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부채위기·경제침체·기후변화 ‘퍼펙트 스톰’
강대국 패권 다툼 골몰, 개도국 각자도생 내몰려
전쟁 여파로 강대국 위상 약화, 경제정책 정치화
러시아가 지난해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1년 가까이 지났다. 전격전을 통해 조기에 승부를 짓는다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계획은 우크라이나의 강력한 저항과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서방 진영의 대규모 경제적·군사적 지원에 부딪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순간에도 동부 돈바스 지역을 중심으로 교전이 치열하고, 특히 탱크와 중화기 등 서방의 군사 물자가 우크라이나로 밀려들고 있어 전쟁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1년은 제3자인 개도국과 저소득 국가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까.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라고 부르는 국가들 말이다. 이에 대해 만모한 싱 인도 총리 시절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쉬브샹카르 메논이 귀담아들을 만한 설명을 내놓았다.
팬데믹·부채위기·경제침체·기후변화 ‘퍼펙트 스톰’
우크라이나 전쟁은 수많은 개도국에는 자국을 덮친 팬데믹과 부채 위기, 경제침체,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와 같은 긴급한 글로벌 이슈들을 덮는 부정적 사건으로 비치고 있다고 그는 소개했다. ‘동맹으로부터’라는 제목의 포린어페어즈 기고문(2월 9일자)을 통해서다.
메논이 보기에, 개도국들은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강대국의 행태에도 분노하고 있다. 강대국들이 패권 다툼에 매몰된 나머지, 참혹한 상황에 놓인 개도국의 민생을 외면함으로써 자신들을 사지로 내몰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북미와 유럽, 그리고 자유주의 동맹국들을 하나로 묶어 ‘민주주의와 전제주의’ 간의 대결 구도를 만들 지정학적 기회로 보는 서구 분석가들과는 다른 시각이다.
메논은 “세계 많은 지역에서 2022년의 가장 중요한 이슈들은 우크라이나 전쟁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며 “그들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은 세계질서의 미래가 아니라, 유럽의 미래에 관한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그들만의 전쟁’이 아니냐는 항변인 셈이다.
‘그들만의’ 우크라이나 전쟁…분노하는 개도국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개도국의 상황은 처참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부채 위기를 겪는 나라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중남미 지역 50여 개에 이르고 있다. 스리랑카는 작년 4월 디폴트(지불유예) 사태를 맞이했다. 지난해 파키스탄은 홍수로 인구의 20%가 이재민이 됐다.
또한 민생 파탄에 따른 사회적 불안 등으로 인해 18개월 동안 아프가니스탄과 미얀마, 네팔, 파키스탄, 스리랑카 등 남아시아 5개국에서 정권이 바뀌기도 했다. 메논은 “작은 나라들이 그 어느 때보다 취약하다. 전반적인 시스템 리스크가 지난 수십 년보다 더 크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세계질서를 약화시켰다는 게 메논의 평가다.
첫째로 러시아의 침공은 팬데믹과 글로벌 경제침체의 지속적 효과와 결합해 모든 강대국의 힘도 권위도 약화시켰다. 경제적, 정치적 고립 등 러시아가 최대 피해자다. 자업자득이다.
유럽도 상황은 그다지 밝지 않다. 전쟁이 어느 한쪽의 승리로 끝나든 현 상태가 지속되든 미래의 유럽질서 구축에 몰두하면서 글로벌 차원의 역할은 제한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의 대외적 영향력도 약화됐다. 전쟁이 세계 경제와 중국의 에너지·식량 수입, 그리고 사실상의 중국-러시아 동맹에 미친 2차 효과가 그 요인으로 거론됐다. 메논은 중국이 다른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과는 달리 우크라이나 위기 상황에서 정치적, 군사적으로 의미 있는 역할을 못 했고, 기후변화와 개도국 부채 위기와 같은 글로벌 이슈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평가했다.
전쟁 여파로 강대국 위상 약화, 경제정책 정치화
상대적으로 미국은 건재하다는 게 메논의 견해다. 서방의 단합을 강화하고 중국과의 전략경쟁에 집중하면서도, 미군 개입 없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적절히 대처해왔기 때문이다. 다만 중동과 아프리카에 신경을 제대로 못 쓰고, 양극화된 국내 정치로 글로벌 다자시스템을 구축할 건설적 리더십을 기대할 수 없는 점을 미국의 취약점으로 꼽았다.
전쟁의 두 번째 효과는 미국과 유럽, 중국 등 주요 강대국의 경제정책이 “경제학만큼이나 정치학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그는 ‘프렌드 쇼어링’과 ‘온쇼어링’ 등을 거론하면서 “오늘날 글로벌 제조와 가치사슬에서 공급의 안보와 정치적 이해관계가 가격보다 우선 고려사항인 사례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세계화된 시장에서 미·중 간의 탈동조화(디커플링)는 어느 정도 제한받겠지만, 반도체 제조와 인공지능, 에너지, 희토류 등 전략 분야에서는 불가피할 것으로 그는 내다봤다.
메논은 현 상황을 ‘민주체제와 독재체제의 대결’로 보는 서구의 이분법에 반대한다. 그런 측면도 없지 않지만, 중·미 간 경제적 상호의존과 세계화된 경제 현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렇게 두 부분으로 딱 자를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강대국 패권 다툼 골몰, 개도국 각자도생 내몰려
그래서 초강대국 간 대결이 아니라 다양한 많은 국가 간에 대결이 펼쳐지는 다극화된 세계로 본다. 여기서 개도국들은 소외된 채 각자도생의 길로 내몰리고 있다는 게 그의 문제의식이다. 지금 개도국들은 냉전 시대에 미국과 소련 어느 한 편에 서기를 거부한 ‘비동맹’(nonaligned)과는 달리, 동맹관계에서 소외됐다는 뜻에서 ‘동맹이 아닌’(unaligned) 것으로 표현됐다.
전쟁 초기에는 개도국 대부분은 서방이나 러시아 어느 쪽에도 서지 않았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물론 인도와 인도네시아, 남아공과 같은 대국들이 유엔의 러시아 비난 결의안에 기권했던 것이 그 사례다. 그러나 서방의 대러시아 경제 제재에는 겉으로는 동참을 꺼리면서도 실제로는 그것을 존중하는 두트랙 행보를 보여왔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이 이어지자, 개도국 중 일부는 서방과는 물론 러시아와도 관계 유지 방도를 찾고 있는 모습이다.
끝으로 메논은 전쟁의 장기화와 강대국 대립 속에서 국제시스템은 한동안 표류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리고 과거 비동맹체제의 대표로서 올해 주요 20개국(G-20) 의장국인 인도가 개도국들의 절박한 고민들을 국제적 어젠다의 전면에 내세우는 일을 해줄 것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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