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학들의 뿌리를 더듬어 본다 ②]

독립유공자들이 설립한 대학 대부분이 주인 바뀌어

신흥무관학교 뿌리 밝히자는 요구에 경희대 묵묵부답

단군 정신으로 세워진 홍익대는 설립자 ‘바꿔치기’

덕성여대, 오랜 분규 끝에 차미리사 설립 역사 복원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1910년 8월 조선이 일제에 강제 병탄되자 그해 12월 이시영은 이석영·이회영 등 형들을 따라 가솔을 이끌고 만주로 이주했다. 이시영 형제는 이상룡·이동녕 등과 함께 1911년 신흥강습소를 세웠다가 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개편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8월 문을 닫기까지 독립군 양성의 요람 구실을 했다. 배출한 졸업생은 2100여 명. 그 가운데 주요 인사로는 변영태·이범석 전 국무총리, 김원봉 의열단장, 윤세주 조선의용군 부대장, 소설 ‘아리랑’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락), 김법린 전 문교부 장관, 송호성 초대 국방경비대 사령관, 오광선 광복군 국내지대장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시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법무부장·재무부장·감찰위원장 등 요직을 두루 지내다가 1945년 11월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환국했다. 돌아오자마자 신흥무관학교 부활위원회를 조직해 독지가들의 성금을 모은 뒤 1947년 2월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신흥전문학원을 설립하고 2년 뒤 신흥초급대학으로 승격시켰다. 법인명은 설립자 이시영의 호를 딴 성재학원이다. 문교부 인가 서류에 기재된 개교일은 1949년 2월 15일이지만 신문 광고 등에 창립일을 1911년 6월 10일로 적어 뿌리가 신흥무관학교에 있음을 천명했다.

신흥대학은 1949년 7월과 1950년 5월에 각각 1·2회 졸업생을 배출했으나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경영난에 빠졌다. 이시영이 부통령직을 내던지며 이승만 대통령의 부패와 실정을 성토해 정권에 밉보인 것이 영향을 미쳤다는 추측도 있다. 이시영은 1953년 4월 17일 별세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중국 상하이 공항에 모인 임시정부 요인들. 꽃다발을 목에 걸고 가운데 서 있는 인물이 김구, 오른쪽에 중절모를 쓰고 손으로 눈물을 닦는 인물이 신흥대학 설립자 이시영, 김구 앞에 선 소년이 이시영의 종손자 이종찬이다. [우당기념관 제공]
1945년 해방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중국 상하이 공항에 모인 임시정부 요인들. 꽃다발을 목에 걸고 가운데 서 있는 인물이 김구, 오른쪽에 중절모를 쓰고 손으로 눈물을 닦는 인물이 신흥대학 설립자 이시영, 김구 앞에 선 소년이 이시영의 종손자 이종찬이다. [우당기념관 제공]

 

만주에 세워진 신흥무관학교 모습. 초가 지붕의 초라한 건물에다가 교사와 학생들의 복장도 남루하지만 의기만큼은 하늘을 찔렀다. [우당기념관 제공]
만주에 세워진 신흥무관학교 모습. 초가 지붕의 초라한 건물에다가 교사와 학생들의 복장도 남루하지만 의기만큼은 하늘을 찔렀다. [우당기념관 제공]

이회영 유족들 “학교 되찾자는 게 아니라 역사 밝히자는 것”

신흥대학은 1951년 5월 조영식에게 인수된 뒤 1954년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으로 캠퍼스를 옮겼다. 1955년 재단 명칭을 고봉재단으로 변경한 데 이어 학교 간판도 1960년 경희대로 바꿔 달았다.

이시영의 아들 이규창은 조영식을 상대로 개명 무효소송을 제기했다. 이규창은 이승만의 비호 아래 재단 강탈이 불법적으로 이뤄져 조영식의 재단 이사 선임 절차부터 원천 무효라고 주장한 반면, 조영식 측은 “부채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며 재단을 맡아 달라고 간청해 수락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 법정 공방은 1963년 이규창의 사망으로 일단락됐다.

경희대 인터넷 홈페이지의 연혁에는 '▲1949.2 = 1946년 설립된 배영대학관을 모체로 재단법인 성재학원 설립 ▲1949.5 = 신흥초급대학(2년제) 설립 인가 ▲1951.5 = 6ㆍ25 전쟁으로 재정난에 봉착했던 재단을 조영식 박사가 당시 1500만 원의 부채를 부담하는 조건으로 인수’라고만 표기해놓았다.

 

오늘날의 경희대 캠퍼스. 그리스 신고전주의 양식의 본관 건물 앞에 분수대가 꾸며져 있고, 뒤편에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평화의 전당이 들어서 있다. [경희대 제공]
오늘날의 경희대 캠퍼스. 그리스 신고전주의 양식의 본관 건물 앞에 분수대가 꾸며져 있고, 뒤편에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평화의 전당이 들어서 있다. [경희대 제공]

법정 공방은 끝났어도 역사를 기억하려는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신흥대 졸업생 등이 1982년 신흥대학 연혁복원추진위원회를 조직해 학교 연혁에 신흥무관학교를 명시할 것을 촉구한 것이 시작이었다. 2011년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가 발족했으며 경희대 총민주동문회, 경희대 총동문회, 경희대 총학생회 등도 가세해 세미나를 여는 등 뿌리찾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회영의 손자이자 이시영의 종손자인 이종찬 광복회장 겸 우당기념관장(전 국가정보원장)과 이종걸 우당이회영기념사업회 이사장(전 국회의원)도 언론 인터뷰에서 “이제 와서 학교를 되찾자는 게 아니라 신흥무관학교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되살리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요구에 대해 조영식의 아들 조인원 경희대 이사장은 이렇다 할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홍익대설립자유족회 “정권에 밉보여 학교 빼앗겼다”

이흥수 홍익대 재단 초대 이사장 [홍익대학설립자유족회 제공]
이흥수 홍익대 재단 초대 이사장 [홍익대학설립자유족회 제공]

홍익대학교는 우리나라 건국 이념이자 교육 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에서 이름을 따왔다. 민족종교이자 항일종교인 대종교 재단은 1946년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서 문을 연 홍문대학관을 이듬해 인수해 서울시 중구 저동으로 이전하며 교명을 홍익대학으로 바꿨다. 1948년 12월 용산구 문배동으로 교사를 옮긴 뒤 1949년 6월 4년제 인가를 받았다. 마포구 상수동에 캠퍼스가 들어선 것은 1955년이다.

대종교가 홍문대학관을 인수할 때 군산의 실업가인 이흥수가 사재 1억 환을 기부하며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그 뒤로도 15억 환을 투자한 그는 1964년 대종교 6대 총전교에 추대됐다. 학장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돼 3년간 옥고를 치른 국어학자 정열모가 맡았다.

그러나 홍익대학교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이흥수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대종교와 관련된 내용도 없었으나 2000년대 들어서야 “1947년 운영난으로 ‘홍문대학관 관무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운영진을 대종교 관계인사들로 영입”이란 대목을 삽입했다. 단과대학 시절의 역대 학장 명단도 ‘초대 양대연(1946.6~), 2대 정열모(1947.7~)’라고 소개하고 있어 정열모가 초대 학장이라는 대종교 측의 주장과 차이가 난다.

홍익대 학생들도 대종교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다. 1949년 7월 김구의 장례가 국민장으로 치러질 때 홍익대 3기생들이 운구를 맡았다. 김구가 1947년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건국실천원양성소도 1949년 8월 홍익대가 인수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 정권과 갈등이 불거졌다. 그해 12월 재단 이사와 교수, 학생회 간부 등이 용공 혐의로 경찰과 헌병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정권의 압력을 견디다 못한 정열모는 학장직을 사임했다.

 

홍익대 캠퍼스 전경 [홍익대 제공]
홍익대 캠퍼스 전경 [홍익대 제공]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열모를 비롯한 대종교 인사 상당수는 자진 월북하거나 인민군에 의해 납북됐다. 빈자리에는 친일파 혹은 친이승만 인사들이 들어와 재단을 장악했다. 1956년에는 자유당 국회의원을 지낸 이도영이 10억 환을 기부하는 조건으로 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이도영은 기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 족벌 체제를 강화하고. 오히려 이흥수가 기부한 재산으로 치부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에 반발한 교수와 학생들이 동맹휴업 사태를 벌이고, 동창회는 배임과 횡령 등의 혐의로 이도영을 고발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간첩으로 몰려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

4·19혁명 이후 이흥수가 이사장으로 복귀하고 이도영은 이사로 물러났으나 박정희 정권은 1963년 이도영을 다시 이사장에 앉혔다. 이도영은 박정희 정권 실세인 김종필에게 홍익대 1호 명예박사학위를 주고 아들을 박정희 처조카와 결혼시키는 등 5·16 세력들과 탄탄한 관계를 맺었다.

1973년 이흥수와 이도영이 사망한 뒤 홍익대 관련 자료에는 이흥수 등 대종교 인사들의 발자취가 지워지고 ‘설립자 이도영’이란 표현이 등장했다. 후임 이사장 최애경은 이도영 부인이다. 이흥수 삼남 이용석은 홍익대설립자유족회를 만들어 “이도영이 학교를 강탈하고 역사를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한동안 주목받지 못하다가 1999년 이후 총학생회와 민주동문회 등에서 잇따라 문제를 제기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유족과 학생이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당하기도 했다.

이면영 현 이사장은 이도영의 육촌동생이다. 1966년 교수로 임용된 뒤 1985년부터 12년 동안 총장을 지냈고, 1997년부터 지금까지 재단을 이끌고 있다. 이흥수의 손자인 이준혁 홍익대설립자유족회장은 2016년에도 교육부에 홍익대 재단 임원진 승인 취소와 임시이사 파견을 요청하는 등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조선일보 1934년 2월 11일자에 실린 근화여학교 사진. 지금 덕성여중고가 들어선 안국동 교사 앞에서 교직원과 학생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 위의 인물이 차미리사. [덕성여대 제공]
조선일보 1934년 2월 11일자에 실린 근화여학교 사진. 지금 덕성여중고가 들어선 안국동 교사 앞에서 교직원과 학생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 위의 인물이 차미리사. [덕성여대 제공]

차미리사 “전 조선 1천만 여성 다 내게로 오라”

덕성여대는 차미리사가 1920년 4월 서울 종로구 도렴동 종다리예배당(지금의 종교교회)에 설립한 부인야학강습소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12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배화학당 교사로 일하던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여성 계몽운동에 앞장설 것을 결심하고 이듬해 조선여자교육회를 발족했다.

그는 동아일보에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이렇게 밝혔다. “학교를 다니지 못한 가정에 있는 여자들은 편지 한 장도 자신의 손으로 쓰지 못하고 신문 한 장을 마음대로 보지 못한다. 귀 멀고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매를 비참한 운명에서 구해 보고자 한다.”

여자강연대도 꾸려 1921년 6월부터 10월까지 전국 73곳에서 강연을 펼쳤다. 그는 강연할 때마다 첫머리에 “전 조선 1천만 여성은 다 내게로 오라. 뜨고도 못 보는 무식한 여성들은 다 오면 어두운 눈 광명하게 보여주고 이혼한 남편 다시 돌아오게 해주마”라고 외쳤다. 동아일보는 “조선 여자계의 일대 광명이며 생명 있는 신운동”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덕성여대 대학본부 1층에 걸려 있는 차미리사 선생 초상과 창학 이념 [덕성여대 제공] 
덕성여대 대학본부 1층에 걸려 있는 차미리사 선생 초상과 창학 이념 [덕성여대 제공] 

강습소는 근화학원, 근화여학교, 근화여자실업학교를 거쳐 1938년 덕성여자실업학교로 개명했다. 일제가 무궁화를 뜻하는 근화(槿花)를 학교 이름에 쓰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1940년에는 민족교육에 힘쓰는 차미리사를 교장 자리에서도 물러나게 했다.

차미리사에 이어 교장에 취임한 송금선은 기고와 강연 등으로 일본 학병 지원을 독려하고 황국신민 교육에 앞장섰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들었다. 1950년 덕성여자초급대학을 세우고 초대 학장에 취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차미리사가 덕성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었으나 1952년 건강 문제로 사임하고 송금선의 부친인 송유영이 이어받았다. 이후 박준섭·송금선 부부와 아들 박원국이 차례로 이사장을 독식하는 전형적인 학원 족벌로 탈바꿈했다.

재단은 각종 횡포와 비리 의혹 등으로 학내 구성원들과 마찰을 빚었다. 1997년 한상권 사학과 교수의 재임용 탈락을 계기로 교수와 학생 등이 들고 일어났다. 총학생회는 447일간 점거 농성을 벌였고 직원들은 파업으로 대학 당국에 맞섰다. 교수와 동문도 이들의 투쟁을 지원했다.

오랜 분규 끝에 교육부 감사를 거쳐 2001년에야 관선 이사가 파견되고 교수, 학생, 직원, 동문 대표들이 대학평의원회를 구성해 안정을 찾기 시작하면서 차미리사의 창학 역사가 뒤늦게 복원될 수 있었다. 송금선의 호를 딴 덕성여대 정문 앞의 다리 남해교는 근화교로 이름을 바꿨고, 2002년 차미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뒤 차미리사연구소와 차미리사기념관이 들어섰다.

<※ 2주 뒤에 후속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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