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다는 것은 내가 깨었다는 것이다. 깨었다는 것이 생각이다. 밝은 것이 빛이듯이 깬 것이 빛이다. 깨었는지 안깨었는지는 말이 심판한다.” - 다석 류영모, 「버들푸름(30)」에서
#1. 토막 이야기 하나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은 항일 독립투쟁기에 활동한 사회운동가이자 시인이요, 언론인이다. 한국 근대 자유시의 효시로 평가되는 「불놀이」의 작가이고, 3․1혁명 뒤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기자로 활동했다. 그는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가 주도하여 조직한 대한인국민회, 흥사단, 수양동우회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지식인들이 대거 체포되었을 때 이광수, 전영택, 현제명, 홍난파 등과 함께 일제에 전향했다. 1940년대 전시체제기 동안 총독부에 순응하면서 협력활동을 펼쳤다. 창씨개명한 이름은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
한국전쟁이 끝난 뒤, 그는 1954년 흥사단 기관지 『새벽』을 창간했다. 새벽사에서 발행한 이 잡지는 1926해에 창간되어 1932해 통권 40호로 종간된 『동광(東光)』을 복간한 것이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편집자 겸 발행인은 주요한이었다. 『새벽』은 도산의 ‘무실역행’(務實力行) 정신을 이었다. ‘무실’(務實)은 ‘실(實)에 힘쓰자’는 뜻이다. 이때 ‘실’(實)은 진실과 성실을 말한다. 그러니까 거짓없이 일하라는 것. ‘역행’(力行)은 ‘행(行)에 힘쓰자’는 뜻이다. 이때 ‘행’(行)은 실천과 행동을 말한다. 그러니까 나아가라는 것, 움직이라는 것.
도산은 우리 민족이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고 깨어나는 길은 자아혁신·자기개조를 통하여 민족혁신·민족개조를 이루는 데 있다고 믿었다. 그는 그가 설립한 대성학교(大成學校)·청년학우회·흥사단 등을 통해 ‘무실역행’(務實力行)의 사상을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그는 ‘무실역행’(務實力行)의 정신이 현실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곧 참됨은 알맹이가 들어 있기에 실(實)이 붙은 성실이요, 거짓은 속이 비어 있기에 허(虛)가 붙은 허위(虛僞)라고 하여,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참되기’와 ‘거짓이 없을 것’을 가르치며 위(僞)와 가(假)를 배격했다.
또 약속을 지키는 것, 집합시간을 지키는 것이 모두 성실의 공부요, 약속을 어기는 것, 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은 허위의 실천이라고 하였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거짓이 없고 참된 것이 무실이기 때문에 참의 정신, 참의 실천, 참의 도덕으로 우리 민족을 교육시켜 갱생시키고자 하였다.
도산이 말한 ‘역행’은 ‘힘써 행하라’는 말이 아니라, ‘행하기를 힘쓰라’는 말이다. 즉 공리공론(空理空論)의 허식 명분론을 버리고 실천궁행(實踐躬行)하기에 노력하자는 것이다. 1909년에 조직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4대 정신은 ‘무실·역행·충의·용감’의 정신이다. 도산은 이 4대 정신 이외도 ‘자강·충실·근면’의 셋을 더해서 7대 정신을 내세웠다. ‘청년학우회가’(靑年學友會歌)를 지은 육당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노래 가사에 “무실역행 등불 밝고 깃발 날리는 곳에, 우리들의 나갈 길이 숫돌 같도다.”라고 써서 그 정신을 나타냈다.
다석철학은 도산 안창호에서 남강 이승훈(李昇薰, 1864~1930)으로 이어진 ‘무실역행’(務實力行)의 정신을 잇는다. 그것은 오산학교에 녹아든 정신이기도 했다.
#2. 토막 이야기 둘
주요한이 편집을 맡은 『새벽』은 창간호에서 제6권 제3호까지는 B5판 200면 내외였고, 그 뒤로는 A5판으로 바뀌고 쪽수도 200면에서 300면까지 다양했다. 1960년 12월 15일 통권 제7권 제15호로 종간되었다. 1960해 4․19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되자 주요한은 그해 5달의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재선되었다. 8달에는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제2공화국 내각에서는 부흥부장관, 상공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장면(張勉, 1899~1966)의 발탁에 따른 것. 이런 사정으로 『새벽』은 1960해 12달에 종간되었다.
다석 류영모는 『새벽』에 글을 기고했다. 1955해 7월호였다. 『새벽』이 창간되고 얼마되지 않아서의 일이다. 다석은 책을 낸 적은 없다. 그렇지만 그가 직접 손글씨로 써서 기고한 글들이 적지 않다. 『성서조선』에 실린 글들이 있고, 이렇게 『새벽』에 실린 글도 있다. 제자 김흥호(1919~2012)는 다석의 흩어진 글과 강연을 모아 『제소리-다석 류영모 강의록』(솔, 2001)을 펴냈다. 어쩌면 더 찾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다석의 강연이 무르익었던 1956해와 57해, 이 시기의 강연록을 정리한 이는 당시 스물 넷의 청년 송기득(1931~2019)이었다. 그 때는 송기득이 결핵을 앓고 있던 시기였다. 그는 연세대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1984해부터 1999해까지 목원대에서 신학과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은퇴한 뒤에는 『신학비평』 편집주간을 지냈다. 그는 늘 ‘역사의 예수’에 집중했다. 그를 ‘이 시대의 선지자’로 부르는 까닭이다. 그는 ‘인간화’를 틀거리 삼아 그리스도교를 비판했고, 역사의 예수에서 사람다움의 길을 모색했다.
그는 『궁극의 실재를 찾아서』(대한기독교서회, 2005), 『사람살이가 구도의 방랑길입니다』(새날, 1999), 『그리스도교 신학과 인간해방』(대한기독교서회, 1998), 『역사의 예수』(대한기독교서회, 2009), 『사람 아직 멀었다』(대한기독교서회, 2016), 『하느님 없이 하느님과 함께』(신학비평사, 2006), 『탈신학 에세이』(신학비평사, 2019) 등을 비롯해 여러권의 신학 에세이를 펴냈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1956해부터 1957해까지 서울 YMCA 강당에서 진행된 다석강의 속기록을 정리했다. 송기득에게 다석의 말씀은 영혼을 치유하는 ‘말숨’이기도 했다. 『다석일지』제4권에 실려있는 「버들푸름」이 송기득의 작품이다. 「버들푸름」은 다석강의가 싱싱하게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송기득 신학의 깊은 뿌리에 다석사상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만하다.
송기득은 『기독교사상』2015해 9월호에 「다석 유영모 선생과 ‘언님’의 호칭」을 기고했다. 그는 이 글에서 “유영모 선생은 6·25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광주 방림동에 있는 동광원수도공동체에 초청을 받아 한 해에 두 차례, 여름 겨울의 집회에서 ‘말씀모임’을 주도했다. 그 무렵 동광원 수행자들끼리 불러야 할 호칭이 문제가 되었다. 유영모 선생은 ‘언님’이란 호칭을 제시했다. 남녀 상관없이 수도자들은 서로 ‘언님’이라고 부르면 좋겠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그때 동광원의 ‘조실’(祖室)격인 이현필 선생도 그 뜻을 새기고서 즐겁게 받아들였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이 글에서는 ‘다석’(多夕)이라는 호의 뜻도 밝히고 있다. 다석과의 대화에서다.
유영모 선생의 호는 ‘多夕’이다. 청년 때 손수 지은 것이다. 내가 결핵을 앓은 뒤 동광원에서 후요양을 하고 있을 무렵 어느 겨울날 한 모임에서 (1958해 무렵) 선생에게 물었다.
“선생님, 어째서 호를 다석(多夕)이라고 지으셨습니까?”
선생이 대답했다.
“저녁이 좋잖아! 수많은 별을 볼 수 있으니까.”
‘석다’(夕多)라고 읽어도 좋다고 했다. 저녁이 많거나 많은 저녁이거나 다 좋지 않으냐는 것이다.
그리고 ‘언님’의 호칭에 대해 그는 이렇게 평가한다. “선생은 일찍이 상대를 부를 때 어른이나 어린이나 남자나 여자나, 빈부귀천 위아래를 가릴 것 없이 상대방을 ‘언님’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한 바 있다. ‘언님’은 ‘어진 님’의 준말이다. 우리나라에는 상대방을 부를 만한 알맞은 말이 없다고 늘 걱정하던 끝에 내놓은 호칭이라, ‘언님’이란 말은 자못 그 의의가 컸다.”라면서 “이 호칭에는 ‘사람은 모두 어질다.’는 그의 인간학이 깔려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사람이 모두 어질기를 바라는 그의 간절한 염원도 담겨 있다. 그리고 어른이나 어린이나 남자나 여자나, 위아래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서로 ‘언님’이라고 부르자는 그분의 제안은 평등사상에 깊이 바탕하고 있다. 그의 씨알철학으로 보아, ‘인간은 평등하다.’는 주장은 그에게 너무나 당연하다. ‘언님’이라는 호칭은 그의 사회적 휴머니즘의 상징이다.”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토막 이야기 셋
『새벽』에 실린 다석의 「제소리」는 크게 네 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빛나는 말씀’이다.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띄어쓰기 없이 원문 그대로를 가져온다.
“맨첨에 하나님이 하늘, 땅을 첨맨드시니라.(創世記1章1節)
맨첨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요한1章1節)
萬物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인 것이 말씀 없이는 지은 것이 하나도 없나니라.(上同3節)
목숨삶이 말씀에 있으니 목숨은 사람의 빛이라.(上同4節)”
『성경』에서 가져 온 글을 토대로 그림 글꼴을 그렸다. 그림 글꼴을 그릴 때는 그의 생각이 빛났다. 오래 궁글린 생각의 씨글이 ‘앗숨’을 터트렸다.
그림3)을 그려 놓고 그 옆에 이런 글을 덧붙였다.
“이 끈 이, 올 끈 이로, 온 끝에 까지, 말씀 사르므로, 생각이오니, 맨첨부터 함께계심.”
이 그림은 「버들푸름(8)」의 “긋 끝 나 말씀”과 「버들푸름(43)」의 “산보”를 더불어 읽으면서 낱낱이 따져 물으면 아주 잘 보인다. 다석은 직접 이 그림에 대한 풀이도 하고 있다. 이제 이 글 뒤로 이어질 다석의 그림 글꼴을 푸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글이다. 원문 그대로 보고 읽는다.
“이 그림은 살아 계신 빛을 보인것입니다. 이런 알짬 순수純粹한 매첨 말씀에 가까운 말씀, 쓴 것을 읽으면 확 우리머리에 그 집점 초점焦點이 잡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글을 까다롭게 써서가 아닙니다. 날마다 그의 쓰는 말이 그런 생각을 해보는 데는 쓰지못한 까닭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이 곧 우리살림의 부끄럼이 제 스스로 반영反映됨이라고도 보아야 할까 합니다. 말씀(참귀한 말씀이온데)을 사람이 (사람만이 말씀을 쓰게된 생물生物인데) 평생平生에 그리 대수롭지 안한데만 말을 쓰는 버릇을 가지고 살면, 바꿔말하면 말없이도, 벙어리로도, 짐승으로도 살수 있는 따위 살림에만 말을 잘 쓰고, 사람노릇 하는 생각 (생각을 반드시 하고 살아야만 제 노릇을 하게된 것이 사람인데)에는 말씀을 많이 안쓰고 살면, 참말씀은 모르고, 바른 사람노릇도 모르고 있다가 결국 참말씀을 못쓰게 쓴 값으로 그 목숨삶의 열매도 못쓰게 됨이 아닌가 저어합니다. 그리고 또, 한글로 된 말씀 테두리 버들(도리어 생각의 틀이라 할까?)를 인욕忍辱하시며 먼저 알아 보아 주셔야 하고, 그러려면 한글에 대한 제자해制字解스러운 버들의 소견所見을 좀 原종하여 주셔야 하겠습니다.”
[다석의 한글철학 ②] “꼭지이응(ㆁ)은 참나의 씨알이다”에 글쓴이는 그림3)에 대해 먼저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제소리」에 “이 끗 이, 올 끈 이로, 온 끝에 까지, 말씀 사르므로, 생각이오니, 맨첨 부터, 함께계심.”이라 썼다. 글이 든 그림이 중요하다. 가운데 ‘함께’ 위아래로 ‘생각’/‘사름’이 날개를 펴고 돌고 있다. ‘맨첨’/‘온끝’도 돌아간다. ‘이’/‘끗’도 똑같다. 다른 그림엔 ‘함께’를 가온(ㄱㄴ)에 넣었다. 그림은 ‘끝없’(∞)이고, 그 ‘끝없’에 글이 들어있다. 둘을 하나로 풀어야 풀린다. 중첩․얽힘․도약이 동시에 ‘끝없’으로 일어난다.
하지만 그림3)과 그림4)는 글보다 먼저 그림을 보아야 한다. 글의 꿍꿍은 창세기 1장 1절, 요한 1장 1절, 3절, 4절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그림은 무엇을 참조한 것일까? ‘끝없․없끝’(無限)의 기호 ‘∞’이다. 이것은 복희여와(伏羲女媧)의 소용돌이 몸이요, 『천부경(天符經)』의 끄트머리 글자 ‘ᄒᆞ실’(하나:一)이다. 첫 글자도 ‘ᄒᆞ실’(一)이요, 막 글자도 ‘ᄒᆞ실’(一)이지 않은가. 또 나비의 두 날개를 닮았고, 북편과 채편을 가진 장구의 조롱목도 닮았다. 오른쪽 날개에 ‘맨첨’이 있고 왼쪽 날개에 ‘온끝’이 있다. 두 날개는 한쌍으로 돌아가는 한꼴로 하나다. 그러니 ‘맨첨에 온끝’이라고 풀어야 하리라. 이것은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는 영원한 생명줄이요(끊이지 않는 ‘참나’이기도 하다), ‘끗’은 끝끝내 나고 나는 참나다. 그이를 ‘올끈이’라고 한다. 올끈이는 ‘맨첨’부터 ‘온끝’까지 생각을 사른다. 생각을 사른 자리에 말씀이 계신다. 어떻게 계실까? ‘함께’ 계신다. 늘 함께 계신다. 그 ‘함께’를 끝끝내내 찍어야 한다. 그래서 1956해에 그린 것은 가운데에 가온(ㄱㄴ)이 있다.
「버들푸름(8)」의 “긋 끝 나 말씀”은 “오늘은 끝에 관해서 생각해 본다. 끝은 종말(終末)이라는 뜻과 점수(點數)라는 뜻과 첨단(尖端)이라는 뜻과 점찍는 점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나는 이 민족의 한 끄트머리며 현대에 나타난 하나의 첨단(‘뾰족한 끝’이라는 뜻이다)이며 나의 정신은 내가 깨어나는 순간 순간 나의 마음 한복판을 찍는 가온찌기 한점이다.”라고 시작한다. 왜 ‘함께’라는 말이 가온 한복판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말씀에 대해서는 “말씀은 내 속의 표현이며 나 자체이기도 하다. 나는 한 끄트머리며 하나의 점이면서 하나의 끝수이기도 하다. 땅밑의 싹이 하늘 높이 태양이 그리워서 그그하고 터 나오는 것을 그린 것이 긋이요, 그것이 터 나와서 끄트머리를 드러 낸 것이 끝이요, 끝이 나왔다고 나다. 석가가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고 뽐내며 나다하는 것이 나요, 이 나야말로 가장 가치가 있는 점수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 끝수가 많은 한끝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이렇게 표현해 본다.”라면서 이렇게 붙인다.
“한금을 내려근 줄은 이라고 발음하며 영원한 생명줄을 말한다. 영원한 생명이 시간속에 터져 나온 한순간이 이긋이요, 그것이 공간으로 터져나와 육체를 쓰고 민족의 한 끄트머리로 나온 것이 이 세상에 터나온 나라고 하는 제긋이고 이 육체 속에 정신이 터져나와 가장 고귀한 점수를 딸 수 있는 가치가 이제긋이다. 이제 시간과 공간과 인간의 긋이 모여 영원한 이가 공간 속에 나타나이어 계속 나타나 이것이 이어져서 예 이 땅에 예 예어 나가는 내가 한점광명(一點光明) 긋이오니 고디 곧장 오르고 또 올라 내 속에 있는 고디(神)를 살려내어 내 속에 가온찌기 내 속에 가장 온군(‘옹근’을 말한다) 속알(德)이 있는 것을 자각하여 깨닫고 나오는 가온찌기가 가장 소중하며, 자각은 한번만 할 것이 아니라 순간 순간 계속 자각하기 때문에 끗끗내내 자각하고 또 자각하여 종당은 땅위에 하늘 뜻을 드디고 실천하는 디긋 디긋 철인들이 되어서 이긋이 태초의 맨첫긋과 종말의 맨마지막 맞끝이 한통이 되어 영원한 생명이 되는 것을 이 인제 임을 머리에 인() 하늘의 아들들은 겸손하게 머리숙여 모른다고 하지만 그 모르는 속에 참 앎이 있지 않을까.”
글 마디마디마다 그이는 ‘영원한 생명줄’, ‘영원한 생명’, ‘끄트머리’, ‘이제긋’, ‘영원한 이’, ‘내 속에 있는 고디(神)’, ‘가온찌기’, ‘끗끗내내’를 힘주어 말한다. 말은 말로 중첩되고 얽힌다. 그렇게 중첩되고 얽혀야만 ‘끝없’의 ‘없끝’을 이루리라. 그가 “태초의 맨첫긋과 종말의 맨마지막 맞끝이 한통이 되어 영원한 생명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까닭이 예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렇게 ‘한통’이 되어 끄트머리의 영원을 이루기 위하여 임을 머리에 이어야 한다. 머릿골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가.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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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모 글, 다석학회 엮음, 『다석일지』, 동연, 2024
박영호 지음, 『다석전기(류영모와 그의 시대)』, 교양인, 2012
류영모 말씀, 박영호 엮음, 『씨의 메아리 다석어록: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 홍익재, 1993
박영호 엮음, 『다석 류영모 어록: 다석이 남긴 참과 지혜의 말씀』, 두레, 2002
박영호 엮음, 류영모 글, 『다석 류영모 어록: 제나에서 얼나로』, 올리브나무, 2019
이정호 지음, 『훈민정음의 구조원리-그 역학적 연구』, 아세아문화사, 1975
대종교총본사, 『삼일철학-역해종경사부합편』, 개천4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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