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학들의 뿌리를 더듬어 본다 ⑤]
스크랜턴 여사, 정동에서 학생 한 명 놓고 첫 수업
고종은 “배꽃처럼 아름다우라” 교명과 편액 하사
지난 총선 때 ‘미군에 이대생 성상납’ 논란 일기도
1885년 구세학당 설립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배재학당 설립자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와 함께 입국한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턴은 서울 정동에 ‘미국의사 병원’을 차렸다. 아들이 의료 활동을 통한 선교에 힘쓰는 동안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 여사는 여성 교육에 매달렸다.
1886년 5월 31일 ‘김 부인’으로 불린 고관의 첩을 학생으로 두고 정동 교사에서 첫 수업이 열렸다. 우리나라 근대 여성 교육기관의 효시인 이화학당의 출발이었다. 김 부인은 곧 학교를 그만두었으나 10살 난 꽃님이와 4살짜리 고아 별단이가 차례로 입학했다. 그해 11월 200평 규모의 기와집 교사가 완공됐고, 1887년 4월 고종이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고 쓴 편액을 하사했다. “배꽃처럼 순결하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을 담았다.
스크랜턴 모자는 여성 환자들이 서양의 남성 의사에게 몸을 맡기려 하지 않는 것을 보다 못해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부에 여의사 파견을 요청했다. 그에 따라 최초의 여성 의료선교사 메타 하워드가 입국했는데도 여성 환자들이 좀처럼 찾지 않자 1887년 10월 31일 정동에 최초의 여성 전문병원인 보구녀관(普救女館)을 세웠다. 이 이름 역시 고종이 명명한 것으로 이화여대의료원의 전신이다.
박에스더·김란사·류관순 등 여성 선각자 배출
이화학당은 1904년 중등과를 설치한 데 이어 1908년 보통과와 고등과, 1910년 대학과, 1914년 유치원, 1915년 유치원사범과를 차례로 신설했다. 학령별 전 과정을 아우르는 학제를 갖추는 동시에 교사 양성 시스템도 마련했다.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서양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펜젤러의 딸 앨리스 아펜젤러는 미국에서 중고교와 대학을 마치고 다시 내한해 1922년 이화학당 교장으로 부임했다.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은 같은 감리교 소속이었다. 1925년 대학과를 전문학교로 승격시키고 신촌에 학교 터를 마련해 1935년 전문학교와 보육학교를 옮겼다.
이화학당은 숱한 여성 선각자를 배출했다. 이화학당의 4번째 입학생인 김점동(박에스더)은 보구녀관 2대 원장 로제타 홀의 통역을 맡았다가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보구녀관 의료보조훈련반을 거쳐 미국으로 유학해 1900년 한국인으로는 서재필에 이어 두 번째, 여성으로는 첫 번째 의사가 됐다. 귀국 후 5대 보구녀관 원장을 맡아 헌신적으로 여성 환자들을 돌보다가 1910년 과로로 순직했다.
‘3·1운동의 아이콘’ 류관순은 이화학당 보통과를 거쳐 고등과에 다니던 중 만세 시위가 일어나자 외국인 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동료 여학생 5명과 함께 뒷담을 넘어 시위대에 합류했다.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 천안으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체포돼 옥사했다.
류관순을 가르친 김란사도 이화가 낳은 여성 지도자였다. 남편도 있고 아이까지 딸린 처지였지만 룰루 프라이 교장에게 간청, 이화학당의 금혼(禁婚) 학칙을 깨고 1894년 입학했다. 이듬해 일본에 유학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주 웨슬리안대에서 국내 여성 최초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모교인 이화학당 교사로 부임해 학생자치단체 이문회를 지도하며 류관순 등에게 애국혼을 불어넣었다.
김활란, 여성운동 선구자이며 친일파란 두 얼굴
이화학당에서 초·중·고등 과정과 대학과를 마친 김활란은 3·1운동 때 비밀결사에 참여했으며 미국 웨슬리안대를 거쳐 보스턴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와 근우회 창립을 주도하고 신간회 여성 간사를 맡는 등 여성운동과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서다가 1931년 컬럼비아대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인 여성으로는 송봉신에 이어 두 번째 박사였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발발을 전후해 친일파로 변절한 뒤 연세대의 백낙준과 비슷한 길을 걷는다. 강연과 기고 등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을 적극 옹호했으며 1939년 이화여전 교장을 맡았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1942.12 신시대)라는 기고문이나 “아세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때 어찌 여성인들 잠자코 구경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1943. 12. 25 매일신보)라는 발언을 보면 강요와 압력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한 친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광복 이후에는 친미파로 변신했다. 미군정 교육위원으로 활동하며 1946년 종합대로 승격된 이화여대 초대 총장에 취임했다. 공보처 장관, YWCA 이사장, 코리아타임즈 사장, CBS후원회 이사장,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한국여성단체협의회장 등을 두루 지내며 교육계·여성계·종교계의 거목으로 군림했다. 자신의 이름 앞뒤 두 글자를 딴 금란여중고를 세워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이화여대 본관에 동상이 세워져 있으나 여러 차례 철거 시비에 휘말렸다. 지난 4월 총선을 앞두고는 “미군정 시기 김활란 총장이 이화여대 학생들을 미군 장교에게 성상납시켰다”는 김준혁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발언이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화인들의 친일 행적 희석하려고 류관순 영웅화”
김활란과 함께 대표적인 친일 여성으로 꼽히는 모윤숙도 이화여전 출신으로 해방 뒤 이화여대에 출강하다가 교수가 됐다. 한국전쟁 중에는 이승만의 지시로 여성 사교모임 낙랑클럽을 결성해 고위 미국인들을 상대로 로비에 앞장섰다. 모윤숙은 이 일을 두고 “나라를 위해 스스로 논개가 됐다”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가 하면 “김활란 박사가 외국인과 대화하는 매너와 에티켓을 지도했고, 서툴지만 사교 댄스도 추었으며, 때론 미인계도 썼다”고 털어놓았다.
10여 년 전 일각에서는 “류관순을 가르친 박인덕이 자신을 비롯해 김활란·모윤숙·박마리아(이기붕 부인) 등 이화여전 졸업생과 교수들의 친일 행적을 희석하고자 류관순을 ‘한국의 잔다르크’로 영웅화했다”는 주장을 제기해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관순의 공적에 비해 그가 받은 건국훈장 훈격이 낮다는 여론이 우세해 정부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3등급(독립장)에서 1등급(대한민국장)으로 높여 추가 서훈했다.
배재학당 만든 아펜젤러는 1902년 사고로 숨져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는 1885년 8월 3일 이겸리와 고영필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교육으로 꼽힌다. 이듬해 고종은 ‘배재학당(培材學堂)’이란 교명과 편액을 내렸다. 배재는 배양영재(培養英才·뛰어난 인재를 기름)의 줄임말이다.
1895년 보통부·중등부·대학부를 설치했다. 이승만·주시경·나도향·김소월·여운형 등이 배재학당 출신이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자회의에 참석하려고 배를 탔다가 군산 앞바다에서 마주 오는 배와 충돌해 실종됐다.
아펜젤러의 아들 헨리 도지 아펜젤러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배재학당 교장으로 헌신했다. “우리 배재학당 배재학당 노래합시다”로 시작되는 교가는 그가 자신의 모교인 프린스턴대 응원가를 개사해 만든 것이다. 배재학당을 전문학교로 키우진 못했다. 해방 후에도 배재중고등학교만 명맥을 이어나갔고 대학부는 폐지됐다.
배재학당 재단은 이승만 정권이던 1956년 배재대 설립 기성회를 발족하고 성북구 하월곡동 땅을 정부로부터 불하받아 1959년 기공식까지 치렀다. 하지만 4·19혁명 이후 불하 과정이 위법했다는 이유로 대학 부지를 몰수당했다.
지금의 배재대는 1971년 인수한 대전보육학원이 모태다. 대전여자초급대로 개칭한 뒤 배재대전초급대와 배재실업전문대를 거쳐 1980년 4년제 배재대로 출범시켰다.
숭실대는 평양에서 월남한 이산(離散)대학
숭실대는 윌리엄 마틴 베어드 선교사가 1897년 평양에 개설한 숭실학당에 뿌리를 두고 있다. 평앙 시민들도 학교 설립 모금에 참여했다. 1906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대학부를 두었다. 1931년 전문학교로 승격했으나 1938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고 자진 폐교했다.
독립운동가 손정도·차이석·조만식, 작곡가 안익태, 국문학자 양주동 등이 숭실학당 출신이고 만주 태생의 저항시인 윤동주도 서울의 연희전문으로 진학하기 전 평양 숭실중학을 다녔다. 최성곤 목사 등 숭실학당의 주요 인사들은 해방 직후 남하해 1948년 서울 신당동 동양척식회사 건물에 중고등학교를 재건했다. 1954년 대학 인가를 받은 뒤 저동 영락교회 건물을 빌려 개교했다. 초대 총장과 이사장은 한경직과 배민수가 각각 맡았다.
1971년 대전대와 통합해 숭전대가 됐다가 1982년 다시 분리해 숭전대 대전캠퍼스는 한남대로 개명했다. 숭실대는 평양에서 출발한 장신대와 함께 이산(離散)대학이라는 별칭을 지니고 있다. 평양에 캠퍼스를 재건하겠다는 희망을 간직하며 통일대학을 자처한다.
‘사과의 고장’ 상징 대구동산병원의 100살 사과나무
서울에서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을 운영하던 미국의 선교사들은 대구·광주·목포·군산 등지에도 선교병원을 설립하며 제중원 이름을 함께 썼다. 대구제중원은 계명대 대구동산병원의 뿌리가 됐고 광주제중원의 후신은 광주기독병원이다.
대구제중원은 1911년 동산기독병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1924년 계명대 간호대 전신인 간호부양성소를 개설했다. 1954년 4년제 대학 인가를 받아 계명기독학관이란 이름으로 개교했다. 1956년 계명기독대학을 거쳐 1965년 계명대로 이름을 바꿨다. 친일파 신후식과 동생 신태식이 계명대 설립에 깊이 관여했으며 신후식의 아들 신일희가 대를 이어 지금까지 총장을 맡고 있다.
계명대 대구동산병원 의료선교박물관 정원에는 수령 90여 년의 사과나무가 자라고 있다. 2000년 대구시 보호수 1호로 지정된 내력 깊은 나무다. 표지석에는 ‘사과나무 100년’이란 제목 아래 유래를 설명한 글귀가 적혀 있다.
의료선교사 우드브리지 존슨은 1899년 대구제중원 초대 원장으로 취임한 이듬해 미국 미주리주에 사과나무를 주문해 72그루를 사택 뒤뜰에 심고 시민들에게도 묘목을 나눠줬다. 서양 사과나무 재배의 시작이었다. 이전까지 재래종 능금을 키우던 대구는 사과의 고장이 됐다. 존슨이 심은 시조목은 죽었고, 동산병원에 자라는 나무는 유일한 자손목이다.
<※ 2주 뒤에 후속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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