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시간 30분 초과 근무가 9시간 30분으로 축소

근로기준법 위반했는데 아니라고 뒤집은 대법원

계산법에 따라 제멋대로…'초과로노동' 길 열려

69시간 망언 정부에 잘못된 신호 줄 우려도

시대흐름·시민인식도 못 쫓아가는 사법부 유감

1주일 연장근로 시간을 단순히 법정 근로시간(40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으로 봐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정부·여당이 '주 60시간 이상' 근무제를 추진하는 가운데, 사법부가 하루 20시간 이상 '초(超)과로노동'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놨다는 비판이 나온다.

14일 <시민언론 민들레>가 입수한 대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는 지난 7일 근로기준법과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항공기 객실청소 서비스 업체 대표에게 벌금 100만 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남부지법으로 내려보냈다.

해당업체 대표는, 2013년 9월부터 2016년 9월까지 근무하다가 2016년 11월 사망해 퇴직한 직원 A 씨에게 248만 원의 연장근로 수당을 지급하지 않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A 씨가 △2014년 34회 △2015년 43회 △2016년 32회 등 근로기준법을 초과한 근무를 했다고 봤고, 1·2심 법원도 이를 인정해 유죄로 판단했다.

 

26일 오전 서울 원효대교 북단에서 민주노총 관계자들이 주69시간제 폐기, 최저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는 메시지가 담긴 현수막을 들고 선전전을 하고 있다. 2023.4.26. 연합뉴스
26일 오전 서울 원효대교 북단에서 민주노총 관계자들이 주69시간제 폐기, 최저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는 메시지가 담긴 현수막을 들고 선전전을 하고 있다. 2023.4.26. 연합뉴스

그러나 대법원이 원심을 뒤집고 연장근로 시간 계산에 대한 판단을 달리하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앞서 1·2심 법원은 근로일마다 1일 8시간을 초과하는 근로시간을 연장근로로 보고, 각 근로일의 연장근로 시간을 합산해서 주당 12시간을 초과하면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판단했다.

A 씨의 경우, △2014년 4월 15일 12시간 △4월 16일 11시간 30분 △4월 17일 14시간 30분 △4월 20일 11시간 30분 등 2014년 4월 14일(월요일)부터 20일(일요일)까지 일주일 동안 총 4일을 근무했다.

1·2심 법원은 A 씨가 근로일마다 8시간을 초과한 부분을 연장근로로 인정해 일주일간 총 17시간 30분(4시간+3시간 30분+6시간 30분+3시간 30분, 아래 표 참고) 추가로 근무했다고 보고, 법정 한도(12시간)를 초과해서 연장근로했다고 판단했다.

 

반면에 대법원은 "1일 8시간을 초과하는 연장근로시간의 1주간 합계에 관하여 정하고 있는 규정은 없다"면서도, "1주간의 근로시간 중 40시간을 초과하는 근로시간을 기준으로 연장근로를 판단해야 한다"며 원심의 '연장근로 합산' 방법이 잘못됐다고 했다.

대법원은 A 씨가 2014년 4월 14일부터 20일까지 일주일 동안 근무한 시간이 총 49시간 30분이므로, 이중에서 법정근로 시간인 40시간을 뺀 9시간 30분만 연장근로라고 인정했다. 주당 12시간을 초과하지 않아 근로기준법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울러 대법원은 근로기준법의 근로시간 규율에 대해서도 "1일 8시간을 초과하는 연장근로가 가능하다는 의미이지, 1일 연장근로의 한도까지 별도로 규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면서, 연장근로가 가능하다는 점에만 초점을 맞춰 해석했다.

대법원의 판단대로라면, 하루에 최장 21시간 30분씩(근로기준법에 따라 4시간마다 30분씩 휴게시간 제외하고 최대시간 근무) 이틀 연속으로 근무(43시간)를 해도 법정근로 시간(40시간)을 빼면 연장근로 시간이 3시간에 불과하므로 위법하지 않게 된다.

원심대로 계산한다면 21시간 30분 근무시 연장근로 시간만 13시간 30분(21시간 30분-8시간)으로, 단 하루 근무만으로도 12시간을 초과해 근로기준법에 위반되지만, 어떻게 연장근로 시간을 계산하느냐에 따라 '초과로노동'도 얼마든지 가능해지는 셈이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6일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근로시간 제도 개편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2023.3.6 연합뉴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6일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근로시간 제도 개편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2023.3.6 연합뉴스

고용노동부의 명확한 지침도 없다. 고용부 관계자는 <민들레>와 통화에서 "1일 8시간, 1주 40시간을 초과하는 경우 둘 다 연장근로로 해석하는데, 1주간 12시간까지 한도로 연장 근로를 할 수 있다"며 "대법원 판결과 관련해 연장시간 계산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주무부처도 명확하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섣부른 대법원의 판단은 정부의 노동정책과 노동시장에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현 정부는 이미 '주 69시간 근무제' 추진으로 홍역을 겪고도, 제조업과 생산직 등을 대상으로 또다시 '60시간 이상 근무제'를 추진하고 있다. 주당 근로시간 상한 설정 등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못 이룬 상황에서, 대법원 판결이 자칫 '과로노동'을 양산하는 길만 열어놓을 수 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이 사법부의 보수적인 성향을 그대로 드러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사법부가 노동과 관련한 시대 흐름이나 세계 추세 등과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이다.

일례로 2022년 기준 한국의 연간노동 시간은 1901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5위다. OECD 평균(1752시간)이나 최하위국인 독일의 연간 노동시간(1341시간)과 비교해도 한참 높은 수준이다. 52시간 근무제 도입에도 세계 최장 수준의 노동시간을 기록하는 한국 사회에 대한 사법부의 고찰이 필요해 보인다.

 

시민들의 인식과 괴리된 판결이라는 점에서도 사법부의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초고도 성장을 해온 한국 사회에서 노동시간 단축은 이미 하나의 흐름이 된 지 오래다. 윤석열 정부가 난데없는 '69시간 근무제'를 들고나와 뭇매를 맞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직장갑질119가 여론조사기관 엠브레인 퍼블릭에 의뢰해 9월 4~11일 19세 이상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주당 근로시간에 대해 48.3%가 '48시간 이하'가 적절하다고 답했고, 29.6%는 현행 52시간이 적절하다고 응답했다. 직장인 10명 중 8명(77.9%)이 근로시간을 유지하거나 줄여야 한다고 답한 셈이다.

노동계도 이번 판결에 반발하고 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는 성명을 내고 "주 69시간 노동도 모자라 이제 하루 21.5시간 일을 시키려 한다. 정부·여당에 이어 사법부까지 노동자를 쉬지 않고 일하는 기계로 만들려고 한다"면서 "사법부는 멋대로 법을 해석하며 노동자를 다 죽일 심산이냐"고 했다. 노조는 "노동시간 단축은 시대적 과제"라며 "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 투쟁을 전개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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