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 + ㅇ, 즉 우주에 참사람의 씨가 박힌 꼴
ㅣ가 ㅇ에 앞서니 '나'는 곧 몸 아닌 정신
나가 이렇게 곤두 서 있듯 먼 훗날에도 그럴 것
“첨도 저녁이오 나종도 저녁이다. 첨과 나종이 한가지 저녁이로다. 저녁은 영원하다. 낮이란 만년을 깜박어려도 하루살이의 빛이다. 아 영원한 저녁이 그립도소이다―파동 아닌 빛 속에서 쉼이 없는 쉼에 살리로다.” -다석 류영모, 『성서조선』(1940년 8월호)
“혀뿌리를 가지고 목구멍에서 입안으로 통하는 통로를 닫고 날숨을 코로 내뿜어 내는 소리” 『훈민정음(해례본)』 제자해의 “ㆁ雖舌根閉喉聲氣出鼻”의 풀이다.
나 내고 나 낳고 나 되고 나 이루는 나날이다. 내가 나를 늘 내는 나날이요, 오늘로 늘 ‘오늘살이’하는 나날이요, 이쪽저쪽 없이 오롯한 서슬 타는 나날이다. 나날이 저절로 숨 쉬는 ‘빛숨’이 우주 별이다. 나 내는 나남의 빔에 빛(日) 나는(生) 별(星).
‘ㅣ’는 참사람(眞人)의 씨다.
‘ㅇ’는 우주 하늘 빔(太虛)이다.
‘ㅣ’가 ‘ㅇ’에 벼락번개로 난 글꼴이 ‘꼭지이응’이다.
별은 본디 스스로 빛을 내며 반짝이는 우주 빛숨이다. 그 우주 빛숨이 몸꼴(形像)에 힘입어 ‘저절로’ 숨빛을 틔우니 ‘나’로 숨 튼다.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生氣)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되니라”(창1:7)는 옳은 소리다. 생기(生氣)는 산숨․낸숨이다. 생령(生靈)은 ‘산알․산얼’이요, 깨어난 ‘깬얼’이다.
“없극(無極)에 큰극(太極)”은 바른 소리다. 그 자리에 솟는 빛숨이니, 오직 숨 하나다(氣一元). 숨은 쪼개지지 않는다. 노자 늙은이(老子)가 말한 “이름 없에 하늘 땅이 비롯고(無名天地之始), 이름 있에 잘몬의 어머니(有名萬物之母). … 이둘은 한끠 나와서 달리 이르(브르)니(此兩者同出而異名), 한끠 일러 감아(同謂之玄), 감아 또 감암이(玄之又玄) 뭇 야믊의 오래러라(衆妙之門).”(다석 류영모 한글풀이)도 옳고 바른 올바른 소리다. 올이 바르니 ‘없있’ 한 꼴로 튼 숨빛이 저절로다. 빛숨이 꺼지면 숨빛도 꺼진다. 숨빛 틔워 몸소 숨 쉬어야 ‘나’ 저절로다.
빛숨의 우주 한늘은 이응이요, 그 이응에 ‘앗숨’ 박힌 소리가 꼭지이응이다. 크고 큰 우주 한늘에 참사람의 씨 ‘ㅣ’가 곤두선 꼴이요, 텅 비어 빈 빈탕에 ‘하나’가 난 꼴이다. 하늘땅사람(天地人)의 사람 ‘ㅣ’가 우주 한늘에 박힌 꼴이요, 홀로 숨빛 낸 꼴이다. 산 사람은 숨을 태워 빛내는 별이다. 그래서 그이 홀로 숨빛이다.
꼭지이응은 텅 비어 빈 ‘비’요, 하나가 난 꼴로 ‘씨’요, 아직 깨어나지 못한 난꼴의 씨알로 ‘몬’이다. 참을 깨고 캐고 내야 참나의 얼빛이 터진다. 터져야 숨빛이 환하다. 꼭지이응은 참나의 씨알이므로.
민세 안재홍은 논문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의 제2장 “조선 정치철학과 신민족주의”에서 “조선의 선민이 맨 처음에 발견한 세계관적 철리(哲理)는 ‘비’요, ‘씨’요, ‘몬’의 그것이었다.”라고 말한다. 비․씨․몬의 한 꾸러미가 ‘꼭지이응’에서 찾아지는 까닭을 알 수 있다. 민세의 논문에서 ‘비․씨․몬’의 풀이 몇 조각을 가져왔다.
‘비’는 허공이니 우주만유가 허공에서 생성하고 출발한 것임을 규정함이다. 만유의 원시가 ‘비로소’이니, 허공본무(虛空本無)에서 만유가 출발하였음을 명징함이요, ‘빌미’․‘빌으집음’ 등이 다 그를 보임이다. 광명이 ‘비’에서 일며 통하고, 만물이 ‘비’에서 잉태되고 생장하나니, 광선의 ‘빛’ 및 ‘볕’과, 배의 ‘배’와, 잉(孕)의 ‘배어’가, 다 그것이요.
‘씨’는 종(種)이니 즉 종자(種子)이다. 허공이 세계의 외연이면, 종자는 그 중핵이요 섬위(纖緯)이다. 조선 맨 처음의 역사의 출발이 아사달사회이니(阿斯達社會)이니, 아사달은 ‘아씨닿’이라.
‘몬’은 물질(物質)을 이름이라. 세계 생성의 호대(浩大)한 물질 방면은 ‘몬’으로써 일컬었나니, 집결이 ‘모음’ 혹 ‘모듬’이요, 물질의 부유방산(浮遊放散)되는 잔재(殘滓)는 ‘몬지’이다[지는 잔재요 분(糞)].
‘비’요 ‘씨’요 ‘몬’이요 하는 삼자(三者)의 외(外)에, 우주의 근원이 되고 핵심을 이루는 섭리의 힘이라고 해서, 후생(後生)한 신앙이요, 철리의 주축으로 된 자 - ‘알’ 혹 ‘얼’이니, 그는 지성(知性:알)이요, 핵심(알)이요, 또 정령(알․얼)이다.
꼭지이응은 이응(ㅇ)에 고디 하나(ㅣ)가 벼락번개로 꽂혀 난 꼴이다. ‘고디’는 곧을 정(貞)으로 곧이 선 이를 뜻하는 다석의 한글철학 뜻말이다. 사람을 뜻하는 ‘ㅣ’는 그래서 참사람의 씨다. 다석은 늘 ‘ㅣ’를 생각했다. ‘ㅣ’가 먼저라고 보았다. 언젠가 빛고을 광주 동광원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이현필과 함께 양림동 양림교회 앞을 지나면서 다석은 이런 소리를 나지막이 읊었다.
“ㅣㅣㅣㅣㅣ”
그러나 그와 더불어 옆을 걷고 있던 이현필이 소리를 받았다.
“ㅣ보다는 ㅏ가 먼저 아닐런지요?”
다석은 “‘ㅣ’가 먼저지요!”라고 되받았다.
왜 다석은 ‘ㅣ’가 먼저라고 말했을까? 『다석어록』을 살피니 “나는 몸이 아닙니다. 생각하는 정신입니다. 정신은 밖에서 보이지 않지만 정신은 영원합니다. 정신은 머리를 하늘에 두고 있는 존재이기에 나는 막대기를 세워 영어로 ‘I’라 하듯이 모음 하나로 ‘ㅣ’라고 합니다. 이 이 저 이라 하는 것이지요. ㅣ긋이 태초에 맨 첫 긋과 맨 마지막 맞긋이 한통이 되어 영원한 생명이 됩니다.”라고 남겨 놓았다.
해방되기 앞에 쓰던 다석의 수첩에 이런 시 한 편이 있다.
ㅣ 소리
ㅣㅣㅣㅣ ㅣㅣㅣㅣ ㅣㅓㅣㅓ ㅣㅓㅣㅓ
ㅓㅣㅓㅣ ㅓㅣㅓㅣ ㅣㅣㅣㅣ ㅣㅣㅣㅣ
ㅣㅓㅣ ㅣㅕㅣㅡㄹㅣ ㅓㅣㅣㅕ ㅣㅓㄹㅏ
쉬운 뜻으로 풀면, “줄곧 이이이이로 이어서 잇고 잇고 이어이으리. 어서어서 잇고 이어서 이이이이로 줄곧 이으리. 기어이 이어이어서 이으리. 어서 이어이어 이어라.”로 풀린다. 그가 얼마나 ‘ㅣ’를 곰곰이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늘 ‘ㅣ’가 문제라고 하였다. “ㅣ가 문제다. 이렇게 ㅣ가 나섰다. 하늘 밑이 이처럼 ㅣ가 나섰다. 나가 일어나 이렇게 서 있다. 먼 훗날에도 이렇게 곤두설 것이다. ㅣ는 이 땅을 뚫고 하늘을 뚫고 나간다. 우리의 정신이 위로 올라간다. 이 머리의 이마가 앞잡이 노릇을 하고 위로 올라간다. 이마는 내 님을 맞을 이마이다. 이 내 머리를 깔고 앉을 수 있는 것은 참이요 얼이신 절대자만이 한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볼 수 있을 터이다.
‘ㅣ’는 줄곧 하늘이 세워 얼줄 이은 참사람의 씨요, 빛숨 틔우는 때의 글꼴이다.
‘ㅇ’는 텅 비어 빈 빈탕의 우주 한늘의 글꼴이다.
꼭지이응은 참사람 씨가 우주 한늘 이응에 벼락번개로 곤두선 글꼴이다.
꼭지이응은 빛숨의 숨빛을 씨알로 가진 글꼴이다.
꼭지이응은 참나의 씨알이다. 참의 숨빛을 가진 씨알!
“참사람의 숨은 발뒤굼치로 쉬고, 뭇사람의 숨은 목구멍으로 쉰다.”(다석어록)
때(時) 나니 빔(空) 난다. 때 가야 빔 간다. 때 있어 빔 있다. 때 없에 빔 없다. 때 난 곳에 빔이 너울너울 춤춘다. 빔이 춤추니 때가 여기저기거기다. 여기저기거기 빔이 솟는다. 때가 벼락쳐 빔이 터진다. 늘 때빔(時空)이 한 꼴로 돌아간다. 꼭지이응은 이응이 먼저가 아니다. 꼭지가 먼저다. 꼭지는 날벼락이요 천둥 번개다. 벼락번개가 우르르 쾅 내리치니 이응이 우주 대폭발로 터진다. 기윽(ㄱ)이 하늘에서 온 얼이듯이, 꼭지이응(ㆁ)은 ‘참나’(眞我)의 씨알이다. 벼락번개가 씨에 내리쳐 이응이 깨질 때 숨빛의 ‘앗숨’이 크게 환하다.
꼭지이응(ㆁ)은 우주 하늘 씨알이다. 씨에 앗숨이 들었으니 ‘씨알’이다. 생명은 누구나 하늘 씨알이다. 수운 최제우는 시천주(侍天主)라 하였다. 사람은 하늘 씨앗으로 왔으니 사람마다 누구나 하늘님을 이미 마음에 모시고 있는 ‘모신 하늘님’이다. 그러니 시천주는 ‘하늘님을 모셔라’가 아니라, 그냥 ‘모신 하늘님’이다. ‘모신 하늘님’으로 온 이가 사람이다. 하지만 ‘모신 하늘님’은 딱딱한 껍질 속에 잠들어 계실 뿐이다. 깨지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이 껍데기가 제 것 밖에 모르는 ‘제나’(ego)다. 생명은 저절로 제나를 깨지 못한다. ‘모신 하늘님’을 깨우려면 벼락번개가 내리쳐 대폭발을 일으켜야 한다. 말씀의 ‘말숨’이 벼락번개다. 곤두선 ‘ㅣ’ 꼭지다.
오직 ‘말숨’의 빛숨이 벼락번개로 씨를 내리쳐 ‘앗숨’을 틔운다. 씨에서 ‘앗숨’을 깨 캐 내야 시원시원한 빈탕의 텅 빈 ‘참나’(眞我)가 오롯하다. ‘참나’는 그 무엇의 ‘몸꼴’(形狀)로 있지 않다. 그렇다고 그 무엇의 뚜렷한 ‘맘꼴’(心象)로 있는 것도 아니다. 산 사람의 넋이나, 흠 잡을 데 없이 뛰어난 사람의 정신도 아니다. ‘참나’는 없이 계시는 얼이다. 빈탕으로 가득가득한 텅 빈 ‘참’의 한 가운데에 반짝이는 얼빛이다. 꼭지이응은 얼빛이 반짝이는 ‘앗숨’의 씨알이요, ‘참나’의 씨알이다.
마야 부인의 옆구리에서 나온 석가모니는 일곱 발자국을 걸었다. 발자국마다 숨빛 꽃이 피었다. 참의 불꽃을 사르는 참사람은 발뒷굼치로 숨을 쉰다.
‘앗숨’이 깨지고 터져야 비로소 제대로 ‘모신 하늘님’이다. 참사람은 ‘모신 하늘님’이 깨어난 사람이다. 두꺼운 껍질이 깨지고 부서져서 ‘참나’의 숨빛이 환히 밝은 사람이다. 꼭지이응(ㆁ)이 기윽(ㄱ)보다 앞서 있는 것은 ‘참나’의 씨알이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온 얼이 벼락번개로 이 꼭지이응을 깨운다. 다석은 『다석어록』에 이런 말을 남겼다.
“‘긋’이 나다. 나는 ‘긋’이다. 영원한 생명의 긋이 나다. ‘긋’자의 가로로 그은 막대기(ㅡ)는 세상이다. 가로 막대기 밑의 시읏(ㅅ)은 사람들이다. 가로 막대기 위의 기윽(ㄱ)은 하늘에서 온 정신인데 그 정신이 땅에 부닥쳐 생긴 것이 사람이다. 정신이 육체를 쓴 것이 사람이다. 사람의 생명은 정신이다. 이 영원한 정신의 긋이 제긋이요, 그것이 나다. 나는 이제 실제로 여기 있는 이제긋이다.”
“우리 앞에는 영원한 생명인 정신의 줄곧 얼줄이 늘 늘어져 있다. 이 우주에는 도(道)라 해도 좋고, 법(法)이라 해도 좋은 얼줄이 백 년이 가도 천년이 가도 드리워져 있다. 우리는 이 얼줄을 버릴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다. 이 한 얼줄을 잡고 좇아 살아야 한다.”
“천 가지, 만 가지의 말을 만들어 보아도 결국은 하나밖에 없다. 하나밖에 없다는 데는 심판도 아무것도 없다. 깨는 것이다. 깨는(覺) 것, 이것은 하나이다. 한(天) 나(我)가 하나이다.”
꼭지이응에 이토록 깊은 뜻이 있다는 걸 다석은 어떻게 알아차렸을까? 본래부터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다석이 그렇게 뜻을 심었던 것일까? 사실 다석은 이응과 꼭지이응을 쓸 때는 ‘없이 계시는 님’의 빛숨을 늘 떠올렸다. 까닭은, 빛에 숨이 반짝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1940년 8월호로 펴낸 『성서조선』(139호)에 다석 류영모는 「저녁찬송」을 써 보냈다. 이 글은 작은 말이마(小主題) 두 개로 꾸며져 있다. 첫째는 ‘어둠’이고, 둘째는 ‘쉼’이다.
‘어둠’을 말이마로 세운 글에 이런 글귀가 있다.
“태양계(太陽界)에서 미(美)와 력(力)의 대본(大本)이 태양(太陽)이지만 태양(太陽)도 물질(物質)이어니 우주(宇宙)의 한 작은 화소(火燒)니라. [광(光)은 우주파동(宇宙波動)의 소부분(小部分)]. 정신(精神)은 물질(物質)보다 크다. 물질이상(物質而上)이다. 공(功)을 감추는 미(美)와 력(力)은 등잔(燈盞)속의 기름이오. 상(賞)을 타는 광영(光榮)은 심지 끝의 불이니라. 기름은 은밀(隱密)한 중(中)에 계신 아바지의 영원(永遠)하신 지시(指示)대로 감이오. 불은 바러진 세상(世上)의 한때 자랑이다. 창세기(創世記)에 ‘(먼저)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다.’ 하였고, 묵시록(黙示錄)에 ‘새하늘과 새따에는 다시 해빛이 쓸데없다.’ 하였으니, 첨도 저녁이오 나종도 저녁이다.”
「저녁찬송」은 『다석일지(4권)』(홍익재, 1990) 579쪽에도 실려 있다. 글쓴이가 한자 앞에 한글을 붙이고 띄어쓰기를 고쳤다. 나머지는 다석의 글맛 그대로다. 굵은 글씨로 나타낸 ‘광(光)은 우주파동(宇宙波動)의 소부분(小部分)’을 풀면 ‘빛은 우주 파동의 작은 부분’이라는 뜻이다. 이 말과 맨 위에 가져다 쓴 말에서 ‘파동 아닌 빛 속에서 쉼이 없는 쉼에 살리로다’를 더불어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다석은 양자역학(量子力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이런 말을 꺼낸 까닭은 그가 짓고 만들어 쓴 한글 가운데는 도무지 알아차리기 힘든 글꼴들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글꼴의 멋을 위해서 지었다고 보기 힘든 글꼴이다. 게다가 한 꾸러미의 한 묶음, 아니 꽃다발처럼 ‘글다발’로 묶어서 그린 글꼴들도 적지 않다. 이런 글꼴의 뜻을 풀기 위해서는 양자역학에서 자주 언급되는 중첩․얽힘․도약을 알아야만 한다. 물론 말로는 다 풀어질 수 없이 나타난 꼴로 ‘난꼴’(現狀)이니 잘 알아차려서.
이 글을 읽는 이들은 한글철학을 이야기하면서 갑자기 양자역학의 중첩․얽힘․도약이라니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따져 물을지 모르겠다. 다석의 한글철학을 오래 공부해 온 글쓴이도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그런 양자역학의 얼개로 풀어야 뜻이 알아차려지는 걸 어찌한단 말인가! 글꼴 하나에 ‘서로’의 뜻이 중첩되어 있는데 어떤 글꼴은 그조차도 얽혀 있어서 마치 ‘서로서/로서로’(相卽相入)의 ‘난꼴’을 보는 듯하다.
아주 흥미롭게도 ‘글다발’의 뜻이 풀려 환히 밝혀지는 찰나에 예외 없이 얼이 둥 뚜렷이, 그러니까 얼빛이 뚝 떠 솟구치는 기쁨에 휩싸인다. 한글을 우리 민족에게 보내주신 하나님의 계시라면서 ‘옳은 소리, 바른 소리’라고 생각한 다석의 한글철학이 이해되는 순간이다.
① 윗 동그란 글꼴만 소리내 읽으면 ‘옴 맘 바삐’이고, 뜻을 풀면 ‘네 녘 올발라 돎에 쉬지않는 옴 욈이 참맘을 바삐’로 읽힌다. 이 풀이는 여러 풀이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하늘아(․) 든 글꼴은 반드시 하늘 숨 쉬며 도는 ‘참’이라는 걸 알아차려야 한다. 이 글꼴은 위아래 한꼴로 중첩되어 있다.
② 첫소리 큰 이응에 작은 이응이 있고, 또 그 이응에 히읗이 들었다. 그 히읗 속에 하늘(․)이 들었다. 큰 이응 속 글꼴을 안팎으로 이어 읽으면 ‘한웋’이다. 큰 이응의 글꼴은 ‘얼’이다. 안에 들어 맞붙은 글꼴. 작은 이응 속 ‘ᄒᆞᆫ’도 한꼴이다. 하나로 얽힌 ‘얼’의 첫소리 이응(ㅇ)은 한늘(宇宙)이다. 끝없고 밑없는 한늘에 속알로 계신이가 ‘웋’이요, ‘한’이라는 뜻. 하나로 얽혀 있다. 중첩이고, 얽힘이다.
③ 「제소리」에 “이 끗 이, 올 끈 이로, 온 끝에 까지, 말씀 사르므로, 생각이오니, 맨첨 부터, 함께계심.”이라 썼다. 글이 든 그림이 중요하다. 가운데 ‘함께’ 위아래로 ‘생각’/‘사름’이 날개를 펴고 돌고 있다. ‘맨첨’/‘온끝’도 돌아간다. ‘이’/‘끗’도 똑같다. 다른 그림엔 ‘함께’를 가온(ㄱㄴ)에 넣었다. 그림은 ‘끝없’(∞)이고, 그 ‘끝없’에 글이 들어있다. 둘을 하나로 풀어야 풀린다. 중첩․얽힘․도약이 동시에 ‘끝없’으로 일어난다.
④ 위 세 녘의 한 줄을 읽으면 ‘한웋인이긋이꼭눈땅’이다. ‘인’의 첫소리는 여린 히읗을 써야 하고, ‘눈’의 끝소리는 쌍니은을 써야 한다. 이 날 일지에 쓴 시를 한꼴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위아래 동그라미 글꼴은 얽혀있다.
⑤ ‘옴’에 글을 넣었다. 이응 속은 ‘둔둠둥글’인데, 기윽(ㄱ)에 ‘둔둠둥’을 넣었다. ㄴㅁㆁ끝소리는 합용병서. 미음 속은 ‘졔계’다. 여기 ‘예’, 저기 ‘졔’, 거기 ‘계’. 졔계는 하느님 계신 곳이다. 옴 소리에 둥글 옴의 계가 열린다. 소리․글․뜻이 한뜻 얽혀 도약!
다석 류영모는 1912년 9월부터 1913년 6월까지 도쿄물리학교(東京物理学校)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익히고 배웠다. 그 앞의 때, 그러니까 1910년부터 2년 동안은 오산학교에서 배우미(學生)들을 가르쳤다. 그곳에서 시당 여준(時堂 呂準, 1862~1932)과 단재 신채호(丹齎 申采浩, 1880~1936)를 만났다. 그들은 다석에게 『노자』를 권유했다. 여준은 오산에 올 때 고전과 신학문 분야의 책을 많이 가져왔고, 단재는 유교․불교․도교뿐 아니라 민족의 전래 종교인 고신도(古神道)에도 관심이 컸다. 다석은 자연스레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다석의 말이다. “나는 20살쯤에 불경과 『노자』를 읽었어요. 그러나 없(無)과 빔(空)을 즐길 줄 몰랐어요. 요새 와서야 비로소 빔과 친해졌어요. 불교에서 말하기를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빔에 갈 수 있다고 했어요. 간두에 매달려 있는 한 빈 데 갈 수 없어요. 제나를 탁 놓아버려야 합니다.”
다석은 유학하는 동안 ‘도쿄조선YMCA’를 자주 들렀다. 그곳에 삼성 김정식(三醒 金貞植, 1862~1937)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열 다섯에 삼성의 권유로 서울 연동교회를 다녔었다. 삼성은 1906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도쿄조선YMCA)를 세우고 초대 총무에 취임했다. 그리고 1909년에는 조만식(曺晩植), 정익로(鄭益路) 등과 ‘범종파연합교회’인 도쿄조선인교회를 설립했다. 또 일본의 무교회주의 기독교인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와 친분을 쌓았다. 다석은 도쿄조선YMCA에 드나들며 그들과도 인연을 맺었다. 다석이 무교회주의를 받아들인 것도 이때였다.
저에 붙좇아 따름.
법에 붙좇아 따름.
저에 숨빛 밝.
법에 빛숨 밝.
- 우리말 풀이 -
몸꼴 : 형상(形像)의 우리말 풀이다.
산숨․낸숨 : 생기(生氣)의 우리말 풀이다.
산알․산얼․깬얼 : 생령(生靈)의 우리말 풀이다.
난꼴 : 이 글에서는 알 란(卵)의 뜻말로도 쓰고, 현상(現狀)의 우리말로도 썼다.
비 : 허(虛)의 우리말이다.
씨 : 종(種)의 우리말이다.
몬 : 물(物)의 우리말이다.
긋 : 하늘이 땅 그리워 내리는 기윽(ㄱ)이, 세상인 땅(ㅡ)에 부딪혀 난 것이 사람(ㅅ)이다.
고디 : 곧을 정(貞)의 뜻을 이어적기로 쓴글씨다. 다석이 ‘거룩’을 담아 그리썼다.
서로서/로서로 : 불교의 상즉상입(相卽相入)의 우리말 풀이로 썼다. ‘서로서로서로’의 한 가운데에 빗금을 그은 것이다. ‘서로서’는 홀로에 서로가 일어서는 것이요, ‘로서로’는 서로가 홀로를 내고 낳는 것이다.
없 : 무(無)의 우리말 풀이다. ‘없음’이 아니라, 그냥 ‘없’이다.
빔 : 공(空)의 우리말 풀이다. ‘비어있음’이 아니라, 그냥 ‘빔’이다.
※글 가운데 “한끠 일러 감아(同謂之玄), 감아 또 감암이(玄之又玄)”의 ‘아’와 ‘암’은 모두 하늘아를 써야 한다. ‘참사람’과 ‘뭇사람’의 ‘람’도 하늘아를 쓴다. 중세 한국어 ‘생각’의 ‘생’도 하늘아를 쓴다.
- 참고문헌 -
류영모 글, 다석학회 엮음, 『다석일지』, 동연, 2024
류영모 말씀, 박영호 엮음, 『씨의 메아리 다석어록: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 홍익재, 1993
박영호 엮음, 『다석 류영모 어록: 다석이 남긴 참과 지혜의 말씀』, 두레, 2002
박영호 엮음, 류영모 글, 『다석 류영모 어록: 제나에서 얼나로』, 올리브나무, 2019
이정호 지음, 『훈민정음의 구조원리-그 역학적 연구』, 아세아문화사, 1975
안재홍선집간행위원회, 『민세안재홍선집2』, 지식산업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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