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원 동식물 옮겨 만든 동양 최대 동물원
임금 사냥터-신흥종교 성지-신무기 개발 비밀기지
신천지 “과천은 선악과, 청계산은 시나이산‘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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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 11개월 8일 동안 서민들의 도심공원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던 창경원 동물원의 동물들이 경기도 과천의 서울대공원으로 이사를 했다. 사육사가 던진 나일론 포획망에 붙잡혀 나무상자 속에 들어간 공작은 청록색 꼬리를 흔들며 정든 우리를 떠나기 싫은 듯 ‘꺽꺽’ 울어댔다. 곧이어 검은댕기해오라기도 사육사에게 붙잡혀 나무상자 속에 넣어졌는데, 검은 댕기를 흔들며 영문도 모르고 재롱을 피웠다. 동물들의 이동순서는 성질이 온순해 다루기 쉬운 동물부터 시작됐다. 내년에 옮겨질 대형 동물들은 동물원 이동 작전의 하이라이트가 될 것이다.”(1983년 10월 8일 동아일보)
900만㎡에 창경원 동식물 옮기고 놀이시설 설치
서울 종로구 와룡동의 창경궁은 1909년 일제에 의해 창경원으로 격하되고 동물원과 놀이공원으로 탈바꿈한 이래 서울시민은 물론 전 국민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아왔다. 이전에는 이렇다 할 놀이시설도 없고 구경거리나 즐길 거리도 많지 않아 창경원 나들이가 어린이에게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 특히 해마다 4월 초에는 밤벚꽃놀이를 즐기러 온 상춘객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뤘다. 1986년에 와서야 창경궁은 제 이름을 되찾고 예전의 모습을 회복했다. 그곳에 있던 동물들과 식물원 식물들은 경기도 과천의 서울대공원으로 이사했다. 일제가 심어놓은 벚나무들은 여의도 윤중로로 옮겨져 새로운 서울의 명물이 됐다.
1984년 5월 1일 문을 연 서울대공원은 약 913만㎡의 대지에 동물원을 비롯해 식물원, 놀이동산 서울랜드, 국립현대미술관, 산림욕장, 캠핑장 등을 갖추고 있으며 연간 600만 명의 발길을 불러 모은다. 서울대공원은 개원 40주년을 맞아 29일 미디어아트 기반의 체험형 공원 ‘원더파크’를 개장하고 시민 참여 정원 공모전을 여는 등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펼치고 있다. 맨발로 걸을 수 있는 황토길도 조성하고, 1991년 설치한 스카이리프트를 사계절 탈 수 있는 곤돌라로 교체하는 계획도 추진 중이다.
서울대공원은 창경원의 바통을 받아 어린이들에게는 꿈동산이자 놀이터, 어른들에게는 트레킹 코스이자 휴식처 구실을 톡톡히 해왔다. 지금은 푸른 숲속에 진기한 동물과 예쁜 꽃이 가득한 아름다운 공간이지만 개원 이전 이 땅의 내력을 더듬어보면 창경궁의 수난사 못지않게 기구하다.
임금 사냥터 청계산이 신천지 성지로 둔갑
서울대공원은 청계산 서쪽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청계산은 청룡산으로도 불렸다. 풍수지리적으로도 관악산과 함께 각각 좌청룡 우백호의 지세를 이루고 있다. 예로부터 숲이 울창하고 짐승이 많아 단종이나 연산군 등 조선시대 역대 임금들이 이곳에서 사냥을 즐겼다고 한다. 청계산의 매바위, 매봉, 응봉(鷹峯) 등도 사냥용 매를 키우던 곳으로 추정된다. 그때부터 이 일대가 국내 최대의 동물원 터가 될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바위가 많은 관악산과 대조적으로 청계산은 대부분 흙으로 이뤄진 육산(肉山)이어서 늘 맑은 물이 흐른다. 그래서 산 이름도 청계(淸溪)다. 서울대공원의 주소지는 과천시 막계동이고 예전 지명은 시흥군 과천면 막계리다. 과천(果川)은 우리말로 풀면 ‘열매 시내’이고, 막계(莫溪)는 ‘맑은 개울’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이 같은 지명의 유래는 이곳을 신흥종교의 성지(聖地)로 만들었다. 신천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청계산을 성지로 삼은 까닭을 이렇게 소개했다.
“이만희 신천지 총회장은 청계산에 들어가 3년간 기도했다. 그때 성경이 머릿속에서 착착 맞춰졌다고 한다. 구약성경 출애굽기에는 모세가 하나님의 계시와 십계명을 받은 시내산이 등장한다. 청계산(淸溪山)의 '계(溪)'도 '시내 계'자여서 청계산은 동방의 시내산이다.”
시내산은 이집트 시나이반도에 있다. 시나이를 줄여 시내산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우리 말 시내와는 아무 관련 없지만, 열성 신도들에게는 단어의 어원이나 문법적 설명이 중요하지 않다. 지명에 신의 섭리가 숨어 있고, 탁월한 영적 능력을 지닌 교주가 이를 밝혀냈다고 믿는 것이다. 청계라는 지명도 전국에 여러 곳 있다. 그러나 과천은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상징하는 것이어서 이곳이야말로 성지 중의 성지라고 여긴다. 신천지가 총회본부를 과천에 두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신천지 특유의 성경 해석 방법으로 꼽히는 것이 이른바 짝풀이(비유풀이)다. 특정 단어나 구절이 어떤 상징과 은유를 담고 있는지 풀이하는 것으로, 천국 문을 여는 암호와도 같다. 여기에는 성경은 물론 다른 종교 경전이나 역사적 유명 인물의 어록들도 동원된다. 한자와 우리말과 외국어도 넘나들어 요즘 유행하는 ‘아재 개그’처럼 비치기도 한다. 신천지 교주 이만희와 한때 2인자로 꼽혔던 김남희의 이름을 두고 맨 뒤부터 한 글자씩 합해 ‘빛(희·熙)과 빛’의 ‘만남’은 ‘이김’으로 풀이하기도 했다. ‘이김’은 신약성경 요한계시록의 ‘이긴 자’를 뜻한다.
‘싸이 장인’ 유재열, 최연소 교주로 신도 마을 조성
처음 이곳에 둥지를 튼 신흥종교는 신천지가 아니었다. 이곳을 동방의 시내산이라고 해석한 것도 이만희의 독창적인 발상은 아니다. 청계산의 신흥종교 역사는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있던 호생기도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부교 교주 박태선의 영향을 받은 김종규(본명 김용기)는 1964년 호생기도원을 차렸다.
고교생 유재열은 1965년 신비체험을 한 뒤 부친 유인구와 함께 호생기도원에 합류했다. 김종규가 여신도 간음 스캔들을 빚자 이탈해 1966년 4월 4일 청계산 기슭 지금의 장미원 자리에 장막성전(帳幕聖殿)을 지었다. 유재열은 당시 18세로 신흥종교 역사상 최연소 교주로 꼽힌다. 어린 종, 삼손, 선지자 등으로 불렸으며 여러 이적을 행했다고 한다. 그는 “지금이 말세”라고 주장하며 “불바다가 되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장막성전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설교했다.
불바다의 환란이 지나가면 14만 4000명이 피신처에서 나와 신천신지(新天新地)를 이루게 되며, 장막성전을 지은 1966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260일째 되는 날 예수 재림이 이뤄진다고 예언했다. 이를 믿고 따르는 신도가 전국에서 몰려왔다. 버스도 들어오지 않는 궁벽한 산골이었으나 400가구에 2천여 명을 헤아렸다. 초막으로 지은 교회도 웅장한 콘크리트 건물로 바뀌었다.
그러나 예언한 그날(1969년 11월 1일)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교단은 혼란에 빠졌다. 교단은 와해됐고 유재열은 신도들에게 사기 등의 혐의로 피소돼 형사처벌을 받았다. 유재열은 1980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가 1985년 귀국해 종교와는 무관한 사업에 매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딸이 가수 싸이와 결혼했는데, 코로나 팬데믹 사태 때 신천지에 이목이 집중되면서 새삼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유재열 고발에 참여한 신도 가운데 한 명이 이만희다. 그는 1967년 장막성전에 들어와 집 짓는 일 등을 하다가 집사가 됐다, 이만희는 1984년 3월 14일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을 창립했다. 신천지는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을 가리키고, 증거장막성전은 장막성전에서 일어난 일을 증거하는 성전이란 뜻이다.
박정희, 신도 내쫓고 "무조건 북한보다 크게 지으라" 지시
박정희는 대통령 시절 이 일대에 미사일과 핵무기 등 신무기 개발기지를 만들려고 했다. 3대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 부장을 지낸 혁명 동지 김재춘을 시켜 경기도 김포와 서울 강서구에 소유하던 인산농원을 담보로 대출받아 땅을 구입하게 했다. 정부가 나서면 미국의 의심을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군사전문가들이 북한군 장사정포의 유효 사거리 안에 있다는 이유로 반대해 기지 예정지는 대전 인근으로 옮겨졌다.
김재춘은 곤경에 빠졌다. 더욱이 1971년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으로 묶이는 바람에 팔기도 어렵고 다른 용도로 활용하기도 곤란해졌다. 결국 박 대통령은 서울시가 과천 부지를 사들이도록 해 서울대공원을 짓기로 했다.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의 서울시립승화원이 경기도에 위치하면서도 서울시가 소유·운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울대공원도 경기도에 자리 잡고 있으나 서울이란 이름이 붙었다.
정부는 1977년 이곳을 공원용지로 고시했다. 그때까지도 남아 있던 장막성전 등 신흥종교 신도들은 모두 인근 문원동으로 이주시키기로 했다. 일부 주민이 철거에 거세게 저항했지만, 정부의 방침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서울대공원은 1978년 10월 30일 공사를 시작한 지 5년 반 만에 문을 열었다.
서울대공원의 이름은 원래 남서울대공원이었다가 착공 직전에 바꿨다. 동물원 면적은 당초 24만8000㎡로 계획했으나 박 대통령이 “평양의 조선중앙동물원(268만1000㎡)보다 크게 지으라”고 지시하는 바람에 계획안의 10배가 넘는 290만4806㎡로 늘어났다. 이는 미국 샌디에이고 동물원에 이어 세계 2위로 아시아 최대였다. 그때는 뭐든지 북한보다 앞서야 한다는 경쟁심이 지배하고 있었고, 동양 최대나 아시아 최초 등으로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금은 동물원 자리에 다른 시설들이 들어서 면적이 242만㎡로 줄어들었다. 이것만으로도 국내 최대이고 세계 유수 동물원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보유 동물은 포유류 115종, 조류 66종, 파충류 27종, 양서류 11종 등 219종 3000여 마리를 헤아린다. 조선중앙동물원은 어류 120여 종을 포함해 400여 종 4000여 마리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85년 개원한 식물원은 1587종 16만 8686본을 보유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은 1986년 들어섰고, 놀이동산 서울랜드는 1988년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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