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없으면 진리고 생명이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가 가고 ‘나’가 오는 것이다. 그때 ‘참나’가 된다.”
-「버들푸름(12)」에서

“일원(一圓)은 법신불(法身佛)이니 우주(宇宙) 만유(萬有)의 본원(本源)이요
제불(諸佛) 제성(諸聖)의 심인(心印)이요 일체(一切) 중생(衆生)의 본성(本性)이다.”
-『대종경』에 실린 「교리도」에서

이응(ㅇ). 지금 ‘이응’이라고 말하지만 본디 이응이 태어날 때는 소리가 없었다. 굳이 바꾸어 말하면 ‘없소리’(無聲)다. 없는 소리로, 없소리. 입은 닫히고 목구멍은 열려있는, 그러니까 목구멍 숨줄이 뻥 뚫렸으되 나지 않는 소리 글꼴이다. 한마디로 나지 않는 ‘소리없’(無音)에 다 열린 글꼴이랄까! 숨구멍이 다 뚫려서 다다 열고 연 이응 글꼴의 세계는 그러므로 ‘끝없’(無限)의 우주다. 없는 소리에 오히려 수많은 소리가 끝없다. 뚫린 목구멍 숨줄은 목숨이요, 말씀을 들깨운 말슴은 말숨이요, 말숨에 깨우친 빈탕의 참 마음(眞心:ᄆᆞᆷ)은 얼숨 쉰다. 이응은 얼숨의 맨 처음 바탈(本性)이다.

이응은 ‘끝없’의 한 둥긂

다석 류영모는 “쉬지 않는 불식(不息)이 숨쉬는 식(息)입니다”라면서 “자강불식(自强不息)은 줄곧 숨쉬고 줄곧 생각하여 하늘에 도달하여 내가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이 곧장입니다. 코로 숨쉬는 데도 몸을 곧게 정신을 숨쉬는 데도 곧이 곧장 이것이 양기법 양생법 양심법입니다. 몸을 곧이 곧이 이것이 장생법입니다. 곧이 곧장 정신을 가지고 입다물고 숨쉬고 곧이 곧장을 가지면 숨이 잘 쉬어지고 호흡이 잘 됩니다.”라고 하였다(『다석일지(4권)』「버들푸름(23)」). 입다물고 숨쉬는 자리가 이응이다.

두 콧구멍으로 들어간 들숨은 새끼줄 꼬듯 목구멍을 타고 가면서 숨바람으로 소용돌이 일으키며 깊숙이 파고든다. ‘않’(內)과 ‘밖’(外)은 막힘이 없고, 안팎을 두루 이어놓은 숨구멍은 있는 그대로 산숨(生氣)의 용오름이다. 들숨이 끝나는 낮고 깊숙한 숨자리에 속알 힘이 크고 짱짱하다. 얼의 뿌리가 든든하다. 들숨의 깊은 바다에 큰 물고기 곤(鯤)이 들썩인다. 들숨이 날숨으로 뒤바뀌는 찰나에 곤(鯤)은 붕(鵬)으로 날아오른다. 날숨이 끝나는 더욱 낮고 깊숙한 숨자리에 ‘꿍꿍’(想像)의 날개가 구만리(九萬里)로 치솟는다. 아득히, 까마득히 먼 날숨의 한늘에 붕(鵬)이 높높다. 오호라! 이응은 온 우주가 한통속으로 드나드는 움쑥한 들숨이요, 불쑥한 날숨이구나. 맨 그 자리는 아주, 아주 크고 깊고 고요하여라.

 

그림1) 『역해종경사부합편 전』(대종교총본사, 개천4406) 136쪽에 실린 ‘삼묘도’(三妙圖)이다. 이 셋(圓方角)은 한글 닿소리의 첫 얼개다. 학산은 원(圓)을 머리, 방(方)을 몸통, 각(角)을 두 다리에 빗댔다. ‘밖’(外)을 에둘렀으나 ‘않’(內)은 텅 빈 것이 둥근 원(圓)이다. 에둘러 그린 꼴이 이응이라는 동그라미일뿐 하늘은 본디 꼴이 없다. ‘꼴없 꼴’(形無形)이 이응의 본꼴이다. 꼴없는 하늘 머리로 참숨 쉬는 몸에 ‘얼나’(靈我)가 솟나리라.
그림1) 『역해종경사부합편 전』(대종교총본사, 개천4406) 136쪽에 실린 ‘삼묘도’(三妙圖)이다. 이 셋(圓方角)은 한글 닿소리의 첫 얼개다. 학산은 원(圓)을 머리, 방(方)을 몸통, 각(角)을 두 다리에 빗댔다. ‘밖’(外)을 에둘렀으나 ‘않’(內)은 텅 빈 것이 둥근 원(圓)이다. 에둘러 그린 꼴이 이응이라는 동그라미일뿐 하늘은 본디 꼴이 없다. ‘꼴없 꼴’(形無形)이 이응의 본꼴이다. 꼴없는 하늘 머리로 참숨 쉬는 몸에 ‘얼나’(靈我)가 솟나리라.

학산 이정호는 『훈민정음의 구조원리』에 쓰기를 “ㅁ이 방정을 의미하듯이 ㅇ은 원신(圓神)을 의미한다. ㅁ은 유한성을 말하고 ㅇ은 무한성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도 무한성의 상징인 목구멍은 하늘이요, 유한성의 상징인 입술은 땅임에 틀림이 없다. 하늘은 공허하며 ‘땅을 싸고 둥글고 고리 같으니 그림자이고’, 땅은 착실하여 ‘하늘을 싣고 모나고 반듯하니 몸집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몸집(體)과 그림자(影)는 서로 안고 안기고 하여 그 속에는 ‘이기(理氣)도 들어있고 신명(神明)도 모여 있다’고 하였다. ㅇ이 우리의 머리를 상징한다면 ㅁ은 우리의 배를 상징한다. 이것이 또한 건곤(乾坤)의 이치이며, 인간 속에 천지(天地)가 들어 있고, 그 천지(天地)를 두 다리로 버티고 있는 것이 또한 인간의 상(像)이기도 하다.”라고 하였다. 다석도 “하늘로 머리를 들면 시원하다. 시원하니까 생각이 난다. 백두산에서 물이 흐르듯이 마음에서 생각이 나온다.”라고 하였다(「버들푸름(29)」).

‘무한성의 상징인 목구멍은 하늘이요, 유한성의 상징인 입술은 땅임에 틀림이 없다’고 하였다. 입술은 있으나 소리없이 숨구멍만 뚫렸으니, 이응의 까닭은 모든 소리의 첫바탈(根本)이 아닐까. 학산도 이응의 역학적 의의(意義)에 대해 “ㅇ은 후음중(喉音中)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오며 모든 초성의 근본이라고 하겠다. 후부(喉部)는 모든 발음기관 가운데서 가장 깊고 가장 윤택(潤澤)하므로 구강오행(口腔五行)으로는 수(水)에 해당한다. 사시(四時)로는 겨울이요, 방위(方位)로는 북(北)이며, 오성(五聲)으로 우조(羽調)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없는 소리 이응이 온갖 첫소리의 맨 밑바탈(根本)이다.

『역해종경사부합편 전』(대종교총본사, 개천4406)의 「삼일신고서(三一神誥序)」는 이렇게 시작된다. “신은 그윽이 엎드려 듣사오니. 뭇 고동(機)은 허울(象)이 있고, 참 임자(宰)는 얼굴(形)이 없는지라. 그 없음을 빙자(藉)하여, 질그릇 만들 듯 조화(亭毒)함을, 가론 한얼이오. 그 있음을 빌어서, 나고 죽으며 즐기고 괴로움을, 가론 사람과 만물(物)이니. 그 처음에 한얼이 주신 성품(性)은 본대 참함(眞)과 가달(忘)이 없건마는. 이로부터 사람이 받는 품수(品)가, 이에 정함(粹)과 얼럭(駁)이 있으니. 비유컨대 온갖(百) 내(川)가 젖은 바에, 외로운 달(月)이 한가지로 찍히고. 한번 비가 부루(潤)는 바에, 온갖(万) 풀(卉)이 다르게 꽃다움 같으니라.”라고. 그윽이 엎드려 듣는 그 소리는 없이 나는 소리다. 한얼은 얼굴도 없이 ‘없’을 맨 밑바탈(藉:根本)로 조화를 부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얼이 처음 주신 맨 첫 바탈은 ‘없’ 하나다. 저절로 다 다르게 이루는 꽃다움에 ‘없’의 산알이 있다.

이응은 ‘앗숨’이 움솟는 터

이응은 아무 소리를 갖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깊고 고요할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있’(有:存:在)을 에둘러 품고 아울러 모은 ‘없’(無:空:虛)의 산알이다. ‘없’은 그저 없고 없어서 텅 빈 죽음(滅)이 아니다. ‘없’은 있없이 텅 비어서 반짝이는 빈탕이다. 나죽지 않는 빈탕이요(無生四諦), 가온길에 움솟는 ‘앗숨’이요(中道實相), ‘앗숨’에 깨쳐 깨닫는 한 둥긂이다(圓覺). 『정감록(鄭鑑錄)』, 『격암유록(格庵遺錄)』, 「궁을가(弓乙歌)」에 궁궁을을(弓弓乙乙)이라 했다. 궁궁은 ‘없’이요, 을을은 ‘빔’이다. 궁궁을을은 ‘비롯(비로소)’이다. 궁궁을을은 나죽지 않는 터요, ‘앗숨’이 움솟는 터요, 산알로 반짝이는 터다. 그래서 난세에 피신할 피난처로 꼽은 까닭이다. 수운 대신사(大神師)가 받은 영부(靈符) 선약(仙藥)의 꼴도 그렇고, 소태산 대종사(大宗師)가 한 번 큰 소리로 꾸짖은 “궁궁은 무극 곧 일원(一圓)”이라는 꼴도 그렇다. 그 자리가 맨 밑바탈(根本)이다.

앞글 일곱 번째 글에서 민세 안재홍의 ‘비․씨․몬’을 살핀 바 있다. 그리고 덧붙여서 “‘비’요 ‘씨’요 ‘몬’이요 하는 삼자(三者)의 외(外)에, 우주의 근원이 되고 핵심을 이루는 섭리의 힘이라고 해서, 후생(後生)한 신앙이요 철리의 주축으로 된 자 - ‘알’ 혹 ‘얼’이니, 그는 지성(知性:알)이요, 핵심(核心:알)이요, 또 정령(알․얼)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조선의 선민이 맨 처음에 발견한 세계관적 철리(哲理)는 ‘비’요, ‘씨’요, ‘몬’의 그것이었다.”라고 꿰뚫은 뒤에 ‘우주의 근원이 되고 핵심을 이루는 섭리의 힘’이 ‘알․얼’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알․얼’의 첫소리는 빈탕(虛空)의 이응이요, 끝소리는 쉬지 않고 흐르면서 내고 낳고 되고 이루는 리을이다.

『우리말의 상상력』(정신세계사, 1991)을 쓴 정호완은 “‘아시/앗’은 근원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 ‘낮’과 ‘아침’의 부분에서 풀이한 바와 같이 ‘앗’은 ‘시작’이요 ‘태동’의 뜻으로 보인다. ‘앗’은 받침이 바뀌어 ‘앋’(『신어』4-12)으로도 드러나며 다시 ‘ㄷ>ㄹ’의 변화를 따라서 ‘알’로 드러나기도 한다. ‘알’은 생명이 출발하는 공간이요 시간이라면, 보이지는 않으나 ‘알’이 있게 한 내면의 과정 혹은 하나의 힘이 ‘얼’이 아닌가 한다.”라면서, “형태로 보아 ‘앗/앋/알’은 ‘엇/얻/얼’과 대립되는 짜임새를 갖는다. 여기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알/얼’이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앗’은 어린이요 ‘엇’은 부모이다. 따라서 ‘알/얼’이 그에 상응하는 계열이라면, 결국 알은 얼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하겠다.”라고 풀었다. 또 “일반적으로는 ‘씨알(씨앗)’의 ‘씨’는 아버지의 혈통으로, ‘알’은 어머니의 혈통으로 말하지만, 필자는 얼을 부모로 알을 자식으로 보면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얼이 먼저요, 알이 그 뒤라는 이야기. 얼이 궁궁이요, 알이 을을이라는 이야기. 얼알이 곧 궁궁을을이라는 이야기. 없극에커극(無極而太極)이라는 이야기. 없극겆이요, 커극겆이라는 이야기. 없극 거기에 커극 거기가 움쑥불쑥이라는 이야기. 어버이가 얼이요, 그로부터 ‘앗숨’이 터졌다는 이야기. 이 이야기의 맨 처음은 어디로부터 비롯되었을까? 옛조선(古朝鮮)이 만든 거울에 그 답이 있을 터.

 

그림2) 정문경(精文鏡)이다. 다른 이름으로 다뉴세문경(多鈕細紋鏡). 지름은 21.2센티미터. 1971년 12월 21일에 국보 제141호로 지정되었다. 이 ‘고리달린 잔무늬청동거울’은 청동검, 청동방울과 함께 고조선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세계 최고의 정교함을 자랑한다. 청동기 시대의 거울은 태양숭배사상과 관련이 깊다. 거울은 곧 ‘큰빛’(太陽)이라는 이야기다. ‘앗/앋/알’에서 살폈듯이 ‘깨침’은 곧 ‘아침’이요, ‘앗숨’이다. 이 거울에는 헤아릴 수 없는 ‘알’의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가장 처음 만들어진 ‘일원상’(一圓相)이다.
그림2) 정문경(精文鏡)이다. 다른 이름으로 다뉴세문경(多鈕細紋鏡). 지름은 21.2센티미터. 1971년 12월 21일에 국보 제141호로 지정되었다. 이 ‘고리달린 잔무늬청동거울’은 청동검, 청동방울과 함께 고조선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세계 최고의 정교함을 자랑한다. 청동기 시대의 거울은 태양숭배사상과 관련이 깊다. 거울은 곧 ‘큰빛’(太陽)이라는 이야기다. ‘앗/앋/알’에서 살폈듯이 ‘깨침’은 곧 ‘아침’이요, ‘앗숨’이다. 이 거울에는 헤아릴 수 없는 ‘알’의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가장 처음 만들어진 ‘일원상’(一圓相)이다.

일원상(一圓相)은 “중생이 본디부터 갖추고 있는 깨달음의 모습을 상징하기 위하여 그리는 둥근 꼴의 그림”을 뜻한다. 선종의 제6조이자 남종선(南宗禪)의 시조인 혜능(慧能, 638~713)의 제자 남양혜충(南陽慧忠, 675~775)이 손으로 원상(圓相)을 그려 보인 데서 비롯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거울 이야기는 혜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혜능의 계송(偈頌)은 이렇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네.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있으리요.
마음은 보리의 나무요
몸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라
밝은 거울은 본래 깨끗하거니
어느 곳이 티끌과 먼지에 물들리오.

혜능의 스승은 게송을 본 날 밤(子時)에 금강경을 설한 뒤 떠나보냈다. 혜능은 한 번 듣고 깨쳤다. 말씀이 말숨으로 단박에 씨를 깨니 ‘앗숨’을 텄다. 말이 제 안에 바로 섰다. 말씀이 말숨으로 말슴을 세웠다. 홍인(弘忍, 601~674)의 ‘ᄆᆞᆷ’이 그대로 혜능의 ‘ᄆᆞᆷ’으로 이어져서 저절로 깨졌다. 가온(中)에 숨 하나가 텅 찍혀서 돌았다. 가온찍기다. 단박에 깨친 돈법(頓法)이다. 이제 끝끝내내 가온찌기다. 모름지기다.

이응은 궁궁하는 우주

『대종경』「변의품29」에 오고간 말이다. 조원선(曺元善)이 여쭙기를 “동학 가사에 ‘이로운 것이 궁궁을을에 있다(利在弓弓乙乙)’ 하였사오니 무슨 뜻이오니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세상에는 구구한 해석이 많이 있으나 글자 그대로 궁궁은 무극 곧 일원이 되고 을을은 태극이 되나니 곧 도덕의 본원을 밝히심이요, 이러한 원만한 도덕을 주장하여 모든 척이 없이 살면 이로움이 많다는 것이니라.” 또 여쭙기를 “궁을가를 늘 부르면 운이 열린다 하였사오니 무슨 뜻이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러한 도덕을 신봉하면서 염불이나 주송(呪誦)을 많이 계속하면 자연 일심이 청정하여 각자의 내심에 원심과 독심이 녹아질 것이며, 그에 따라 천지허공법계가 다 청정하고 평화하여질 것이라는 말씀이니 그보다 좋은 노래가 어디 있으리오. 많이 부르라.”

또 『대종경』「성리품11」에는 “변산구곡로(邊山九曲路)에 석립청수성(石立廳水聲)이라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요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라” 말하고 “이 뜻을 알면 곧 도를 깨닫는 사람이라”라고 밝혔다. 봉래정사에 있을 때 큰비가 와서 층암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폭포와 사방 산골에서 흐르는 물이 줄기차게 내리는 것을 보면서 “저 여러 골짜기에서 흐르른 물이 지금은 그 갈래가 비록 다르나 마침네 한곳으로 모아지리니 만법귀일(萬法歸一)의 소식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라고 한 뒤에 밝힌 것이다.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요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라”는 무슨 뜻일까? 바로 풀면 “없없에 몯 없없이요 안안에 큰 안안이라”이다. 역(亦)은 ‘또/또한’, ‘모두’, ‘크게’, ‘대단히’를 뜻으로 가졌다. ‘또’로만 풀면 안 된다. ‘모두’는 ‘몯>모둠’이다. 대종사의 말슴은 온갖 것들이 돌아간 ‘하나’의 자리(萬法歸一)를 뜻한다. 다석이 “나는 없에 가자는 것이다. 없는 데까지 가야 크다. 태극에서 무극에로 가자는 것이다. 이것이 내 철학의 결론이다.”라고 말한 그 자리. 나죽지 않고, 앗숨이 움솟고, 산알로 반짝이는 궁궁을을의 자리. 위없는 맨이요, 밑없는 맨의 자리. ‘없’이 ‘없’에 모둔 ‘없’도 ‘없’이요, ‘안’이 ‘안’에 큰 ‘안’도 ‘안’이라. 제 아무리 ‘없없’에 모다 모은 ‘없’이라도 그저 ‘없’일 뿐이요, 제 아무리 ‘아닌안’에 큰 ‘아니’를 붙여도 ‘안’일 뿐이라. 그러니 ‘없없’(無無)은 ‘없꼭대기’(無極)으로 이응이요, ‘아닌안’(非非)은 ‘큰꼭대기’(太極)로 이응이다. 둘은 하나다(不二). 원만하고 조금도 흠이 없는 우주의 신령스러운 깨우침(圓覺), 곧 일원(一圓)의 한 둥긂이다. 얼․숨․김이 그저 움쑥불쑥할 뿐이다.

“오래 살려면 말씀 줄을 자꾸 물려주어야 한다. 얼의 실이란 곧 한얼님의 얼말씀이다. 영원한 생명줄로 나온 얼의 실이 말씀이다. 나는 다른 아무것도 믿지 않고 얼나의 말씀만 믿는다. 여러 성현들이 수천년 뒤에도 썩지 않는 말씀을 남겨 놓은 걸 씹어보아요. 이렇게 말하면 종교통일론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통일은 싫다. 통일은 되는 게 아니다. 온통(絶對)인 한얼님께로 돌아가는 귀일(歸一)이라야 한다.”(『다석어록』에서)

 

그림3) 『다석일지』에 쓴 1956년 10월 29일의 읊이(詩)다. 제목은 ‘보아요’. 그 옆에 ‘(念在神在)’라고 썼다. ‘생각 솟는 자리에 얼이 계신다’는 뜻이다. 다석은 “생각이 있는 곳에 곧 신이 있다.”고 하였다. 읽는 소리로 풀면, “한얼계셔 생각들히 사람보계 말슴나지/ 네목궁에 얼숨김이 귾져봐라 이승즘승/ 살마도 어린적 노릇(버릇) 즘승갓간 이승버릇”이다. 소리로 그리 읽어도 글꼴을 무시하면 안 된다. 다석 한글철학은 그 글꼴에 큰 뜻이 있다. 보자. 한얼이 계시니 생각이 들이친다(들히). (들이치니) 사람사는 세상에 말이 서고 말씀이 난다. 네 목구멍에 얼숨김이 끊어져 봐라. 이승은 짐승이다. 사람도 어릴적 노릇은 짐승 같잖은가. 그것이 이승 버릇이다.
그림3) 『다석일지』에 쓴 1956년 10월 29일의 읊이(詩)다. 제목은 ‘보아요’. 그 옆에 ‘(念在神在)’라고 썼다. ‘생각 솟는 자리에 얼이 계신다’는 뜻이다. 다석은 “생각이 있는 곳에 곧 신이 있다.”고 하였다. 읽는 소리로 풀면, “한얼계셔 생각들히 사람보계 말슴나지/ 네목궁에 얼숨김이 귾져봐라 이승즘승/ 살마도 어린적 노릇(버릇) 즘승갓간 이승버릇”이다. 소리로 그리 읽어도 글꼴을 무시하면 안 된다. 다석 한글철학은 그 글꼴에 큰 뜻이 있다. 보자. 한얼이 계시니 생각이 들이친다(들히). (들이치니) 사람사는 세상에 말이 서고 말씀이 난다. 네 목구멍에 얼숨김이 끊어져 봐라. 이승은 짐승이다. 사람도 어릴적 노릇은 짐승 같잖은가. 그것이 이승 버릇이다.

난날(生日)은 난나(生一)여야 한다. 하나를 내야 한살이(一生)이다. 다석은 하루 한살이(一日一生)를 살았다. 하루를 사는 오늘살이는 늘 여기에 이제를 사는 ‘이제살이’다. 여기를 살고 이제를 살아야 나날이 ‘있없’(有無) 하나로 텅 비어 돌아간다. 텅 비어 숨돌리는 그 자리가 이응이다.

학산은 이응(ㅇ) 제자(制字)의 기원(起源)을 『훈민정음해례본』에서 찾는다. “‘욕’(欲)자의 초발성인 ㅇ은 제자해에 ‘후음(喉音) ㅇ은 목구멍의 형상을 본받았다’고 하였으니 성문(聲門)을 열어 제치고 숨을 통하되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程度)로 가만히 내니 빈 소리라 하겠다. 그 둥근 모양과 아울러 ‘상형이자방고전’(象形而字倣古篆)에 일치한다고 보겠다.”라면서 “소리가 비고 상하(上下)가 걸림없이 통하는 것은 마치 물속이 비고 맑아서 흘러 통하는 이치와 같다고 한다. 물은 불과 더불어 만물을 생성하는 기본 요소요, 우리 일상 생활에 없지 못할 가장 중요한 제일차적인 물건인 즉 거의 하늘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의미로는 물이 하늘인 것이다. 그러므로 ‘물기운과 흙기운이 완전히 조화된 것이 하늘과 땅이라’하여 오행(五行)의 토(土)가 땅을 의미하는 동시에 수(水)가 하늘을 의미하기도 한다. 문인(文人)들은 눈으로 보는 광경(光景)에서 물과 하늘이 한 빛이라고도 한 것이다. 하여간 구강내(口腔內)에서 수(水)에 해당하는 목구멍을 하늘이라고 한다면 토(土)에 해당하는 입술은 의심할 것도 없이 땅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틀림없이 목구멍과 입술은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겠다.”라고 덧붙이다.

 

그림4)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펴낸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2卷』(1915) 119쪽에 실려 있는 현무(玄武)다. 강서대묘(江西大墓) 사신도(四神圖) 가운데 하나다. 북한의 국보 제28호. 남포시 강서구역 삼묘리에 있는 고구려의 굴식 돌방무덤. 무덤의 축조 시기는 6세기 후반에서 7세기로 본다. 강서대묘는 고구려 후기의 왕릉이다. 현무(玄武)는 북쪽과 겨울, 오행 중 수(水)를 관장하는 사신(四神)이다. 현무의 현(玄)은 새끼줄을 꼬아놓은 모습에서 유래된 상형 문자인데 뱀이 서로 몸을 뒤트는 형상에서 붙였다는 학설이 있다. 도교에서는 그 의미를 오묘함, 심오함, 깊고 고요함으로 해석하여 다른 색보다는 훨씬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풀이는 위키백과와 나무위키를 참조하였음). 학산이 “수(水)에 해당한다. 사시(四時)로는 겨울이요, 방위(方位)로는 북(北)이며, 오성(五聲)으로 우조(羽調)”라고 역학적 의의를 밝힌 것과 같다.
그림4)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펴낸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2卷』(1915) 119쪽에 실려 있는 현무(玄武)다. 강서대묘(江西大墓) 사신도(四神圖) 가운데 하나다. 북한의 국보 제28호. 남포시 강서구역 삼묘리에 있는 고구려의 굴식 돌방무덤. 무덤의 축조 시기는 6세기 후반에서 7세기로 본다. 강서대묘는 고구려 후기의 왕릉이다. 현무(玄武)는 북쪽과 겨울, 오행 중 수(水)를 관장하는 사신(四神)이다. 현무의 현(玄)은 새끼줄을 꼬아놓은 모습에서 유래된 상형 문자인데 뱀이 서로 몸을 뒤트는 형상에서 붙였다는 학설이 있다. 도교에서는 그 의미를 오묘함, 심오함, 깊고 고요함으로 해석하여 다른 색보다는 훨씬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풀이는 위키백과와 나무위키를 참조하였음). 학산이 “수(水)에 해당한다. 사시(四時)로는 겨울이요, 방위(方位)로는 북(北)이며, 오성(五聲)으로 우조(羽調)”라고 역학적 의의를 밝힌 것과 같다.

이응은 나죽지 않는 ‘없’

1976년 8월 30일, 다석은 제자 박영호에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나라 하고 하느님을 너라고 하였을 때 나를 하느님 너 속에 바쳐서 넣으면 하느님께서 너가 나아지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나너 너나’입니다. 나와 너는 나너지는 것인데 여기서는 나너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또 1980년 3월 13일, 다석의 90돌 난날(生日)에 박영호가 다석의 구기동 집을 찾았을 때 이런 말을 남겼다. “어떻게 이렇게 꼭 막히었는지 나고 드는 것을 도무지 몰라. 알 수 없어요. 저 얼굴이나 이 얼굴이나 낯익은 얼굴인데 도무지 시작을 알 수 없어요. 모를 일이야. 참 알 수 없어.”라고. 그 자리에서 ‘저 얼굴’은 아내 김효정을 가리키고, ‘이 얼굴’은 제자 박영호를 가리킨다. 다석은 언젠가 이런 말도 남겼다.

“숨은 목숨인데 이렇게 할딱 숨을 쉬어야 사는 몸은 참 생명이 아닙니다. 이 할딱 숨 너머에 영원한 숨이 있습니다. 누에는 죽어야 고치가 됩니다. 죽지 않으려는 생각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실을 뽑았으면 죽는 것입니다. 집을 지었으면 그 속에 드는 것입니다. 니르바나에 드는 것입니다. 생각의 실을 다 뽑기까지는 살아야 하고 실을 다 뽑으면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으려는 맘은 버려야 합니다. 무에서 와서 무로 가는 것 같아서 허무를 느끼는데 무가 무가 아닙니다. 신정(新正)의 새시대입니다.”

말을 잘 알아 들어야 한다. 그는 “‘없’에서 와서 ‘없’으로 가는 것 같아서 빈탕(虛無)을 느끼는데 ‘없’이 ‘없’이 아니다”라면서 그래야 ‘신정’(新正), 그러니까 새날 첫머리를 가진 새시대라고 힘준다. 생각 실로 집을 짓고 그 속에 들어 니르바나(涅槃)로 깨어나라는 이야기다. 말 그대로 목숨 끊고 죽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살아서 거듭나는 깨우침이다. 실을 뽑는 내내 ‘좀나’(小我)는 죽고 죽어서 ‘큰나’(大我)로 거듭난다. “생각의 실을 다 뽑기까지는 살아야 하고 실을 다 뽑으면 죽어야 합니다.”라고 말한 까닭이다. “‘없’이 ‘없’이 아니다”라는 말을 되새김해야 한다.

뜬금없는 이, 더할 나위 없는 이, 쓸데없는 이, 난데없는 이, 갈 데까지 간 이, 나죽지 않는 이, 벼락맞은 이, 더없는 이, 있는 그대로, 저 스스로, 저 저절로……. 그렇게 이어 이어 가오는 이가 깨어난 이다. 스스로 깨어나고 저절로 깨어나는 이. 늘 끄트머리에 깨어나는 나. 다석은 그런 나를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어 이어 예 한 점이 내가 아닐까. 이 한 점에 힘이 붙고 능력이 붙고 수가 생겨 몸성히 마음놓이 이것이 내가 아닐까. 마음이 놓일 때 마음은 비어 진리를 담을 그릇이 준비되고 몸성히 불이 될 때 몸은 살아 임을 그리워하게 된다. 목숨 쉼은 불사름이요, 말씀 쉬면 물 씻음이니 깨끗하게 비고 아름답게 태워서 새로운 바탈을 내놓음이 숨쉬는 한 목숨이요, 영원히 이어나갈 이 목숨이기에 맘 비고 몸성히 숨쉬는 한 목숨이다. 나의 바탈을 비고 비어 참을 그리는 것인데 몬으로 지어 먼지가 되면 흙덩이처럼 가득 차 새로운 바탈을 내지 못하고 힘도 없고 수도 없어 숨도 못 쉬는 흙덩이가 되고 만다.” (『제소리-다석 류영모 강의록』, 57쪽).

본디 가진 바탈(本性)을 비고 비어 참을 그리는 자리에 이응이다. 그래서 학산은 “ㅇ은 공(空)을 의미한다. 수로는 십(十)에 해당한다. ㅇ이 십(十)이라면 ㅇ에서 싹트기 시작한 ㆁ(꼭지이응)은 일(一)일시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물기운 속에서 나무의 싹이 트기 시작하니 오행 상생의 ‘수생목’(水生木)이 되는 것이다. 어쨌든 ㅇ이 십(十)이요 ㆁ이 일(一)이라면 우리 국문(國文) 초성의 순서는 종래와 같이 ㄱ으로 시작할 것이 아니라 ㆁ으로 시작하여 ㆁㄱㄴㄷㄹㅁㅂㅅㅈㅇ…의 순으로 하는 것이 마땅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하여는 동학(同學)의 엄정한 검토(檢討)를 바라는 바이다. 하여간 ㅇ은 그 상에서 보듯이 공(空)이다. 공은 무엇인가. 공은 모든 시간성의 근원이요 모든 공간성의 본초(本初)이며 만유(萬有)의 중(中)으로서, 요순(堯舜)의 궐중(厥中)과 공자(孔子)의 시중(時中)과 오늘날의 정중(正中)이 다 이 공(空)에서 유래하는 것이라 하겠다.”라고 속뜻(意義)을 길게 붙였다.

학산이 밝힌 ‘ㆁ’(꼭지이응)의 역학적 의의(意義)는 이렇다. “ㆁ(꼭지이응)은 ㅇ(이응)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발음되는 부위가 이미 목구멍을 떠나서 어금니로 옮겨 오는 동시에, 나무가 물에서 나서 형상(形狀)이 있기 시작하는 것이니, 마치 연한 새싹이 물에서 나와서 아직도 물기가 많지만 그래도 나무에 속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음(牙音)에 속한다. 그러나 ㆁ(꼭지이응)은 너무 연약하기 때문에 아음제자(牙音制字)의 시초가 되지 않고, ㆁ(꼭지이응)이 더욱 완실(完實)하여 견고하게 바탕을 이룬 것을 나타내는 상기 ㄱ이 아음제자의 기본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ㅇ(이응)이 공허하여 열(十)의 뜻이 있다면 ㆁ(꼭지이응)은 열에서 갖난 하나(一)의 뜻이 있다고 보겠다. 역(易)에서는 ‘하나가 열이 없으면 체(體)가 없고, 열이 하나가 없으면 용(用)이 없다’고 하였으니, 열과 하나는 실로 서로 체(體)도 되고 용(用)도 되어 십일귀체(十一歸體)라고 하겠다.”

 

그림5) 『동의보감』에 실린 ‘신형장부도’(身形臟腑圖)이다. 정기신(精氣神)의 순환은 물론이요, 인체를 대우주와 대응시키는 천인상응론(天人相應論)을 보여준다. 정신과 물질의 상호작용으로 병을 꿰뚫는다. 『황제내경』을 비롯해 동아시아 의학서와 조선의 향약론을 집대성하여 허준이 편찬했다. 소리는 이 몸에서 나는 것이다. 소리가 먼저요, 글꼴이 뒤를 따른다. 몸을 알지 못하면 글꼴에 심어 놓은 철학을 꿰뚫지 못한다. 신형장부도는 이응과 꼭지 이응이 돌아가는 숨자리를 잘 보여준다.
그림5) 『동의보감』에 실린 ‘신형장부도’(身形臟腑圖)이다. 정기신(精氣神)의 순환은 물론이요, 인체를 대우주와 대응시키는 천인상응론(天人相應論)을 보여준다. 정신과 물질의 상호작용으로 병을 꿰뚫는다. 『황제내경』을 비롯해 동아시아 의학서와 조선의 향약론을 집대성하여 허준이 편찬했다. 소리는 이 몸에서 나는 것이다. 소리가 먼저요, 글꼴이 뒤를 따른다. 몸을 알지 못하면 글꼴에 심어 놓은 철학을 꿰뚫지 못한다. 신형장부도는 이응과 꼭지 이응이 돌아가는 숨자리를 잘 보여준다.

글쓴이가 ‘ㆁ’(꼭지이응)에 이어붙여서 푼 풀이다. “빛숨의 우주 한늘은 이응이요, 그 이응에 ‘앗숨’ 박힌 소리가 꼭지이응이다. 크고 큰 우주 한늘에 참사람의 씨 ‘ㅣ’가 곤두선 꼴이요, 텅 비어 빈 빈탕에 ‘하나’가 난 꼴이다. 하늘땅사람(天地人)의 사람 ‘ㅣ’가 우주 한늘에 박힌 꼴이요, 홀로 숨빛 낸 꼴이다. 산 사람은 숨을 태워 빛내는 별이다. 그래서 그이 홀로 숨빛이다. 꼭지이응은 텅 비어 빈 ‘비’요, 하나가 난 꼴로 ‘씨’요, 아직 깨어나지 못한 난꼴의 씨알로 ‘몬’이다. 참을 깨고 캐고 내야 참나의 얼빛이 터진다. 터져야 숨빛이 환하다. 꼭지이응은 참나의 씨알이므로.”(「다석의 한글철학②」참조)

‘씻어난이’(聖人)는 제나(自我)를 다 살라서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맑고 시원한 사람이다. 하얀 불꽃으로 사르고 말씀으로 살라서 깨끗이 씻어났으니 거듭난 사람이다. 사람은 바탈(本性)을 사르고 살라서 오르고 자란다. 사람은 그렇게 자람이 되어야 속알이 찬다. 사람이 자람 되고 자람이 차람 되어야 빈탕의 속알로 거룩해진다. 거룩한 사람. 바로 그가 참나(眞我)로 솟구쳐 얼 깬 솟난이다.

다석 류영모는 나 난 남 낭을 말했다. 나가 난이 되고 난이 남이 되고 남이 낭이 된다. 내가(나) 날마다 나를 낳고(난) 나니(남) 나무(낭)란 얘기다. 예서 늘 숨 틔워 내가 그리 서도록 하는 나무는 무얼까? 예 숨 그리스도록의 십자가다. 으이아의 가온찍기로 돌돌 돌아가는 나무다. 없이 있는 나무 소용돌이(卍)! 어쩌면 그것은 꼭지이응의 ‘숨’일지 모른다. 그런데 노자 늙은이는 27월(章)에 “잘 다닌 데는 바퀴자국이 없고, 잘한 말에는 티 뜯긴데 없고, 잘 센 셈에는 산가지 안 쓰고, 잘 닫은 데는 빗장 없어도 못 열고, 잘 맨데는 줄 죔 없어도 못 풀겠네”라고 했다. 이응이다. 텅 빈 빈탕의 이응이 싹을 틔운다. 꼭지이응이다.

- 참고문헌 -

류영모 글, 다석학회 엮음, 『다석일지』, 동연, 2024
박영호 지음, 『다석전기(류영모와 그의 시대)』, 교양인, 2012
류영모 말씀, 박영호 엮음, 『씨의 메아리 다석어록: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 홍익재, 1993
박영호 엮음, 『다석 류영모 어록: 다석이 남긴 참과 지혜의 말씀』, 두레, 2002
박영호 엮음, 류영모 글, 『다석 류영모 어록: 제나에서 얼나로』, 올리브나무, 2019
안재홍선집간행위원회, 『민세안재홍선집2』, 지식산업사, 1983
이정호 지음, 『훈민정음의 구조원리-그 역학적 연구』, 아세아문화사, 1975
원불교 교화훈련부 2015, 『대종경』, 문학동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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