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등록평가·관리 2개 법을 ‘킬러규제’ 지목
유해성 심사기준·유출사고 과징금 완화 추진
화학물질 안전 규정 강화하는 세계적 추세 역행
규제 풀면 제2의 살균제 참사 일어날 수도
정부가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등 화학물질 규제를 완화하기로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24일 ‘킬러 규제 혁파 규제혁신 전략회의’에서 화평법과 화관법을 기업 투자를 가로막는 킬러 규제로 지목했다. 환경부도 이날 ‘화학물질 관리 등 환경 킬러 규제 혁파 방안’을 보고했다. 화학물질 등록과 심사 기준 등을 낮추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해 기업 부담을 줄이겠다는 것인데 국민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고 화학물질 안전 규정을 강화하는 세계적 추세와도 맞지 않는 퇴행적 정책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화평법은 화학물질의 등록과 신고, 유해성과 위해성에 관한 심사와 평가, 유해화학물질 지정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법이다. 신규 물질은 연간 0.1t 이상, 기존 물질은 1t 이상 화학물질의 유해성 정보를 환경부에 등록해야 한다. 법을 위반하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 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
화학물질의 유해성 정보를 등록하려면 외부 전문기관에 기업이 평가를 맡겨야 하기에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될 수 있다. 그래서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기업들은 등록과 심사 기준을 완화해달라고 요구해왔다. 이에 환경부는 법을 개정해 신규 물질에 대해 1t 이상 제조하거나 수입할 때만 유해성 정보를 등록하도록 완화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다.
화관법은 유독물질과 허가 제한 물질, 사고대비물질 등 유해화학물질 취급 현장 관리기준과 화학물질 사고 때 행정처분을 구체화한 법이다. 안전기준은 400여개이며 인체에 유해 한 화학물질 유출 사고를 내면 해당 사업장 매출의 최대 5%에 달하는 과징금을 내야 한다. 환경부는 화학물질을 위험도와 취급량에 따라 차등 관리하는 방식으로 기업 부담을 줄여주는 법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하지만 섣부른 화학물질 규제 완화는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 신중해야 한다. 국민의 건강과 생명뿐 아니라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환경경영을 위해서도 화학물질 규제는 꼭 필요하다.
화평법은 2011년 한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준 가습기살균제 사건이 계기가 됐다. 당시 많은 이들이 심한 기침과 호흡곤란, 폐 섬유화 증상 등을 보였다. 이에 보건당국이 1년여간 역학조사를 벌였고 가습기살균제가 원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가습기살균제로 수천 명이 사망했고 지금도 병마로 고통을 겪고 있는 피해자들이 많다. 이 사건으로 화학물질의 안전성 검증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화평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화관법도 유사한 이유로 만들어졌다. 지난 2012년 9월 경북 구미공단에서 불산 가스 누출로 노동자 5명이 숨지고 인근 주민 1만 명이 대피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전국적으로 비슷한 사건이 잇따랐고 유해화학물질 관리를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거셌다.
화평법과 화관법이 시행된 2015년부터 재계는 “기업이 부담해야 할 비용과 기준이 까다롭다”며 규제 완화를 호소했다. 2019년 일본이 한국에 대한 소재와 부품, 장비 수출을 규제했을 때도 앵무새처럼 똑같은 요구를 반복했다.
주목해야 할 점은 당시 환경부가 지금과는 정반대로 대응했다는 사실이다. 재계와 보수언론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화평법과 화관법이 오히려 외국에 비해 규제 기준이 낮다고 항변했다. 예컨대 화평법과 화관법을 지키려면 화학물질 1개 등록에 수억 원이 소요된다는 재계 주장에 대해 환경부는 “평균 비용이 1200만 원 정도이고 유럽은 최대 60가지의 시험서류를 제출해야 하지만 우리는 47개에 그친다”고 해명했다. 또 일부 조항은 2030년까지 유예하고 있어 기업 부담이 크지 않다고도 했다.
이랬던 환경부가 총대를 메고 화학물질 규제가 과도하다며 화평법과 화관법 개정을 추진하겠다는 것은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국민 건강과 자연환경을 지켜야 할 환경부가 산업통상자원부 2중대냐”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선진국들은 유해화학물질에 대한 사전 안전성 검증을 강화하고 있다. 사고가 발생하면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유럽에 화학제품을 수출하려면 높은 안전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는 ESG(환경보호·사회적 책임·기업지배구조 개선) 경영 측면에서도 화학물질 규제를 완화할 게 아니라 오히려 강화해야 한다. 유해화학물질로 사고를 낸 기업은 앞으로 생존이 힘들 수 있다. 화평법과 화관법 시행 이후 사고가 크게 줄었다는 점에서 화학물질 규제 완화는 산업재해가 많았던 과거로 퇴행하는 것과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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