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OECD 37개국 중 6위로 아직 장노동인데
"OECD 연 평균치와 격차 줄어 185시간 밖에 안돼"
근무환경 열악한 일본을 본보기 사례로 들어
"시간 외 근무 늘려야 한다"며 윤 정부 방침에 '군불'
정부와 재계가 일을 몰아서 할 수 있도록 하는 근로시간 개편안을 다시 밀어붙일 태세다. 정부는 ‘주 69시간 근로’를 가능하게 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올해 3월 발표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산업현장의 현실을 무시하고 사실상 장시간 근로를 허용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중시했던 MZ세대 노동조합까지 비판에 가세하자 정부는 한발 물러서 개정안을 보완하겠다고 했다. 이에 따라 고용노동부는 국민 6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와 그룹별 심층 면접을 통해 여론 동향을 파악한 뒤 새로운 개편안을 내놓기로 했다.
그러나 정부의 근로시간 개편 방향성이 근본적으로 바뀔지는 미지수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최근 재계 입장과 논리를 반영한 보고서를 내놓고 있다. 고용부의 설문조사와 심층 면접 결과 발표를 앞두고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군불을 때고 있는 것이다.
경총이 11일 발표한 ‘근로시간 현황 및 추이 국제비교 분석’ 보고서도 그중 하나로 보인다. 보고서의 요지는 한국의 전체 임금근로자 1인당 연간 실근로시간이 지난해 기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의 평균보다 185시간 더 길었는데 이는 2001년에 비해 554시간이나 짧아졌다는 것이다. 풀타임 임금근로자의 주당 평균 실근로시간도 42시간으로 OECD 평균보다 1시간 정도밖에는 길지 않았다고 경총은 분석했다. 그러니 한국을 예전처럼 장시간 근로 국가로 보기 어렵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근로시간을 유연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게 경총 주장이다. 정부가 추진했던 ‘주 69시간 근로’와 맥을 같이 하는 결론이다.
경총이 지난 1일 발표한 ‘임금·HR연구 2023년 하반기호’ 주제도 ‘최근 근로 시간 환경 변화와 인적자원관리 대응’이다. 일하는 방식이 바뀌고 있는 만큼 다양한 형태의 근무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게 골자다. 기업 근무 환경이 한국보다 열악한 일본 사례를 들어 시간 외 근무를 늘려야 한다는 궤변도 실려있다. 어떻게든 재계가 요구하는 쪽으로 근로 시간 개편안을 바꾸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경총은 “이제 근로 시간이 OECD 평균과 비교해도 과도하게 길다고 볼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며 “저성장 극복을 위해서는 장시간 근로 국가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근로 시간 유연화 같은 생산성 제고를 위한 제도 개선을 적극적으로 도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경총 보고서를 자세히 보면 한국은 여전히 장시간 근로에서 탈피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 눈길을 끈다. 지난해 한국 임금근로자의 연평균 실근로시간은 1904시간에 달했다. 통계가 없는 튀르키예를 제외한 OECD 37개국 중 6번째로 일을 많이 했다. 독일보다 600시간, 일본보다 약 300시간이 더 길었다. 풀타임 임금근로자의 주간 평균 실근로시간도 자료를 공개하지 않은 호주와 캐나다, 체코, 일본, 튀르키예를 빼고 7번째로 길었다.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 하기에 민망할 만큼 일하는 시간이 많은 셈이다. 그런데도 OECD 회원국 평균과 격차가 줄었다는 추이만 강조하는 건 사실을 호도하는 것이다.
정부의 기존 개편안은 연장근로시간 관리를 주 단위에서 월, 분기, 반기, 연 단위로 다양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런 방식으로 11시간 연속휴식권 보장하면 한 주에 최대 69시간, 휴식권을 보장하지 않으면 최대 64시간을 근무할 수 있도록 했다. 정부와 재계는 일이 몰릴 때 집중적으로 일하고 ‘한 달 휴가’를 즐길 수 있다는 논리로 포장했다. 하지만 노동단체는 물론 청년세대까지 현장과 괴리된 방안이라는 비판이 빗발쳤다. 장시간 일해도 한 달 휴가는 사실상 불가능한 현실을 무시한 탁상공론 정책이라는 것이다. 특히 중소기업은 대체인력이 부족해 휴가를 못 쓰는 일이 허다하다. 쌓인 연차도 소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짜 노동과 과로만 늘어날 것이란 불만이 쏟아졌다.
정부의 설문조사와 심층 면접 결과가 어떤 내용으로 나올지 두고 봐야 하겠지만 정책 방향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또 여론의 역풍에 직면할 게 뻔하다. 근로시간 개편은 기업보다 노동자를 우선순위로 놓고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노동자의 휴식권과 건강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생산성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주간 근로시간 상한선을 높이는 것은 세계적 추세와 맞지 않는다.
지난 2018년에 도입된 주 52시간 근무제는 재계가 우려했던 것과 달리 산업현장에서 안착하고 있다. 노동자는 일과 생활의 균형을 맞출 수 있고 생산성이 줄었다는 증거도 없다.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일하면 오히려 생산성이 높아진다. 이는 한국보다 근로시간이 짧은 선진국에서 이미 증명됐다.
이런 점에서 근로시간 개편은 일하는 시간을 줄이는 쪽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MZ세대를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가장 적절한 근로시간으로 ‘주 40시간’이라는 답변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조사도 있다. 젊은 세대가 ‘주 69시간’에 강력하게 반발했던 것도 이런 인식 때문일 것이다. 정부와 재계가 근로 시간을 늘리기 위해 어떤 논리와 근거를 제시해도 일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세계적인 추세를 거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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