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활동가를 만나다] 제주 4.3 범국민위 백경진
오랜 민주화 운동의 내공으로 다져진 4.3활동가
제주의 진실과 의미와 가치를 알리는 정명이 필요
47년 3.1절 경찰 폭력으로 시작된 민중항쟁 봉기
처음부터 불법인 제주와 윤석열의 계엄령 만행
서울 제주 4.3영화제를 통해 진실의 봄 기대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대상이나 사건에 이름을 붙이는 일은 그 정체성을 찾아주는 것이며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사건의 작명은 가해자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덮기 위한 용도를 위해 악용하기도 한다. 전두환 독재 시절 ‘광주 사태’라고 불린 5.18 민주화운동은 문민정부 들어서야 제 이름을 찾을 수 있었고,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로 이름을 빼앗겼던 4·19는 의거에서 혁명으로 헌법을 통해 그 정신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 사건들보다 훨씬 먼저 있었던 제주 4·3은 정명을 찾지 못한 채 지역과 숫자로 불린다. 아직도 폭동이라고 우기는 자들이 제주의 4·3을 폄훼하고 있는 것도 그 한 이유이다. ‘항쟁’과 ‘혁명’보다 더 의미 있는 이름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당시 제주는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를 반대했기에 통일운동의 연장선에 있기도 하다. 그래서 진정한 이름이 필요하다. 4·3의 진실과 의미를 문화적인 언어로 시민들과 공유하고자 다양한 문화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제주 4·3 범국민위원회’가 있다. 제주의 정신을 평화와 인권, 통일의 지향으로 승화시켜 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이 단체에서 이사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백경진 이사장을 만나 보았다.
그는 제주에서 초중고를 졸업한 제주 출신이다. 대학 1학년이던 72년도 겨울방학 즈음, 재경 서울대 학우회에서 제주 전역에 걸쳐 벌인 할망당(일종의 서낭당) 조사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가 맡은 지역 심방(무당)의 살풀이 언어에는 빠짐없이 4.3 원혼들 얘기가 등장해 큰 혼란을 경험했다. 역사에서 배우지 않았기에 공식적인 자료가 없는 상태였고 그 내용을 보고서에 실어야 하는지의 여부로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결국은 수록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이 일이 일종의 부채의식으로 작용했으며 그게 인연이 되어 지난한 4·3 활동가의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이후 그는 74년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8개월여 동안 수배생활을 했고,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 활동에 헌신하며 민주화운동을 이어갔다. 89년경부터는 현기영 작가를 비롯하여 제주도 여러 선후배들과 함께 제주사회문제협의회(제사협) 활동을 하며 다시 4.3문제에 관심을 쏟게 된다. 50주년이었던 1998년 제주 4.3 범국민위원회의 서울활동에 이들 제사협이 주축이 되어 참여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현재는 이사장을 맡고 있다.
세월이 흘러 전국 규모의 제 단체를 망라하여 70주년 행사를 치른다. 70주년 행사는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제주4·3이 제주도의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라는 것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울에서의 행사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광화문에서의 퍼포먼스 등 다채로운 행사를 통해 4.3을 소개했다. 이후 단체의 존속 여부를 논의한 결과, 4.3활동에 공감하는 회원들로 구성하여 재출발하자는 의견이 모여 현재의 '제주4.3범국민위원회'로 변경하였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7년째 단체를 지속하고 있다. 언뜻 이름만 보기엔 공법단체나 국가의 지원금으로 운영하는 단체로 보일 수는 있지만 순전히 회원들의 후원금으로 유지 운영되는 사단법인이다. 평화인권교육과 영화제 등을 통해 그동안 4·3의 진실을 알리는 일에 매진해 왔다.
4·3의 제주에서도, 현실의 대한민국에서도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어느 시대건 나라건 계엄이라는 단어가 주는 공포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계엄은 국가원수에 의해 동원되는 가장 적극적인 물리력 행사이기 때문이다. 독재 정권시대의 대한민국이 그랬듯이 계엄이란 수단은 권력자의 뜻에 의해 남용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계엄 선포의 요건이 전시, 사변과 같은 비상사태에서 선포되는 것이기에 계엄 선포를 위해 일부러 전시, 사변을 일으키는 경우도 존재한다. 윤석열의 계엄령이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일부러 준전시 상황을 만들려 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으며 실제로 북의 도발을 유도하려 했다는 정황이 계속 나오는 중이다. 제주의 4·3도 진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미군정은 남로당 개입을 핑계로 가혹한 탄압과 학살을 합리화해 버렸다.
미군정 시기인 1947년 3.1절 기념식 행사 직후 기마경찰이 어린이를 치고 조치 없이 달아나자 분노한 시민들이 경찰서에 몰려갔고 항의하던 시민을 경찰이 폭도로 몰아 발포했다. 그러나 경찰은 발포가 치안을 위한 정당방위라고 주장하였으며 3월 1일의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려고 했다는 거짓 정보를 사실인 것처럼 흘렸다. 이로 인해 제주도에 통행금지령이 선포되었고 다시 수백 명의 진압경찰이 육지로부터 파견된다. 여기에 시위와 관련하여 수십 명의 시민이 경찰에 강제 연행되자 제주도의 민심은 크게 요동쳤다. 결국 3월 10일, 제주도내 민·관이 연합하여 총파업을 하기에 이른다.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가 이 파업에 동참했다. 관공서는 물론이고 통신기관, 운송업체, 공장, 회사, 학교 등에서 공무원, 심지어는 미 군정청 통역단까지 파업에 참여한 것이다. 노동자, 학생들은 일제히 파업했고, 이는 13일까지 제주도 전역으로 확산된다. 파업 참여자들은 발포 사건에 대한 사과와 발포자 및 책임자 처벌, 희생자 유가족 지원 등을 주장했다. 심지어 제주도 출신의 경찰들도 파업에 참여하여 직장을 이탈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3월 말부터는 총파업이 잠잠해졌지만 탄압은 계속되었다. 육지에서 온 경찰과 서북청년회원들을 중심으로 파업 참여자들에 대한 검거 선풍이 한동안 이어졌고, 검거된 사람들은 경찰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된다. 이것이 제주 4.3 항쟁의 발단이 됐다. 당시 경찰은 다수가 일제강점기 경찰 출신으로 그들에게는 해방조국의 시민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여전히 통제와 감시의 대상으로 인식하던 것이 이 사건의 또 다른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듬해인 1948년에도 탄압이 계속되면서 4월 3일을 기해 주민들은 결국 무장봉기에 이른다.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 무려 7년 7개월 동안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의해 벌어진 제주도 양민 학살 사건이라는 것이 바로 제주 4·3의 진실이다.
한편,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조선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장병들이 제주를 진압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출병 명령을 거부한다. 그리고 이 부대는 이승만 정부에 대항하게 된다. 이때 이승만 정부는 10월 21일을 기해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사건의 진압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이 학살당한 사건이 발생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계엄령은 그 장소가 여수와 순천 일대였지만 내용을 보면 제주에 대한 진압명령을 거부한 것이 발단이었으니 우리나라 계엄령의 시초는 제주의 연장선에 있는 셈이다. 한때는 ‘여순 반란’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여수와 순천의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여순 주민들이 진압군에 의해 무고한 학살을 당한 사건이었다.
4·3의 계엄령과 윤석열의 계엄령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에 대해 백경진 이사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선 불법 계엄이라는 측면은 같지만 그 내용이 다릅니다. 4·3당시의 계엄은 ‘대통령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따라 계엄을 선포한다’라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으나, 계엄법은 1년 뒤에야 제정되었으므로 불법입니다. 즉, 계엄법이 없는 상태에서 선포된 계엄령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계엄에 따라 불법군사재판을 받은 수형인들이 지금은 재심과정을 통해 검사가 무죄를 구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윤석열이 선포한 계엄은 불법임과 동시에 다분히 위헌적입니다. 헌법기관인 국회와 선거관리위원회를 침탈한 것은 명백한 위헌이라고 봐야 합니다. 포고령에 ‘처단’한다고 하였으니, 훨씬 더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계엄인 셈이지요.” 제주에서의 계엄령은 계엄법 없이 계엄의 의미조차 모르는 이들이 진압은 물론 사법부의 역할까지 도맡아 해버렸으니 군인과 경찰 그리고 서북청년단이 합세하여 양민에 대한 즉결처형 등 무자비한 살육을 저지른 것이다. 그로 인해 제주 4·3 당시에는 무장 항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린 것이다.
이 같은 제주 4·3의 진실을 알리고 홍보하며 무자비한 권력의 탄압에 맞서 싸웠던 그 정신을 계승하고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알리고자 제주 4·3 범국민위원회가 주최하는 서울 4·3영화제가 4월 11일부터 4월 13일까지 사흘간 서울 노무현 시민센터에서 열린다. 『4·3의 오늘, 나 우리 그리고 재일조선인, 계엄령의 그늘』 이라는 3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영화 상영 후에는 영화평론가 등과 함께하는 대화의 시간이 준비되어 있다. 관객과의 대화에는 영화평론가이자 유튜버 거의없다, 언론학자 정준희 교수, 오동진 영화평론가, 권해효 배우, 이명세 감독 등을 비롯해 많은 영화인들이 참여할 예정이다. 4·3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새기고자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모든 영화는 무료이다.
훌륭한 영화를 통해 제주의 계엄령도 현실의 계엄령도 모두 물러가는 4월의 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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