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탐방] 길 위의 근현대사 / 광화문 가는 길①
해방 공간으로 돌아간 듯 느껴지는 극우의 준동
피 흘리지 않고 되찾은 일상의 소중함을 재확인
과거가 현재를 도왔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했다
목요일 광화문 집회 가기 전 함께하는 역사기행
얼마 전부터 광화문 범시민대행진에 몇 시간 일찍 와서 광화문 일대의 역사탐방을 하고 있다. 12차 범시민대행진이 있던 지난 22일에는 세종호텔 해고노동자 고진수씨의 고공농성 응원으로 탐방을 시작했다. 이어 옛 중앙정보부(중정) 기억공간으로 꾸민 '기억6',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터, 중정 본부건물이었던 서울유스호스텔, 명동성당, 전태일 열사 분신장소와 기념관을 돌아보고 광화문 집회에 합류했다.
이날 다섯 명의 조촐한 기행단은 세종호텔 해고노동자 고진수 씨가 고공투쟁을 벌이고 있는 명동역 1번 출구에 모였다. 농성장에는 소수의 청년들이 라면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있었다. 잠시 후 몇몇이 플루트로 민중가요를 연주했고, 주변의 청년들이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한 명 두 명 늘어난 응원군이 민중가요 ‘바위처럼’과 ‘세상에 지지 말아요’에 맞춘 율동으로 고진수 씨를 응원했다. 시민합창단 출신인 나도 함께 노래하며 응원을 보냈다. 이후 몇몇은 국가인권위원회 앞 집회를 위해 깃발을 높이 들고 떠났다. 우리 기행단도 12.3계엄의 위협이 가시기 전에 ‘계엄의 시대, 긴급조치의 시대’의 민낯을 들여다 보기 위해 중정 6국터에 마련된 ‘기억6’ 전시관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구타와 고문 그리고 조작과 은폐의 시대
'남산에 한 번 끌려가 봐야 정신차리지?' 하는 우스갯소리가 돌던 시절이 있었다. '남산'으로 빗대어 불린 중앙정보부는 그만큼 일반 국민에게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그런 곳이었다. 중정에서도 6국은 학생운동,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고문과 조작을 일삼던 조직이다. 죄 없는 이들을 간첩으로 만들어 심지어 사법살인에 이르는 만행의 기억이 가득 차 있는 곳이다. 오죽하면 중앙정보부6국에 끌려가면 살점 하나 떼주지 않고는 나올 수 없다하여 육(肉)국이라 했겠는가? 기억6은 옛 중앙정보부6국이 있던 자리에 있다. 현장설명은 주로 1차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 2차 인혁당 사건과 사법살인의 과정에 관해 진행됐다.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수많은 만행 중에서도 단연 끔찍한 만행이다. 없는 조직과 죄를 만들어 순식간에 사형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민청학련에 대해 법정에서 내려진 최종 형량은 단일 사건으로 세계신기록 수준인 자그마치 징역 1650년이다. 청년 학생들을 변호하던 강신옥 변호사에 대한 인신구속은 당시 박정희 정권의 무도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중앙정보부 옛 본관(현재 서울유스호스텔)으로 이동하는 길에 기행단은 잠시 역사의 시간을 조금 더 뒤로 돌렸다. ‘기억의터’에 들러 247 분의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다.
"나 좀 살려 달라”하니까 살려준다면서 그때부터 아편을 놓아주는기라. 아편 주사라는 건 중독이 될 때야 알았지. 하루 한 번 주던 게 아침에 한 번 주고 저녁에 주고 그러는디 이제 주사를 안 주면 아이고 맞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드라고."
"내가 위안부였는데 누구와 결혼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어머니에게는 내가 위안부였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공부도 하고 공장에도 취직했었다고 말했다. 마음이 괴로워 고향에 돌아온 지 1년 만에 말도 없이 집을 나왔다."
‘기억의터’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일제의 만행을 잊지 않겠다는 ‘대지의 눈’과 위안부 피해 할머니 247명의 이름과 증언이 적힌 ‘통곡의 벽’이 보인다. 이어 일제 주한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 표석을 거꾸로 세운 ‘거꾸로 세운 동상’이 있고, 주변으로 247개의 기림비에는 할머니 한 분 한 분의 성함이 새겨져 있다. 이어 세상의 배꼽 주변으로 자연석이 배치되어 있다. 100여 년 전 이 자리는 조선통감관저로 사용되던 터인데, 제국주의 침탈의 원흉들은 그로 인해 고통 받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끝내 사죄하지 않았다. 우리는 두고두고 안타까운 역사를 기억해야 하고 끝내 합당한 사죄를 받아내야 한다. 기행단은 나비가 되어 떠난 할머니들의 기림비를 어루만지며 위로를 전했고 쉽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고개를 넘으면 중앙정보부 본관이다. 지금은 유스호스텔로 사용되고 있는데 주변에는 옛 중앙정보부의 흔적들이 즐비하다. 2차 인혁당 사건의 피해 가족은 공산주의자의 가족으로 몰렸고 구명활동은 외면당했다. 그런 시절 피해 가족의 손을 잡아 준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다. 중앙정보부의 흔적들을 뒤로하고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당시 지학순 주교는 민청학련 용의자들에게 자금을 지원했다는 혐의로 강제 연행돼,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이때 조직돼 유신반대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젊은 신부들이 앞장서 구성된 사제단은 인혁당 사건을 조작으로 규정했고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때마다 자료를 수집하고 사건의 진실을 각계에 알리는 데 주력했다. 이후 재야인사와 양심적인 지식인이 모여 호소문을 채택하는 등의 활동을 이어갔고 공동조사단 구성과 석방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재야인사, 종교인, 지식인, 시민사회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 날조된 인혁당 사건의 수감자들은 1975년 4월 9일 새벽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대법원 판결이 내린 지 단 18시간 만이다.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잠재우기 위해 시도된 1964년 1차 인혁당 조작 실패의 주역들이 11년 뒤인 1975년 기어코 2차 인혁당 사건을 '완수'하고야 만 것이다. 대법관 민복기, 중앙정보부장 신직수, 중앙정보부 6국장 이택용이 1차 조작이 있었던 1964년에는 각각 법무부장관, 중앙정보부 차장, 중앙정보부 5국 과장으로 있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맞닿은 그 현장에 비극만이 가득했다 하겠다.
명동성당을 나와 청계천 8가로 향하는 기행단의 발걸음이 차분해졌다. 개봉동에서 온 여성 참가자는 “아들을 둘 둔 엄마로서 지금의 시대가 그 때와 같지 않음이 새삼 감사한 일이 아닌가 싶다”며 “지난 12.3계엄이 성공하기라도 했다면 생각보다 훨씬 비극적인 시대가 오지 않았을까?”라며 소회를 밝혔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일요일은 쉬게 하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세상
얼마쯤 걸었을까? 기행단은 청계천 8가에 다달아 가장 먼저 전태일 흉상 앞에 묵념으로 마주했다. 진행을 맡은 기자는 전태일 하면 딱 한 문장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로 설명을 시작했다. “측은지심(연민)이 가장 잘 발달된 사람.” 그렇다. 사람에 대한 측은지심이 세상의 36.5도를 유지시킨다. 하루 일당 50원을 받고 15시간을 노동하며 각혈을 해도 숨길 수 밖에 없었던 그 야만의 시절을 목도하면서, 전태일은 죽음으로 그들에게 돌아가고야 만 것이다. 철벽같은 노동해방의 제단에 스스로를 바치는 것만이 마음의 고향 같은 소녀공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전태일은 분신으로 당시의 여공들에게, 시대의 약자들에게 그리고 오늘날의 비정규직들에게 스며들었다. 냉혈한 시대를 혈혈단신 온 몸으로 막아세우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결국 36.5도의 시대를 열었다.
아직은 숙제가 많다. 그러나 많은 연대의 방법을 남기고 간 전태일이 있었기에 노동자는 전진할 수 있었다. 노동자의 전진은 시대의 전진을 의미한다.
전태일 분신터를 설명하고 있을 때 남자 아이 하나를 둔 한 가족이 흉상 앞에 섰다. 아이가 전태일이 보고 싶다고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단. 아이의 나이는 고작 여덟 살이었다. 그 자체로 세상의 변화가 증명되고, 또 한 시대가 전진해 오고야 말 것임을 알 수 있다. 기행단 누구도 아이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우리는 기행을 마무리했다. 다시 광장으로.
황의원 기자와의 역사탐방 ‘광화문 가는 길’ 안내 : https://forms.gle/22byPRA2eiCYsXz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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