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분명한 반대에도 원유 추가 감산 주도해
사우디 '탈미국' 신호탄은 작년 시진핑 국빈방문
이란‧시리아와 관계 개선…미국과는 거리 두기
'해볼 테면 해보라'는 사우디…달래기 나선 미국
중동의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의'탈(脫)미국' 행보가 거침이 없다.
사우디는 미국의 분명한 반대 의사를 무시한 채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주요 산유국 협의체인 OPEC 플러스(+)의 대규모 추가 감산 결정을 주도했다. OPEC 플러스는 2일 스스로 사우디 50만 배럴 등 하루 116만 배럴을 추가로 감산하겠다고 발표했다. 그 결과 3일 국제유가는 전장보다 6% 이상 급등했다. 앞으로 인플레 압력으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전문가들은 OPEC 플러스의 이날 결정으로 인해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미국의 전략비축유 소진과 인플레 악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정책 수단 제한 등을 초래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조 바이든 행정부는 즉각 비판에 나섰으나, 비판 수위는 조절하는 모습이었다.
사우디, 미국 반대에도 원유 추가 감산 주도
연합뉴스에 따르면,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전화 브리핑을 통해 "시장의 불확실성을 감안할 때 감산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사우디를 '80년 전략 파트너'라고 소개하는 등 사우디를 최대한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백악관의 이런 반응은 작년 10월 OPEC 플러스의 하루 200만 배럴 감산 결정을 두고 "근시안적 결정"이라거나 "후과가 있을 것"이라고 대놓고 위협한 것과는 달랐다. 당시엔 사우디와의 외교 관계 재검토 방침까지 거론했을 정도로 격앙돼 있었다. 그런 미국의 초강경 자세엔 그 결정으로 사우디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도왔다는 불만이 깔려 있었음은 물론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7월 고유가 대응 차원에서 리야드로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를 몸소 찾아가 간곡히 '원유 증산'을 요청했다.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의 배후로 지목돼 바이든 자신이 "국제 왕따"라고 비난했던 인물인데도 말이다. 거기다가 '주먹 인사'까지 할 정도로 신경도 썼다. 인플레와 민생 안정이 주요 이슈였던 중간선거를 앞둔 탓에 그로서는 이것저것 가릴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빈 살만 왕세자는 증산은커녕 되려 하루 200만 배럴 감산으로 대답했다. 바이든 대통령과 세계의 리더 국가인 미국이 자존심을 구긴 사건이었다. 그 결정에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물론이고 바이든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서 반드시 '후과'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우디 '탈미국' 신호탄은 시진핑 국빈 방문
이때부터 사우디의 '탈미국 행보'가 국제사회의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신호탄은 작년 12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사우디 국빈 방문이었다. 시 주석의 방문 기간에 사우디는 중국과의 관계를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로 격상하는 한편, 그린 수소·태양광·건설·정보통신·클라우드·의료·교통 등의 분야에서 38조 원 규모의 34개 협정을 체결했다.
특히 중국의 기술굴기 견제와 안보상의 이유로 미국 시장에서 퇴출한 중국의 통신장비 업체 화웨이를 클라우드·초고속 인터넷 첨단단지 건설에 참여시켰다. 특히 이 자리에서 시 주석은 석유·가스 대금의 위안화 결제 구상을 제시했다. 1975년 출범한 미국의 이른바 '페트로 달러 체제'는 중동지역의 에너지 대금 결제를 달러로만 하도록 강제해왔다.
사우디는 화답했다. 석 달이 지난 후 첫 성과도 나왔다. 중국 수출입은행이 지난달 14일 사우디 국영은행과의 첫 위안화 대출 협력을 끌어낸 것이다. 중국이 원하는 원유 대금의 위안화 결제 문제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지만, 사우디가 페트로 달러 체제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셈이다. 당시 이를 두고 미국과 사우디의 '일부일처제 혼인 관계'가 끝났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사우디의 대중 밀착 행보는 가속화하고 있다. 급기야 지난달 29일에는 중국 주도의 안보협의체인 상하이협력기구(SCO)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이 중국을 '세계에서 유일한 위협'으로 규정하고 서방 동맹국들과 함께 전방위로 압박하는 한편, 누구도 중국에 줄 서지 말라고 강력히 경고하는 상황인데도 사우디는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이다.
사우디, 숙적과는 관계 개선…미국과는 거리두기
그뿐만이 아니다. 오랜 '숙적'을 비롯해 역내 국가들과는 갈등 해소를 통한 관계 회복에 나서는 데 반해, 80년 전통의 맹방인 미국과는 점점 더 거리를 두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좀 과장한다면, 미국과 아예 '헤어질 결심'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 대표적 사례가 미국의 제재를 당하는 이란과의 국교 정상화 합의다. 수니파 이슬람 수장인 사우디와 시아파 수장인 이란은 중동지역 패권을 놓고 양보 없는 싸움을 벌여온 '숙적'이라는 점에서 두 나라의 화해는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란은 2016년 사우디가 반정부 시위 주동자로 체포했던 시아파 고위 성직자를 처형한 데 반발해 국교를 단절했다. 그 후 두 나라의 대립과 갈등은 역내 다른 이슬람 국가들인 시리아와 이라크, 레바논, 예멘 등으로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갔다.
주목할 대목은 사우디와 이란이 중국의 중재를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미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에 전력투구하면서 생긴 중동의 전략적 공백을 중국이 시의적절하게 파고든 것이다.
중국은 연중 가장 중요한 정치행사인 양회(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기간인 지난달 10일 베이징으로 두 나라 대표를 초청해 국교 정상화 합의를 중재했다.
시아파 이란 이어 시리아에도 화해의 손 내밀어
7년 만에 국교 정상화의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중동 평화 협상 중재' 역할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갔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사우디와 이란은 조만간 외무장관 회담을 개최하는 데 이어 정상회담도 추진 중이다. 사우디 국왕이 이란 대통령을 리야드로 초청한 상태다.
이번에도 역시 미국의 제재를 받는 시리아다. 사우디가 시아파 수장인 이란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면서 같은 시아파 국가인 시리아에도 손을 내미는 모양새다. 그 계기는 다음 달 19일 사우디에서 열리는 아랍연맹(AL) 정상회의이다. 사우디는 여기에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초청을 추진 중이라고 로이터 통신이 전했다.
아랍연맹은 2011년 시리아 내전이 반정부 시위에 대한 알아사드 대통령의 강경 진압이 원인이었다고 보고 시리아를 연맹에서 쫓아냈다. 시리아가 이 자리에 초청된다면 알아사드 정권의 고립은 공식으로 끝나는 것을 뜻한다고 통신은 해석했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사우디…달래기에 나선 미국
사우디가 보인 일련의 행보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듯 미국의 대응은 작년과 달리 신중했다. 커비 조정관은 "국제유가는 지난 한 달 동안 배럴당 80달러 정도였는데 작년 같은 시기에는 배럴당 110~120달러에 거래됐다. 지난해와 비교할 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라고 주장했다.
백악관이 직접 나서 이번 추가 감산 결정의 지정학적 파장을 가능한 한 축소하려고 애쓰는 표정이 역력했다. 사우디와의 외교 관계 재검토 방침도 통상적인 차원이었다고 발을 뺐다. 커비 조정관은 "외교 정책 목표와 국가안보 이익에 부합하는지 지속해서 살펴보지 않는 양자 관계는 없다. 우리는 전 세계에서 이런 일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궁색한 해명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우리나 사우디가 서로 항상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략적 파트너십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계속 협력해야 할 일로 예멘 휴전과 이스라엘 문제, 우크라이나 인도 지원 등을 제시했다.
특히 바이든 대통령이 경고했던 '후과'에 대해 그는 사우디에 "의회 차원에서 무기 판매에 대한 제한이 있었다"라면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더는 문제 삼지 않을 테니 앞으로 서로 잘해보자는 얘기다.
이를 두고 CNN방송은 경고를 철회한 것으로 해석했다. 미국의 대사우디 정책 변화를 예고하는 대목이다. '채찍'이 먹혀들지 않으니 '당근'을 내놓을 공산이 크다. 뒤늦게 달래기에 나선 듯 하다. 마음이 떠난 듯한 사우디를 과연 미국이 돌려세울 수 있을지 두고볼 일이다.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