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참전 60돌]⑨ "한국의 적은 한국이다"

미래 비전 없고 반골 기질뿐인 한국 민족주의

한일 협력만이 혼돈이 지배하는 한국의 출구

제국주의 피해자를 이해 못하는 미국의 DNA

한일 관계 개선 없인 남북통일 요구 거세진다

미국, 팽창과 침략 역사의 피해 보상에는 둔감

60년대 초 미국은 한국을 바라보며, 한국의 적(敵)은 한국이라 했다. 자기 파괴성이 있다는 뜻이다.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미국은 큰 규모의 군대를 상주시켜 보호하고 수십억 달러 원조를 제공했다. 그래도 한국은 불안했고 홀로 서지 못했다. 왜일까?

미국은 주기적으로 자국의 이익이 걸려있는 나라에 대한 정보를 모아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추정하는 보고서를 작성한다. 미 중앙정보국(CIA)가 최종본을 집필하는 비밀(secret) 보고서 '국가 정보 추정 보고서(National Intelligence Estimate)'이다. 5.16쿠데타 발생 4개월, 쿠데타 세력은 좌충우돌했지만, 권력을 움켜쥐었다. 미국은 더 이상 박정희 군사 통치의 정당성 논쟁 따위에 얽매이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미국은 무엇을 해야 하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줄이면 '남한의 적은 남한이다'가 된다. 한국이 폭삭 주저앉지 않게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다양하게 수집된 정보에 기초해 작성되는 미국의 '국가 정보 추정 보고서'(National Intelligence Estimate). 5.16쿠데타 직후 작성된 보고서는 "한국의 적은 한국"이라고 평가했다. 사진은 보고서의 첫 페이지.
다양하게 수집된 정보에 기초해 작성되는 미국의 '국가 정보 추정 보고서'(National Intelligence Estimate). 5.16쿠데타 직후 작성된 보고서는 "한국의 적은 한국"이라고 평가했다. 사진은 보고서의 첫 페이지.

이 보고서의 도입 부분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세계사에 대한 높은 수준의 이해와 인식이 있는 고위 당국자들이 읽는 문서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보고서에서 한반도 문제는 1945년에서 시작한다. 전례를 찾기 어려운 총체적 수탈, 압제 통치의 후유증으로 열병을 앓고, 겨우 힘겹게 서 있을 정도로 회복한 한국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한일 관계 개선을 밀어붙인 미국의 정책 사고를 읽는 게 필요하다. 미국의 눈에 한국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 본문 그대로 읽는 것이 좋다. 먼 장래에는 어떨지 몰라도, 현재로서는 한국에 가장 큰 위협은 북한이 아니라 한국이란 선언으로 시작한다. (The greatest threat to South Korea, at least in the near term, does not come from North Korea. It comes, instead, from within South Korea itself.)

"비틀거리는 경제와 끊이지 않는 비상상황, 권위 지향적인 지도부와 자기표현 및 자유를 열망하는 국민 사이에서 생기는 정치적 문제, 경제 개발을 위한 사회적 응집력과 효과적인 기관의 부족, 끝으로 인내심이 극에 달하면 나타나는 국민의 반란 욕구.”

“From the country’s shaky economy and its almost perpetual state of crisis; from the unresolved political questions that arise out of the leadership’s demand for authority versus the people’s desire for self-expression and freedom; from the lack of social cohesion and effective institutions for economic development and finally, from the people’s appetite for revolt once their patience has been pushed to its limit.”

보고서는 한국이 여러 종류의 많은 문제를 안고 있어, 생각의 갈피를 못 잡고 헤맨다고 평가했다.

“남한 사람들은 아직 어떤 나라를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감이 없다. 이 때문에 공산주의식 통일, 국공 경제·문화 협력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호소와 제안은 위험하다. 강력하고 응집력 있는 (북한의) 이념과 사실상 (남한의) 이념적 공백이 대결 상태이다.”

“South Koreans have so far developed no clear sense of national direction and purpose. It is this lack of national purpose which makes dangerous the variety of Communist appeals for unification on Communist terms and their offers of economic and cultural cooperation. A strong cohesive ideology is being matched against a virtual ideological vacuum.”

한국은 더 많은 미국의 원조가 답이라 주장했다. 미국은 이를 수용할 수 없었다. 미국의 원조는 한국을 바꾸어 놓지 못한다. 더 많은 원조를 받아내기 위해 잔머리와 기술을 동원한다고 보았다. 쓸데 없이 군대를 늘려 군사 원조를 받아 내려 한다는 편견까지 있었다. 원조는 곧 자원 낭비란 인식이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61년 11월 박정희가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국무장관 러스크에게 미국의 원조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며 후회감을 나타낸 이유다. 러스크가 한미 양쪽 모두 실수가 있었음을 인정하자고 했지만, 덕담이었다. 미국은 한국의 앞날은 일본과의 협력에 달려있다는 정책 비전을 굳게 움켜쥐고 있었다.

식민 통치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공동운명이란 전략적 사고의 근원은 어디 있나? 아래 지도가 말해 준다.

 

놀라운 미국의 팽창 역사를 보여주는 지도.
놀라운 미국의 팽창 역사를 보여주는 지도.

위 지도가 말해주듯 팽창과 점령으로 이룬 미국은 그 피해자 관점에서 역사를 볼 수 있는 DNA를 갖고 있지 않다. 한국이 겪은 일제 강점기의 아픔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시대 식민지 피해를 한민족만 당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36년은 상대적으로 긴 세월이 아니란 의식도 반영했다. 

 

미국, 특히 러일 전쟁을 중재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은 일본에 우호적이었다. 1907년 11월에는 백악관에 스모 선수들을 초청해 시험 경기를 하도록 했다. 
미국, 특히 러일 전쟁을 중재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은 일본에 우호적이었다. 1907년 11월에는 백악관에 스모 선수들을 초청해 시험 경기를 하도록 했다.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로부터 치면 일본의 식민 통치는 36년간 이어졌다. 하지만 조선에 대한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성은 1875년 운요호 사건에서부터 확연했다. 4년 전인 1871년 미국이 제국주의 먹잇감으로 조선을 한 번 찔러본 사건이 병인양요다. 미국과 일본은 동업종 종사자로, 한때 같은 시장을 탐냈다. 1898년 스페인을 무찌르고 아시아 태평양을 세력권으로 만든 미국은 1905년 일본의 제국주의 식탁에 올려진 조선을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했다. 미국은 그렇지 않아도 먹을 것이 차고 넘쳐 주체를 못하는 상황이었다. 조선은 식당으로 치면 메인 코스 뒤에 서비스로 나오는 별미 정도의 의미가 있었다. 이 접시를 일본 쪽으로 밀어 놓은 미제 칼과 포크는 식탁 한 가운데 기름진 고기 음식으로 향했다. 필리핀을 주축으로 한 태평양이다. 

국제 사회, 특히 민족 자결주의를 외쳤던 미국이 조선 민족 현실을 외면한 것은 '아시아는 일본이 알아서 하라'는 메시지였다. 식민 통치 관련해서 일본은 백지 수표를 국제 사회로 부터 받은 형국이다.  

정신분석학에 기초해 제국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한 프란츠 파농. (Public Domain)
정신분석학에 기초해 제국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한 프란츠 파농. (Public Domain)

제국주의자들은 '피압제 민족은 자신을 최악이라고 믿는다.(The oppressed will always believe the worst about themselves.)'고 생각한다. 서양 제국주의에 대한 프란츠 파농(Franz Fanon 1921-1965)의 날카로운 지적이다. 자신을 못난 존재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수단으로 강요된 언어가 있다. 파농의 말대로 압제자의 언어를 사용하면, 압제자의 세상, 그 문화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문화 말살은 수탈과 착취의 전제 조건, 또는 상호 보완 장치로서 제국주의자들에게는 손에 익은 무기다.

일본은 압제 방식에서 뛰어났다. 인도에서 영국 식민 통치자들이 힌디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금지하려 들었을까?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서 불어를 강요했나? 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필요도 없었다. 수탈을 최대화하기 위한 지배 구조를 운영하는 데 피수탈자가 어떤 언어를 쓰는지에 매달리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엘리트 계층이 영어와 불어를 마스터해서 식민 지배자들을 대신해 통치를 해주면 된다. (인도와 인도차이나에서는 모순이 발생했다. 영국, 불어 교육을 받은 식민지 엘리트들이 당연히 제국 통치자 편, 민중의 반대편에 서야 했는데 거꾸로 됐다. 간디, 네루, 호찌민, 보응우옌잡 등 변증법적 인물들이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식민통치자로부터 최고 엘리트 교육을 받고 인생을 식민 통치 종식에 바친 경우다.)

서구에 비해 다소 뒤늦게 식민지 팽창에 나선 일본은 준비를 철저히 했다고 할 수 있다. 영국과 인도차이나와는 달리 식민지 엘리트들이 피압제 민중의 편에 서지 못하게 교육했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 '흙 (1932)'에 김갑진이란 캐릭터가 등장한다. 식민 통치자들이 기뻐할 완전한 대리인의 자격을 갖춘 인물이다. 그는 파농의 지적대로 일본어 교육을 통해 식민사고를 완전히 내면화했다. 경성제국대학 법과 출신으로 판검사가 꿈인 인물이다.

"그 어디 조선 신문 잡지야 보기나 하겠던가. 요새에는 그 쑥들이 언문을 많이 쓴단 말야. 언문만으로 쓴 것은 도무지 희랍말 보기나 마찬가지니, 그걸 누가 본단 말인가. 도서관에 가면 일본문, 영문, 독일문의 신문 잡지, 서적이 그득한데, 그까짓 조선문을 보고 있어? 그건 자네같이 어학 힘이 부족한 놈들이나, 옳지 옳지! 저기 저 모 심는 시골 농부놈들이나 볼 게지, 으하하!"

소설 속 인물이지만 김갑진처럼 일본의 문화 말살 정책을 철저하게 흡수한 조선인들의 도움으로 일본은 제국주의 역사에 보기 드문 통치술을 발휘했다. 경성제국대학 법학과와 더불어 식민 통치자와 혼연일체가 될 수 있는 루트가 또 있었다. 일본제국의 황군(皇軍)이 되는 것이었다.

일본의 철저한 식민 통치와 수탈의 원인을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 1857~1924) 의 소설 ‘암흑의 핵심 (Heart of Darkness)’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구 정복이란 대개 우리와 피부색이 다르거나 코가 약간 납작한 사람들에게서 지구를 빼앗는 것을 의미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코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The conquest of the earth, which mostly means the taking it away from those who have a different complexion or slightly flatter noses than ourselves, is not a pretty thing when you look into it too much.”

일본의 한민족 강점은 콘래드의 지적과 일치하지 않는다. 조선 민족은 일본 민족보다 얼굴이 검거나 코가 납작하지 않다. 인종과 문화의 우수성을 내세워 제국주의 침탈을 정당화할 근거가 되지 못했다. 그러면 차선(당하는 쪽에서는 차악)은 문화 자체의 말살이다. 이것이 신천지 사상이다. 일본의 식민 통치로 새 하늘 새 땅이 도래했으니, 옛것은 의미가 없어졌다. 한민족의 독립 투쟁에는 '우리 땅을 빼앗고 우리 문화 민족을 야만인 대하듯 하며 우리의 오랜 사회와 민족의 훌륭한 심성을 무시(쉽고 바르게 읽는 3.1 독립선언서)'한 일본에 대한 정신적 투쟁이 두드러진 이유이다.

 

미국은 제국주의 나라다. 1899부터 1902까지 필리핀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벌였다. 그 후 1946년까지 필리핀을 식민 통치하면서 미국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다. 제국주의 국가로 일본과 비슷한 경험을 했다. 1906년 발생한 Bud Dajo 학살 현장. (Public Domain)
미국은 제국주의 나라다. 1899부터 1902까지 필리핀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벌였다. 그 후 1946년까지 필리핀을 식민 통치하면서 미국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다. 제국주의 국가로 일본과 비슷한 경험을 했다. 1906년 발생한 Bud Dajo 학살 현장. (Public Domain)

미국은 한민족이 경험한 일제 통치의 역사성을 읽지 못했다. 한민족이 수난을 겪었지만, 그 고통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통해 파생된 역사의 에너지는 폭발성이 강했다. 식민지와 해방공간에서 자주독립 정신은 기본이고, 민족 장래에 대한 다양한 테제와 화두가 제기됐다. 이념 갈등과 대립은 역설적으로 깨어 생각하며 행동하는 민족이란 뜻도 된다. 미국은 식민 통치의 경험에서 파생된 민족의 역동성을 냉전의 시각에서 접근했다. '미국식'이 아니면 적대 사상이므로 수용 불가. 가장 미국적인 인물이 민족 지도자고, 건국의 아버지가 됐다. 작가 최일남의 단편 '노래'에서도 묘사된다. 격변기 처세술의 달인 아버지가 아들을 가르친다. “이제부터는 만사 제쳐 놓고 영어만 배워라. 그래야만 산다…지금부터는 코 큰 놈 세상이 올 것이니깨. 그 놈들 불알을 꽉 붙잡아야 한다 이 말이다.”

어쨌든 1945년 이후 미국의 헤게모니 식탁에 코리아가 다시 올라왔다. 이번에는 반쪽이었다. 냉전의 식탁에는 메인 코스와 별미 서비스가 따로 없었다. 한국은 냉전 격전지의 메인이었다. 자신처럼 칼과 포크를 들고 테이블 건너에 앉아 있는 공산 세력이 건드리지 못하게 해야 했다. 3년 넘게 전쟁도 했다. 한국을 보기 좋고, 영양가 있는, 식욕 돋는 요리로 변신시켜 식당의 자랑거리로 만들어야 했는데 쉽지 않았다. 자기보다 이 음식에 대해 이해와 경험이 있는 셰프를 데려왔다. 미국의 눈에 이 음식을 가장 원하고, 잘 아는 일본이었다. 이 셰프가 아니면 이 요리, 한국은 곧 폐기해야 할 것이라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때 박정희가 말 그대로 탱크를 몰고 나타났다. 이 당혹스러운 상황을 미국은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가능케 하는 데 활용한다. 

 

5.16 당시 탱크를 몰고 나온 쿠데타군. (대한뉴스 갈무리)
5.16 당시 탱크를 몰고 나온 쿠데타군. (대한뉴스 갈무리)

미국은 박정희에게서 무엇을 보았나? 친일 경력을 가진 약점 잡힌 쿠데타 리더였나? 그 이상이다. 박정희 연구의 권위자로 꼽히는 전 하버드 대학교수 카터 에커트(Carter Eckert 1945-2024)의 분석이 이해에 도움을 준다. 미국에게 박정희의 이용 가치는 그의 친일 경력을 넘어선다. 박정희 찬미로 들릴 수 있는데, 박정희는 미국에 유용한, 기대할 가치가 있는 '후진 의존국(backward client state)' 지도자였다. 나라 만들기와 경제 개발의 기술(technology of nation building and economic development)을 갖추고 있었다고 에커트는 주장한다. 

그는 박정희의 통치 철학에서 네 개의 튼튼한 기둥을 발견했다. 박정희가 5.16 제멋대로 미국의 지휘권 아래 있는 군대를 동원해 탱크를 앞세워 권력을 잡은 그 순간을 잊어 주면, 그는 미국이 찾고 있던 유능한 기술자다. 에커트가 박정희에게서 발견한 독특한 지도력이다. 

첫째,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는 군대가 정치에 개입할 권리뿐 아니라 의무도 있다고 믿었다. (belief that in a national crisis of sufficient gravity, the army had not only a right but also a duty to intervene in the political system.)

둘째, 자본주의 경제는 나라의 부와 힘을 증대시키기 위해 국가에 의해 면밀히 계획되고, 실행되고, 감시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저 사적 이익을 위한 시스템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capitalist economy would have to be scrupulously planned, implemented, and monitored by the state for the sake of increasing national wealth and power, and not permitted to serve merely as a system for private gain.)

셋째, 국가적 목표 추구를 위해선 대담하고 때론 위험을 불사하는 행동력, 매우 불리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의지와 자신감을 갖는 것이다. (a commitment to bold, even risky action in pursuit of…national goals, and a sense that unfailing willpower and confidence, even under the most extreme of adverse conditions.)

넷째, 국가와 사회는 모든 부분과 형태로 협력하여 기능하며, 사회는 국가 목표와 조화를 이루어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자기 훈련 과정에 동참한다. (the state and the society in all their parts and manifestations would function in tandem, with society engaged in a voluntary and active self-disciplining process in harmony with state goals.)

한일 국교 정상화, 또 압축 경제 개발 같은 강한 추진력이 요구되는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국가 운영 철학을 박정희가 갖고 있었다는 해석이다. 

 

한일회담 과정에서 박정희가 가장 의지했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왼쪽). 미국은 그의 영향력과 협상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국정을 음습하게 이끌어가는 논란의 인물로 보았다. 한일 협정에 정권의 미래를 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오른쪽). 그는 1962년 3월 24일부터 대통령 권한 대행을 겸직했다. (연합뉴스)
한일회담 과정에서 박정희가 가장 의지했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왼쪽). 미국은 그의 영향력과 협상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국정을 음습하게 이끌어가는 논란의 인물로 보았다. 한일 협정에 정권의 미래를 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오른쪽). 그는 1962년 3월 24일부터 대통령 권한 대행을 겸직했다. (연합뉴스)

한일 관계 정상화와 관련해서 미국은 모순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강하게 밀어붙였지만, 이를 빌미로 한국이 미국에 더 많은 원조를 요구할까 경계했다. 1964년 6월 3일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막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한 박정희는 곧 퇴임하는 사엘 버거 대사를 진해의 대통령 별장으로 불렀다. 그가 귀국하면 존슨과 마주할 것을 알았다. 한일 회담 진척에 관한 대화가 오갔다. 박정희가 미국의 도움을 호소했다. 한일 회담에 대한 반대를 완화하기 위해서 미국이 박정희 정부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요청이었다. 그 힘은 다름 아닌 원조였다.

여러 원조 항목 중에는 나중에 박정희 시대와 동일시되는 고속도로 건설 프로젝트가 있었다. 고속도로는 경제개발과도 연관이 있지만, 가시적인 국책사업으로 대중에게 정부의 성과를 호소하는 데 좋은 아이템이었다. 버거가 한마디로 거절했다. 검토는 하지만, 원조의 우선순위가 아니라고 잘랐다. (It was under study, but not likely to be given high priority.)

 

한일 회담 반대 시위가 확산하자 박정희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대 여론을 잠재울 가시적 메시지(원조)를 내놓으라고 했다. 미국은 이를 거절했다. 한일 관계 개선에 미국이 개입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굴욕적 외교를 결사 반대한다'는 구호가 보인다.
한일 회담 반대 시위가 확산하자 박정희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대 여론을 잠재울 가시적 메시지(원조)를 내놓으라고 했다. 미국은 이를 거절했다. 한일 관계 개선에 미국이 개입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굴욕적 외교를 결사 반대한다'는 구호가 보인다.

박정희가 일본을 움직이도록 러스크 국무장관이 더 적극적으로 협상에 개입해 달라고 요청하자, 기대하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국이 역사의 피해의식을 앞세워 이것저것 미국에 요구하지 말라는 뉘앙스였다. 한국은 일본이 더 많은 한국 상품을 수입하도록 길을 찾으라고 조언했다. 알아서 하라는 얘기였다.

미국은 한일 관계 정상화를 위해 한국을 압박하면서도, 협상에 대해서는 불원불근(不遠不近)을 유지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정직한 브로커란 명분을 내세워 너무 멀리, 또 가까이에도 있지 않았다. 식민 통치가 남긴 아프고 파괴적인 유산을 안고 사는 한국에 대해 미국은 민감하지 않았다. 역사적 피해 민족에 대한 보상을 논하기 시작하면 미국은 감당이 되지 않는 나라다. 흔한 말로 미국은 한일 협력이란 과일의 단물만 빨려고 했다는 비난도 가능하다. 빨대로 코코넛 주스를 마시듯 말이다.

1년 뒤 한일 협정이 체결되자, 미국은 또 하나 국론 분열의 소지가 있는 어젠다를 한국에 내밀었다. 악화해 가는 베트남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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