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인 미만 사업장 확대 ‘2년 유예’ 촉구
기업 안전관리 소홀로 중대사고 많은데
경제단체들 억지 주장 앵무새처럼 반복
이미 3년 간 유예…“더 미룰 명분 없어”
사망사고도 감소…“효과 있다고 봐야”
“경기 서부의 한 주물업체에서 2년 전 환갑을 넘은 근로자가 무너진 자재 더미에 깔려 사망했다. 이 회사 대표는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회사 관계자는 “이제는 사고가 터지면 구속 등 처벌이 불가피해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중대재해법(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적용이 다가오면서 중소기업이 집단 패닉에 빠져들고 있다.”
한국경제신문은 중대재해법이 50인 미만 사업장으로 27일부터 확대 시행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이런 내용의 기사를 24일 자 1면에 게재했다. 기사를 보면 중대재해법 시행으로 처벌받을 수 있는 기업 대표를 걱정하는 마음이 듬뿍 담겼다. 그런데 기사를 읽으며 비정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자재 더미에 깔려 사망한 고령의 노동자에 대한 연민은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안전하지 못한 사업장에서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한 노동자보다 집행유예를 받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을 뿐 건강하게 살고 있는 기업 대표가 더 불쌍하다는 이야기인가.
중대재해법 관련해 이런 식으로 보도하는 매체는 한국경제만이 아니다. 대다수 보수언론은 중대재해로 사망하거나 크게 다친 노동자는 뒷전이고 기업 사정만 전달하기 바쁘다. 경제단체들은 50인 미만 영세 기업들이 법을 준수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며 ‘2년 유예’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명분이 약하다.
중대재해법은 2021년 1월 국회를 통과했고 1년 뒤인 2022년 1월 27일 5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시행에 들어갔다. 법이 제정된 시기부터 따지면 준비 기간이 3년인 셈이다. 그런데도 시행을 코앞에 두고 더 미루자는 것은 법 자체를 형해화하려는 ‘떼쓰기’로 보일 뿐이다.
재계보다 더 한심한 곳이 윤석열 정부다. 법이 취지에 따라 제대로 시행될 수 있도록 재계를 설득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유예기간 2년 연장’을 앞장서서 외치고 있다. 재계 '아바타'를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과 오영주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은 24일 중대재해법 유예기간 연장을 위한 법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이들의 주장은 이렇다. “법이 확대 시행되면 동네 음식점과 빵집도 적용 대상이 된다. 이들이 대기업도 어려워하는 안전보건 관리체계를 구축하고 인력과 예산을 확보하고 있을 것이라 기대하기 어렵다. 중대재해로 대표가 처벌받으면 경영이 힘들어진다. 83만 7000개 50인 미만 기업이 안정적으로 운영되지 못하면 그 피해가 고스란히 그곳에서 일하는 800만 명 근로자 일자리에 미칠 것이다.” 이는 재계 논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중대재해법은 안전 확보 의무를 소홀히 한 사업주나 경영책임자에게 1년 이상 징역이나 10억 원 이하 벌금을 물리는 처벌 조항을 두고 있다. 산업안전보건법 등 기존의 유사한 법보다 처벌 강도가 셀 수 있다. 산업 현장의 고질병인 중대재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처벌 수위를 높여야 할 필요성이 있어 이를 반영한 것이다.
정부와 재계, 보수언론은 이처럼 처벌이 강한데도 법률 내용이 모호해 기업들이 뭘 준비해야 할지 모른다고 비판한다. 법 조항의 이현령비현령식 해석으로 억울하게 처벌받는 기업인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특히 50인 미만 영세 사업장은 이런 법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중대재해법 관련 판결을 보면 대부분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다. 중대재해법 시행 후 600건 넘게 수사 대상에 올랐는데 기소된 사건은 30여 건 불과하다. 지난해 말까지 중대재해법 관련 재판에서 1심 이상 판결은 12건이 나왔는데 실형이 확정된 곳은 한국제강 한 곳뿐이다. 재계가 우려했던 것과 정반대로 사법부가 중대재해 해석을 엄격하게 한 결과다.
안전관리 체계 구축을 위한 비용 부담이 클 것이라는 이야기도 과장된 측면이 있다. 중대재해법 사건의 기소율이 낮은 게 이를 증명한다. 정부와 재계가 지적하는 포괄적 규정이 오히려 기업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안전보건 관리체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만 인정돼도 처벌을 면할 수 있다. 50인 미만 사업장 10곳 중 8곳 이상은 이 정도의 안전관리 체계를 구축했거나 준비 중이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중대재해법으로 기업 부담이 커질 것이라는 주장을 신뢰할 수 없는 이유다.
중대재해법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에도 불구하고 법 시행 효과는 증명되고 있다. 김경식 고철연구소 소장 겸 ESG 네트워크 대표는 최근 한겨레와 인터뷰하며 “(법이 시행된) 2023년 1분기 중대재해 사망자가 전년 동기 대비 12.9%(19명) 감소했다”며 “법시행 효과가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단순 사망사고 비중이 작아지는 건 안전의식이 개선되는 신호”라며 “2018~2020년 산재 사망자 2011명의 요인을 분석해보니 작업방법 미준수, 안전보호구 미착용 등 안전의식 미흡으로 인한 사고 비중이 66.5%에 달했다”고 설명했다. 김 소장은 “2년 뒤 경제단체가 다시 유예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며 “확대 시행을 유예할 명분이 약하다”고 강조했다.
노동계도 24일 국회 본관 앞에서 중대재해법 확대 적용 유예에 반대하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노동계는 법 적용 사업장을 넓혀야 사망 등 중대재해가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망사고를 포함한 산업재해의 70% 이상이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은 “노동자 권리와 안전을 가장 앞장서서 보호해야 하는 노동부가 본분을 망각하고 있다”며 “법을 시행하라는 노동 현장의 절박한 호소를 외면한 채 경제단체만을 대변하는 지금의 상황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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