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의 뒤늦은 선거연합정당 추진 결정
진보정치의 오랜 위기와 분열 속에 돌파구?
또다시 각개약진과 각자도생은 대안 아냐
민주당 오른쪽으로 후퇴하자는 '세번째 권력'
이준석, 양향자, 금태섭도 함께할 수 있다?
진보적 가치와 정체성 사라지고 선거공학만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정의당은 전국위원회를 열어 정의당을 플랫폼으로 해서 녹색당과 진보당과 노동당과 민주노총 등과 함께 선거연합정당을 추진한다는 내용을 담은 방안을 의결했다. 이것은 다양한 진보정치 세력들이 총선 공동 대응 기구를 구성하여 정책연대, 후보단일화, 공동 선거운동을 강화해나가자는 민주노총 정치방침과도 일부 부합하는 내용이다.
더구나 이것은 아직 독자적인 힘이 부족한 진보정당들이 전 세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예컨대 지난해 프랑스 대선에서 마크롱과 르펜의 양자 대결 구도에 밀려 3위를 차지했던 멜랑숑의 ‘불굴의 프랑스’는 이어진 총선에서 녹색당, 공산당, 심지어 사회당까지 포괄하는 새로운 좌파 선거연합(생태사회적 신민중연합)을 결성해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정치의 과제가 무엇인가라는 큰 그림에서 봐도 이것은 적절한 면이 있다. 진보정치는 기득권 우파들에 맞서서 민주 개혁의 과제를 이루는 데 앞장서고 민주당과 부분 협력하면서도, 더 나아가 민주당을 넘어서 더 급진적 사회경제 개혁을 위한 힘과 조건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것은 단지 민주당을 강하게 매도하고, 민주당 지지자들을 깎아내린다고 저절로 이루어질 과제가 아니다. 기득권 우파 카르텔이 쌓아온 적폐의 청산과 민주 개혁에 민주당보다 더 철저하다는 것을 입증하면서, 더 나아가 급진적 사회경제 개혁의 필요성을 폭넓게 대중적으로 납득시키는 과정이어야 한다.
진보정당들이 그동안 이 과제에 성공했다면, 다가오는 총선은 훨씬 더 유리한 구도였겠지만 솔직히, 현실은 별로 그렇지 않다. 현재 진보정당들은 정의당, 진보당, 녹색당, 노동당 등으로 난립해 있는데 대부분 독자적으로는 3% 봉쇄 조항의 벽을 넘어서 국회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은 조건이다. 심지어 이번에는 정의당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따라서 정치적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많은 진보정당들이 각자의 독자적 목소리와 정책을 유지하면서도 지역구에서 후보를 단일화하고 비례투표에서 힘을 모으는 ‘선거연합 정당’은 필요하고 효과적인 방안일 수 있다.
그러면 국민의힘은 절대 싫지만 민주당도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최대한 한곳으로 모으는 데 성공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를 통해 비례득표에서 더 큰 시너지를 내고, 상대적으로 큰 진보정당이 작은 진보정당을 도와서 3%의 벽도 넘어서게 해줄 수 있다.
그래서 민주노총뿐 아니라 필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오래전부터 거듭해서 진보정당들에게 이런 전술이 필요하다고 주문해 왔지만, 그동안 진보정당들은 별로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2012~13년 박근혜 정부의 ‘종북몰이’와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과정에서 만들어진 갈등과 불신, 상처의 깊은 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정의당과 진보당은 갈라졌고 또 새로운 진보정당들이 계속 만들어졌다. 연대와 협력보다 경쟁과 배제의 논리에서 진보정당들도 자유롭지 못했다. 선거 때마다 ‘진보정당들이 뿔뿔이 흩어져 3%를 넘느냐 못 넘느냐로 희비가 갈리는 길’과 ‘진보정당의 일부가 민주당과 선거연합을 해서 원내로 진출하는 길’이라는 양자택일이 반복됐다.
진보정당들이 갈라져서 각자 그런 길들을 가고, 매번 선거 끝나고 나면 어느 쪽은 안도하고 어느 쪽은 좌절하면서 갈등의 골이 더 깊어지는 악순환을 보면서 씁쓸한 심정을 느껴본 게 이미 여러 번이다. 이런 식으로 10년도 넘게 진보정당 지지자들의 희망은 좌절돼 왔다. 정의당은 이런 상황에 대한 더 큰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
그동안 유일한 원내 진보정당이었고, 가장 크고 힘 있는 진보정당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정의당의 결정에 대해서 ‘왜 이제서야’라는 반응이 나온다. 정의당이 원내 진보정당으로서 그나마 탄탄한 기반과 지지를 유지하고 있을 때 이런 방안을 추진했다면 훨씬 더 빨리 더 많은 성과가 가능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다.
예컨대 4년 전 총선 때 이런 시도를 했다면 민주당이 위성정당을 만들면서 다른 진보정당이나 활동가들이 거기에 끌려갈 여지와 명분은 상당 부분 차단됐을 것이다. 정의당이 내년 총선에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할 것이 분명해진 상황에서야 뒤늦게 이런 방안이 결정된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지금, 정의당은 지지율뿐 아니라 당원 수도 줄어들고, 주요 활동가들도 당을 떠나고, 재정적 위기도 겹쳐있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심상정 의원과 핵심 지도부가 추구했던 지난 10여 년간의 방향에서 어떤 성과와 문제가 있었는지, 제대로 된 평가는 잘 보이지 않고 내부적 갈등과 분열이 커지는 상황이기도 하다. 다른 진보정당들도 좋은 상황은 아니다.
진보당은 오랜 고생 끝에 바닥을 다지며 ‘종북몰이와 강제해산’의 후유증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힘겹게 나아가는 듯하지만, 여전히 여러 걸림돌이 있다. 특히 진보당은 지금도 윤석열 정부가 심심하면 터트리는 ‘간첩단’ 마녀사냥과 ‘건폭몰이’ 공격의 핵심 표적이 돼 있다. 진보당의 힘이 커질수록 이것은 더욱더 강하게 목을 조여 올 것이다.
녹색당과 노동당 등도 독자적인 총선 준비와 대응이 매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최근 서울 강서구청장 재보선에서 정의당, 진보당, 녹색당 후보가 각개약진을 했지만 다 합쳐서 3.5% 득표에 그친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민주노동당부터 시작해 20년이 넘은 진보정당 운동의 역사가 이제 다 합쳐서 4%도 안 되는 득표라는 결과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진보정당들의 지역적 기반은 더 줄었고, 사회운동과 연계는 더 약해졌고, ‘영남 노동벨트’는 더 희미해졌다. 진보정당 지지기반의 확대 재생산이 아니라 축소 재생산이 진행된 셈이다. 그래서, ‘이미 너무 늦었다’는 반응들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늦었다고 포기하고 또다시 각개약진과 각자도생을 선택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부터라도 함께 길을 찾아가는 게 더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먼저 정의당부터 좀 더 기득권을 내려놓으며 진정성을 보일 필요도 있다. 정의당을 플랫폼으로 고집하며 다른 진보정당들에게 들어올 것을 요구하기보다는, 특정 정당을 넘어선 플랫폼을 만들거나 차라리 민주노총을 플랫폼으로 삼는 것이 더 효과적으로 보인다.
다른 진보정당들도 ‘함께하지 않을 핑계’를 찾기보다, ‘함께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미 줄어든 지지 기반을 서로 더 갈라먹기 위해서 다투는 게 아니라 함께 힘을 모아서 지지 기반을 넓히려는 자세를 보고 싶다. 그 점에서 가장 문제적인 것은 정의당 내부의 의견그룹인 ‘세번째 권력’과 박원석 전 의원의 입장이다.
조성주 공동대표와 장혜영 의원, 류호정 의원 등이 주도하는 ‘세번째 권력’은 진보정당들의 연대와 협력을 반대하면서 오히려 민주당이나 국민의힘에서 떨어져나온 정치인들과 함께 ‘제3지대 신당’으로 가자는 태도다. “폐쇄적 운동권 정당”을 벗어나 “양당 기득권과 불평등과 기후 위기와 차별에 맞서기 위해 누구라도 함께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그러면서 이준석 전 대표, 금태섭 전 의원, 양향자 의원 같은 기성 정치인들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기성 정치인들이 ‘불평등과 기후 위기와 차별에 맞서’는 데서 어떤 비전도 보여준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사실 ‘진보정당의 연대’와 ‘제3지대 신당’을 대립시키는 것 자체가 허구성이 짙고 제대로 된 구분이 아니다.
진보정당 자체가 원래 기득권 우파는 싫지만 민주당 계열 정당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제3지대’ 신당으로서 등장했다. 거기서 ‘제3지대’는 민주당 왼쪽의 의미였다. 그런데 ‘세번째 권력’과 박원석 전 의원은 난데없이 민주당 오른쪽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여기가 진짜 제3지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는 지난 20년 동안 민주당 왼쪽에서 제3의 진보적 대안을 건설하려는 시도가 왜 성공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진지한 평가를 찾을 수 없다. 진보정치의 기본적 가치도 거추장스러운 짐이 돼 버렸다. 그저 “거칠게 말하자면 민주당 오른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완전히 다른 조합을 보여줄 때 신당이 성공할 수 있다”(조성주)는 선거공학적 계산만이 남았다.
실제로 ‘세번째 권력’은 노동운동이 그동안 고용불안정과 비정규직 확산 때문에 반대해 온 ‘자회사 모델’을 긍정하고 있고, “기업은 타도 대상이 아니라 공존을 도모할 수밖에 없는 상대”라거나 “시장은 관여와 개입 속에 번영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등의 전형적인 주류정당의 친기업, 친시장적 노선과 비슷한 주장들을 내놓고 있다.
이렇게 스스로 진보적 가치에서 멀어지게 됐으니, 여성과 장애인에 대한 ‘혐오정치’를 펼쳐 온 이준석이든, 삼성 출신으로 재벌들의 편에서 줄곧 반개혁적 입장을 취해 온 양향자이든, 검찰 개혁의 발목을 잡더니 결국 지난 대선 때 윤석열 캠프에 합류했던 금태섭이든 ‘누구든지 함께할 수 있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여성혐오와 성폭력에 반대한다며 민주당조차 ‘가짜진보’라고 비판하던 바로 그 사람들이 갑자기 태도를 180도 바꾸어서, 국민의힘 대표였던 이준석을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지점이 있는 정치인” “배울 게 있는 정치인”(조성주)이라고 추켜세우고, “젠더갈등 문제 해결을 목적으로 터놓고 얘기할 기회”(류호정)를 기대하는 현상까지 나타난다.
이런 방향을 주도하는 게 청년 진보 정치인들이라는 것도 아이러니다. 이들은 선배 정치인들이 ‘종북몰이’에 제대로 맞서 싸우지 못하면서 생긴 진보의 분열과 위기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지만, 거꾸로 혐오정치와 타협하는 또 다른 후퇴를 덧붙이면서 진보정치의 위기를 더욱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민주당 왼쪽의 ‘제3지대’에서 진보정당을 만들려는 시도뿐 아니라, 민주당의 오른쪽(국민의힘과 민주당 사이)의 ‘제3지대’에서 중도정당을 만들려는 시도도 한국 사회에서 결코 낯선 경험이 아니다. 문국현과 안철수 등으로 대표되는 이 시도는 언제나 ‘여론조사에서 20~30% 정도 나오는 무당층을 잡겠다’며 선거를 앞두고 등장했다.
양당에서 떨어져 나오거나 공천받지 못한 의원들을 모아서 양쪽의 노선과 정책을 반반씩 섞거나 절충하는 게 이들 세력의 특징이었고, 결국 어느 한쪽으로 흡수되기 십상이었다. 지금은 윤석열의 품으로 들어간 안철수 의원이 대표적이다. ‘좌도 우도 아닌 앞으로’를 말하던 조정훈 의원과 ‘시대전환’의 국민의힘 합당도 비슷한 경우다.
실제로 이준석, 양향자, 금태섭 등이 만드는 ‘제3지대’ 신당은 총선 이후 국민의힘과 합쳐지면서 윤석열 정부의 권력 연장에 함께할 가능성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20년 진보정치의 노력을 웃음거리로 만들며 무너트리는 이런 시도는 막다른 골목이다. 진보정치가 민주당의 오른쪽에서 수렁에 빠져 사라지는 길이 아니라, 민주당의 왼쪽에서 기득권 우파에 맞서며 한국 사회의 더 급진적 변화와 개혁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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