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석 시대소설 '작전명 여우사냥'

기자 출신이 집요하게 추적한 숨은 진실

오늘의 상황, 인물들 연상시키는 '현재적 역사'

'작전명 여우사냥' 표지.
'작전명 여우사냥' 표지.

한국 근대사의 가장 잔혹한 비극 중 하나인 을미사변. 후일 명성황후로 추존되는 중전 민씨가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 군인과 특파기자들에 의해 살해된 지 올해로 꼭 130년을 맞는다. 소설 『작전명 여우 사냥』은 그해 10월 1일부터 암살 당일까지의 일주일간을 복원하고 있다.

내가 권영석의 소설 『여우사냥』 초고를 읽으면서 먼저 떠올린 생각은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분명 1895년 을미년의 중전 민 씨 암살 사건이지만, 담고 있는 주제의식을 보면 그것은 단지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우리나라 국내외 정세를 은유 또는 연상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깔려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130년 전 조선반도의 국제정세와 지금의 한반도 국제정세가 근본적으로 변함이 없다는 사실에 근거하거니와, 국내정세로 보면 몇백 년 전 이씨조선왕조 연산군 때나 광해군 또는 선조나 인조 때와 별반 다름없는, 어처구니 없는 봉건 패륜적 세도정치가 판을 치고 있는 사실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작품에 등장하는 간교한 중전 민 씨의 행태는 자꾸 김건희를 연상시켰고, 우유부단하면서도 무모한 고종의 태도는폭압 무도한 윤석열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조선의 운명을 발아래 둔 왕비의 위험한 권력 놀음도 그렇고, 일본 극우들의 암살극은 이 소설의 100여 년 전 시간을 2025년 현재로 연결 짓고 있다. 세계 패권을 둘러싼 국제정치 질서가 흔들리고, 그 틈을 타고 군사적 굴기를 꾀하는 국가가 등장하는 양상은 19세기 후반과 지금이 놀랄 정도의 유사성을 보인다. 꼭 일본과 한국의 관계만이 아닌, 한 나라가 다른 한 나라의 정세에 영향을 끼치고 더 나아가 그 나라의 영토와 주권을 강탈하려는 행태는 앞으로 더 자주 벌어질 것이다. 소설 속 일본 언론인들의 물밑 행각은 단지 먼 옛날의 일만이 아닌 셈이다.

그동안 ‘여우사냥’이라는 제목으로 중전 민 씨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가 없지 않았을 테지만 그 작품들이 대부분 ‘역사소설’의 범주에 머무른 데 비해, 권영석의 이 작품 『작전명 여우사냥』은 그 범주를 ‘시대소설’로 넓혀놓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때를 잘 만나면’ 대박이 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윤석열과 김건희 부부의 합작 내란 쿠데타가 일단 진압된 이 시점에서, 『작전명 여우사냥』은 많은 독자로부터 다양한 관심과 해석을 유발할 수 있는 때맞춘 이야깃감이 될 것이 분명하다.

내가 이 책을 주목하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저자와의 각별한 인연 때문이다. 권영석은 내게는 대학 후배이면서 몇 안 되는 판소리 제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서울대 인문대 연극반 출신이다. 기실 권영석이 나의 창작판소리 제자가 된 것도 그 같은 학연 또는 동아리 인연 덕분인 셈이다. 나는 그가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라는 빼어난 장편소설을 만년(晩年)에 써낸 고려대 언론학부 김민환 명예교수처럼, 작가의 길을 걷기를 바란다.

내가 또 하나 떠올린 생각은 언론인이 소설을 쓴다는 것이 희소한 일이기는 하지만 다른 소설과는 비교되는 독특한 성과가 가능하다는 예감이다. 앞서 예로 든 김민환 교수도 언론학자 출신이며, 우리 시대 탁월한 소설가 중 한 명인 김훈 작가도 기자 출신이다. 이들 언론 출신 소설가의 특징은 소재의 포착과 진실의 발견에 있어 기자만이 갖는 예리하고도 집요한 실행력과 판단력을 담보로 한다는 것이다. 언론인으로 반평생을 보낸 권영석에게도 그러한 기자 감각이 몸에 배어있는 것이 분명하다.

특히 조선 왕비를 암살하는 계략의 핵심 역할을 맡았던 장본인이 바로 일본의 언론인이었다는 것, 경복궁에 난입한 암살범들의 대다수가 바로 《한성신보》의 일본인 특파기자들이었다는 설정은 그가 중국 특파원 시절 일본인 기자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에서 단서를 찾은 것이었다고 한다. 30년 전에 들은 얘기 한 토막을 그는 잊지 않고 반생의 숙제로 간직해 왔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의 오랜 숙제의 결과물이자 수십년 기자 인생의 한 결산서와도 같은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이명재라는 가상의 캐릭터로 온건 개화파의 수장이었던 민영익의 호위무사 출신이다. 이명재는 일본 유학 도중인 1894년 갑오왜란으로 왕과 왕비가 건청궁에 가택연금되자 급거 귀국해 중전 민 씨의 경호대장을 맡는다. 왕비에 대해서는 이중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 그는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전쟁 직후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야욕을 직시하며, 빼앗긴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한다.

이 소설에는 당시 조선 정계의 주요 인물들, 고종, 흥선 대원군, 안경수, 러시아 공사인 베베르와 왕실 고문 리젠더(프랑스어명 르장드르) 등이 등장한다, 그리고 갑신정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간신히 생존한 급진 개화파 유길준 내각 서기장은 또 다른 중심 인물이다. 유길준은 주인공 이명재와 게이오의숙 동문이자 형님뻘이라는 설정으로, 역사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은 당시 개화파 지식인들의 속내를 문학의 힘을 빌려 허심탄회하게 토로하고 있다.

이명재의 라이벌로 등장하는 인물 아다치 겐조는 작가 권영석이 중국 특파원 때 들었던 일본 기자의 진술과도 겹치는 실존 인물이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특수부대’ 역할을 수행하는 조선 최초이자 유일한 일간지 일본 《한성신보》 사장으로 조선 침략을 부르짖은 위험한 언론인이다. 실제 역사에서 아다치는 중전 민씨 암살 성공 직후 일본으로 도주한 뒤 일본 정계의 거물로 승승장구한다.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뮤지컬 '명성황후' 30주년 기념공연 프레스콜에서 출연 배우들이 주요 장면을 시연하고 있다. 2025.2.4 연합뉴스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뮤지컬 '명성황후' 30주년 기념공연 프레스콜에서 출연 배우들이 주요 장면을 시연하고 있다. 2025.2.4 연합뉴스

중전 민 씨 암살 사건은 일본의 조직적 은폐로 아직까지 전모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최소한 이 아다치 겐조가 암살 작전을 지휘하는 책임자라는 것은 확인된다. 실제 경복궁으로 쳐들어간 폭도들 가운데 《한성신보》 특파기자들이 대다수였으며, 아다치가 소속된 ‘구마모토 국권당’이라는 일본 극우정당 역시 을미사변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돼 있었다. 국권당 또는 현양사 등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비밀결사조직들은 이후 조선 ‘진출’은 물론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침탈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역시 비밀조직의 특성상 아직까지 전모가 명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는 상태다. 저자는 소설에서 이 신념형 폭도들의 사상적, 정치적 의도와 조직적 행태들을 문학적으로 복원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타국의 왕비를 암살하는 데 앞장선 것과 같은 제국주의 언론의 정체가 무엇인지, 작가가 작품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아다치 겐조와의 대화를 통해 말하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적지 않은 시사를 안겨 준다. “식민지 개척을 위한 특수부대는 선교사들이었지만, 산업혁명 이후엔 특파기자들이 특수부대 역할을 수행했어. 특파기자들은 언론을 통해 원주민의 영혼과 의식을 개조하고 식민지 경제침탈의 첨병 업무를 수행하고 있지. 점령군이 오기도 전에 식민지 침탈 전쟁은 이미 끝나 있는 거야.”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설정,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을 10월 1일부터 8일까지 7박 8일간의 한정된 시간으로 압축시켜놓은 설정은 매일매일 사건 사고를 취재하며 반평생을 긴장되게 생활한 기자 출신 권영석의 본능적 발상이다. 이 압축된 시간은 독자로 하여금 잠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작전명 여우사냥』에는 사실과 허구가 혼재되어 있고, 실명(實名)과 허명(虛名)이 아울러 등장한다. 고종이나 중전 민 씨, 진령군, 유길준이나 홍계훈, 해월 최시형과 전봉준, 일본인 특파기자 아다치 등은 역사 속의 실제 인물들이다. 하지만, 주인공으로 설정된 이명재나 그림 그리는 첫사랑 우메코 등은 허구의 인물들이다. 중전 민 씨 암살이나 《한성신보》 일본 특파기자들의 범죄, 김홍집 내각의 붕괴, 아관파천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지하 비밀동굴 굴착이나 게이오 의숙 동창생이라는 설정, 중전 민 씨 얼굴을 확인하기 위한 시도, 주인공의 연인 우메코의 등장 등은 모두가 허구이다.

역사소설 혹은 시대소설은 역사적 사실과 있음 직한 허구가 교합함으로써 생겨나는 상상의 세계이며 해석의 공간이다. 나는 역사소설 또는 시대소설의 완성도는 독자들이 소설을 읽고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 허구인지 알 수 없게끔 얼마나 정교하게 교직(交織)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권영석의 소설은 이 문제에 있어 상당한 정도로 교직에 성공하고 있으며, 그만큼 작가로서의 가능성과 전망이 열려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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