬類一源). 한울로 하늘은(一天) 집집 우주에 있는 온갖 것들의 짓됨을(森羅萬象) 휘두르는 우주관(宇宙觀)이요, 땅구슬 뭇돌․몯돌(地球) 사람들이 하나로 돌아가면서(歸一會通) 대동사회를 꿈꾸는 사상이다.
크고 큰 ᄒᆞᄂᆞ의 사상은 때새(時間)와 빔새(空間)를 하나로 두루 고루 통하게 한다. 때빔(時空)이 한 꼴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ᄒᆞ실은 ᄒᆞᆫ으로 돌아가며 끝없이 숨 돌리는 집집 우주의 ᄒᆞᄂᆞᆯ님이다. 늘 내고 낳고 돋게 하는 창조의 주체이며 언제까지나 그 안팎에 앞뒤로 있으면서 가오는 법이며 산숨이요, 산일름이요, 산알이다. 춤(舞)에 ᄒᆞ실이 있다. 춤추게 하는 무(舞)의 첫 뿌리는 무(無)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춤의 숨은 뜻은 ‘없이 추는 숨빛’에 있다.
『천부경』의 두 번째 글씨는 “너나․없:비롯(始․無:始)”이다. 붙여 쓴 ‘너나’는 ‘너와 나’가 아니라 그냥 ‘너나’다. ‘너’에 ‘나’가 한 꼴이란 이야기다. 바꾸어 말하면 ‘음양’(陰陽)이 한 꼴이다. ‘너나’는 ‘음양’이요, ‘땅하늘’이다. 쪼개진 바 없는 하나로 ‘너나’가 돌아가니 ‘없극에커극’(無極而太極)이다. ‘없극’에 ‘커극’이 움 솟아 돌아가는 뜻이다. 그렇다고 그것은 결코 둘이 아니다.
비 : 텅 빈 ‘비움’이니, 비는 없커극(無太極)이다.
롯 : 움 튼 ‘바람’이니, 롯은 숨돌힘(氣運力)이다.
‘비롯(비로소)’은 내고 낳고 되고 이루는 ‘숨돌힘’이다. 숨 돌리는 힘이란 이야기다. 음양정동의 가운데 자리는 ‘비롯’의 본디 ‘밑몸’(本體)이다. 본디 ‘밑몸=없커극’은 늘 하나 그대로 있으되, 하지 않음이 없는 ‘ᄒᆞ실’의 ‘하는님’(윤노빈)이다. ‘밑몸’을 둘러싸고 음양정동을 이루는 동그라미 세 개가 그려져 있다. 마치 청동거울 뒤의 세 동그라미처럼.
『천부경』의 세 번째 글씨는 “ᄒᆞᆫ 푸리․셋:가장(一析․三:極)”이다. ᄒᆞᆫ은 크고 크고 또 큼이라 했다. 그런데 왜 ‘푸리’(析)일까? 그것은 ‘뿌리+풀이’의 뜻이기 때문이다. ‘석’(析)은 가르고 쪼갠다는 뜻이니 ‘ᄒᆞᆫ 푸리’(一析)은 크고 큰 뿌리가 셋(三)으로 풀렸다는 걸 뜻한다. 크고 크고 또 큰 ᄒᆞᆫ 푸리에 셋이니 ‘세커극’(三太極)이다. ‘긋․끝’도 ‘가장’(極)이라 부른다. ‘가장’은 여럿 가운데 어느 것보다 정도가 높거나 세다는 뜻이다. 가장 높으니 ‘용마루’요, ‘꼭대기’요, ‘끝․긋’인 것이다.
‘없극’에 ‘커극’ 나니, 오롯한 하나일 뿐이다. 길(道)는 텅 비어 돌아가는 ‘없커극’(無太極)이다. 길을 몸에 닦음은 바로 이 ‘없커극’에 이르기 위함이다. 길이 ‘ᄒᆞ실’이요, 길이 ‘ᄒᆞᄂᆞᆯ님’이요, 길이 ‘없커극’이다. 예수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 14:6)라고 말했듯이 ‘나’는 곧 ‘참나’요 ‘얼나’다. 본디 ‘밑몸’으로 존재하는 ‘없커극’이다. 그이를 ‘ᄒᆞᄂᆞᆯ님’이라 부르는 까닭이다.
하나 나니 땅에 숨바람이 일어
민세 안재홍(民世 安在鴻, 1891~1965)은, “한(一)은 ‘일천’(一天)으로 ‘한’이니 ‘한’, 즉 ‘한울’로서 수(數)의 시원(始原)이요, 대세계(大世界)로서의 천(天)이다.”라 했고, “둘(二)은 이지(二地)로 ‘둘’이니 ‘둘’은 즉 ‘들’이다. 현대어에서 ‘들’은 원야(原野)의 뜻이나 고대어에서는 대지를 이른다.”고 했으며, “셋(三)은 ‘삼종’(三種)으로 ‘세’ 혹은 ‘셋’이니, ‘씨’ 혹은 ‘씨앗’ 즉 종자(種子)이다.”라고 했다.
땅에 ‘숨바람’이 이니, ‘세웃’이 솟아 자란다. ‘세웃’은 씨알이요, 사람이다. ‘씨ᄋᆞᆯ’에 ‘ᄉᆞᄅᆞᆷ’이니, 그 사이사이 ‘새’에 땅이 있고 하늘이 있다. ‘하늘땅사람’(天地人)이 한꼴이다. 그 셋이 곧 가장이요, 한꼴이다. 세상에 나올 때 사람은 하늘이 심어 준 바탈(性)․일름(命)․알짬(精)을 ‘밑몸’(本體)으로 받았으니, 그 셋을 ‘참’(眞) 하나로 꿰어 참바탈(眞性)․참일름(眞命)․참알짬(眞精)으로 이어야 한다. 그래야 얼 깨고 캐고 난다.
‘바탈’은 하늘이 심어 내린 ‘마음’이다. 늘 하늘로부터 ‘받아서 할’로 ‘받할’이니 부르는 말로 ‘바탈’이라 한다. ‘바탈’은 나날이 하늘마음 내는 일이다. 우리는 그것을 본성(本性)이라고 한다. 본디 태어날 때부터 갖춘 하늘마음이 ‘ᄆᆞᆷ’이다. 그것을 잃지 않아야 한다. ‘일름’은 하늘이 심어 일러준 ‘목숨’이다. 목숨 줄은 하늘이 이르는 것을 이어받는 얼줄이니 ‘일름’은 나날이 ‘얼숨’ 쉬는 일이다. 하늘로 나날이 ‘얼숨’ 쉬지 않으면 살았어도 제대로 사는 게 아니다. ‘제대로’는 제 ‘얼숨’ 그대로 받아 쉬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천명(天命) 곧 ‘웋일름’이라고도 한다. 그것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알짬’은 하늘이 심어 밝힌 ‘숨빛’이다. 산숨(生氣) 가득한 몸이 춤바람 춤을 추는 신명의 한 가운데에 이것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정수(精髓)라고 한다. 또 정기(精氣)라고도 이른다. 사람만이 아니라 온갖 잘몬(萬物)에 깃들어 숨 돌리는 힘이다. 으뜸 숨이요, 숨빛 힘이요, 곧고 곧은 얼(精神)이다.
바탈(性)은 하늘마음(天一一)이요, 본디부터 갖추어 난 ᄆᆞᆷ(心)이다.
일름(命)은 맞둘목숨(地一二)이요, 제대로 받아 쉬는 얼숨(氣)이다.
알짬(精)은 세웃숨빛(人一三)이요, 숨 돌려 춤추는 씨ᄋᆞᆯ(身)이다.
바탈․일름․알짬을 참(眞)이 소용돌이 돌려 하나로 꼬아야 한다(三眞歸一). 셋이 하나로 돌아가는 자리에 ‘참나’(眞我)가 있다. 그때 비로소 ‘ᄒᆞᄂᆞᆯ’(天) 모심이 솟는다. 홀로 나날이 나 날 내고 되어야 비로소 다 이어진다. 그 홀로에 ‘서로’가 솟아 이어질 때 ‘다시 개벽’이 올 것이다.
홀로에 서로가 솟으니 홀로는 없고 참 하나만 있다!
나날이 나 날 낸 홀로에 서로가 솟는다. 서로가 솟아 서로서로서로 이어진다. ‘서로서/로서로’가 상즉상입(相卽相入)이다. ‘서로서’는 서로를 끊이지 않고 걸림 없이 하나로 일으키니 ‘상즉’(相卽)이요, ‘로서로’는 스스로 저절로 이어 돋아나 결림 없이 하나로 갈마드니 ‘상입’(相入)이다. 홀로가 사라진 자리에 온갖 꽃들이 서로서로서로 그물코를 이룬다. 가지가지 갖가지 꽃으로 꾸민 화엄(華嚴)이 아닌가!
ᄒᆞᆫᄋᆞᆯ 댛일쪽 실줄
옛조선을 세운 환웅은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가지고 왔다. 등걸 임금인 단군은 하늘땅사람 셋의 올 다스림을 위해 『천부경(天符經)』을 남겼다. 다석 류영모는 『다석일지』에 ‘천부경’을 풀어 놓았다. 1963년 12월 21일에 처음 풀었고, 1968년 10월 30일에 풀이를 마쳤다. 6년 동안 여섯 번 풀었다. 다석이 한글로 바꾼 ‘천부경’(天符經) 말머리 풀이는 이렇다.
한늘 어음찍 월(1963.12.21.)
한늘 어음찍 월(1963.12.25.)
ᄒᆞᆫᄋᆞᆯ 댛일쪽 실줄(1964.1.21.)
한늘 어음 찍 월(1964.4.21.22.)
ᄒᆞᄂᆞᆯ 어음 찍 월(1964.4.21.22.)
ᄒᆞᆫᄋᆞᆯ 댛일쪽 실줄(1968.10.30.)
⦁ 하늘 천(天) : 한늘, ᄒᆞᆫᄋᆞᆯ, ᄒᆞᄂᆞᆯ
한늘(大常:宇宙)은 크고 큰 늘을 뜻한다. 우주를 풀어 쓸 때 이렇게 썼다. ᄒᆞᆫᄋᆞᆯ 큰나(大我)는 우주에 가없는 하나요, 우주 밑몸(本體)의 ‘참나’를 뜻한다. ᄒᆞᄂᆞᆯ(一:天)은 수운 최제우의 ᄒᆞᄂᆞᆯ님(天主)이요, 오롯한 하나를 뜻한다.
⦁ 믿음 부(符) : 어음찍, 댛일쪽
옛사람들은 나뭇조각이나 두꺼운 종이에 무늬 또는 글씨를 쓰고 도장(證印)을 찍은 뒤 둘로 쪼개 나누어 가졌다. 잘 두었다가 뒷날에 맞추어 약속의 증거로 삼았던 것이다. 나무나 종이에 쓴 무늬ㆍ글이 약속 어음(契)이요, 그 반은 믿음의 ‘맞쪽’(符信)이다. 둘로 쪼갰을 때 모난 쪽이 ‘어음 수쪽’(右契)이요, 오목한 쪽이 ‘어음 암쪽’(左溪)이다. 빚진 이가 ‘암쪽’을 갖고 빌려준 이가 ‘수쪽’을 갖는다. 천부경의 ‘부’(符)는 앞서 살폈던 어음(契)이요, 믿음의 맞쪽(符信)이다. 다석이 천부경의 ‘부’를 ‘어음찍’이라고 바꾼 이유다. 그러므로 천부경도 ‘어음 암쪽’(左契)일 것이다. 천부경은 사람과의 약속이 아닌 하늘과의 약속이다. 다석이 ‘어음찍’을 하늘에 ‘댛일쪽’이라고 달리 푼 이유다. 하늘이 온씨알(百姓)에게 내려 준 말씀의 실줄(經)이요, 약속의 증거요, 믿음의 맞쪽이란 이야기다. 그걸 꼭 잡고 올라야 한.
⦁ 날실 경(經) : 날실
‘씨줄과 날실’에서 ‘날실’은 베틀에서 위아래로 된 실을 말한다. 사람이 가로로 씨줄을 끼워 넣는다. 다석은 하늘땅 위아래에 날실이 있으니 사람이 씨실로 그 사이를 꿰어야 한다고 보았다. 사람이 곧 씨알인 이유다.
뜻을 하나로 엮어서 꿰면 ‘ᄒᆞᆫᄋᆞᆯ 댛일쪽 실줄’은 이런 뜻이다.
ᄒᆞᄂᆞᆯ 우주 오롯한 참나에
맞 댛일쪽 내린 얼 실줄
“○, 곧 둥근 것은 지름 하나로 세 길이 둘러서 온전함을 쓰되 수가 다함이 없다. 그러므로 하늘을 형상하여 성품의 현묘함을 모양한다. □, 곧 네모진 것은 지름 하나로 네 길이를 둘러서 절반을 쓰되 수가 한정이 있다. 그러므로 땅을 본떠서 목숨의 현묘함을 모양한다. △, 곧 세 뿔은 홑과 짝을 합하여 날카롭고 무딘 것을 갖추며 바르고 빗긴 것을 교착하여 수가 같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사람을 형상하여 정기의 현묘함을 모양한다. 무릇 세 가지 몸은 신(神)의 화공(化工)의 극진한 궤도라, 밝은이가 이로써 삼극(三極:天․地․人)의 묘함을 통하고,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며 변화의 고동을 행하는 것이다.”
(서일, 「진리도설」, 『대종교중광육십년사』, 대종교총본사, 1971, 117쪽. 원문은 한문으로 되어 있다. 가져 온 곳은 김동환, 「극원철학에 나타나는 한국적 사유」, 『선도문화(제8집)』, (국학연구원, 2010), 197쪽.)
한눈 뚫려 솟난이
캄캄한 밤길이다. 똘똘 감겨진 한길이다. 맞붙은 한길에 두 가닥 새끼줄이다. 줄을 꼬아 얽어 맨 자리마다 빛 밝아 오르내린다. 복희․여와(伏羲女媧) 한 꼴이요, 해달(日月)이 한 꼴이요, 용오름이 한 꼴이다. 몸 안팎에 ᄆᆞᆷ이 한길로 한 꼴이니 소용돌이 굽이쳐 가는 길에 젖빛 가람(銀河)이 펼쳐진다. 아, 몸이 한늘(宇宙)이구나!
몸 씨ᄋᆞᆯ에 든 ᄋᆞᆯ이 첫 씨앗 깨 ‘앗’ 틔워 크게 터지니 너나 사라진 몬(物)에 ᄆᆞᆷ이 텅 비어 숨 돌리는 비롯이다. 이제 여기 지금이 숨 쉬며 가없이 돌아가는 저절로 있는 그대로의 한늘이 두둥실 솟는다. ᄆᆞᆷ 뚫린 몸에 눈부신 환캄(恍惚)이 갑작스럽다. 불쑥 움직인 자리에 움쑥 고요한 숨결이 밀썰물이다.
살아 움직이는 없, 굳이 말하면 활동하는 무(無)!
짓고 일으키는 없, 굳이 말하면 창조하는 무(無)!
불현듯, 없이 열린 크고 큰 한눈 하나 동그랗게 훅 뜨더니 두루 고루 우주에 퍼진다. 어디에나 한 눈이다. 때 없고 빔 없다. 온데간데없이 온통 때빔(時空)이요, 때빔 너머요, 때빔 스스로다. 수많은 별빛처럼 반짝이며 들고 난다. 아니 나고 든다. 앞 뫼 뒷 뫼 사이사이 겹겹의 뫼들 속으로 나고 들고 난다. 이 나무 저 나무, 이 바위 저 바위 할 것 없이 속속들이 들어찬 하나 한눈이다. “너나․없:비롯(始․無:始)”이라는 말이 깨달아진다. 한 동아리 몸에 한 동아리 맘이다.
산속은 풋풋한 산알 흙내다. 보드란 흙덩이가 한 아름으로 안겨 품는다. 통나무 속은 시냇물처럼 졸졸졸 솟구쳐 내리는 싱싱한 물내다. 뫼 바위는 아주 느리게, 그러니까 즈믄즈믄 느릿느릿 숨을 내쉰다. 한 숨에 즈믄해(千年)요, 두 숨에 즈믄해다. 온통으로 크게 열린 한눈은 땅구슬(地球) 못돌 안팎을 후다닥 나다닌다. 불덩이 해에 가 닿더니 이제는 주저하지 않고 이 은하 저 은하를 쏜살같이 놀아난다. 아, 까마득하게 트여서 환하다. 나는 나고 들고 또 나는 사이 없어 아찔하다.
몸눈은 깜빡거려도 끝없이 열린 한눈은 결코 깜빡이지 않는다. 때빔이 따로 없어 여기저기거기로 쑥 들어간 한눈은 그 속을 다 알아차린다. 한눈은 제 스스로 재빠르고 저절로 가오는 깊고 높고 드넓고 뻥 뚫린 채 없이 있는 고요한 ‘있없’ 한 꼴이다.
몸눈 지그시 감고 맘 가라앉힌다. 한눈에 몸눈이 조용히 감겨든다. 몸맘얼이 한 덩이로 빛 소용돌이 캄캄에 둥 뚜렷이 떠오른다. 소용돌이 아래 속 깊이 숨 내리고 두루 고루 조용히 돌아가며 솟아오른다. 고루 두루 안팎에 숨이 번진다. 사슴뿔 하나 나지 않는다. 끊어 넘어선 너머 안팎에 한눈이 환하다. 그 한눈에 우주가 한 점으로 쑥 들어가 회돌이 치면서 ‘불숨’을 내뱉는다. ‘불숨’이 일면서 갑자기 온 우주 한늘로 터지는 환빛(靈光)!
비(虛), 비어 빈 빈탕에 비로소 환캄(恍惚)으로 까마득해라.
씨(種), 씨ᄋᆞᆯ 빛 알갱이 아씨땋 가온(中核)으로 홀홀 돌아라.
몬(物), 몬지 티 먼더기 모듬짓 잘몬(萬物)으로 떠 흩어져라.
뚫어 솟난이가 임금(王)이다. 임금은 길과 하늘과 땅을 뚫고 솟구쳤기에 솟난이다. 우리 모두는 하루하루 솟날뚜렷이다. 솟난이는 지금 예 여기서 얼로 솟난 사람이다. 땅하늘에 한늘을 다 열고 열어서 돌아가는 빈탕 마루다. 씨알이 그냥 뭇사람이면, 임금은 그 씨알을 튼 사람이다. 씨알 튼 이는 그러므로 누구나 임금이다. 그런 그가 본받은 것이 땅이요 하늘이요 길이다. 그러니 스스로 저절로 그러함에 한가지일 수밖에.
솟날뚜렷, 솟난이, 씨알 튼 사람, 씨알 튼 속알이 다 하나다. 그 속알에 땅이 솟나고 하늘이 솟나고 길이 솟나서 저절로 열려 돌아가는 됨됨이는 등걸(檀君)이다. 그 우주 등걸의 임금이 올 다스림의 으뜸 마루다. 스스로를 다스리고 하늘에 기도하는 이가 마루다. 기도가 땅하늘을 잇는다. 말씀이 말슴으로 곧이 서서 잇는 꼴이다.
마루도 세상 다 꿰뚫어 훤히 아는 사람이다. 막힘이 없고 열리지 않는 길이 없다. 올 다스림의 길을 깨달았으니 ‘길가진이’다(得道). 길에 ‘한가지한이’다(仙通). 그이가 우주 등걸 마루다. 그이는 속알이 든든해서 가볍지 않다. 까불거리는 따위로 방정맞지도 않다. 하루해를 마치도록 든든한 속알은 떠날 기미조차 없다. 속알 얻은 됨됨이라 하지 않았나. 그이는 여기저기 번쩍번쩍한 구경거리가 있어도 ‘뚝 떠 솟구쳐(燕處)’ 의젓이 지낼 뿐이다. 그러니 그의 삶은 ‘씻어난이’(聖人)의 삶이리라.
속알이 든든하다는 것은 텅 빈 알짬이 가득이라는 말이다. 가없이 빈 것이 속알 알짬이다. 그 알짬은 비었으되 세상없이 무겁다. 무거우니 기우뚱 거리지 않는다. 씻어난 이는 그렇게 홀로 우뚝 곧이 서서 돌아가는 이다. 바로 그곳이 길과 하늘과 땅을 뚫고 솟구친 솟난이의 자리다. 우주 등걸 마루의 자리다. 임금의 자리다. 가벼우면 뿌리 빠지고 방정이면 떨어뜨리는 크고 큰 비움(太虛) 자리다. 그 비움에 큰 숨 하나가 돌아간다. 오롯이 숨 하나가 으뜸이다.
붓다, 여기에, 솟나(秀)!
붓다, 예, 수!
붓다예수!
우주여자 씨알
깨 캐 솟난 이
붓다예수!
가오는 나그네
모든 ‘너들/나들’, 그러니까 한울을 이룬 ‘너나들’은 ‘계’에서 나온 나그네다. 다석 류영모는 그래서 ‘계소리’를 잘 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끊어지면 영영 ‘올’(理․經)을 잡지 못하고 미끄러져 버린다. ‘계소리’ 잡아야 올바른 ‘제소리’를 낼 수 있다.
사람의 얼은 ‘계’에서 나서 다시 ‘계’로 돌아간다. 난 자리(出生地)는 몯돌(地球)이지만 우주 빈탕을 돌면서 돌아가는 그저 한 점(點)에 불과한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다석 류영모는 “죽음이란 어린이가 만삭이 되어 어머니 배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지구는 어머니 배나 마찬가지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람의 몸은 아끼고 아끼다가 흙 된다.”고도 했다. 우리는 빈탕(虛空)을 건너가는 나그네인 것이다. 한 점 한 긋이 곧 사람이다.
불교는 ‘제계’(彼岸)에 가는 길을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라고 했다. 그것의 뜻은 쪼개고 나누는 ‘가름’(分別)과 그것에 쏠려 사로잡히는 ‘매달림’(執着)을 끊어낸 자리에 솟구친 오롯한 ‘슬기’(智慧)를 일컫는다. 슬기로운 삶을 이룬 자리가 곧 피안이요 ‘제계’다. 나날이 익히고 닦아서 다함 없는 끄트머리가 솟은 자리, 그 자리가 끊고 넘어선 궁극(窮極)이요, 완성(完成)이다. 끝끝내 이루어 낸 자리다.
천부경은 그 자리를 ‘무진본’(無盡本)이라 했다. 다함 없는 밑동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세계는 이변계(二邊界)의 상대세계가 아닌가.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다. 미(美)가 있어 추(醜)가 있다. 너와 나는 맞붙은 ‘너나’로 하나가 아니라 갈라진 둘이다. ‘와/과’를 끼워서 갈라야 직성이 풀리는 세상이다. 그 둘의 생각을 하나로 바꾸어야 한다. ‘와/과’를 빼고 붙여야 한다. 모든 게 다 한가지로 한 꼴이라는 걸 알아차려야 한다. 한 씨알로 ‘너나(始)’가 곧 ‘없(無)’에 있어 ‘비롯(始)’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쉼 없이 돌아가는 ‘늘’(常)에는 ‘때빔’(時空)조차 한가지요 한 꼴이다!
몸이 가는 길이 있고, 맘이 가는 길이 있고, 얼이 가는 길이 있다. 한 걸음이 두 걸음에 세 걸음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몸이 가는 길에는 ‘끝’(終)이 있고, 맘이 가는 길에는 ‘깸’(覺)이 있고, 얼이 가는 길에는 ‘큼’(天)이 있다. 몸은 ‘맘얼’(心靈)로 텅 비어야 복이 있다.
예수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태5:3)라 말했고, 장자(莊子)도 심재(心齋) 곧 ‘마음을 굶기라’고 소리쳤다. 심재(心齋)는 마음을 가지런히 하는 것이요, 마음을 굶기는 것을 뜻한다. 내가 나를 장사 지내고(吾喪我), 앉아 잊으라고도 했다(坐忘). 그런데 ‘맘’(心)이 아니라 ‘맘얼’(心靈)이란다. 바로 그것이 몸에 모시는 하늘나라(天國) 아닌가. ‘하늘모심’의 시천주(侍天主)다. 하늘나라는 죽어서 가는 게 아니다. 살아서 산제사로 나날이 모시는 “하! 늘나라”다. 해월 최시형이 말한 향아설위다(向我設位). 내가 참나로 거듭나는 나의 나라!
“예, 이제에 사는 게 삶이지, 이제, 예에 내가 살지 않으면 참삶이 아니다.”
- 다석어록
나날로 거듭남이니 끝에 끄트머리가 가오고, 나날로 거듭남이니 깸에 위아래가 가오고, 나날로 거듭남이니 큼에 집집 우주가 돌아간다. 그런데 끝의 끄트머리에는 코뚜레가 있고, 깸의 위아래에는 숨 돌림이 있고, 큼의 우주에는 콧구멍이 없다. 숨 하나로 오롯이요, 빛 하나로 오롯이요, 힘 하나로 오롯이다. 가오는 나그네는 오롯한 기일원론(氣一元論)이다!
가온데, 그 자리 그대로
노자 늙은이(老子)는 47월(章)을 다석은 이렇게 풀었다.
지게문을 나지 않고 셰상을 알며,
창문을 내다 않보고 하늘길을 볼거니.
그 더멀리 나갈스록.
그 앎이 더 적음.
이래서 씻어난이
가지 않고 앎.
보지 않고 이름.
ᄒᆞ지 않고 됨.
‘나지 않고’는 그냥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나고 든 적이 없어 나지 않는다. 나죽지 않음을 깨우쳐야 한다. 노자 늙은이가 말한 지게문은 방문이요 외짝 문이다. 대문이 아니다. 지게문을 나지 않았으니 문 닫은 방 그대로 콧구멍이 없다. 창문을 내다 안 보고 ‘하늘길(天道)’을 보는 까닭이다. 그러니 가지 않고 알고, 보지 않고 이르며, 하지 않고 되는 것이다. 장자(莊子)가 노자를 이어받았다.
장자(莊子)도 ‘인간세’ 6월(章)에 이렇게 썼다.
瞻彼闋者(첨피결자)
虛室生白(허실생백)
吉祥止止(길상지지)
夫且不止(부차부지)
是之謂坐馳(시지위좌치)
저 문 닫음 바라봄은
빈방에 난 ‘흰(빛)’이요,
좋은 낌새에 그쳐 ‘머묾’이라.
저기 또 머물지 않으면,
이리저리 가는 ‘들썩’이라네.
문 닫은 방에 홀로 솟아 흰(빛)으로 머물러야 참 그대로다(眞性).
있는 그대로 그쳐 머무를 때 방을 둘러싼 벽은 사라지고 우주가 훤히 밝아진다. 그 자리에 솟아 알고, 그 자리에 솟아 이르며, 그 자리에 솟아 되고 된다. 그 자리가 좋은 낌새에 그쳐 머무르는 자리다. 그런데 머물지 않고 그치지 않으면 맘이 제멋대로 앉아 뛰면서(坐馳) 들썩인다.
다석 류영모는 “깨달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염불(念佛)”이요, “앉아 있는 붓다의 모습은 참에 가까운 상”이라 했다. 그러면서 “참선이 그것인데, 앉아서 아주 완전에 들어가려는 것”이니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앉아 배기는 일을 참고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다석어록, 1957)
참나(眞我)는 나죽지 않는다. 나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다. 늘 그대로 오시는 ‘있다시 온(如來)’이다. 다석은 “붓다가 몸으로 났다가 돌아간 것은 중생을 깨닫게 하는 방편”이라고 했다. 나죽지 않는 것이 ‘참나’(佛性:眞我)이니, 몸이 남(出生)을 괴롬(苦)이라 한 것이다. 괴롬은 삶의 쓴맛에서 온다. 몸에 사로잡히면 안 된다.
다석 류영모는 1960년 강연에서 “천상천하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란 형이상하(形而上下)에 나밖에 없단 말이다. 높다는 존(尊)은 존(存)이다. 나는 무식해서 잘 모르지만 요새 철학자들이 말하는 실존(實存)이란 말도 이 나라는 게 정말 참 확실하므로 ‘그저 쉽게 보낼 게 아니다’란 말이어야 한다. 혼자 나서 혼자 죽는데 그 사이에 무슨 짝이 있을 리 없다.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란 함께 수도(修道)하자는 말에 대한 대답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몸으로 날지라도 혼자 나서 혼자 죽는 데 그사이에 무슨 짝이 있으리오.
- 참고문헌 -
류영모 글, 다석학회 엮음, 『다석일지』, 동연, 2024
박영호 지음, 『다석전기(류영모와 그의 시대)』, 교양인, 2012
류영모 말씀, 박영호 엮음, 『씨의 메아리 다석어록: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 홍익재, 1993
박영호 엮음, 『다석 류영모 어록: 다석이 남긴 참과 지혜의 말씀』, 두레, 2002
박영호 엮음, 류영모 글, 『다석 류영모 어록: 제나에서 얼나로』, 올리브나무, 2019
안재홍선집간행위원회, 『민세안재홍선집2』, 지식산업사, 1983
이정호 지음, 『훈민정음의 구조원리-그 역학적 연구』, 아세아문화사, 1975
서일, 「진리도설」, 『대종교중광육십년사』, 대종교총본사, 1971
윤노빈 지음, 『신생철학』, 제일문화사, 1974(증보판은 학민사에서 2003년에 펴냄)
대종교총본사, 『삼일철학-역해종경사부합편』, 개천4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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