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밟히는 이들과 함께 다시 광장에 나섰겠지

세계 잠식한 탐욕과 냉소에 분연히 맞섰겠지

잔혹한 시대의 끝자락, 불씨 지키는 마음으로

"사람 사는 세상 만들자" 그의 외침이 그립다

19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영결식에서 민중가수들이 민중의 노래를 합창하고 있다. 2021.2.19. 연합뉴스
19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영결식에서 민중가수들이 민중의 노래를 합창하고 있다. 2021.2.19. 연합뉴스

백기완 선생(1932~2021)이 떠난 지 오래지 않아, 세상은 다시 어지러워졌다. 거리의 함성은 잦아들고, 정의를 외치는 입들은 지쳐갔다. 그러나 백기완 선생의 목소리는 여전히 귓가에 맴돈다.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지요."

그는 언제나 그 말을 했다. 그에게 '사람'은 단순한 단어가 아니었다. 이념보다 깊고, 정치보다 무겁고, 신앙보다 뜨거운 그 무엇이었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의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미국의 트럼프가 다시 세상을 휘두르며, 가난한 이와 약한 이를 짓밟는 것을 본다면, 그는 아마 또다시 광장으로 나섰을 터이다. 가느다란 육신으로, 그러나 불타는 심장으로, 그는 말했으리라.

"이놈의 세상, 아직도 제 정신이 아니구먼!"

트럼프의 시대는 단지 한 사람의 독선이 아니다. 세계를 잠식하는 탐욕과 냉소의 그림자다. 진실보다 이익이, 인간보다 체제가 앞서는 시대. 총성 없는 전쟁과, 보이지 않는 불평등의 사슬이 우리의 일상을 조용히 조여온다. 그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무뎌지고, 분노조차 피로에 잠겨버린다. 하지만 백기완 선생은 그런 침묵을 가장 경계했다.

 

2018년 3월 12일 통일문제연구소에서 비주류사진관 특강하는 백기완 선생. 정남준 사진가.
2018년 3월 12일 통일문제연구소에서 비주류사진관 특강하는 백기완 선생. 정남준 사진가.

그는 늘 외쳤다.

"분노는 살아 있는 자의 증거요, 사랑은 분노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의 분노는 미움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그것은 사랑에서, 눈물에서, 이 땅의 사람들을 향한 끝없는 연민에서 솟아났다. 그의 외침은 거칠었지만, 결코 잔인하지 않았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한 세기의 슬픔과 꿈을 품은 시였다.

요즘 뉴스를 켜면, 또다시 무력감이 밀려온다. 트럼프가 연일 3500억 달러는 선불이라며 압박하고 있다. 언제까지 한미동맹이라는 신주단지를 모시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세계 5위의 군사력과 천문학적인 국방비를 쓰면서도 우리는 아직 전시작전권 하나 스스로 행사하지 못한다.

이재명 대통령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트럼프의 부당한 요구에 제대로 된 항의 한마디 하지 못한 채 눈치만 보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이것이 과연 주권국가의 자존인가. 이것이 백기완 선생이 평생 꿈꾸었던 '사람 사는 세상'인가.

그는 분명 말했다.

"자주 없는 민주주의는 거짓이여. 남의 발 밑에서 피어난 자유는 진짜가 아니여."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우리에게 묻고 있다.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번영의 이면에 얼마나 많은 굴욕과 침묵이 깔려 있는지를. 종종 그가 그립다. 거리의 촛불이 꺼질 무렵, 뉴스에서 또다시 부조리한 권력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의 부재가 더 크게 느껴진다. 그의 주름진 얼굴, 그 안에 스며 있던 민초들을 향한 한과 사랑이 떠오른다. 그는 '혁명'을 말하면서도, 결국은 '사람 냄새 나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 세상이 아직 오지 않았기에, 그의 부재는 완전한 침묵이 될 수 없다.

트럼프의 폭정은 지구의 반대편에서도 우리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그의 언어는 폭력이고, 그의 정책은 두려움의 제도화다. 이민자들은 추방되고, 가난한 이들의 꿈은 장벽에 막힌다. 그러나 역사는 증언한다. 억압은 오래가지 못한다. 어둠은 스스로의 무게에 눌려 꺼지고, 거짓은 언젠가 진실 앞에 무릎을 꿇는다.

 

2018년 3월 12일 통일문제연구소에서 비주류사진관 특강하는 백기완 선생. 정남준 사진가.
2018년 3월 12일 통일문제연구소에서 비주류사진관 특강하는 백기완 선생. 정남준 사진가.

백기완 선생은 그 시간을 믿었다. 그는 말년에 이렇게 썼다.

"꽃은 눈 속에서도 피어난다. 눈이 녹은 뒤에야 비로소 봄이 오는 게 아니여."

그의 말처럼, 우리는 지금 눈 속에 서 있다. 세계의 강대국이 휘두르는 탐욕의 바람, 거짓이 진실처럼 포장된 미디어의 소용돌이, 그 한가운데서 우리는 얼어붙은 땅을 딛고 있다. 그러나 그 얼음 밑에서는 보이지 않는 뿌리들이 여전히 자라고 있다. 그 뿌리가 바로 사람의 마음이다. 그 뿌리가 바로 연대이며, 사랑이다.

오늘도 묵묵히 살아남은 이들을 떠올린다. 트럼프의 정책으로 삶이 무너진 이민자들, 불의한 전쟁의 그림자 아래서 침묵을 강요당한 사람들, 그들의 눈빛 속에서 백기완 선생의 미소를 본다. 그는 그들의 편에 있었고, 그들의 목소리였다. 그가 살아 있다면 지금 이 순간, 그는 분명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그걸 위해 울고, 웃고, 싸워야 혀."

그 말 한마디면 충분하다. 그것이 내 마음의 깃발이 된다. 그의 부재는 결핍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다. 그가 피워 올린 불씨를 우리가 꺼뜨리지 않는 일, 그것이 곧 그의 생명을 잇는 일이다.

오늘, 트럼프의 횡포가 거세질수록 오히려 백기완의 존재를 더 선명히 느낀다. 그의 부재 속에서, 나는 오히려 그의 영혼이 우리 곁을 서성이는 것을 느낀다. 그는 분노의 불길로, 그리고 사람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 있다. 그 믿음은 시대를 넘어, 우리의 가슴 속에 조용히 타오른다.

그가 그립다. 그래서 말하고 싶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의 언어로, 세상의 거짓과 잔혹을 향해 이렇게 외치고 싶다.

"사람이 하늘이다. 그 하늘이 다시 무너지지 않도록, 우리 각자가 빛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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