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학들의 뿌리를 더듬어 본다 ④]

1885년 입국한 언더우드가 학교 기반 닦아

미군정 업고 친일파 백낙준이 운영권 장악

연희대와 세브란스의대 통합해 연세대 탄생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부활절이던 1885년 4월 5일, 일본 나가사키를 떠나 제물포항에 들어온 상선에서 두 미국 청년이 내렸다. 미국의 북장로회가 파견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미국 감리회 소속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였다. 다음 달에는 미국 감리회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턴도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과 함께 입국했다.

이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를 열고 근대적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이들이 세운 새문안교회, 정동제일교회, 아현교회는 한국 개신교의 뿌리가 됐고 언더우드학당, 배재학당, 이화학당은 훗날 연세대, 배재대, 이화여대로 발전했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조선 백성에게 복음을 전하고 미개 상태에 놓인 민중을 깨우치겠다는 사명감에 넘쳤다. 앞선 근대 의술을 통해 서양 문명의 우수성을 과시한 것도 선교에 큰 보탬이 됐다. 이들은 민주주의와 공화제, 신분 타파, 남녀평등 등의 서구 사상을 전파하고 과학기술과 서양철학 등 당시로서는 첨단 학문을 소개하며 우리나라 근대화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서양 중심의 세계관과 백인우월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연세대의 모태를 만든 세 선교사. 왼쪽부터 구세학당 설립자 언더우드, 광혜원(제중원) 초대 원장 알렌, 제중원의학당 초대 교장 에이비슨. 
연세대의 모태를 만든 세 선교사. 왼쪽부터 구세학당 설립자 언더우드, 광혜원(제중원) 초대 원장 알렌, 제중원의학당 초대 교장 에이비슨. 

신촌 연희궁 터 매입해 이전하며 연희전문대로 개명

언더우드는 조선 최초의 의료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이 서울 재동에 설립한 광혜원(제중원)에서 진료를 돕다가 정동의 가옥 한 채를 빌려 고아들을 가르쳤다. 1886년 고아원을 겸한 남자학교를 세워 언더우드(원두우)학당, 야소교(예수교)학당, 민노아(Miller)학당, 구세(救世)학당 등으로 부르다가 1905년 경신(儆新)학교로 개명했다. 독립운동가 김규식과 안창호가 구세학당 출신으로 오늘날 혜화동에 자리잡은 경신중고등학교의 전신이다.

언더우드는 초창기부터 경신학당을 대학으로 키우려고 애썼으나 선교사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개신교 전래 초기에는 평양의 교세가 서울보다 컸는데, 평양에 이미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으로 1906년 개교한 숭실학교 대학부(인가 받은 정규 대학은 아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포기하지 않고, 언더우드 타자기를 발명해 큰돈을 번 친형 존 언더우드의 자금 지원을 받으며 평양의 선교사와 숭실학교 교원들을 끈질기게 설득해 1915년 서울 종로2가의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서울YMCA회관)을 빌려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으로 경신학교 대학부(조선기독교대)를 설립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이듬해 건강이 나빠져 미국으로 돌아간 뒤 숨졌다.

일제는 온갖 핑계를 들어 대학 설립을 방해하다가 1917년 전문학교로 인가했다. 언더우드에 이어 교장을 맡은 올리버 에이비슨은 그해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창천리(서울시 서대문구 신촌동) 연희궁(延禧宮) 터를 매입한 뒤 이듬해부터 차례로 건물을 지어 이사했다. 연희궁은 조선 초기 이궁(離宮)의 하나로 정종이 왕위를 태종에게 물려주고 한때 머물렀으며 세종도 자주 들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기독교대에서 이름을 바꾼 연희전문학교는 여기서 따온 것이다.

 

1891년 언더우드가 세운 예수교학당과 학생들의 모습.
1891년 언더우드가 세운 예수교학당과 학생들의 모습.

탄탄한 재정과 우수 교수진 덕에 숱한 인재 배출

연희전문은 미국식 대학을 모델로 삼았기에 4년제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3년제로 줄일 것을 강요해 상과는 3년제, 문과·수물과·신과·농과는 4년제였다. 1924년 개교한 경성제국대학은 법문학부와 의학부만 있었고 이공학부도 1941년에야 설치했기 때문에 상과·수학과·물리학과·응용화학과 등의 인기는 매우 높았다. 보성이나 명륜(성균관대 전신) 등 사립 전문학교들도 대부분 문과 중심이었다.

미국 개신교 단체들의 후원으로 재정이 비교적 넉넉한 데다 미국 대학 박사 출신의 교수진을 확보하고 있어 교육의 질이나 학생 수준도 높았다. 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미시간대) 이원철과 수학박사 장세운(노스웨스턴대)이 수물과 1회 졸업생이었다. 국학자 정인보와 국어학자 최현배 등이 교수로 재직해 민족주의적 성향도 띠었다. 저항시인 윤동주가 최현배의 제자였다. 미국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27년 교수로 부임한 백낙준도 1936년 문과 과장을 맡았을 때 총독부의 탄압 속에서도 국학 과목을 신설하고 연구를 후원했다.

그러나 군국주의가 기승을 부려 개신교 교단들이 신사참배 강요를 받아들이고 태평양전쟁 발발과 함께 미국의 선교사와 교수들이 추방되면서 친일의 길로 들어섰다. 친일파 윤치호가 교장을 맡았고, 백낙준도 일제의 황민화(皇民化) 정책을 옹호하고 조선 청년의 참전을 독려하는 연설과 기고에 나섰다.

1942년에는 총독부가 적산(敵産·적국인 미국의 재산이라는 뜻)이란 명목으로 학교를 몰수했다. 교장은 일본인 다카바시 하마치로 바뀌었다. 본관 앞에 있던 언더우드 동상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미나미 총독의 글씨를 돌에 새긴 흥아유신기념탑(興亞維新紀念塔)을 세웠다. 1944년에는 교명을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로 바꿨다.

미군정, 미국 유학파 출신 친일파 대거 기용

해방 후 연희전문 교수와 재단 관계자들은 연희전문학교접수위원회를 꾸렸다. 미군정청으로부터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의 재산과 운영권을 인수해 연희전문학교로 교명을 회복했다. 친일단체 흥아보국단,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등의 간부를 지낸 유억겸이 1945년 10월 5대 교장으로 취임했다가 두 달 만에 백낙준에게 바통을 넘겼다.

미군정은 남한 교육계를 재편하면서 미국 유학파 출신 친일파들을 대거 기용했고, 이러한 정책 기조는 이승만 정권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백낙준이다. 그는 미군정청 학무국의 조선인 교육위원으로 활동하며 경성제국대학에서 이름을 바꾼 경성대(서울대) 법문학부 부장에 임명됐다.

이어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거쳐 1946년 종합대로 승격된 연희대의 초대 총장에 취임했다. 1948년 대한민국 교육법 기초위원, 대한소년단 총재 등도 역임했으며 연희대 이사장과 문교부 장관을 겸직하다가 장관 퇴임 후 연희대 총장으로 복귀했다. 1957년 1월 연희대와 세브란스의대가 통합해 발족한 연세대의 초대 총장도 그의 몫이었다.

정부는 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고, 그가 1985년 89세로 사망하자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지금의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20여 년이 지난 뒤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그를 포함시켰다.

 

연세대 중앙도서관 앞에 세워진 초대 총장 백낙준 동상.
연세대 중앙도서관 앞에 세워진 초대 총장 백낙준 동상.

세브란스의 거액 기부로 현대식 종합병원 설립

세브란스의대의 뿌리는 1886년 3월 29일 문을 연 제중원의학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6명의 학생을 선발했으나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거나 졸업 후 관료로 전직해 의사를 배출하지는 못했다.

1893년 제중원 책임자로 부임한 에이비슨은 미국의 실업가 루이스 세브란스에게서 거액을 지원받아 1904년 서울역 앞 복숭아골(지금의 연세대재단빌딩 자리)에 최초의 현대식 종합병원인 세브란스기념병원을 세웠다. 제중원의학교 이름도 세브란스의학교로 바꾸고 1908년 7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1917년에는 총독부 인가를 받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개명했다.

1911년 졸업생 중에는 이태준도 있다. 안창호의 권유로 신민회 외곽단체 청년학우회에 가입한 그는 졸업 후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다가 중국을 거쳐 몽골로 망명했다. 레닌이 한인사회당에 지원한 독립자금을 운반하고 헝가리인 폭탄제조 전문가를 의열단장 김원봉에게 소개하는 등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했으며, 전염병 퇴치에 헌신해 ‘몽골의 슈바이처’로 불렸다.

3·1운동에 세브란스 교직원과 학생들 적극 참여

세브란스의전은 3·1운동 때도 큰 역할을 했다. 캐나다 출신의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는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린다. 개신교와 천도교 등의 주요 인사들이 대대적인 만세 시위를 은밀하게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외국인은 그가 유일했다. 세브란스의전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명인 이갑성에게 해외 정세를 담은 외국 신문을 전해주며 거사를 도왔다. 이갑성은 세브란스의전 출신으로 당시 세브란스병원 제약주임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해 해외에 알리는 한편 시위 현장에서 사진을 찍어 배포하고 국내외 영어신문에 독립선언의 취지를 알리는 글을 실었다. 언더우드 2세(원한경) 등과 함께 서울 서대문형무소와 대구형무소를 찾아 수감자들의 고문 흔적을 확인한 뒤 조선 총독과 정무총감 등을 만나 항의하기도 했다. 그해 4월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수촌리와 향남면 제암리 등에서 학살극이 벌어지자 이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 해외에 보냈다. 세브란스의전 학생들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용설을 중심으로 소식지 ‘삼일신문’을 만드는가 하면 조직적으로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그러나 세브란스의전도 연희전문처럼 일제의 탄압으로 민족적 성향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1942년에는 이름도 아사히의학전문학교로 바뀌었다. 1947년 예과 2년, 본과 4년의 6년제 의과대로 개편된 뒤 1957년 연희대와 합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9년 5월 29일 연세대 백양누리 동문광장에서 열린 제4회 ‘연세 정신을 빛낸 인물’ 부조동판 제막식. 왼쪽부터 윤동주, 이태준, 현봉학, 정석해의 얼굴을 형상화한 부조가 걸려 있다. 사진 제공 연세대  
2019년 5월 29일 연세대 백양누리 동문광장에서 열린 제4회 ‘연세 정신을 빛낸 인물’ 부조동판 제막식. 왼쪽부터 윤동주, 이태준, 현봉학, 정석해의 얼굴을 형상화한 부조가 걸려 있다. 사진 제공 연세대  

백낙준·유억겸 대신 윤동주·이태준을 기려야 한다

연세대는 2016년부터 ‘연세 정신을 빛낸 인물’을 선정해 부조동판을 교내 백양누리 동문광장에 설치함으로써 후배 학생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하고 있다. 제1회 윤동주에 이어 이태준, 현봉학(1951년 흥남철수작전 때 미군 사령관에게 군수품 대신 피난민을 수송해 달라고 요청), 정석해(3·1운동에 참여하고 4·19혁명 때 교수단 시위를 주도) 등이 뽑혔다.

 

1962년 준공된 유억겸기념관. 연희전문 5대 교장을 지낸 친일파 유억겸의 이름을 땄으며 지금은 심리학과 건물로 쓰이고 있다. 
1962년 준공된 유억겸기념관. 연희전문 5대 교장을 지낸 친일파 유억겸의 이름을 땄으며 지금은 심리학과 건물로 쓰이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친일의 그늘도 여전히 짙게 드리워져 있다. 중앙도서관 앞에는 백낙준 동상이 세워져 있고, 1995년부터 그의 호를 딴 용재학술상과 용재석좌교수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문과대 심리학과 건물도 또다른 친일파의 이름을 따 유억겸기념관으로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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