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도·사우디 “다극화 세계”…미·중 양자택일 거부
인플레감축법 ‘보호주의적’…미국 리더십 신뢰의 위기
“미국, 파트너들이 국익 어떻게 보는지 고려 안 해”
바이든, 한국·일본, 영연방 “우리의 핵심 동맹관계”
"미국에 맞서는 베팅은 결코 잘한 베팅이 왜 아닌지를 전 세계 국가들이 다시 한번 보고 있다.” 지난 10월 발표한 미 국가안보전략(NSS) 서문에 나온 조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위협도 거론하긴 했지만, 중국을 세계에서 미국에 도전할 의사와 역량을 지닌 유일한 국가로 꼽은 것을 고려하면, 동맹국과 파트너(동반자) 국가들을 향해 멋모르고 중국 편에 서지 말라고 대놓고 경고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여기서 바이든은 중국과 러시아를 ‘전제(專制) 국가’인 권위주의 체제라고 비판한다. 그는 “이들 경쟁자는 국력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이해 못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전제정치보다 더 취약하다고 잘못 믿고 있다”고 주장했다. 현 국제질서를 ‘자유주의·민주주의’ 진영과 ‘권위주의·사회주의’ 진영의 대결로 보는 이분법이다. 바이든이 대통령 취임 이후 자주 드러냈던 이런 양자택일의 이분법적 관점이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에 반영되기에 이른 셈이다.
좌고우면 없이 바이든의 말을 따르는 나라들이 있다. 영국과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들을 맨 먼저 꼽을 수 있다. 당장 중국과의 마찰로 인한 경제적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미국과 함께 대중 압박에 열성적이다.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 등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가치 외교’를 내세우며 미국 편에 섰다지만, 미국의 경고를 생각하면 일찍 순응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음 직하다. ‘충성도 경쟁’에선 윤석열 정부의 한국과 일본도 절대로 뒤지지 않는다. 바이든이 “유럽과 인도·태평양 지역의 우리 핵심 동맹관계들(our core alliances)”이라고 지칭했던 나라들이다.
미국의 대중 압박은 군사와 경제 분야를 위시해 전방위로 진행 중이다. 큰 틀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토대로, 대중 군사 포위망은 쿼드(Quad, 미·일본·인도·호주)를 중심으로, 오커스(AUKUS, 미·영·호주 안보협력체)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 힘을 보태고 있다.
최근 들어 미국을 비롯해, 일본과 나토, 호주, 캐나다 등이 방위비 대규모 증액을 통해 대폭적인 군사력 증강 계획을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다. 나토와 일본은 미국의 요구에 따라 5년 내 방위비를 국내총생산(GDP)의 2% 수준으로 인상하기로 했다. 또한, 동맹국 간의 양자, 삼자, 다자간 연합군사훈련도 활발하다. 대만해협과 남중국해 유사시 중국의 군사적 공세를 저지, 봉쇄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다.
대중 경제포위망은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를 중심으로 구축한 상태이다. 중국을 배제하고, 민주주의와 인권 등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국과 파트너끼리 교역 및 공급망을 구축하겠다는 게 미국의 구상이다. 첨단반도체 제조기술·장비의 대중국 수출 금지, 중국산 희토류 사용 제한 등도 미국이 특별히 챙기는 사안이다.
미국의 말이라면 꼼짝 못 하는 나라만 있지는 않다. 유럽에서는 독일, 아시아에서는 인도, 중동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그 대표적 사례들이다. 이들은 지금의 국제질서를 ‘다극화 세계’(multipolar world)‘로 보고 ’미·중 신냉전’이라는 이분법을 거부한다. 그래서 자국을 독자 세력으로 규정하고 국익을 최우선으로 기준으로 삼아 전략적 자율성을 추구한다. 미국과 중국, 또는 자유주의와 권위주의 중 어느 한 편이 아니라, 국익에 따라 양쪽을 넘나든다.
우선 독일의 행보를 보자. 지난달초 올라프 숄츠 총리는 대규모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베이징을 찾았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세 번째 연임을 확정한 직후였다. 미국 등 서방 진영에서 반대 목소리가 꽤 나왔다. 중국과의 디커플링(단절)을 추구하는 ’서방의 단일 전선에 균열이 생길 것을 우려해서다. 그러나, 숄츠 총리는 감행했다.
독일 국익을 우선한 결정임은 물론이다. 지난해 독일과 중국의 교역 규모는 2450억 유로(약 340조 원)에 이르며, 중국은 독일에 최대 무역 상대국이다. 독일 기업들의 수익 상당 부분이 중국에서 나오고, 대중 직접투자도 계속 확대되는 추세다. 이렇듯 경제관계가 서로 긴밀히 엮인 상황에서 중국과 ‘단절’하라는 미국의 요구는 수용하기 쉽지 않다.
방중 기간에 중국은 170억 달러(약 22조 2천억 원) 상당의 에어버스 여객기 140대 구매라는 선물을 숄츠에게 건넸고, 독일 BMW도 중국 전기차 배터리 공장에 100억 위안(약 1조 9천억 원)을 추가로 투자하기로 했다. 숄츠 총리의 실용주의적 국익 외교의 성과다.
숄츠는 “중국이 부상한다고 베이징을 고립시키거나 협력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또다시 세계를 블록(진영)들로 나누는 유혹을 피해야 한다”(포린어페어즈 기고)고 역설했다. 중국의 고립을 추구하는 미국의 양자택일 정책에 대한 비판이다. 그렇다고, 독일이 미국과 척을 지려는 것도 아니다.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다량의 무기를 지원하는 등 나토의 핵심 일원으로 미국과 함께 전력을 쏟고 있다. 미국으로선 얄미워도 뭘 해볼 입장은 아니다.
인도의 국익 챙기기는 몇 술 더 뜬다. 국제문제를 다룰 때 도덕성이나 합법성은 그다지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지난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때 서방과는 달리 러시아를 규탄하지도, 제재에 동참하지도 않았다. 그뿐이 아니다. 서방의 제재를 무시하고 대폭 할인된 값으로 러시아 원유를 구입해 많은 혜택을 누렸다. 러시아산 무기도 계속 수입하고 있다. 인도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의 한 축이면서도, 구소련 시절부터 이어온 러시아와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 견제를 위한 미국 주도의 군사포위망인 쿼드와 경제포위망인 IPEF의 핵심 멤버인 동시에, 중국 주도의 안보협의체인 상하이협력기구(SCO) 회원국이기도 하다. ‘기회주의적 양다리 걸치기’ ‘극도의 현실주의자’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미국과 구소련이 대결하던 냉전 시대에 인도는 ‘비동맹’(non-aligned) 외교 노선을 지키며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던 역사가 있다. 비동맹은 이제 인도의 노선이 아니다. 다수의 진영 또는 모든 진영에 가담하는 ‘다자동맹’(multi-aligned) ‘전부동맹’(omni-aligned)이 새 노선이 됐다고 말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미 랜드연구소의 선임국방애널리스트인 데렉 그로스먼은 최근 포린폴리시 기고문을 통해 “인도는 새롭게 등장하는 다극적(multipolar) 국제환경의 일부가 되려고 한다”며 “글로벌 무대에서 인도와 협력하기를 원한다면 ‘인도 극(極)’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배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인도에게 물어볼 것은 ‘누구 편이냐’가 아니라, ‘누가 당신 편이냐’이다”라고 강조했다.
사우디의 최근 행보도 예상을 뛰어넘는다. 특히, 시 주석의 국빈방문 기간(12월 7~10일)에 중국과의 밀월을 보란 듯이 과시한 것은 전통적 맹방인 미국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지난 7월 원유증산 요청차 리야드를 어렵게 찾은 바이든 대통령을 냉대한 것과는 사뭇 달랐다.
특히 중국의 기술굴기 견제와 안보상의 이유로 미국 시장에서 퇴출시킨 중국의 통신장비 업체 화웨이를 클라우드·초고속 인터넷 첨단단지 건설에 참여시킨 대목에 이르면, 사우디가 저렇게 해도 미국이 두고만 볼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사우디는 이번에 중국과의 관계를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로 격상하는 한편, 그린 수소·태양광·건설·정보통신·클라우드·의료·교통 등의 분야에서 38조원 규모의 34개 협정을 체결했다. 사우디의 고민은 서방국가들이 기후변화 대처를 위해 에너지 정책을 석유에서 재생에너지 쪽으로 옮겨갈수록 석유시대의 종말도 그 만큼 앞당겨진다는 데 있다.
사우디의 실세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이런 점을 간파하고 ‘석유이후 시대’에 대비한 ’비전 2030‘ 구상을 내놓았다. 이는 원유 수출을 통해 확보한 재정을 다양한 미래 산업에 투입해 사우디를 개조하겠다는 대규모 국책사업인 것이다. 빈 살만은 이 구상의 실현이 현 시점에서 사우디의 최대 국익이라고 여길 공산이 크다. 도움이 된다면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고, 저해가 된다면 설사 전통적 맹방이라도 거리를 두는 것은 합리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대중국 견제를 위해 인도·태평양에 집중하면서 중동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 미국과 거리를 두고 중국을 끌어들인 사우디의 판단은 절묘한 측면이 있다. 한편으론 중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고, 언젠가 미국이 다가오도록 중국을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어서다. 미국과의 관계 단절이 사우디의 목표가 아님은 물론이다.
미국이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아랍권 국가들과 소원한 틈을 활용해, 시진핑은 석유·가스 등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망을 확보하게 됐다. 대만해협 유사시 서방의 전면 봉쇄가 있을 때를 대비한 측면도 있다.
이번에 중-아랍 정상회의와 중-걸프협력회의(GCC) 정상회의에 참석한 중소 아랍국들도 사우디와 유사하게 미국은 물론, 중국, 러시아 등 모든 강대국과 관계 유지를 원하고 있다. 어느 한 편에 확실히 설 경우, 그 쪽에서 보장하는 혜택보다 경쟁상대의 보복 등 리스크가 더 클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미 워싱턴 연구소의 매니징 디렉터인 마이클 싱은 7일자 포린어페어즈 기고문에서 “세계를 두 진영으로 딱 자르겠다는 바이든의 비전에도 불구, 강대국들이 경쟁하는 이 시대는 ’전부 아니면 전무‘(all-or-nothing)라는 이분법 구도로 특징 지워지지 않는다”며 “중소 규모 나라들이 어느 한 강대국과의 동맹을 맺는 것도, 비동맹으로 있는 것도 피하는 대신에 ’모두와의 동맹‘을 선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특히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은 파트너들이 자동으로미국에 유대감을 갖고 있다고 여기는 ’전략적 나르시시즘‘에 빠져서, (그들이) 자국의 이익을 어떻게 보는지 고려하지 않을 때가 많다”고 비판했다.
특히, 싱은 “동맹관계에서는 미래의 혜택을 위해 지금 일정한 비용의 지불을 요구하는 것은 합리적일 수 있다”며 “미국은 그런 장기적 관계를 다져나가길 원한다면, 멀지 않아 미래의 특전이 주어질 것임을 분명히 해야만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리더십은 지금 신뢰의 위기를 맞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과 대중 포위망 구축 과정에서 동맹국들에게 '헌신'과 '출혈'을 요구했지만, 정작 미국 자신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취한 사실이 드러나고 있어서다. 미 정치전문지 폴리티코 보도(11월 24일자)에 따르면,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심각한 에너지난을 겪는 유럽에 에너지를 미 국내 가격의 4배로 팔고, 무기 판매로 한몫 챙긴 것을 두고 유럽 내에서 원성이 높다. 특히, 북미산 전기차에만 대당 최고 7500 달러의 보조금(세액공제)을 준다는 보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인플레감축법(IRA)이 제정되자, 유럽의 산업기반과 투자도 다 빼앗아 가려는 게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아직도 우리 동맹이 맞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말이다.
어느 나라보다도 더 앞서서, 더 열성적으로 미국에 '올인한' 윤석열 정부는 이 같은 유럽 동맹국의 사정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대한민국의 국익을 챙기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릴 필요가 있다. IRA 보조금 배제에서 보듯이, 미국이 바라는 실리는 다 내어주고 얻는 것은 ’한미동맹 강화‘ ’확장억제 강화‘ 등과 같은 ’공약‘ 뿐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국익이 늘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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