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활동가를 만나다] 삼청피해자연합회 이만적
공포정치로 국민탄압의 수단이 되었던 삼청교육대
순화교육 근로봉사 보호감호소 거쳐 3년 동안 피해
언론인 등 4만명 피해, 실제 등록은 3천여명에 그쳐
진상규명 사과 특별법 개정위해 국회앞 4년쨰 농성
청산하지 못한 과거는 현재진행형이면서 미래세대에게는 부채가 된다. 국가와 국민을 향해 저지른 범죄는 사회안정, 국민통합, 국가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화해와 용서라는 말로 포장된다. 하지만 친일 세력과 반민주 세력을 제대로 단죄하지 못한 후과는 12·3 계엄령이라는 내란으로 돌아왔다. 특히, 전두환 시절의 국가 폭력은 회상조차 싫을 만큼 끔찍한 만행이었다. 12·12 군사반란으로 군을 장악한 다음 5·17 확대 계엄과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1980년 8월 계엄포고령 13호를 근거로 삼청교육대를 만들었다. 삼청교육대는 표면적으로 사회정화와 사회악 일소를 슬로건으로 하여 불량배들을 잡아들였지만, 진짜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정치적 보복과 공포 분위기 조성이라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무려 3년여 세월 동안 고통에 시달린 이가 있었다. 여의도 국회 앞 천막농성장에서 4년째 집회를 이어가는 이만적 목사, 이적 이라는 필명으로도 활동하는 시민운동가이다. 그는 삼청교육대전국피해자연합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현재 민통선공동체 교회의 담임목사이기도 하다.
1980년 8월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이른바 불량배들이 TV 저녁뉴스의 전면에 등장했다. 전두환 정권은 방송국 카메라를 앞세워 자극적인 부분만을 편집하여 국민들에게 전달했다. 온몸에 문신을 한 폭력배가 착하게 살겠다는 선서와 함께 무거운 통나무를 든 채 육체 훈련하는 모습에 국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열광했다. 언론이 철저히 통제되던 시절이라 시민들이 삼청교육대의 진실을 알 리가 없었다. 당시 이만적 목사는 지방 신문사의 사회부 기자였다. 폭력배 제거에 앞장서고 있다는 이유로 그 역시 전두환의 삼청교육대를 내심 칭송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동네 식당 외상값이 있다는 이유로 끌려가 삼청교육대로 넘겨졌다. 그해 9월의 일이었다. 신용카드 같은 것도 없던 시절이라 외상값은 어느 지역이든 빈번한 일이었고 월급날이 되면 외상값 갚는 날이 일종의 트렌드이기도 했다. 불량배 소탕 명목에 대해 박수를 보내던 그가 정작 불량배라는 이유로 끌려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삼청교육대로 끌려간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의 친척이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자원입대한 후 월북했다가 남파간첩으로 활동한 이력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이를 빌미로 국가는 그의 가족을 가족간첩단 사건으로 조작하려했으며 부모 형제들이 모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기도 했고 연좌제에 걸려 취업제한에 생계의 위협마저 느낀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털어도 간첩으로 걸릴 만한 게 없으니 그를 결국 삼청교육대로 보낸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삼청교육대는 사회 정화를 명목으로 정치 보복과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국민들의 저항 의지를 억누르게 위해 만든 일종의 징벌 기구였다. 당시 전두환이 만든 위헌적인 국가기구 국보위가 종로구 삼청동에 있었다는 이유로 ‘삼청’이라는 명칭이 지어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렇게 맥락 없는 이름을 지을 리 만무하다. 몸과 머리와 마음, 이 세 가지를 맑게 하여 새사람을 만들겠다는 의도로 붙여진 이름이 바로 삼청교육대였다. 이는 이만적씨가 당시 조교들로부터 숱하게 세뇌 받은 내용이기도 하다. 치안 보호와 범죄자 교화라는 명분으로 범죄자 외에 무고한 시민들까지 잡아들여 불법적인 인권 유린을 자행되었다. 수용자들은 고문에 가까운 육체 훈련은 물론 진압봉으로 구타를 당하거나 군용차에 묶여 끌려가는 반인권적인 가혹행위를 당했으며 탈출을 시도하면 가차 없이 살해당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가 훈련받던 곳에서도 욕하고 때린다는 이유로 반항했던 피해자가 네 명의 조교로부터 구타와 고문 끝에 사망했으며 엠불런스에 실려가는 것을 직접 목격한 바 있다.
전국 모든 군대의 사단 훈련소에서 삼청교육대의 만행이 저질러졌다. 그는 당시 파주의 28사단에 있는 삼청교육대 훈련소에서 고문에 가까운 훈련을 받았다. 4주간의 순화교육이 끝나니 6개월간의 삼청근로봉사대라는 이름으로 다른 훈련을 받게 했다. 이게 끝나자 그는 다시 청소보호감호소로 옮겨졌다. 사회보호법에 따른 처분이라고 했지만 그는 당시 전과도 없었고 다른 범죄를 저지른 이력조차 없던 그저 선량한 시민이었다. 그의 나이 24세에 끌려가 27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풀려난 것이다. 처음 끌려갔을 땐 1개월 정도면 풀려날 것이라는 말을 믿었다. 심지어 계엄이 해제되면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해서 1981년 1월 계엄이 해제되던 날 만세삼창까지 외쳤으나 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실제로 1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간 이들도 있었지만 그는 부당하고 가혹한 구타와 고문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서 항의했던 게 미운털이 박혀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있게 되었으며 1984년 3월이 되어서야 공식 탈출할 수 있었다.
이만적 목사는 삼청교육대에서 경험한 일들을 매일 일기처럼 기록했다. 그 기록을 근거로 ‘정화작전’이라는 수기를 책으로 펴냈다. 책이 나오기 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은 삼청교육대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민주화의 바람이 일면서 책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전국의 주요 대학에서 강연요청이 몰려들었다. 13대 국회 당시 5공비리 특위가 만들어지면서 국회차원에서 조사가 이루어지는 듯했지만 정치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아직까지 진상규명은 물론 그 사건에 대해 아직도 사과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한편, 2018년 12월 대법원은 삼청교육대 설립 근거가 된 계엄포고령 제 13호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린바 있다.
처음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이들은 6만여 명이었으며 선별과정을 거친 실제 피해자만 해도 4만 여명에 달한다. 그중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망을 인정한 사람은 모두 54명이다. 하지만 끌려가 생사확인이 되지 않는 행방불명자까지 포함하면 사망자는 수백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최연소 14세 중학생부터 최고령 72세 노인, 그리고 여성 삼청교육대 200여명 까지 피해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언론 정화작업이라는 이유로 해직기자와 언론사 통폐합이 이루어지던 시절이라 언론인과 노동운동가, 종교인, 5·18당시 시민군, 민주당계 정치인 등이 주요 피해자이기도 했다. 심지어 모 지역 언론사 사장은 간통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삼청교육대에 끌려갔지만 당시 그는 발기부전 치료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간통과는 전혀 관계없는 상황이었다. 정권에서 제출하라는 불온기자 명단을 제출하지 않았다는 것이 진짜 이유였다. 이런 연유로 끌려왔으니 당시 삼청교육대 내부에서는 물리적 충돌이 빈번히 발생했다. 이는 삼청교육대 폭동사건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삼청교육대 내부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의 일환이었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야 겨우 삼청교육대 피해자를 위한 국회차원의 조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2004년 처음 삼청교육대 특별법이 만들어졌을 당시 약 3000여명이 피해자로 등록되었다. 그리고 최근 추가로 등록된 이들은 겨우 800여 명이니 전체 피해자의 10%에 불과하다. 삼청교육대를 다녀온 이들은 깡패와 전과자라는 손가락질 받는 것이 두려워 주변 사람들에게는 삼청교육대 출신이라는 피해사실을 숨기며 살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당시의 가혹행위와 고문의 후유증으로 다수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가족에게 삼청교육대 피해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면 피해자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더욱 요원하다. 삼청교육대전국피해자연합회는 현재 특별법의 개정과 진상규명 등을 위해 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우선, 피해자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필요하다. 사망자, 상의자, 행불자로만 되어있는 피해자의 범위를 모든 삼청교육대출신으로 확장해야 한다. 영장없이 불법 체포 구금 구타 고문 가혹행위를 당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또한, 삼청교육대의 정확한 진상규명 작업도 이루어져야 한다. 국가폭력에서 가장 선행되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진상규명이 이루어지면 사과와 배상 또한 당연히 절차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피해자에 대한 생활비 지급 등도 당연한 조치이다. 또한 재발 방지를 위해 삼청교육대기억관을 만들어 다시는 이런 국가적 만행으로 피해를 입는 일들이 사라져야 한다.
정통성도 정당성도 없이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유신헌법을 개정하여 5공화국 헌법을 만들어 이른바 체육관선거를 통해 대통령의 직에 올랐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른바 3저 현상이 막 시작되려던 시기였다. 저유가, 저달러, 저금리가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인데, 1980년대 초중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대한민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3저 현상으로 경제는 호황을 누렸고, 극빈층이 중산층으로 올라서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며 내수 시장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는 비단 대한민국만의 현상이 아니라 아시아 전역이 호황이었으며 세계경제의 흐름이기도 했다. 중동의 여러 국가와 일본,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이 3저 현상으로 큰 혜택을 누린 것이다. 그러나 단죄하지 못한 전두환의 야만적 국가 폭력은 경제가 호황이었다는 이유로 그 시절이 좋았다는 낭만이 되기도 하고, 폭력적 통치를 정당화시키는 당위성의 논리가 되어 21세기 문명국가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계엄령과 내란의 합리화 구실로 둔갑된다.
매일 국회앞 농성장에서 집회를 이어가고 있었지만 계엄령이 터지던 날, 그는 하필 맹장이 터져 김포의 한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소문으로만 돌던 계엄령이 현실이 되었다. 너무도 비현실적인 현실에 어이가 없었지만 윤석열의 계엄령은 반드시 실패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전두환 시절의 민도와 21세기 문명국가 대한국민의 민도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우리 국민들이 어떤 식으로든 계엄령을 막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처럼 우리 국민의 위대함은 결국 계엄령을 막아내고 내란범을 파면했다. 이제 다시 국민의 저력으로 남아있는 내란세력을 단죄해야만 한다. 범죄자에 대한 강력한 단죄만이 불의한 역사를 막아낼 수 있다. 그것이 역사에 대한 진정한 사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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