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끄트머리며 하나의 점이면서 하나의 끝수이기도 하다. 땅 밑의 싹이 하늘 높이 태양이 그리워서 그그하고 터 나오는 것을 그린 것이 긋이요, 그것이 터 나와서 끄트머리를 드러 낸 것이 끝이요, 끝이 나왔다고 나다.”
- 다석 류영모, 「버들푸름」,『다석일지(4권)』(홍익재,1990), 345쪽.
다석의 한글철학은 닿소리와 홀소리 하나하나가 가진 뜻을 알아야 하고, 둘째는 첫소리·가운뎃소리·끝소리가 만나서 이루는 뜻이다. 예컨대 가온찌기의 오늘살이는 ‘가온찍기’가 먼저다. 찍어야 늘 지키는 ‘지기’가 된다. ‘가온찌기’는 가온을 찍어 지기가 된 글꼴이다. 가온찌기의 글꼴은 ‘ᄀᆞᆫ’이다. 글꼴 풀이는 이렇다.
그이는 “영원한 나의 한 복판을 정확하게 명중시켜 진리의 나를 깨닫는 것이 가온찍기다. 나의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의 긋이 나타난 것이다 기윽(ㄱ)은 니은(ㄴ)을 그리고, 니은(ㄴ)은 기윽(ㄱ)을 높이는데, 그 가온데 한 점을 찍는다. 가온찍기란 영원히 가고가고 영원히 오고 오는 그 한복판을 탁 찍는 것이다. 가온찍기야말로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다.”라고 말했다.
가온찍기란 “나의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의 긋이 나타난 것”이라고 말했다. ‘긋’의 글꼴도 보자. “‘긋’자의 가로 그은 막대기(一)는 세상이다. 가로막대기 밑의 시읏(ㅅ)은 사람이다. 가로막대기 위의 기윽(ㄱ)은 하늘에서 온 얼인데 그 얼이 땅에 부딪혀 생긴 것이 사람이다. 얼이 몸을 쓴 것이 사람이다. 사람의 참나는 얼나다. 이 영원한 생명의 긋이 제긋인데 그것이 참나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긋이다. 이 긋은 제긋이요 이제 긋이다. 이어이어 온 예 긋이다. 이것이 영원에 대하여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긋은 하나이기 때문에 뭐 이러구 저러구가 없다. 모든 것이 이 긋으로부터 시작한다.”라고 힘주었다.
이렇듯 글꼴의 뜻을 밝힐 때는 닿소리와 홀소리 하나하나가 가진 뜻을 풀어야 온뜻을 확연히 밝혀낼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이가 한글철학을 꿍꿍하고 꿰뜷어서 끝끝내 밝히려는 생각의 온통은 무엇일까?
단박에 깨는 것이다. 곧이 곧장 잠에서 화들짝 깨어 일어나는 것이다. 하고픔(欲望)에 사로잡힌 ‘좀나’(小我)를 벗고 우주 밑몸(本體)의 참나인 ‘큰나’(大我)로 솟구치는 것이다. 그이가 “어머니 배에서 나온 것이 내(眞我)가 아니다. 속알(靈)이 나다. 정신(精神)이 나다. 겉사람은 흙 한줌이요, 재(灰) 한줌이다. 그러나 속사람은 한없이 강하고 한없이 크다. 지강지대(至剛至大)하다. 놓아두면 우주에 꽉 차고 움켜잡으면 가슴 세치(三寸)에 들어서는 이것이 호연지기(浩然之氣)의 나다. 이 기(氣)를 가진 내가 기체(氣體)요, 영체(靈體)다. 이 속알(精神)이 자라는 것이 사는 것이다.”[박영호, 『다석사상전집1-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문화일보,1995), 64쪽]라고 말한 까닭이다.
나날이, 하루하루 오늘살이 여기살이 이제살이로 산 까닭도 그렇다. “나는 한 끄트머리며 하나의 점이면서 하나의 끝수”이기 때문에 여기 이제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아무리 넓은 세상이라도 ‘여기’이고 아무리 긴 세상이라도 ‘이제’이며, 이것이 나가는 것의 원점이지 않은가! 그이의 말은 소용돌이다.
“사실 우리 몸이 머무르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의 피는 자꾸 돌고 있으며 우리의 숨으로 태울 것을 죄다 태우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을 실은 지구 또한 굉장한 속도로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 우리의 어제와 오늘은 허공에서 보면 엄청난 차이를 나타낸다. 우리는 순간순간 지나쳐간다. 도대체 머무르는 곳이 어디에 있는가? 영원한 미래와 영원한 과거 사이에 ‘이제여기’가 접촉하고 있을 뿐이다. 과거와 미래의 접촉점을 ‘이제여기’라 한 것이다. 지나가는 한점 그것이 ‘이제여기’인 것이다. 그 한점이 영원이란 미래로 향해 가고 있다. 이렇게 보면 산다는 것은 ‘이제여기’에 당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대단히 훌륭한 발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아무리 넓은 세상이라도 ‘여기’이고 아무리 긴 세상이라도 ‘이제’이다. 가온찍기다. 이것이 나가는 것의 원점이며 ‘나’라는 것의 원점이다.”(『다석어록』)
자, 그런데 내가 없어도 길이 있을까? 아니다. 내가 없으면 결코 길은 없다. 내가 있는 곳에 길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나’ 있는 곳에 길이 있지 나 따로 길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영원히 오고 영원히 가는 길의 한복판을 꿰뚫어야 한다. 그 한복판에 ‘나’가 있기 때문에.
“‘길’이라는 것은 영원히 오고 영원히 가는 길이다. 그런데 그 길은 ‘나’가 가고 오고한다. 내가 자꾸 그 길을 오가면 내가 곧 길이 된다. 이쯤 되면 내가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된다. 예수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했다는데, ‘나’가 간다면 길 따로 나 따로가 있을 리 없다. 내가 없으면 길이 없다. 길이 없다고 내가 못가는 것 아니다. 나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나 따로, 길 따로가 아니다. 예수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한 것은, 나와 길, 나와 진리, 나와 생명이 둘이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나 없으면 진리고 생명이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가 가고 ‘나’가 오는 것이다. 그때 ‘참나’가 된다.”[다석 류영모, 「버들푸름」,『다석일지(4권)』(홍익재,1990), 362쪽]
그래서 다석은 몸성히, 맘놓이, 바탈태우의 삶을 살았다. 한글을 그저 문자(文字)로만 보면 소리글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다석은 한글에 피돌기의 숨돌(氣運)을 불어 넣었다. 본디 그 말이 가진 뜻을 캐고 세종이 지은 옳고 바른 소리(正音)의 뜻을 더했다. 그가 나날이 몸맘얼을 닦아가는 알맞이 삶도 똑같았다. 으뜸 원(元)을 이어 숨바람(氣)을 일으키는 그의 놀라운 뜻풀이를 보라!
“기(氣)는 하늘의 구름을 나타낸 그림이다. 구름이 바람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을 나타낸다. 구름 운(雲)자는 따로 있으니 구름의 움직임을 통해서 구름을 움직이게 하는 바람, 또 바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기(氣)를 나타낸다. ‘二’ 밑에 ‘人’은 사람이 앉아 잇는 모습이다. 사람이 건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元’이다. 충분히 숨쉴 수 있도록 사람이 머리 위에 二(氣)를 이고 있다. 원(元)과 기(氣)는 서로 비슷하다. 그래서 기(氣)는 기지시야(氣之始也)라 한다. 생명은 먼저 기(氣)를 요구한다. 기(氣)는 만물의 생성(生成) 근원이 된다. ‘米’가 없는 ‘气’가 좋다. 쌀을 먹어야 기운이 난다 하여 ‘米’를 붙였다. 성신(聖神)을 나는 형이상(形而上)의 바람으로 본다. 바람이라 ‘气’의 움직임이다. 저 꼭대기에 있는 기가 흘러내려와 통하는 게 도(道)다.”[박영호, 『다석사상전집1-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문화일보,1995), 245쪽]
이번 글월은 앞에서 잠깐 다뤘던 다석의 ‘숨돌림’ 닦아감(修行)을 마저 정리하는 것이다. 글쓴이가 다석의 말과 글을 살펴서 큰 얼개를 잡았다. 그런 뒤에 글쓴이가 직접 숨돌림 수행을 하면서 살을 붙였다. 다석의 숨돌림 수행의 온통은 알 길이 없다. 그이의 숨돌림 수행은 날마다 이른 새벽에 이어졌다. 이러한 나날의 수행이 다석철학의 밑샘(源泉)이었다. 샘솟는 읊이(詩)는 『다석일지』에 고스란히 남았다.
숨
숨에는 여섯 큰 ‘숨돌림’(氣運)이 있다. 첫째는 몸숨(身氣)이요, 둘째는 맘숨(心氣)이요, 셋째는 빛숨(靈氣)이요, 넷째는 시킴숨(命氣)이요, 다섯째는 바탈숨(性氣)이요, 여섯째는 알짬숨(精氣)이다.
첫째 숨에서 셋째 숨은 등줄기를 타고 시원하게 물오르는 싱싱한 물오름 숨이다. 검룡소 샘물이 졸졸졸 흘러서 계곡이 되고 내가 되고 강이 되듯이 오르는 물줄기다. 물숨이 굽이쳐 오를 때마다 시냇물이 내를 이루며 큰 강이 되고 점점 더 크고 넓고 장대하게 흘러 오른다. 크고 큰 강물이 백두산 폭포수로 솟구쳐 올라 하늘못(天池)을 이루듯, 바이칼 호수를 이루듯, 태평양을 이루듯, 은하수를 이루듯 골밑샘((腦下垂體)을 채울 때는 둘레 없이 큰 우주다. 골밑샘은 솔방울샘(松果體)과 어울리며 온 우주의 온통이 되어 솟구친다. 정수리 숫구멍을 뚫고 끝 간 데 없이 치솟는다.
넷째 숨에서 여섯째 숨은 앞이마를 타고 콧구멍으로 들어가 목구멍, 가슴, 그리고 오장육부를 거쳐 배꼽에 이른 뒤, 단전에 가 ‘불숨’의 덩어리가 되는 불내림의 숨이다. 빛숨이 치솟아 하늘 시킴숨으로 은하를 이루며 내릴 때는 헤아릴 수 없는 별무리 빛무리로 쏟아져 내린다. 온 우주의 빛숨을 콧구멍으로 크게 들이쉬어 모시는 일은 아주 기쁨에 찬 일이다. 두 콧구멍으로 들어간 빛숨이 목구멍으로 내려갈 때는 회오리 바람결로 깊숙이 내린다. 가슴샘은 우주 숨바람이 휘돌아가는 밀림이다. 빽빽한 숲에 따듯한 바람이 넘실거린다. 그 바람이 콩팥위샘을 지나 배꼽에 다다를 때는 움쑥에 불쑥하고 불쑥에 움쑥하는 숨돌림이 환하다. 숨돌리는 힘 하나가 벼릿줄 내리듯 줄곧 뚫리며 단전에 가 ‘밝숨’을 돌린다.
오르내림
“옛사람들은 과일이나 곡식의 첫것을 하느님께 드리듯 말의 원초음인 ‘ᄋᆞ(ㆍ)’를 한아님의 이름씨로 바쳤다. 그리하여 ᄋᆞ(ㆍ)님인데 땅의 ‘아’와 구별하기 위해 크다는 뜻의 ‘한’을 붙여 ‘한아님’이라 하게 됐다.”[박영호, 『다석사상전집1-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문화일보,1995), 66쪽]
기윽(ㄱ)의 첫소리는 이응에 싹이 튼, 꼭지 하나가 달린 옛이응 곧 꼭지이응(ㆁ)이다. 꼭지이응은 ‘윽’이라 소리 냈을 것이다. 꼭지이응에 하늘아(ㆍ)를 붙인 ‘ᄋᆞ’가 한아님의 이름씨다. 그 한아님의 이름씨 아이 ‘애’가 바로 참나(眞我)다. ‘애’가 깨나야 깨끗이 솟는다. 깨야 끗이요 끝이다. 그러므로 ‘애’를 깨고 캐는 솟구침이 곧 물오름이다.
“참나는 없이 있는 하나의 긋이요 찰나다. ‘나’라 하는 순간 이미 나는 아니다. 참나는 없이 있는 나다. 그런 나만이 참나라고 할 수 있다. 빛보다 빠른 나만이 참나다. 날마다 새롭고 새로운 나만이 참나다. 참나는 말씀의 나요 성령의 나다.”(1956)
한아님의 이름씨로 온 ‘ᄋᆞ’ 곧 참나의 ‘애’는 말씀의 말숨과 물숨으로 깨어난다. 줄줄 오시는 말씀 줄이 씨에 들어 ‘앗숨’을 터트린다. 말숨이 씨를 뒤흔들고 물숨이 씨를 깨운다. 급기야 씨앗의 ‘앗’이 터지면서 첫숨(元氣)을 틔운다. 말숨에 물숨이 돌아가면서 씨는 자란다. ‘애’는 두터운 힘으로 ‘깨’야 하고 드센 힘으로 ‘캐’야 한다. 두텁게 깨고 드세게 캐고 불쑥 내는 것이다. 바로 참나를 깨닫는 순간이다.
이때 기윽(ㄱ)은 한아가 품고 있는 하늘우주다. 땅 그리워 내리는 ⬎ 꼴로 ‘ㄱ’이니 ‘하늘에서 온 얼’(류영모)이다. 그의 얼을 깨워 하늘 줄 타고 올라야 한다. 얼을 깨우지 못하면 ‘울’에 가 닿지 못한다.
“우리 앞에는 영원한 생명인 얼줄이 드리워져 있다. 이 우주에는 도(道)라 해도 좋고 법(法)이라 해도 좋은 얼줄이 영원히 드리워져 있다. 우리는 이 얼줄을 버릴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다. 이 한 얼줄을 생각으로 찾아 잡고 좇아 살아야 한다. 이 얼의 줄, 정신의 줄, 영생의 줄, 말씀의 줄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1956)
“우리 몸뚱이는 요망한 것이라 스스로가 체신을 갖추어야 참나인 얼나에 이른다. 몸나를 체신(體身)하여 희생함으로 몸나의 어둠이 가시고 얼나의 아침이 온다. 이것이 궁극의 믿음으로 가는 길이다. 우주 안팎의 전체인 하나의 절대자(絶對者)가 하느님이다. 얼로 충만한 허공인 이 우주가 그대로 하느님이시다. 내 맘속에 온 얼나는 절대 허공인 하느님의 아들이다. 이 절대의 아들이 참나인 것을 깨닫고 요망한 몸나에 눈이 멀어서 애착함이 가시어지는가가 문제이다. 그래서 다시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위로 올라간다. 그때가 되면 하나인 허공이 나를 차지할 것이고 허공을 차지한 얼나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얼나의 아침은 분명히 밝아 올 것이다.”(1957)
오름은 하늘에서 온 얼줄을 타고 거슬러 오르는 물숨(水昇)이라면 내림은 밑을 터 아래로 여는 불숨(火降)이다. 참올(眞理)의 ‘올’을 잡기 위해서는 믿음(信)이 아주 중요한다. 믿음 없이는 ‘올’ 하나를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쥐어 잡을 수도 없다. 올을 보고 듣고 잡는 힘은 오롯이 믿음에서 비롯한다. 신약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11:1)라 했으니 믿음 없이는 ‘참’에 다가갈 수 없다. 그런데 올이 썩는 문제도 믿음 때문이다. 한 번 쥐어 잡은 믿음을 놓지 않으려는 마음이 믿음을 가두고 옥죄어 숨도 못 쉬게 만든다. 올바르지 않아 올바름이 뒤틀린다. 믿음은 올을 잡으려는 미는 마음이 먼저였다. 곧 밀음으로 미는 민 마음 없이는 믿음이 드러나지 못하는 것이다. 밀고 미는 밀음으로 믿음이 난다. 믿음이 나니 밀음이 믿음을 새롭게 한다. 새 힘내는 믿음은 늘 밀음이 ‘낮힘’이다.
“나를 보아야 한다. 나는 몸나와 맘나와 얼나로 되어 있다. 몸나와 맘나를 제나(自我)라 하는데 이는 땅의 어버이로부터 받은 죽을 생명이다. 그러나 얼나는 제나를 다스리는 하느님의 아들로 영원한 생명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정견(正見)이다. 나의 참나를 알게 하기 위하여 예수·석가가 오신 것이다. 예수·석가를 믿는 것은 얼나가 죽지 않는 생명임을 알고자 예수·석가를 믿는 것이다. 나의 얼나는 하느님의 씨요 니르바나님의 씨다.”(1957)
확고해진 믿음은 더 이상 밀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늘 새로워야 할 믿음이 멈춘다. 숨 돌리지 않는다. 믿음은 이제 그 안에서 우상이 되어간다. 우상이 되어버린 믿음은 죽어야 한다. 죽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다. 다석은 말한다. “종교의 핵심은 죽음이다. 죽는 연습이 철학이요, 죽음을 없이 하자는 것이 종교다. 죽음의 연습은 생명을 기르기 위해서다.”, “불경이니 성경이니 하는 것은 마음을 죽이는 거다. 살아 있어도 죽은 거다. 내가 한번 죽어야 마음이 텅 빈다. 한번 죽은 마음이 빈탕의 마음이다. 빈 마음에 하느님나라, 열반나라를 그득 채우면 더 부족이 없다.”
믿음을 살리기 위해서 밑을 터 얼어야 한다. 움쑥 밑음이다. 밑음으로 믿음은 다시 살아난다. 애-깨-캐로 오르는 오름으로 참나가 살아나듯이, 밀음 믿음 밑음의 밀-믿-밑으로 내리는 내림으로 참나가 깊어진다. 한 번 오르내릴 때마다 참나는 크게 텅 비어서 싱싱해진다.
캐에 깨-애가 다 열려있듯이 밑음에도 믿음-밀음이 다 열려있다. 한 번 깨어나면 다시 닫히지 않는다. 한 번 밑을 트고 나면 다시 굳지 않는다. 오르고 오를수록 몸은 크고 큰 참나의 ‘ᄆᆞᆷ’이 되어가고, 내리고 내릴수록 몸은 크고 큰 참나의 ‘ᄆᆞᆷ’이 되어간다. 크게 오르내리면서 참나의 ‘ᄆᆞᆷ’이 우주 율려(律呂)가 된다. 하늘우주의 첫비롯(始作)이 한꼴로 휘돌아가는 참나라는 이야기다.
“마음과 허공은 하나라고 본다. 저 허공이 내 마음이요, 내 마음이 저 허공이다. 마음과 빈탕이 하나라고 하는 게 참이다. 빈 데라야 한다.”
“절대의 아들은 빈탕을 바라야 한다. 우주는 빈탕 안에 있다.”
“단 하나밖에 없는 것, 온통 ‘하나는 허공이다. 단일 허공이다. 사람은 확실히 느끼는데 하느님의 마음이 있다면 허공이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느낀다.”[박영호, 『다석사상전집1-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문화일보,1995), 46쪽과 91쪽]
꿍꿍하며 스스로 닦아 익히는 속말 욈
하나에서 아홉까지는 오름의 길이다. 셋(하나·둘·셋)-셋(넷·다섯·섯)-셋(일곱·여덟·아홉)으로 오르는데, 이 셋은 또 애§깨§캐가 세 번 돌면서 오르는 길이기도 하다. 회음부에서 등줄기 척추를 타고 24절기를 타듯이 물오른다. 동지, 소한, 대한, 입춘... 입동, 소설, 대설까지. 이것은 임․독맥(任․督脈)에서 독맥으로 미려(尾閭:꼬리), 협척(夾脊:등뼈), 옥침(玉枕:목뼈)을 지나 상단전의 기혈인 니환궁(泥丸宮)까지를 말한다. 그 얼개는 아래와 같다.
하나(1). 항문 여닫기(여덟 번)
여닫기를 하고 꽉 조여 닫는다. 처음 열고 닫을 때는 힘껏 조이고 천천히 푼다.
둘(2). 회음부, 깊힘(深淵力) 샘 트기
마른씨앗이 숨 트듯 샘을 튼다. 회음부 자리에 작은 옹달샘을 생각하여 불러내고 맑은 물이 솟으라고 속말을 한다. 물 기운에 씨가 탁 트이면서 ‘앗숨’을 내쉰다. 맑고 맑은 새벽 옹달샘의 물이 솟는다.
셋(3). 꼬리뼈(미골), 꼬리오름
샘물이 졸졸졸 흘러 올라서 꼬리뼈에 닿는다. 시원한 샘물이 꼬리뼈에 붙어 오르더니 엉치뼈(薦骨)와 골반에 고인다. 샘물은 솟아 몸을 크게 한 바퀴 돌 때까지 줄곧 솟는다. 웅덩이-엉덩이(엉치+골반)이에 넘실거리며 고인 물이 서서히 솟구치기 시작한다. 엉덩이의 ‘낮힘’이 들썩이며 물을 밀어 올린다.
넷(4). 허리뼈(요추), 허리오름
웅덩이에 고인 물이 솟구쳐 허리뼈를 타고 오른다. 허리를 타고 오를 때는 왼쪽 오른쪽에서 작은 실개천이 수없이 흘러와 척추를 타고 냇물을 이루며 오른다. 그 냇물이 위로 솟는다.
다섯(5), 콩팥위샘(신장, 부신), 콩팥위샘 솟음
콩팥위샘에 오른 맑은 물들이 강을 이룬다. 웅덩이 아래쪽에서 물은 쉼 없이 오르고 솟고 흘러서 드디어 강물이 되어 솟는다. 등줄기가 흐르는 강물로 시원하다.
여섯(6). 가슴샘(흉선, 흉추), 가슴샘 솟구침
맑고 맑게 빛나는 강물이 오르고 솟아서 가슴샘으로 굽이쳐 흐른다. 또한 허리 양쪽에서 모여든 강들이 하나를 이루며 크고 큰 강으로 모여든다. 그 강물이 크게 솟구친다. 척추가 쭈욱 펴지면서 허리 전체가 곧추선다.
일곱(7). 갑상샘(갑상선, 경추), 목숨길 타고 세차게 솟구침
가슴샘의 큰 강이 크게 솟구쳐 목덜미를 타고 오를 때는 물길이 굽이치고 휘몰아치면서 가파르게 빨려 올라간다. 온몸이 그것을 느낀다. 시원한 물줄기가 마치 백두산 폭포수로 쏟아지듯이 머릿골로 타고 들어간다.
여덟(8). 골밑샘(뇌하수체, 머릿골), 가없는 하늘우물 이름
꼬리뼈를 타고 오른 물이 솟고 올라서 내를 이루고 내가 강이 되어 솟구치더니 급기야 폭포수가 되어 머릿골에 백두산 천지연(天地淵)을 이룬다. 그런데 그 하늘우물은 가없이 커서 은하계 별무리를 담고, 또 온 우주의 무수한 별무리로 퍼져서 끝없고 가없다. 하늘이 나에게 일러준 ‘말숨’이 드디어 쉬어진다. “아, 나는 이 까마득히 크고 큰 빈탕의 시원한 우주로 사는구나.” 한다.
아홉(9). 숫구멍(백회혈, 대천문), 정수리 숫구멍 큰샘 트기
끝없고 가없는 우주 하늘우물 한 가운데에서 물기둥이 솟는다. 용오름 오르듯이 물기둥이 하나가 휘감아 오르면서 거대한 흰 물기둥으로 바뀐다. 그 흰 물기둥이 정수리 숫구멍을 뚫고 치솟는다. 정수리 숫구멍이 뻥 뚫려 끝 간 데 없이 흰 물기둥이 솟구친다. 치솟은 물기둥 끝이 폭죽 터지듯 뻥하고 터진다. 흰 빛무리 별무리가 ‘빛숨’으로 떨어진다. 이번엔 ‘빛숨’의 폭포수다.
“으뜸은 저기 맨 꼭대기 같지만 사실은 내 마음속의 얼나이다. 무한우주인 원(圓)의 중심은 내 속에 있다.”(1960)
이 사람은 물(水), 불(火)을 퍽 많이 생각했다. 물을 부리는 것은 불이다. 그런데 불을 다스리는 것은 물이다. 물과 불은 서로 작용한다. 사람은 물, 불 없이 살 수 없다.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을 물과 불에 비유했다. 또 우리 마음속에 평화를 이루려면 푸른 것이 있어야 한다. 물·불로 자란 푸른 열매(벼,禾)가 입에 들어가 평화(平和)롭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물 불 풀이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956)
열에서 열여덟까지는 내림의 길이다. 셋-셋-셋으로 올랐듯이 내릴 때도 셋-셋-셋으로 내린다. 셋은 또 밀§믿§밑이 세 번 돌면서 내리는 길이기도 하다. 정수리 숫구멍으로 치솟은 흰 빛무리가 ‘빛숨’의 폭포수로 쏟아져 앞이마에 내리고 그것을 두 콧구멍으로 들이쉬어 가슴으로 내리는 들숨, 날숨, 긋숨(날숨 뒤의 긴 멈숨)의 임맥이다. 몸의 앞쪽은 우리 몸을 위한 ‘숨밭’이다. 그 ‘숨밭’의 숨과 숫구멍을 뚫고 솟은 ‘빛숨’을 하나로 내린다. 숨을 내리고 그칠 때마다 몸 가운데를 타고 가는‘빛숨’을 느끼고 또 ‘불숨’을 느낀다. 단전에 다다라서 ‘밝숨’이 휘영청 떠오른 달처럼 밝은 것을 느낀다. 그 얼개는 아래와 같다.
열(10). 앞이마 빛숨(전두엽), 빛숨이 앞이마에 내림
‘빛숨’이 앞이마에 쏟아져 내린다. 앞이마는 온통 별무리 ‘빛숨’으로 환하다. 수억 개의 빛무리가 감아 돌듯이 앞이마를 천천히 돌아간다. 이마가 환하게 밝아진다. 크게 밝아진다. 그 느낌은 따듯하다. (상단전)
열하나(11). 콧구멍 빛숨, 빛숨 들이켜 속들임
코로 숨을 들이쉴 때 앞이마의 빛무리를 밑으로 빨아 당겨서 들이쉬고 천천히 내쉰다. 두 콧구멍으로 다시 들이쉴 때 ‘빛숨’이 내 안으로 휘몰아쳐 감아 돌며 하나로 깊이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빛숨’을 속으로 들인다. 들이쉬고 내 쉰 뒤에 고요히 그 자리에서 머무르는 ‘긋숨’을 생각하며 깊이 ‘빛숨’을 내린다.
열둘(12). 목구멍 빛숨, 속 깊이 빛숨 틈
목구멍을 열고 터서 ‘빛숨’이 안으로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 있도록 들이쉬고 내쉬고, 내쉰 뒤에 오래 그치는 ‘긋숨’으로 있는다. ‘긋숨’ 상태에서 ‘빛숨’이 목구멍을 타고 속으로 들어가 가슴에 가 고이는 것을 느낀다. 숨을 들이쉬면서 ‘빛숨’이 가슴에 환히 밝아오는 것을 느낀다. 은하수 빛무리가 가슴에 가득하다.
열셋(13). 가슴, 하늘 빛숨 이룸
가슴에 가득 찬 ‘빛숨’은 은하계가 돌아가듯이 ‘빛숨’을 천천히 돌리며 더 큰 여러 개의 은하를 이룬다. 온갖 은하들이 돌아가는 큰 우주가 끝없이 펼쳐져 있음을 본다. 빈탕의 텅 빈 우주가 빛무리로 감고 감아서 돌아간다. (중단전)
열넷(14). 위, 빛숨이 불숨
이제 가슴 아래로 내려가는 ‘빛숨’은 밝은 불덩이로 아른 거린다. ‘빛숨’이 ‘불숨’으로 바뀌면서 내려간다.
열다섯(15). 배, 불숨이 한 덩이
‘불숨’ 한 덩이가 활활 거리면서 환하게 밑을 연다. ‘불숨’이 지나가는 자리는 다 환하다. 배 아래로 빈탕의 텅 빈 우주가 ‘감을 빛(玄)’으로 환하다. 오장육부가 구들장 밑 고래를 타고 흐르는 ‘불숨’처럼 한 덩이로 내려간다.
열여섯(16). 배꼽, 환한데 컴컴, 컴컴한데 환
배꼽에 이르러서는 큰극(太極)이 한 꼴로 돌아가듯 ‘불숨’이 조화를 이루며 돌아간다. 환하게 빛나는 그 가운데에 먼지 한 톨 만한 컴컴함이 있고, 크게 어둑어둑한 그 가운데에 먼지 한 톨 만한 빛이 있다. 그렇게 환한데 컴하여 돌고, 컨한데 환하여 돈다. 눈이 부실만큼 환하고 찬란한 ‘환컴(恍惚)’이 돌아간다.
열일곱(17). 배꼽 아랫줄, 줄곧 뚫려 내림
배꼽 아래로 거미가 실을 내듯 ‘불숨’의 실 하나가 내려간다. 배꼽의 황홀한 ‘환컴(恍惚)’이 실을 내어 줄곧 뚫으며 단전(丹田)으로 간다. 앞이마에서 내려온 ‘빛숨’이 가슴을 지나 ‘불숨’으로 변하고, 다시 그것이 단전에 모여들어 ‘밝숨’의 덩이가 된다.
열여덟(18). 단(丹), 씨ᄋᆞᆯ
환컴의 ‘불숨’이 단전에 내리어 뜨거운 ‘밝숨’으로 돌아간다. 씨(샘)가 솟아(앗숨) 시원한 등줄기를 타고 오른 ‘물숨’이 ‘빛숨’으로 내리고 내리고 흘러서 ‘불숨’ 하나를 굴리더니, 단전에 우주 씨ᄋᆞᆯ의 ‘밝숨’을 틔운다. 온몸이 환하다. (하단전)
- 참고문헌 -
류영모 글, 다석학회 엮음, 『다석일지』, 동연, 2024
박영호 지음, 『다석전기(류영모와 그의 시대)』, 교양인, 2012
류영모 말씀, 박영호 엮음, 『씨의 메아리 다석어록: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 홍익재, 1993
박영호 엮음, 『다석 류영모 어록: 다석이 남긴 참과 지혜의 말씀』, 두레, 2002
박영호 엮음, 류영모 글, 『다석 류영모 어록: 제나에서 얼나로』, 올리브나무, 2019
이정호 지음, 『훈민정음의 구조원리-그 역학적 연구』, 아세아문화사, 1975
서일, 「진리도설」, 『대종교중광육십년사』, 대종교총본사, 1971
대종교총본사, 『삼일철학-역해종경사부합편』, 개천4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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