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전 주유엔대사, 포린어페어즈서 주장
"'민주주의 대 독재' 바이든 프레임은 실수"
"글로벌 사우스에게 절박한 건 '빵과 버터'"
한미일 삼각동맹으로 치닫는 한국에 경종
중국-개도국 긴밀…“반중국 캠페인 실패 운명”
세계를 ‘민주주의와 독재체제의 대결’로 보고 서방국 중심의 동맹체제를 강화해 중국을 고립시키려는 미국의 시도는 개도국들의 마음을 얻지 못해 실패할 것이라는 경고가 나왔다.
싱가포르 국립대 리콴유공공정책대학원 학장인 키쇼어 마부바니는 국제관계 전문지 포린어페어즈에 실린 ‘아시아의 제3의 길’(Asia’s Third Way)이라는 제목의 기고문(2월 28일 자)에서 “개도국 대부분은 중국과 기꺼이 협업, 협력하고 있다”라며 “글로벌 사우스(개도국·저소득국)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줄이거나 반대하는 미국의 어떤 노력도 실패할 운명”이라고 주장했다.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동, 중남미 등에 자리 잡은 개도국, 저소득국, 저개발국들을 통칭하는 용어다. 미국·유럽 등 서방 선진국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마부바니 학장(74)은 두 차례에 걸쳐 11년간 싱가포르 주유엔 대사를 역임하고 2001~2002년에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까지 지낸 인물이다. 미·중 패권 경쟁에 대한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의 관점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바이든의 ‘민주 대 독재’ 프레임은 자충수?
기고문에서 그는 세계를 “선과 악, 민주주의와 독재체제”의 이분법으로 나눈 미국의 전략을 “같은 생각을 지닌 정부들”, 즉 서구 선진국들하고만 일하겠다는 선언으로 여긴다. 그러나 글로벌 사우스 대부분은 전혀 다른 세계관을 지니고 있어 결국 “자충수”가 됐다고 보고 있다.
마부바니는 미국은 지금 같은 이분법적, 제로섬 식 접근법으론 “열쇠”가 없어 글로벌 사우스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중국이 서구의 부정적 묘사와는 달리 이 지역 전반에 걸쳐 실제로 도움이 되는 무역·투자·원조 관계를 한층 심화해 이들의 마음을 얻고 있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게 그의 충고다. 그리곤 미국에 결단을 촉구한다. 글로벌 사우스 지역을 실용적으로 대할지 아니면 중국과의 제로섬 경쟁을 통해 이들을 밀어낼지, 결정해야 한다고 말이다.
미국이 글로벌 사우스로 들어가는 성문의 열쇠는 실용주의적 접근이라고 그는 보았다. 그리고 꼭 지켜야 할 세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는 어느 나라에도 워싱턴과 베이징 중 선택을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양자택일을 강요하면 미국이 개도국의 반감만 사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아세안-중국, 아세안-미국 관계의 차이를 판단의 근거로 들었다. 워싱턴은 아세안 회원국에 국방협력과 무기 판매 측면에서 중국보다 더 많은 제안을 하지만, 경제협력과 대외원조 측면에선 비교할 수 없다고 그는 주장했다.
예를 들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작년 5월 미-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인프라와 안보, 팬데믹 대비 명목으로 1억5000만 달러 지출을 약속했다. 그에 앞서 중국은 2021년 11월 코로나 퇴치와 인프라 재구축을 위해 3년간 그 열 배인 15억 달러를 공약했다고 한다. 그는 미국의 빠듯한 재정과 의회 저항을 거론하며 “중국에 비하면 미국은 제안한 게 거의 없다”라고 덧붙였다.
미국, 민간협력보다 군사협력에 지나치게 의존
특히 민간협력보다 군사협력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결국 미국에 상처를 줄 것으로 예상했다. 먹고 살기 힘든 글로벌 사우스 주민의 눈에 중국은 빵과 버터를 다루는데 미국은 총과 탄약을 다룬다고 비칠 위험을 거론하기도 했다. 그는 “베이징 하면 버터가 떠오르는데 워싱턴은 총이 연상된다면 큰 실수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글로벌 사우스 주민에게 당장 절박한 것은 ‘빵과 버터’라는 얘기다.
이런 맥락에서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중국의 자본·인력을 동원한 대규모 대외 인프라 구축 사업)에 대한 미국의 비판도 실수라고 봤다. 미국 등 서구 정부와 미디어들이 ‘부채함정 외교’(debt-trap policy)에 빠뜨리는 치명적 플랜으로 묘사하지만, 유엔 193개 회원국 중 140개국이 그런 시각을 거부하고 동참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말한다. 그는 “많은 나라가 거둔 혜택을 고려하면, (미국이) 편을 선택하라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라고 덧붙였다.
두 번째 원칙은 각국의 국내 정치체제에 대해 ‘재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세안 10개 회원국의 정치체제는 민주주의와 독재체제, 공산체제, 절대왕정 등 다양하고, 글로벌 사우스로 그 지역을 넒히면 체제 유형은 각양각색이 될 정도다. 이런 조건에서 ‘민주 대 독재의 대결’로 프레임을 잡은 바이든의 결정은 실수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민주주의 수호자’라는 미국의 이념적 확신 비판
마부바니는 “많은 나라가 정치적 판단 시 점점 더 정교하고 예민해졌다”며 “미국은 중국을 피하라고 요구함으로써 자기 위상만 깎아내린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미국 지도층 인사들의 이념적 확신이 궤도 수정의 방해물이 될 것으로 봤다.
세 번째 원칙은 기후변화와 같은 공동의 글로벌 도전들과 관련해선 중국을 포함해 어느 나라와도 기꺼이 협력하라는 것이다. 기후변화 문제만 해도 재생에너지 최대 생산 및 소비국인 중국과 중국의 글로벌 경제파트너들이 참여하지 않는다면 실현가능한 대처 방안은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중국의 투자는 다른 나라들이 그들의 개발 및 인프라 수요를 충족하면서도 기후 의무를 달성하는 것을 보장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고 본다. 마부바니는 “커지는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기후변화, 빈곤, 팬데믹 등 공동의 글로벌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자산이 될 수 있다”라며 제로섬이 아니라 포지티브섬(윈윈) 방식의 접근을 주문했다.
‘아시아의 제3의 길’…글로벌 사우스의 모델
마부바니 학장에 따르면, 아세안은 그 어느 때보다 평화와 번영을 동시에 구가하고 있다. 인종적, 종교적 다양성에도 국가 간 전쟁 없이 40년째 상대적 평화를 유지해온 동시에, 극적인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성취했다. 2020년 아세안 10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총 3조 달러에 달했다. 전쟁이 다시 터졌고 생활 수준도 지난 20년간 정체됐던 유럽과 대비된다.
비결은 아세안의 ‘세련된 실용주의와 포용적 접근법’이다. 그 덕택에 아세안이 미·중 패권 경쟁의 지정학적 중심부에 있으면서도 양쪽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성장·발전에 두 나라가 기여를 많이 하게 만들 수 있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그가 보는 아세안의 최대 강점은 어느 강대국도 아세안을 위협으로 안 보는 상대적 취약점과 이질성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미국, 중국, 인도 등 역내 주요 강대국이 아세안을 “중립적이고 독립적”으로 여기고 있고, 앞으로도 그런 상황이 지속될 것으로 전망한다.
미·중 지정학적 경쟁에 대한 아세안의 실용주의적 포용적 접근법을 마부바니는 ‘아시아의 제3의 길’로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아세안이 수많은 주민이 사는 글로벌 사우스의 모델이 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중국은 이미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중동 등에 걸쳐 깊게 침투해 있다”며 “이 지역 정부들 대부분은 경제개발에 우선적으로 관심이 있고, 워싱턴과 베이징 싸움에서 어느 한 편에 서길 원치 않는다”고 강조했다.
한·중 경제관계 흔들…외교·군사적 긴장도 고조
그러나 윤석열 정부의 한국은 격화하는 미·중 지정학적 경쟁을 실용주의 접근법으로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아세안과는 정반대의 길을 선택했다. 미국, 일본과의 과도한 밀착을 통해 반중(反中) 전선인 한·미·일 3국 군사동맹을 향해 치닫고 있다. 미국 주도의 대중 포위구상인 인도·태평양 전략의 일환임은 물론이다.
이로써 최대 흑자국이었던 중국과의 경제관계는 흔들리고 있고, 윤 정부의 대만 문제 자극 등과 맞물리면서 한·중 간 외교적·군사적 긴장도 점점 고조되는 양상이다.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용인한 윤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와 불법적인 강제동원을 자행한 일본 정부와 그 전범 기업들에 면죄부를 준 ‘3·6 외교 참사’는 바이든의 목표인 한·미·일 3국 군사동맹을 향한 길에 박힌 한일 식민지 과거사라는 돌덩이들 가운데 하나를 들어낸 격이다.
일제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 지배, 그리고 전쟁 범죄에 관한 역사적 책임을 다름 아닌 한국 대통령의 손으로 직접 세탁해 준 꼴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가슴에 못을 박고 역사를 세탁하는 ‘대승적 결단’을 내린 공로를 인정받아 윤 대통령 부부는 미국의 국빈 방문(4월 26일) 초청을 받았고, 5월에는 일본으로부터 히로시마 주요 선진7개국(G7) 정상회의에 초대받을 공산이 크다. 자국 역사의 의미와 국민의 바람은 외면하고 미국과 일본만 바라보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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