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교육 내세운 총련계 조선학교와는 엄연히 달라
역대 한국 정부는 재일동포들의 민족교육 열망 외면
차별·탄압·우경화 등으로 조선학교는 3분의 1로 급감
재일동포 차세대 정체성 교육 어떻게 할지 고민해야
일본의 한국계 학교 교토국제고가 지난주 일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여름 고시엔)에서 우승을 차지하자 ‘고시엔(甲子園)의 기적’으로 불리며 숱한 화제를 뿌리고 있다. 지금의 수도 도쿄(東京)와 옛 수도인 교토(京都) 대표가 맞붙은 것 자체가 이목을 집중시킨 데다, 전교생 138명에 불과한 미니학교가 처음으로 결승에 진출하고, 25년 전 창단 첫해 34대 0의 대패를 안긴 상대팀 선수가 감독을 맡아 우승으로 이끌었다는 것 등은 만화를 뛰어넘는 반전과 감동의 드라마였다.
한국계 학교여서 국내 관심도 뜨거웠지만 재학생 70%가 일본 학생
교토국제고가 한국계 학교여서 우리나라의 관심도 뜨거웠다. 윤석열 대통령과 조태열 외교부 장관 등이 우승 축하 메시지를 보냈고 이상덕 재외동포청장도 축전을 보냈다. “동해 바다 건너서”로 시작되는 한국어 교가가 공영방송 NHK를 통해 일본 전역에 생중계되는 장면은 재일동포는 물론 대다수 한국인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반면 일본의 엑스(X·옛 트위터) 등에는 “교토국제고를 고교야구연맹에서 제명하라”, “한국어 교가는 기분 나쁘다”, “왜 다른 나라 학교가 출전했나” 등의 부정적 반응이 올라왔다.
대부분의 국내 언론은 교토국제고를 한국계 민족학교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재학생 70%는 일본 학생이고, 야구부원 가운데 한국계는 3명밖에 없을 뿐 아니라 이들 모두 일본 국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더욱이 수업은 일본 교과과정에 따라 일본어로 진행되고 한국어와 한국 역사·지리는 별도 과목으로 다뤄진다.
흔히 민족학교라고 하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계열의 64개(초중고를 따로 계산하면 130여 개) 조선학교를 일컫는다. 한국계 학생이 주로 입학하고 수업도 북한 표준어인 조선어로 진행되는 각종학교(各種學校)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계열의 학교(4개) 가운데서는 동경한국학교만 각종학교이고 교토국제학교와 오사카의 건국학교·금강학교는 제1조학교(1조교)다. 1조교란 일본 학교교육법 제1조에 해당하는 학교란 뜻이다. 일본 문부성의 학습지도요령을 준수하고 검정 교과서를 수업에 사용하므로 일제 침략이나 독도 영유권 등에 대해 일본 입장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최악 재정 상황 조선학교들은 교토국제고와 사정 달라
조선학교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 학교’의 김명준 감독은 교토국제고 우승 소식을 접한 주변 반응을 보고 착잡한 심경을 SNS에 남겼다. “교토국제학교는 한국과 일본의 지원을 받는 반면 조선학교들은 최악의 재정 상황을 겪고 있다”면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학교를 지킬 수 있을지 무엇이 옳은지는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고 밝혔다. 조선학교의 법정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차별’의 김지운 감독도 “대단하고 너무 축하할 일이나 그만큼 일본 넷우익들의 혐오 발언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니 걱정”이라면서 “교토국제중고와 조선학교를 혼동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1945년 광복절 무렵 일본에 있던 한국인은 20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유학이나 취업 등 자발적으로 일본행을 택한 사람도 있었으나 징용이나 징병 등으로 끌려간 사람이 많았다. 자발적 취업자 중 상당수도 생활고로 고향을 떠난 것이어서 식민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해방 후 귀국선을 타지 않고 남은 사람은 65만 명가량이었다. 고향에 연고가 없어 귀국을 포기한 사람, 여비를 마련하지 못한 사람, 해방 후 혼란상을 듣고 사태를 관망하던 사람, 갖고 갈 수 있는 재산 한도가 1천 엔이어서 귀국을 미룬 사람, 북한으로 돌아가려고 기다리던 사람 등이다. 이른바 자이니치(在日)라고 불리는 재일동포의 시작이다. 2023년 재외동포청 집계에 따르면 재일동포는 일본 국적자 39만 218명을 합쳐 80만 2118명에 이른다.
자주교육 지키려는 조선인학교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탄압
재일동포들은 자녀에게 조선어(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지역마다 국어강습소를 열었다. 1945년 10월 결성된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은 국어강습소를 조선인학교로 확대해 나갔다. 이듬해 일본 전역에 조선인학교는 500여 개를 헤아렸고 학생 수는 6만여 명에 달했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의 자주교육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1948년 3월 민족학교 폐쇄 명령을 내렸다.
재일동포들은 이에 거세게 항의했다. 4월 말 반대 시위가 오사카(大阪)와 고베(新戶)에서 가장 격렬하게 일어나 한신(阪新)교육대투쟁이라고 부른다. 일본 경찰의 발포로 한 명이 숨지고 100여 명의 부상자를 낸 끝에 자주성을 인정받는 협상안을 끌어냈으나 1949년 10월 다시 폐쇄 명령이 내려졌다. 대신에 정규 수업 외에 조선인을 따로 모아 조선어와 조선사를 가르치는 민족학급을 허용했다.
한신교육대투쟁 당시 조련 산하 초등학교는 541개교(학생 수 5만 6210명)로 민단계 52개교(6297명)에 비해 압도적이었다. 조련이 좌경화되자 우파와 중립파는 각각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건청)과 신조선건설동맹(건동)을 결성했다가 1946년 10월 재일본조선거류민단(1948년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바꿨다가 1994년 재일본대한민국민단으로 개칭)으로 통합했다. 조련은 1949년 해산 명령을 받은 뒤 1955년 재일본조선인총연맹이란 이름으로 재출범했다.
동경한국학교는 뉴커머·주재원 자녀 위한 학교
오사카의 건국한국학교는 민단과 조련 양측에 거리를 두어 유일하게 폐쇄 명령을 피했다. 조규훈을 비롯한 백두동지회가 1946년 3월 설립했다. 1949년 5월 문부성의 1조교 인가를 받아 사실상 민족교육 대열에서 이탈했다. 한때 총련 지원을 받았다가 1976년 민단 계열로 들어와 그해 10월부터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다. 쿄토국제고가 야구 특성화고라면 건국고는 배구 특성화고라고 할 수 있다. 남녀 배구팀이 2013년과 2011년에 각각 전국대회에 오사카 대표로 출전해 화제를 모았다.
오사카금강인터내셔널학교도 1946년 문을 열었다. 개교 당시 이름은 우리학교였다가 1950년 오사카금강학교를 거쳐 2021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1961년 2월 해외에 설립된 한국인 학교로는 처음으로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받다가 1985년 1조교에 포함돼 일본 정부의 지원도 받는다.
1947년에 세워진 교토국제고는 1961년 5월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1조교 인가를 받은 것은 2003년이다. 프로야구 LG트윈스에서 선수로 뛴 황목치승(아라키 하루스케)이 이곳 출신이다. 제주도에서 출생한 한국 국적자로 할아버지가 일본인이어서 일본식 성을 쓴다.
동경한국학교는 1954년 문을 연 뒤 1962년 3월 한국 정부의 인가를 받았다. 주재원 자녀들과 광복 후 이주한 재일동포 뉴커머(신정주자) 자녀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 한국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이 많다. 한국어로 수업이 진행되고 한국식 교과과정을 따른다. 바둑기사 조치훈, 배우 김선아, 가수 김성재(듀스) 권리세(레이디스코드) 지코(블락비) 등을 배출했다.
교육부 2022년 4월 1일 집계를 보면 학생 수는 동경한국학교가 초등학교(716명), 중학교(351명), 고등학교(324명)를 합쳐 1391명으로 가장 많다. 건국학교는 유치원(60명)을 포함해 461명, 금강학교 초중고 267명, 교토국제학교 중고 156명이다. 교육부 인가를 받은 재외한국학교는 일본 4개교를 비롯해 중국 13개, 대만 2개, 사우디아라비아 2개, 인도네시아·싱가포르·태국·필리핀·말레이시아·캄보디아·파라과이·아르헨티나·러시아·이란·이집트 각 1개를 합쳐 모두 16개국 34개교다.
일본인 납치사건과 일본 정치 우경화로 결정타 맞은 조선학교
총련은 1955년 발족하자마자 교과서 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중앙과 현 본부마다 교육 전담부서를 설치하는 등 민족교육에 적극적이었다. 북한 정부도 지원에 나서 조선학교를 늘려나갔다. 1956년 도쿄에 조선대학도 설립했다. 월드컵축구 북한 대표팀, 독일 분데스리가, 한국 K리그와 일본 J리그 등에서 공격수로 활약한 ‘인민 루니’ 정대세는 아이치(愛知)조선초중고와 조선대를 나왔다.
일본 정부는 조선학교에 대해 탄압으로 일관했지만 총련계 재일동포와 교사·학생·학부모들은 끈질기게 저항했다. 일본교직원조합(일교조)과 일본 공산당 등도 연대 투쟁에 나서 각종학교 인가를 차례로 받을 수 있었다. 각종학교는 일본 학교육법 83조에 따른 비정규 학교여서 대학에 입학하려면 검정고시를 봐야 하고 운동부가 전국대회에 출전하지도 못한다. 일본 정부의 운영비 보조 대상이 아니지만 지방자치단체에 따라 보조금을 주기도 한다.
재일동포 가운데 대한민국 국적을 선택하거나 일본으로 귀화하는 비율은 해가 갈수록 늘고 있다. 일본은 북한 국적을 인정하지 않으며, 남북한 국적을 모두 선택하지 않은 재일동포는 조선적(朝鮮籍)으로 분류하고 있다. 33만여 명의 영주권자 가운데 조선적은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영주권자나 일본 국적자 가운데서도 조선학교를 택하는 이들이 있지만 조선적이 갈수록 줄다 보니 지원자도 줄어들었다. 여기에 1980년을 전후한 시기의 일본인 납치사건 진상이 2000년대에 와서 뒤늦게 드러남에 따라 반북 정서가 확산하고 일본 정계가 우경화의 길로 치달아 조선학교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북한으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교를 왜 허용해야 하느냐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다. 재정난도 가중돼 70년대 200여 개를 헤아리던 것이 3분의 1로 쪼그라들었고 학생 수도 급감했다.
교육 무상화 정책 따른 혜택에서도 조선학교 제외
일본 정부는 2010년 고교 무상화 정책을 도입하면서 각종학교인 외국인학교에도 연 11만 8800엔의 취학지원금을 지급했으나 조선학교는 제외했다. 지원금이 북한을 이롭게 하는 데 쓰일 것이라는 이유였다. 민단도 반대 의견서를 제출했다. 조선학교는 시민단체 등과 손잡고 지자체들을 상대로 소송을 냈으나 2017년 7월 오사카 지방재판소가 1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린 것 말고는 최종심까지 모두 정부의 손을 들어주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직후 한국에서 출범한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과 무상교육 배제 반대 투쟁 기간에 결성된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봄’, 재독일조선학교후원회 등이 조선학교를 돕고 있으나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일본의 혐한(嫌韓) 분위기와 맞물려 조선학교는 헤이트 스피치(혐오발언)나 테러의 표적이 되고 있다. 치마저고리를 입고 다니는 여학생들은 눈에 잘 띄어 옷이 칼로 찢기는 등의 봉변을 당하기 일쑤다. 일본인들은 “차별이 싫으면 돌아가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애초에 일본의 식민 통치가 없었다면 1940년대부터 지금까지 그 많은 한국인이 일본에 눌러살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늦어도 한참 늦은 차세대 재일동포 정체성 교육에 대한 고민
조선학교의 교육 방식을 놓고 논란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학생들은 K팝에 열광하고 한국 드라마를 즐겨보는 데도 한국어가 아니라 조선어로 가르친다. 조선학교 관계자들은 “1950~1960년대 어려운 시절에도 북한은 차별과 빈곤으로 신음하던 우리를 꾸준히 도왔다”면서 “조국이라는 연대감은 남쪽보다 북쪽이 강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 대목에서 그동안 한국 정부는 과연 무슨 일을 했는지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있던 한국계 학교들이 일본 교과과정을 따르는 학교로 바뀔 때도 모국은 뒷짐을 지고 있었다.
한국 국적을 취득한 재일동포들이 열악한 조건을 무릅쓰고라도 자녀들을 조선학교에 보내는 까닭을 헤아려야 한다. 교토국제고의 우승은 당연히 기뻐하고 축하할 일이지만 거기서 그쳐선 안 된다. 차세대 재일동포에게 민족 정체성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해결책을 내놓을 때다.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