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활동가를 만나다] 문화운동가 임진택 선생

마당극의 창시자 '청산별곡' 연출과 배우로 공연

민청학련 사건 연루, 김지하 권유로 문화운동 시작

국풍81 기획자 허문도에게 총감독제안 받고 거절

장준하 추모행사 8월 11일부터 17일까지 진행

장준하 선생은 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김구 선생의 비서를 지내기도 했으며 한국전쟁 중이던 1953년 4월에는 사상계를 창간하기도 했다. 1967년, 박정희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국가원수모독죄라는 죄목으로 투옥되기도 했으며 이때, 옥중출마로 당선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는 민족주의자이며 민주화 운동가였다. '재야의 대통령'이라 불리기도 했다. 한국현대사에 이렇듯 깊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평북 의주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으며 이 시기에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었으나 탈출하여 6천리 길을 걸어 충칭의 임시정부에 합류하며 항일무장 투쟁에 투신하기도 했다. 사상계를 통해 민족 자주 통일 민주주의를 주제로 비판적 담론을 이끌어 내며 지식인 사회의 중심에서 반독재 투쟁을 이끌었다. 1962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언론인분야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김지하의 오적 필화사건으로 1970년 강제 폐간된 사상계는 올해 4월 재창간되었다.)

 

50주기를 앞두고 찾은   장준하 선생의 서거현장 포천 약사봉
50주기를 앞두고 찾은 장준하 선생의 서거현장 포천 약사봉

그런 장준하 선생이 포천의 약사봉에서 1975년 8월 17일 의문의 죽임을 당한다. 오늘날까지 민족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상징이자 시대의 양심으로 기억되고 있다. 올해는 선생이 서거하신 지 50주기가 되는 해이다. 이러한 장준하 선생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일에 판소리 명창이자 문화운동가인 임진택 선생이 추모행사 준비위원장을 맡아 선생을 기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장준하 선생에 대한 기억이 점차 멀어져온 세태에서 우리 시대의 문화운동가 임진택이 추모에 앞장서 나섰다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적어도 장준하 선생과의 직접적 인연이 그를 붙잡아두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진택 선생과 대화를 나눠보니 필자의 짐작은 상당히 빗나간 것이었다. 임진택 선생 자신은 장준하 선생을 직접 뵌 적이 없다는 말로부터 얘기를 풀어나갔다.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죽임을 당한 1975년 8월 그 무렵, 임진택은 실직 상태였다. 임진택은 서울대 재학 중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4개월간 구속되었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그리고 얻은 첫 직장이 대한항공(KAL)이었는데, 회사원 신분으로 유신헌법 반대 문화행사를 계획했으니 무사할 리 없었다. 자의반 타의반 직장에서 나와 딴 직장을 알아보니, 이미 블랙리스트가 돌아 서류 단계부터 취직이 쉽지 않았다.

민청학련 사건은 북한의 사주를 받은 대학생들이 국가를 전복하려 했다는 간첩조작사건이었지만 사실 그 본질은 학생시위를 전국의 대학교가 연대해서 진행하자는 내용이 전부였다. 요즘 같으면 수사 대상도 되지 않는 사건이었다. 사건 당시 주범이었던 유인태 씨를 숨겨줬다는 은닉죄의 이유로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구속된 것이다. 당시 긴급조치 위반 주범을 숨겨주면 무기징역까지 선고하던 시절이었지만 기소유예로 구속 4개월 만에 풀려난다. 그런데 임진택의 운명은 4개월 간 갇혔던 서대문구치소 안에서 결정된다. 선배였으며 사상계에 ‘오적’을 실어 저항시인으로 탄압받고 있던 김지하 시인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구치소에서 검사 취조를 받으러 타고간 호송차 안에서 임진택에게 ‘문화운동’을 하라는 권유를 한다. 그 유언 같은 말에 이끌려 그는 문화운동을 전개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진택은 우리나라 ‘마당극’의 창시자이다. 시작할 당시엔 단어조차 생소했다. 1973년 12월 24일과 25일, 우리나라 최초의 마당극인 ‘청산별곡(哭)’ 공연이 이루어진다. 노래 곡(曲)자 대신 곡할 곡(哭)자를 사용하여 농촌의 현실을 고발하려 한 것이다. 박형규 목사가 담임하던 서울제일교회가 그 공간이었다. 원래 이 작품은 김지하 원작의 ‘진오귀’였다. 처음 준비할 땐 가톨릭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원주에서 김지하가 연출과 기획, 그리고 임진택이 조연출과 배우로 시작되었지만, 본 공연에서는 당시 정권의 주목을 받고 있던 김지하 대신 임진택이 연출을 맡으며 서울제일교회 대학생부 회원들과 공연한 것이다. 바로 그 무렵, 흥사단 본부가 있는 서울 대성빌딩에서 또 하나의 뜻깊은 행사가 진행되었다. 12월 26일, 백범사상연구소(소장 백기완)가 주축이 되어 ‘항일문학의 밤’이라는 행사를 열었는데, 이날 임진택의 절친인 김민기(민중가수)가 독립운동가 우덕순의 시 ‘보난대로 죽이리라’라는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항일문학의 밤’은 정권의 감시를 피해 집회를 하기 위한 명목이고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행사 직후 장준하와 백기완의 주도로 유신철폐 개헌청원 국민운동본부 주관의 범국민 서명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서명운동은 삽시간에 들불처럼 일어났다. 불과 2주 만에 서명자 40만 명을 돌파한 것이다. 인터넷은 물론이거니와 전화기도 드물던 시절, 순전히 오프라인 서명으로 온 국민의 폭발적 지지를 끌어낸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을 계기로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한다. 유신헌법을 반대하고 개헌을 언급하는 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속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비상군법회의를 통해 징역 15년에 처한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그 첫 희생자가 바로 장준하와 백기완이었다. 장준하와 백기완은 개헌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1974년 1월 구속되고 만다.

임진택은 1974년 3월 30일과 31일 이틀간 김민기 연출의 음악극 ‘아구’에 일본인 ‘마라데쓰’ 역으로 출연한다. 한국 민중을 상징하는 말뚝이와 일본인 기생관광객 ‘마라데쓰’의 대립을 다루며 탈춤 마당극을 표방한 이 음악극에, 당시 수배 중이던 김지하가 감시의 눈길을 피해 지도해 주었으며 공연 당일에는 조종실에 숨어들어 공연을 관람하기도 했다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이 공연은 관객들에게 매우 좋은 반응을 얻으며 4월 10일 이화여대에서 재공연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그는 4월 9일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체포되고 만다.

 

2023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진행된 전국비상시국회의 출범식.
2023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진행된 전국비상시국회의 출범식.

이후 서대문구치소에 갇혀 있던 같은 해 7월 13일 민청학련 사건의 주동자들이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임진택은 자신이 갇혀 있던 ‘7사 7방’ 감방장(죄수 중 군기반장 격)이 사형 선고일의 싱숭생숭한 감방 분위기를 의식해 제안한 ‘감옥 오락회’에 김지하가 1972년 발표한 ‘소리내력’을 판소리로 작창해 숨을 죽이며 불렀다. 뜻밖에도 그때까지도 임진택은 정식으로 판소리를 배운 적이 없었다. 임진택은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소리꾼의 길을 걷게 된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2024년 7월, 임진택은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자신의 창작판소리 50주년 기념공연을 열었다.

석방 후, 그는 TBC에 입사하여 PD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5년 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허문도 주도로 언론통폐합이라는 만행이 벌어진다. 당시 TBC는 KBS와 합병된다. 여기에서 한때 안면이 있었던 KBS 기획조정실장이라는 자가 임진택에게 친한 척 접근하게 된다. 몇 차례의 술자리 후 임진택은 그의 손에 이끌려 청와대의 허문도를 만난다. 허문도는 KBS가 주관하는 ‘국풍81’ 행사에서 임진택에게 총감독을 제안한다. 문화잔치를 통해 태평성대를 이끄는 전두환을 칭송하려는 정권의 수작이었으나, 사실 국풍81은 강력한 반독재 투쟁이 예상되었던 광주항쟁 1주년에 대학생들을 행사에 동원함으로써 학생시위를 무력화하겠다는 계산 하에 허문도가 기획한 행사였다. 또한 임진택의 절친인 김민기를 끌어들여 함께 행사를 준비하라는 제안도 있었다. 그리고 당시 학생운동의 주요세력 중 하나인 전국 대학교 탈춤반을 행사에 참여시키라는 주문도 포함되었다. 탈춤반을 포함시키라는 지시는 탈춤반을 발본색원하여 일망타진하려는 정권의 숨은 속셈도 깔려 있었다. 수락한다면 자신을 배신할 뿐만 아니라 선후배들을 밀고해야만 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뻔한 상황이었다.

 

1985년 명동성당에서 공연된 창작 판소리 '똥바다'.
1985년 명동성당에서 공연된 창작 판소리 '똥바다'.

이러한 제안을 받고 그는 백기완 선생과 선배인 김지하 그리고 절친인 김민기를 찾아가 국풍81행사에서 저들이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린다. 그는 1주일 후 다시 불려간 청와대 허문도 방에서 총감독 제안을 정면으로 거절한다. 임진택의 거부에 허문도는 앞에 있던 전화기 두 대를 집어 던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그 일을 계기로 그는 KBS를 반강제적으로 사직하게 된다. 임진택을 삼청교육대로 쳐넣으라는 허문도의 지시도 있었다. 그나마 각종 간첩 조작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전두환의 서슬이 시퍼렇던 1980년대 중반 문화운동가가 된 임진택은 전국의 대학을 돌며 판소리 ‘똥바다’ 공연을 한다. 일본인 주인공 ‘좃또마떼’가 이순신 장군 동상 위에서 똥을 싸지르고 자신이 싼 똥에 미끄러져 죽는다는 내용의 창작 판소리였다. 당시 공연은 대학생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가는 곳마다 1천~2천 명의 대학생들이 관람했다.

87년 6월 항쟁으로 전두환이 항복했고,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지만 당시 야권의 분열은 심각했다. 독자 출마를 강행하던 김대중 김영삼을 향해 민중후보가 필요했다. 이 때 민예총의 전신인 민중문화운동협의로부터 격론을 거쳐 임진택은 이애주 김용태 최열과 함께 백기완 선생을 민중후보로 추대하는 일에 나선다. 단일화를 관철시키기 위해 민중들의 지지를 동력으로 삼는 한편 민중진영의 정치세력화를 도모하는 계기로 이끌려는 명분이기도 했다. 당시 대학로 유세장에 대형 걸개 그림이 등장한 바, 거기에는 제도권 밖의 지도자였던 김구와 장준하 그리고 백기완 선생을 그린 대형 그림이 펼쳐져 있었다. 대한민국 민중의 위대한 지도자들엔 장준하도 있었던 것이다.

임진택은 1973년 연말 항일문학의 밤 행사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한다. 당시 장준하 선생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이미 고인이 된 절친 김민기는 늘 장준하 선생을 만나고 왔다는 것을 자부심으로 이야기했으며 임진택은 그게 부러워 언젠가는 장준하 선생을 만나겠다고 별렀지만 끝내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애석함을 해소하기 위함이 그가 장준하 50주기 추모행사의 준비위원장을 맡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나라의 민족 민중노선을 이끌었던 장준하를 통해 대한민국 정도(正道)의 길을 말하고자 하며, 또한 역동적인 중도를 품고 개혁적 민중세력과 함께 애국애족적인 장준하 선생을 기리고자 하는 큰 뜻을 품고 장준하 50주기 추모행사를 준비하는 중이다.

 

장준하 선생 서거 50주기 추모행사가 8월 11일 부터 17일까지 진행된다.
장준하 선생 서거 50주기 추모행사가 8월 11일 부터 17일까지 진행된다.

장준하 50주기 추모행사는 8월 11일부터 17일까지 국회와 노무현시민센터 그리고 파주의 장준하 추모공원에서 펼쳐질 예정이다. 8월 11일부터 1주일간 국회 의원회관 3층 장준하 아카이브 전시회 개막식을 시작으로 당일 오후 3시부터 국회 소회의실에서 ‘장준하를 말한다’라는 집중 강연회가 예정되어 있고, 8월 17일 10시에는 파주의 장준하 추모공원에서 추도식이 거행된다. 행사의 마지막 날 오후 5시 노무현 시민센터에서 장준하 추모공연이 진행되며, 이 공연 중 하나로 김지하 원작 임진택 작창의 판소리 ‘오적’이 추모객을 만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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