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학들의 뿌리를 더듬어 본다③]

올해는 서울대 전신인 경성제대 개교 100주년

식민 통치 수단에서 친미 반공교육의 요람으로

서울대 설립 반대한 교수·학생은 빨갱이로 몰려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일제 잔재와 미군정 유산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미국은 9월 7일 미육군태평양사령부 포고 제1호를 통해 한반도 38도선 이남에 미군정을 실시한다고 선언했다. 이튿날 미육군 24군단 병력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한 주한미군사령관 존 하지 중장은 입법·행정·사법에 걸친 모든 권력을 행사했다. 미군정청은 10월 16일 법령 제15호를 발표해 유일한 정규 대학이던 경성제국대학을 경성(서울)대학으로 개칭한 데 이어 이튿날 해군 대위 앨프리드 크로프츠를 총장으로 임명했다.

경성제대 개교일은 1924년 6월 12일이다. 그러므로 다음 달이 개교 100주년 기념일이 된다. 그러나 이를 모태로 탄생한 서울대는 “1946년 식민 잔재와 단절하고 새롭게 탄생했다”면서 올해가 개교 78주년이라고 주장한다. 단과대학들은 서울대로 통합되기 이전 전문학교 등의 역사를 내세워 각기 창설 연도가 다르다.

 

서울대 문장(紋章). 원 모양의 월계관은 학문의 전당인 서울대를 뜻하며 X자 모양으로 교차한 펜과 횃불은 지식 탐구를 통해 겨레의 길을 밝히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위에는 국립서울대의 머리글자(ㄱ, ㅅ, ㄷ)를 형상화한 교표를 배치했고 아래 펼쳐진 책에는 라틴어 교훈인 ‘VERITAS LUX MEA(진리는 나의 빛)’가 적혀 있다.
서울대 문장(紋章). 원 모양의 월계관은 학문의 전당인 서울대를 뜻하며 X자 모양으로 교차한 펜과 횃불은 지식 탐구를 통해 겨레의 길을 밝히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위에는 국립서울대의 머리글자(ㄱ, ㅅ, ㄷ)를 형상화한 교표를 배치했고 아래 펼쳐진 책에는 라틴어 교훈인 ‘VERITAS LUX MEA(진리는 나의 빛)’가 적혀 있다.

일제의 우민화 정책에 맞선 민립대학 설립 추진

우리나라 근대 대학의 기원은 1886년 의료인을 양성하기 위해 문을 연 제중원의학당(연세대 의대의 전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의학에 한정된 것이어서 본격적인 대학의 출발은 경성제대로 보는 것이 옳다.

경성제대는 일제 식민 통치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대학이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끈질긴 저항과 자발적인 대학 설립 움직임이 없었다면 이마저도 훨씬 늦어졌을 것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시작으로 독립을 외치는 만세 시위가 전국 방방곡곡으로 번져가자 일제는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통치 방식을 바꿨다. 군인이 맡던 조선 총독을 문관에게 개방하고 지방행정에 조선인(한국인)을 참여시켰다. 언론·출판·집회의 자유도 일부 허용해 이듬해 한국어 민간 신문이 창간됐다.

교육 확대 요구도 수용해 학교 시설을 확충하고 수업 횟수를 일본인과 동일하게 늘렸다. 그러나 한국인의 높은 교육열을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일제는 식민 통치에 필요한 전문인력 양성에만 주력할 뿐 사회지도층 인사를 길러내는 것은 꺼렸다. 이상재를 비롯한 90여 명의 발기인은 1920년 6월 20일 조선교육회(조선교육협회로 개칭)를 발족해 사립고등보통학교 설립 운동을 전개한 데 이어 민립대학 설립을 추진했다. “우민화(愚民化) 정책을 쓰는 일제의 조치를 기대할 수 없으니 우리 힘으로 대학을 세우자”는 취지였다. 1922년 11월 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구성해 모금에 나섰다.

그때까지 한반도에 대학은 하나도 없고 전문학교도 관립인 법학, 의학 전문학교와 고등 상업· 공업·농림학교, 사립인 세브란스의학, 연희·보성전문학교를 합쳐 8개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선전 내용이 불온하다거나 유언비어로 대중을 선동할 염려가 있다는 등 온갖 구실을 내세워 방해 공작에 나섰다. 모급 집회를 강제로 해산하는가 하면 기부자를 협박하기도 했다.

 

1931년 동숭동에 세워진 경성제대 법문학부 본과 건물과 교문. 서울역사박물관
1931년 동숭동에 세워진 경성제대 법문학부 본과 건물과 교문. 서울역사박물관

6번째 일본 제국대학으로 경성제대 설립

일제는 민립대학 설립 움직임을 무산시키는 동시에 조선인의 대학교육 요구를 무마하기 위해 1923년 11월 관립대학 창설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켜 이듬해 경성제국대학을 개교했다. 경성제대는 일본 제국대학 가운데 도쿄·교토·도호쿠·규슈·홋카이도에 이어 6번째로 창설됐다. 정식 교명을 일본식으로 발음하면 ‘게이조 데이코쿠 다이가쿠(京城帝國大學)’였으나 흔히 약칭으로 ‘조다이(城大)’라고 불렀다. 대만의 타이베이제대는 4년 뒤 7번째로 문을 열었다.

예과는 1924년, 본과는 1926년에 수업을 시작했다. 예과는 2년제, 본과는 법문학부 3년, 의학부 4년이었다. 본과 개교 당시 학생 정원 150명 가운데 조선인은 47명이었다. 전체 교수 57명 중에서도 조선인은 5명밖에 없었다.

예과 교정은 지금의 청량리역 인근 미주아파트 단지에 있었다. 법문학부와 의학부 본과 소재지는 각각 종로구 동숭동과 연건동이었다. 이공학부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에야 기술 인력 양성을 위해 노원구 공릉동에 개설했다. 현재 서울과기대가 들어서 있다. 경제학부 등은 끝내 설치하지 않았다.

 

1947년에 찍은 서울대병원 부속병원 본관 건물. 1908년 대한의원 건물로 세워졌다가 조선총독부의원을 거쳐 경성제국대 부속병원이 됐고 지금은 의학박물관으로 꾸며졌다. 서울대 제공
1947년에 찍은 서울대병원 부속병원 본관 건물. 1908년 대한의원 건물로 세워졌다가 조선총독부의원을 거쳐 경성제국대 부속병원이 됐고 지금은 의학박물관으로 꾸며졌다. 서울대

일본인 교수 물러간 자리를 친일파로 채워

2000년대 초 김용옥 교수는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 초청 강연에서 “식민 통치기관인 경성제대를 모태로 국립서울대학을 만들 것이 아니라 조선 시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전통을 승계해 국립종합대학을 설립했어야 했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경성제국대라는 이름에서 ‘제국’만 떼어낸 채 학제와 교사(校舍) 등을 그대로 유지하며 운영 책임을 위관급 장교에게 맡겼다. 일본인 교수들이 물러간 자리에는 백낙준(법문학부장), 현상윤(예과부장) 등 친일 한국인 교수들을 임명했다.

다른 모든 분야도 그랬듯이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 수뇌부는 우리나라 교육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한일 간에 얽힌 복잡미묘한 역사나 친일파에 대한 국민감정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남한을 소련 주도의 공산주의 블록에 대항하는 친미 반공 국가로 만들고자 했을 따름이다.

미군정청 문교부는 1946년 7월 13일 ‘국립서울대학교 설립 취지문’을 발표했다. 이어 8월 22일 ‘국립서울대 설립에 관한 법령’이 공포돼 1946년 10월 개교했다. 초대 총장으로는 목사 출신 교육자인 해리 앤스테드 미군정청 문교부 고문관(육군 대위)이 취임했다.

국립서울대 설립안(약칭 국대안)은 경성(서울)대 3개 학부에 일제 때 만들어진 수도권 관·공립 전문학교 9개와 1개 사립 전문학교를 통폐합해 종합대를 만드는 계획이다. 문교부는 기존의 건물, 설비, 교수진 등을 최대한 활용해 국가 재정을 절약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단과대학은 문리대(경성제대 법문학부 문과 계통과 이공학부 이과 계통 통합), 법대(경성제대 법문학부 법과 계통과 경성법학전문학교 통합), 공대(경성제대 이공학부 공과 계통과 경성공업전문학교·경성광산전문학교 통합), 의대(경성제대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 통합), 농대(수원농림전문학교 개편), 상대(경성경제전문학교 개편), 치대(사립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개편), 사범대(경성사범학교와 경성여자사범학교 통합), 예술대(경성음악전문학교와 신설 미술부 통합) 등 9개였다.

 

동숭동의 법과대 건물과 정의의 종. 1958년 개교 10주년을 기념해 동창회에서 기증한 이 종은 관악캠펴스 법과대 건물 안에 설치돼 있다. 서울대
동숭동의 법과대 건물과 정의의 종. 1958년 개교 10주년을 기념해 동창회에서 기증한 이 종은 관악캠펴스 법과대 건물 안에 설치돼 있다. 서울대

식민 잔재 청산은 말뿐, 실제는 과거 유산 승계

문교부는 취지문에서 “일정 시대로부터의 유물인 기존 고등교육기관을 존속시켜야 할 아무런 의무감도 느끼지 않았다. 이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예속화하려는 식민지 정책의 잔재요 우리 민족을 위한 교육기관이 아닌 까닭이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이상하는 신국가에 적합한 고등교육기관을 건설하여야 할 것은 물론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국대안은 취지문과 달리 경성제대와 관·공립학교들을 사실상 승계하는 것이었다. 충분한 의견 수렴과 검토 없이 비밀리에 마련한 독단적인 졸속 결정이자 일제 식민지 교육의 틀을 친미 반공교육으로 바꿔치기한 것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대학 운영의 전권을 갖는 이사회를 미군과 한국인 각 3인의 군정청 관리로 구성한 것도 큰 반발을 샀다. 군정청이 소수 친미파를 앞세워 학술계와 교육계를 장악하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실제로 친미·보수 성향과 개신교 계열의 교육 엘리트들은 미군정 정책에 편승해 우리나라 교육의 헤게모니를 쥐는 데 성공했다.

경성(서울)대 학생들은 전문학교와 통합되면 자신들의 격이 떨어진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부 전문학교는 오랜 역사를 지닌 학교를 없앨 수 없다고 반발했다.

 

1971년 열린 관악캠퍼스 기공식. 서울대
1978년 세워진 관악캠퍼스 정문. 국립서울대학교의 초성 ‘ㄱ, ㅅ, ㄷ’을 형상화한 것으로 ‘진리를 찾기 위한 열쇠’를 상징한다. 서울대

리승기 등은 월북해 김일성대 설립에 참여

국대안이 발표되자마자 통합 대상 교직원들은 전국교육자대회를 열고 철회를 주장했다. 동맹휴학에 들어간 학생들은 “해방 조선에서 우리 남녀 학생에게 다시금 일본 제국주의적 노예교육의 굴레를 뒤집어씌우려는 문화 음모”라고 주장하며 ▲친일 교수 배격 ▲경찰의 학원 간섭 중지 ▲집회 허가제 폐지 ▲국립대 행정권 일체를 한국인에게 이양할 것 ▲미국인 총장을 한국인으로 대체할 것 등을 요구했다.

국대안 파동은 전국으로 확산했다. 동맹휴학한 학교는 전문학교와 중학교 등을 포함해 57개, 참여 학생은 4만 명에 달했다. 당초에는 민족적 자존심에서 출발했으나 해방 공간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좌우익 대결로 흘러갔다. 미군정은 학계의 공산주의 세력을 척결할 기회로 여겼고, 친일 세력들은 반공을 내세우며 기득권 유지의 발판으로 삼았다.

미군정은 대대적인 탄압에 나서는 한편 이사회 구성 방식을 바꾸는 등 유화책을 제시했다. 이듬해 3월 들어 반대운동이 수그러들기 시작했으며 10월 이춘호 총장이 취임하며 일단락됐다. 재학생 8040명 가운데 61.6%에 해당하는 4956명이 제적당했다가 3518명이 복교했고, 429명의 교수·강사 중 380명(88.6%)이 교단을 떠났다.

교원 가운데 미군정과 경찰, 서북청년단 등에 의해 빨갱이로 몰린 상당수는 월북해 1946년 10월 1일 개교한 김일성종합대로 옮겨갔다. 합성섬유 비날론을 발명한 리승기(화학공학과 교수)도 사표를 냈다가 이듬해 복귀해 공대 학장이 됐으나 6·25 때 북한행을 택한 뒤 비날론 생산에 몰두해 세계적인 학자 반열에 올랐다.

 

1948년 8월 10일 제2회 졸업식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맥아더 장군(가운데)과 하지 장군(왼쪽). 이듬해 세 번째로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이 보인다. 서울대
1948년 8월 10일 제2회 졸업식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맥아더 장군(가운데)과 하지 장군(왼쪽). 이듬해 세 번째로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이 보인다. 서울대

교훈은 미군 대위가 짓고 교가는 친일파가 작곡

서울대는 1948년 8월 10일 제2회 졸업식에서 미극동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와 미군정청 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각각 제1호와 제2호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1949년 7월 15일 제3회 졸업식에서는 한국인 최초로 이승만 대통령이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아 3호를 기록했다.

초창기 명예박사 수여 대상자 면면만 보더라도 신생 서울대가 어떤 인물들로 구성됐고, 이들이 어떤 교육 이념을 지향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더욱 큰 문제는 이렇게 시작된 역사를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청산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1961년 제작된 현제명 흉상. 음대 건물 입구에 설치돼 있다. 서울대
1961년 제작된 현제명 흉상. 음대 건물 입구에 설치돼 있다. 서울대

미군 대위 출신의 초대 총장이 만든 라틴어 교훈 ‘VERITAS LUX MEA(진리는 나의 빛)’는 지금도 그대로 쓰고 있는데, 이는 미국 여러 대학에서 비슷한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버드, 예일, 노스앨라배마대 교표에는 각각 ‘VERITAS(진리)’, ‘LUX ET VERITAS(빛과 진리)’, ‘VERITAS LUX ORBIS TERRARUM(진리는 세상의 빛)‘이라고 새겨져 있다.

서울대 교가의 작곡자는 일제를 찬양하는 노래 ‘후지산을 바라보며’ 등을 지은 친일파 현제명이다. 서울대 초대 음악학부장과 음대 학장을 지낸 그는 서울대 명예음악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음대 건물 입구에 흉상이 세워져 있다.

 

※ 2주 뒤에 후속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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