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학들의 뿌리를 더듬어 본다⑦]
이용익이 설립했다가 천도교 거쳐 김성수가 인수
엄귀비가 세운 숙명여대도 친일파 온상으로 전락
대학 숙주 삼아 학생 고혈 빨아온 교육 기생충들
고려대의 전신 보성(普成)전문학교를 설립한 인물은 구한말 탁지부대신과 군부대신을 지낸 이용익이다. 보부상 출신으로 보통 사람은 닷새 걸리는 약 200㎞ 거리의 서울과 전주를 한나절에 주파할 정도로 속보(速步)의 달인이었다. 민씨 척족 민영익의 문객이 됐다가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장호원(경기도 이천)으로 피신한 민비(훗날 명성황후로 추존)와 창덕궁에 있던 고종 간의 연락을 맡았다.
이 공로로 왕실의 신임을 얻어 함경도 단천부사와 영흥부사로 발탁됐고, 이곳에서 채굴한 사금을 왕실에 바쳐 출세 기반을 다졌다. 세평은 좋지 않았다. 가혹한 수탈로 민란을 유발해 여러 차례 유배형을 받았다. 주화를 마구 발행해 백성의 원성을 사고 독립협회에 의해 고발되기도 했다. 그는 러시아와 인접한 함경북도 명천 출신인데다 민비와 가까웠던 만큼 친러파였다. 일본은 조선 병탄 계획을 추진하는 데 그가 걸림돌이라고 보고 러일전쟁 직후인 1904년 2월 일본으로 압송해 회유와 압박을 가했다.
최초 사립 보성전문, 고종 하사금으로 세워
이용익은 그곳에서 근대 교육기관을 돌아보고 인쇄기와 서적 등을 구입해 10개월 만에 귀국했다. 고종의 하사금으로 이듬해인 1905년 5월 5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보성전문학교를 열었다. 처음에는 관립한성러시아어학교 건물을 빌려 쓰다가 1906년 이웃(현 조계사 터)의 기와집 200여 칸을 사들였다. 교재 출판을 위해 교내에 보성사도 세웠는데, 13년 뒤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역사의 현장이 됐다.
보성전문은 최초의 사립 전문학교였다. 이전에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나 한성사범학교·법관양성소 등 관립학교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종의 하사금으로 학교를 세운 데다 당시 이용익이 대한제국 황실의 금고지기 역할을 했기 때문에 순수한 사학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도 있다.
일제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맺고 침략을 본격화하자 이용익은 국외로 망명해 프랑스와 러시아 등지에서 구국운동을 펼치던 중 1907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숨졌다. 이용익에 이어 손자 이종호가 보성전문학교 운영을 맡았다가 1911년 손병희가 이끌던 천도교에 넘겼다.
조선총독부가 1915년 공포한 전문학교 규칙에 따라 보성전문은 보성법률상업학교로 격하됐다가 전국 독지가들의 성금에 힘입어 1921년 전문학교로 인가받았다. 1918년 교사를 낙원동으로 옮겼고 1922년 다시 송현동으로 이전했다. 그러나 3·1운동의 여파로 손병희가 숨지고 천도교 조직이 일제의 혹독한 탄압을 받은 데다 1929년 세계 경제공황까지 겹치면서 운영난에 빠졌다.
천도교서 보성전문 인수한 김성수의 친일행각
보성전문의 세 번째 주인은 김성수였다. 전북 고창의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두 살 때 큰아버지 양자로 들어가 친부와 양부 양쪽의 유산 상속자가 됐다. 일본 와세다대로 유학했다가 귀국해 1915년 24세의 나이로 중앙학교(현 중앙고)를 인수했다. 1919년에는 경성방직을 설립하고 1920년 동아일보를 창간했다.
그리고 김성수는 추곡 5500석의 토지를 기부하는 대가로 보성전문을 인수했다. 성북구 안암동에 6만2000평의 대지를 마련해 고딕 양식의 화강암 석조전 본관과 도서관(현 대학원)을 짓고 1934년 이전했다. 본관 건물을 지을 때는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이 인부로 일했다. 1944년에는 일제의 강요로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해방 후 보성전문학교 이름을 다시 찾은 뒤 1946년 종합대로 승격하면서 한국을 대표한다는 뜻으로 교명을 고려대(Korea University)로 정했다. 천도교는 운영권을 넘기면서 보성이라는 교명은 꼭 유지해 달라고 당부했으나 김성수는 "전문학교로서 보성 이름은 지키겠다"고 약속한 것이라고 둘러댔다. 이용익이 보성전문 이듬해 설립한 보성중고등학교는 천도교와 불교재단을 거쳐 전형필이 세운 동성학원이 운영하고 있다.
김성수는 민족자본가이자 민족교육과 민족언론을 대표하는 인물이면서도 일제강점기 말 학병 동원을 독려하고 친일 단체 간부로 활동하는 등 씻기 힘든 과오를 저질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됐지만,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돼 2018년 서훈이 취소됐다. 광복 후에는 한민당 수석총무, 민국당 최고위원, 부통령 등을 지냈다. 대지주이자 자본가라는 뚜렷한 한계를 지니면서도 손해를 감수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주도한 농지개혁에 힘을 실어주는가 하면 이승만 반대파를 규합해 반독재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광복을 전후해 보성전문 교수와 고려대 총장을 지내며 고려대 인맥을 대표해온 유진오와 현상윤도 각기 분야에서 쌓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 말 친일 경력으로 치명적인 오명을 남겼다.
숙명여전 첫 교장 일본인…종합대 승격 후 재단 친일파 차지
고려대와 마찬가지로 숙명여대의 출발도 대한제국 황실에서 비롯됐다.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엄귀비)는 1905년 양정의숙, 1906년 진명여학교와 명신여학교를 차례로 세웠다. 앞의 두 학교는 양정고와 진명여고로 발전했고, 명신여학교는 숙명여고와 숙명여대의 모태가 됐다.
엄귀비는 종로 육의전 장사치의 딸이다. 1861년 8살 때 궁녀로 입궐했다. 임오군란으로 민비가 실종되자 고종을 지극정성으로 보필해 지밀상궁이 됐다. 1885년 고종의 승은을 입었으나 민비의 노여움을 사 궁궐에서 쫓겨났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시해되자 5일 만에 다시 입궐한 뒤 이듬해 2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을 주도했다. 1897년 44세의 나이로 의민태자(영친왕)를 낳은 뒤로는 권력이나 예우가 황후를 방불케 했다.
엄귀비는 1906년 5월 22일 명종 장남 순회세자가 살던 용동궁 터(수송동 코리안리빌딩과 석탄회관 자리)에 명신여학교를 세웠다. 초대 교장으로는 정경부인 이정숙이 취임했다. 조대비(신정왕후) 조카이자 갑신정변 때 살해된 예조판서 조영하의 부인으로 엄귀비 측근이었다. 당시 여학교들은 학비와 기숙사비가 무료였으므로 재정 지원을 위해 엄귀비는 개교 후에도 자신과 영친왕의 재산을 꾸준히 기부했다. 그러나 1911년 엄귀비가 사망하고 학교 재단과 황실이 분리되면서 훗날 분규를 낳았다.
명신여학교는 1909년 숙명고등여학교를 거쳐 1938년 숙명여자전문학교로 승격하며 용산구 청파동으로 이전했다. 초대 교장으로는 경성제대 교수를 지내고 숙명여고 교장으로 재직하던 사학자 오다 쇼고가 취임했다. 그는 조선사학회를 조직하고 조선총독부 편집과장과 조선사편수위원을 지냈고 고종실록과 순종실록 편찬을 감수했다.
숙명여대는 인터넷 홈페이지에 "우리나라 교육사상 최초로 한국인 교장이 취임한 가운데 …(중략)… 외국의 자본에 의존함 없이 오직 우리 힘으로 일으킨 민족 여성 교육의 효시였다"고 내세우고 있으나 전문학교 승격 이전부터 민족적 순수성은 훼손된 상태였다. 광복 후에도 숙명여대 재단은 친일파들의 차지였다. 숙명여전은 1948년 4년제로 승격한 데 이어 1955년 종합대로 발돋움했다. 재단 이사 가운데 6명이 친일파였고 이 가운데 임숙재(초대), 김두헌(2대), 윤태림(5대), 이인기(6대)가 총장에 올랐다.
동향 연희전문 동창 둘이 세운 한양대와 세종대
한양대 설립자인 김연준은 1914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거상 김병완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향 출신 이용익의 증손자가 김병완의 서기로 일해 김연준은 어릴 때부터 이용익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고교 시절에는 이용익이 세운 보성전문을 김성수가 인수했다는 신문 보도를 보고 교육 사업에 뜻을 두었다.
독실한 개신교(침례교) 신자였고,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8세 때부터 교회 성가대로 활동하며 6촌 형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해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했다. 훗날 성악가와 작곡가로도 명성을 떨쳤다. 가곡 '청산에 살리라'와 찬송가 '어둠의 권세에서'(새 찬송가 398장)가 그의 대표작이다.
그러나 그가 세운 학교는 음대도 아니고 신학대도 아닌 공과대였다. 1939년 7월 1일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중앙교당 부속건물(수운회관)에 동아공과학원이란 이름으로 2년제의 토목과·광산과·건축과(측량과)를 개설했다. 1942년 동아고등공업학원, 1945년 건국기술학교, 1946년 건국기술전문학교를 거쳐 1948년 4년제 한양공과대학으로 승격했다. 최초의 사립 공과대학이다. 1959년에는 종합대학으로 발돋움했다. 김연준은 1980년까지 총장으로 재임한 뒤 2007년까지는 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아들 김종량도 총장을 거쳐 이사장을 맡고 있다.
김연준은 롤모델로 여기던 김성수처럼 언론사업에도 손을 뻗쳐 1960년 평화신문을 인수하고 이듬해 대한일보로 제호를 바꿨다. 1973년 수재의연금 횡령 혐의로 구속됐다가 무죄로 풀려난 일도 있었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판·검사 및 정·관계 인맥의 중요성을 절감해 한양대에 고등고시반을 개설했다고 한다. 예비고사 고득점자를 전액 장학생으로 스카우트해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하며 시험 준비를 지원했다.
김연준과 같은 함경도(단천) 출신에다가 개신교인이고 연희전문도 함께 다닌 주영하 역시 1940년 서울 중구 광희동에 경성인문중등학원을 설립했다. 먼저 주영하가 학교를 세우겠다고 하자 그와 절친한 사이였던 김연준도 창학 결심을 굳혔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경성인문중등학원은 1947년 서울여자전문학관, 1948년 서울가정사범학교, 1954년 수도여자사범대학을 거쳐 1978년 세종대학으로 거듭났다.
'일제 전시 동원 독려' 임영신이 키운 중앙대
중앙대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종로교회(1930년 중앙교회로 개칭)가 1916년 10월 17일 문을 연 중앙유치원을 시발점으로 삼는다. 중앙교회는 미국 감리회 선교사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가 1890년에 세웠다. 우리나라 근대식 유치원의 효시인 중앙유치원은 유치원 교사 양성을 위해 1922년 사범과를 설치했다가 1928년 중앙보육학교로 승격시키며 중구 정동으로 이전했다.
임영신은 1933년 이를 인수해 교장에 취임했다. 당시 34세이던 그는 전북 금산(1962년 충남으로 편입) 출신의 신여성이었다. 전주 기전여고와 기독전문여학교를 거쳐 일본 히로시마기독여자전문학교와 미국 남캘리포니아주립대에서 공부했다. 3·1운동 만세 시위에 참여하는가 하면 YWCA 총무를 맡고 이승만의 활동을 돕는 등 항일운동과 여성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1940년대 들어 친일 활동에 나섰다. 김활란·박순천·박마리아 등과 함께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을 맡아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순응할 것과 전시 동원체제에 협력할 것을 독려했다.
해방되던 1945년 10월 임영신은 중앙보육학교를 중앙여자전문학교로 확대한 데 이어 1947년 중앙여대로 승격시켰다가 이듬해 남녀공학으로 개편했다. 1953년에는 종합대학이 됐다. 중앙여전 초대 교장, 중앙대 초대 학장과 초대 총장 모두 임영신의 몫이었다. 임영신은 이승만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재선 국회의원과 초대 상공부 장관을 지내고 대한국민당 당수로 뽑히는 등 정치인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박정희 정권 들어서도 공화당 총재고문, 한국부인회 회장, 대한교육연합회 회장, 대한교원공제회 초대 이사장,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등을 지냈다.
중앙대는 2대 총장 임성희(임영신 동생), 3대 총장 임영신, 4대 총장 임철순(임영신 조카이자 양자) 등 족벌 체제로 운영되다가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1987년 재일동포 실업가 김희수에게 넘어갔다. 2008년부터는 두산그룹이 인수해 창업주 박두병의 손자 박용성과 박용현 형제가 이사장을 맡아왔다.
대학마다 똬리를 튼 친일 교육 엘리트들
1936년 성신여학교로 출발한 성신여대도 설립자 이숙종이 친일반민족행위자다. 황상익 성신학원 이사장은 2019년 6월 이숙종 34주기 추도식 자리에서 설립자의 친일 행위와 조기홍·심용현 전 이사장의 반민족행위에 관해 이례적으로 사과했다.
해방 후 처음 생겨난 대학 가운데서도 설립자가 친일파인 대학이 많다. 한국외대(김흥배), 서울여대(고황경), 동덕여대(조동식), 추계예술대(황신덕), 경성대(김길창), 동아대(정재환), 상명대(배상명), 인천대(백인엽) 등이 대표적이다.
친일파 교육 엘리트들은 서울대를 비롯한 국립대, 불교 재단의 동국대, 연세대·이화여대·계명대 등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는 물론 성균관대·국민대·홍익대·덕성여대 등 독립운동가들이 설립한 대학에서도 똬리를 틀었다.
일제강점기 때 쌓은 재산과 학력을 밑천 삼은 이들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비호 아래 대학을 숙주 삼아 숭고한 창학 이념을 갉아먹고 학부모와 학생들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부와 명예를 누린 기생충 같은 존재였다.
<※ '우리나라 대학들의 뿌리를 더듬어본다' 연재는 이번 회로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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