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참전 60돌]⑩ 베트남의 무능 틈탄 기회

남베트남의 불안 상태로 국제원조 필요 더 해져

박정희, 미국에 '적극적 행동' 권하며 확전 훈수

미국, 한일 관계 정상화에 올인하며 신중 모드

북베트남이 뒤봐주는 민족해방전선 상황 주도

무능한 남베트남 군부 통치의 대안은 결국 한국

“그(박정희)는 필요하다면 2개 전투 사단을 파병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는 장비와 교통편이 제공된다면 베트남으로 가서 싸울 의향이 있는 최근 전역병이 많다고 덧붙였다.”
(“He said that Korea was willing to send two combat divisions if necessary. Moreover, there were a large number of recently discharged veterans in Korea who were willing to go to Viet Nam to fight if they could be equipped and transported.”)

1964년 12월 19일. 5개월 전 새로 부임한 윈스럽 브라운(Winthrop Brown 1907~1987) 주한 미국대사는 청와대에서 박정희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한국이 베트남에 2개 사단, 약 4만 명 규모의 전투 부대를 보내겠다고 했다. 파격을 넘어서 무리였다. 당연히 브라운은 국무부에 이 발언 내용을 보고했다.

윈스럽 브라운 주한 미국 대사 (Public Domain)
윈스럽 브라운 주한 미국 대사 (Public Domain)

브라운은 메인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일대학 학사와 법학 학위를 받고 변호사로 활동하다 외교관이 되었다. 전형적인 지적이고 차분한 뉴잉글랜드 출신 엘리트였다. 외모에서 상대를 긴장시키는 정리된 품성과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뉴잉글랜드 명문 기숙학교의 원칙주의자 교장선생님 같은 모습이었는데, 미국이 자신을 길들이려 한다고 생각했던 박정희와 긴장이 없지 않았다.

라오스 대사(1960~1962) 후 주한 미국 대사로 1964년 부임해 67년까지 근무했다. 마지막 공직으로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국무부 차관보를 지냈다. 60년대 한국과는 떼어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박정희의 전투 병력 언급에 브라운은 침착하고 균형을 잃지 않는 외교관다운 반응을 보였다. 베트남 전쟁은 절망적이지 않지만, 별 희망은 없어 보였다. 외부 지원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 

브라운은 먼저 미국이 전투 부대를 원하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했다. 베트남은 외국 군대가 와서 싸워주는 전쟁이 아니라고 했다. (“This was not that kind of war.”) 공병부대, 수송기 조종사, 상륙정(LST), 의료 및 후방 지원 부대의 파견 가능성이 있냐고 브라운이 물었다. 한국은 이 시점에 130명 규모의 이동외과병원과 10명의 태권도 교관을 베트남에 보내 놓고 있었다.

박정희가 베트남에 그런 간접 지원으로 뭘 할 수 있냐는 뉘앙스를 풍기면서 전투 부대 파병을 언급한 것이다. 그는 전략적 훈수를 두었다. “(박 대통령은) 미국이 더욱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면, 베트콩을 격파하고 흔들리는 주변국들의 지지를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했다. (“more vigorous action by the United States would be helpful in defeating the Viet Cong and in getting the support of wavering neighboring countries.”)

이 발언의 키워드는 'vigorous action' 적극적인 행동이다. 냉전 사고에 물든 박정희에게 '적극적인 행동'은 미국과 연합군이 남베트남의 정글을 넘어가는 북진을 뜻했다. 그는 한국의 더글러스 맥아더가 되어가고 있었다. 공산 세력과 싸울 거면 제대로 싸워야 우방들이 미국의 뒤를 따를 수 있는 것 아닌가? 미국은 직접 개입하는 것과, 옆에서 돕는 것 중간쯤에 서 있었다. 되는 일이 없는데, 국제적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브라운이 전한다. “(박 대통령에게) 외부 전투 병력을 투입할 시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설명했지만, (그의) 의견을 존슨 대통령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시기상조지만, 한국이 언급한 파병의 가능성은 미국의 정책 뇌리에 보관하겠다는 답이었다. 데이트 하자는데 결혼할 마음이 있다고 한 박정희에게 브라운은 가능성을 열어 놓고 일단 좀 더 사귀어 보자고 한 셈이다.

이 대화 4개월 뒤인 1965년 3월, 존슨은 베트남에 미 해병을 파병한다. 1954년 이후 유지해 온, '베트남이 스스로 도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help to help itself)'는 정책 기조를 깼다. 철저한 사전 준비가 돼 있었음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박정희가 이 흐름을 파악하고 파병을 제안했을 가능성이 높다.

새로운 것은 없다. 박정희는 3년 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케네디에게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구체성이 없어 오히려 더 무리한 제안이었다. 게릴라전에 익숙한 100만 명 군인이 있는 한국은 베트남에 개입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 케네디가 완곡하게 "이 전쟁은 외국의 도움에 크게 의존하지 않고 베트남인들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며 넘어갔다. 미국은 바라지 않는데, 박정희가 남의 전쟁에 뛰어들겠다는 제안을 거듭하는 이유는 한국의 방위와 자신의 통치에 대한 불안 심리로 봐야 한다. 물론 미국이 그의 불안 심리를 자극했다.

 

1979년 6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이 공화당 훈련원장실에서 새로 입당한 이후락 의원의 인사를 받고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1979년 6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이 공화당 훈련원장실에서 새로 입당한 이후락 의원의 인사를 받고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어쨌든 박정희와 브라운의 대화 중에 흥미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이후락이다. 1963년부터 1969년 사이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고, 그 후 1970년에서 1973년까지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했다. 한 박정희 시대 연구자에 따르면 박정희는 김종필과 달리 이후락은 다른 사람 칭찬도 할 줄 안다며 가까이 두었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이후락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언제나 자신이 제일 유능한 인물로 인정받고 또 그렇게 보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는 말이다.

비서실장 이후락이 한국의 대통령과 주한 미국 대사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박정희의 2개 전투 사단 파병 의사는 사실 '무리'를 넘어서 '무모'였다. 박정희 정부는 북의 위협이 상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군과 미국의 병력 감축은 위험천만한 불장난이란 논리를 펴왔다. 그런데 박정희가 4만 명이 넘는 전투 병력을 남한 밖으로 빼겠다고 한 것이다.

브라운은 불편했다. 그는 미국을 대표해서 한국의 통치자와 앉아 대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비서실장이 대통령의 말에 토를 달았다.

“이후락이 끼어들어 대통령이 참모들과 협의한 후 답변을 주겠다고 말했다. 이미 나는 (박) 대통령이 당장 확실한 답변을 줄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지만, (이후락에게) 결정을 알려주면 주한 미군 사령관 해밀턴 하우즈 장군(Hamilton Howze)이 (한국의) 국방부 장관과 세부 사항을 논의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듣고 있던) 대통령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Yi Hu-rak intervened to say that the President would give his answer after he had consulted with his staff. I had already said that I did not expect the President to give me a firm answer right away, but asked that he let me know his decision soon so that General Howze could begin to discuss details with the Minister of National Defense. The President promised to do so.”

여기에는 'I had already said'가 중요하다. 당신은 왜 뻔한 얘기를 하는가, 이미 말하지 않았나라는 반문이다. 이후락은 이 민감한 대화에서 감당하기 어렵게 속도를 내는 박정희를 위해 브레이크를 밟았다고 할 수 있다. 브라운에게는 주제넘은 끼어들기였다.

미국은 급했지만 신중했다. 베트남에서 다른 나라들의 국기들이 더 힘차게 펄럭여야 했다. 하지만 한국 참전의 후유증을 우려했다. 얻는 것보다는 잃을 것이 더 많아 보였다. 특히 브라운이 한국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한국이 '멀리서 벌어지는, 선전 포고도 하지 않은 전쟁(distant and undeclared war)'에 뛰어든다면, 박정희의 정적들은 한국민들을 당황케 하고 불안감과 공포심을 조성하려 들 수 있다(bewilder the general public and generate uneasiness and fear)고 했다. 결론은 한국은 아직 다른 나라 전쟁에 개입할 심리적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psychologically unprepared) 나라였다. 박정희가 먼저 그에게 '부족한 국민의 신뢰를 구축(build public confidence he lack)'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했다.

미국의 시각에서 한국 상황의 만병통치약은 한일 관계 정상화였다. 미국은 1964년 여름 한국의 민족의식, 다시 말해 '굴종' 알레르기를 6.3사태를 통해 잘 경험했다. 한국의 전투 병력 베트남 파병의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지는 1965년 5월 박정희-존슨 회담까지 미국은 한국의 파병이 논란을 불러오지 않도록 조심했다. 

놀이터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 있다. 두 아이가 시소 놀이를 한다. 물론 시소는 양쪽의 무게가 얼추 비슷해야 한다. 한쪽이 무거우면, 그쪽은 위로 오르지 못하고, 대신 반대쪽은 공중에 떠서 멈추어 선다. 시소가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 몸이 가벼운 아이가 몸을 뒤틀어 아래로 내려갈 수 있도록 애를 쓴다.

이때 무거운 아이가 일어나는 자세를 취해 자기 쪽 무게를 줄이면 상대 아이는 땅으로 내려온다. 몸이 무거운 아이가 이 동작을 반복하면 가벼운 아이는 즐겁다. 하지만 무거운 쪽은 재미도 없고, 일어났다 앉았다 해야 하니 무릎이 아프다. 놀이가 아니라 운동이 된다.

한일 국교 정상화의 기본 구도는 균형이 맞지 않는 시소와 다르지 않았다. 일본은 무거웠고 한국은 가벼웠다. 일본의 경제도 한국에 비해 무거웠지만, 역사의 막무가내 버팀도 셌다. 서세동점의 제국주의 시대에 조선은 서로를 이해하는 같은 동양인 일본과 합병해 공영권을 형성했다는 역사의식은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불린다. 시소 놀이로 치면 일본은 엉덩이를 깔고 움직이지 않았다.

공중에 떠 있는 쪽인 한국은 역사의 피해 사실로 중압을 형성하려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식민 통치를 통해 근대 문명, 산업, 제도를 전수해 주었다며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했다. 60년대 초까지 시소의 불균형은 바뀌지 않았다.

 

1965년 1월 사토 에이사쿠 일본 내각총리대신(왼쪽) 과 백악관에서 회담하는 린든 존슨(오른쪽). 미국의 아시아 정책의 핵심은 일본의 역할 확장이었다. 이를 위해 미국은 한국과 일본의 관계 정상화가 필수였다. . 한국의 베트남 개입도 한일 관계 정상화 이후로 미루는 신중함을 보였다. (LBJ Library)
1965년 1월 사토 에이사쿠 일본 내각총리대신(왼쪽) 과 백악관에서 회담하는 린든 존슨(오른쪽). 미국의 아시아 정책의 핵심은 일본의 역할 확장이었다. 이를 위해 미국은 한국과 일본의 관계 정상화가 필수였다. . 한국의 베트남 개입도 한일 관계 정상화 이후로 미루는 신중함을 보였다. (LBJ Library)

시소 놀이에 중재자가 나타났다. 60년대 들어 미국은 더 이상 약소 후원국에 과거 수준의 원조를 제공하지 않기로 했다. 재정 부담도 문제지만, 특별히 한국의 경우 원조로 인한 가시적 변화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먼저 한국에 속삭였다. "세상이 바뀌었다. 미국에 손만 내밀면 원조를 해주는 시대는 지났다. 미국은 이 관계를 지속할 능력도 마음도 없다. 변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반일 성질을 죽여라. 그래야 산다."

한국에 보낸 메시지는 경고였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앞을 보라는 일침에 박정희는 긴장했고, 미국을 설득해야 했다. 갑자기 이러면 어떡하냐고 호소했다. 1961년 11월 케네디와 회담했을 때는 이런 호소도 했다. "(원조 삭감) 정책 전체를 철회할 것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한국에 중요한 몇 가지 구체적인 예외 사항을 요구한 것이다. (He was not asking revocation of the whole policy, only certain specific exceptions important to Korea.)"

당시의 대화록을 보면, 케네디는 박정희에게 미국에 재정 여유가 없음을 길게 설명했다. 국무장관 러스크가 그날 저녁 만찬에서 더 이야기할 수 있다며 끼어들 정도였다. 미국에 꼭 필요한 좋은 우방이 되어야 한다는 박정희 정부의 외교 기조는 1965년 한국을 베트남에 가깝게 가게 했다.

미국은 일본에도 메시지를 전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호소였다. 성질을 죽이라고 하지 않았다. 저쪽 가벼운 아이를 위해 조금 일어나 줄 수 없냐고 일본에 속삭였다. 너그러움을 보여달라는 뜻이다.

시각을 최근으로 가져올 필요를 느낀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을 상대할 때 지금도 다른 접근 방법을 구사한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군사력에 방점이 찍혀있다. 발등에 떨어진 불, 북한이 뜨겁다. 주한 미군과 미국이 유사시 동원할 수 있는 안보 자산이 미국과 한국을 잇는 연결고리이다. 한국 전쟁 이후 지켜온 정책 기조이다.

일본은 악명 높은 적이 절친이 된 경우다. 극적인 반전이 있는 드라마다. 전에 없는 뜨거운 화공(火攻)을 당한 나라가 다시 일어나서 경제 대국이 되었다. 미국은 한국을 공산 세력에 대한 견고한 방어벽이 되기를 원한다. 일본에 대한 기대는 평화와 번영을 위한 국제적 리더십이다.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평화와 번영, 민주주의를 지키는데 있어 미국의 파트너로 칭한다. 1965년 체결된 한인 협정도 이 정책의 사고의 연장이다. 2024년 4월 10일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열린 미일 정상회담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평화와 번영, 민주주의를 지키는데 있어 미국의 파트너로 칭한다. 1965년 체결된 한인 협정도 이 정책의 사고의 연장이다. 2024년 4월 10일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열린 미일 정상회담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바이든 전 대통령은 지난해 4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고 미일 관계에 대한 희망을 전했다. "미국과 일본은 다른 파트너들과 협력하여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과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입니다 (the United States and Japan will continue our tireless work, together and with other partners, to realize a free and open Indo-Pacific and world.)” 일본이 이 지역에서 반장 노릇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관세, 또 방위부담금 등을 문제 삼아 우방 압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월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의 공동성명에서 일본을 향한 미국의 전략 비전을 내비쳤다. "미일 동맹은 인도-태평양과 그 너머 지역의 평화, 안보, 번영의 초석으로 남아 있다. (The U.S.-Japan Alliance remains the cornerstone of peace, security and prosperity in the Indo-Pacific and beyond.)" 한국의 기능이 북한을 막아내는 일이라면, 일본의 활동 영역은 일본 열도를 훨씬 넘어야 한다. 달리 표현하면 미국과 한국이 굳게 악수한다면 미국과 일본은 어깨동무다. 주변국들이 거북해 하지만, 미국은 절친 일본에 대한 성질을 죽이라고 조언한다.

1964년 한국의 체질을 바꾸고, 일본의 국제적 시야는 넓히겠다는 미국의 전략 목표가 가시권에 들어오길 미국은 인내하고 기다렸다. 1965년 6월이면 한일 간의 국교 정상화는 이루어진다. 10여 년을 기다려온 동북아시아 전략 구도의 재편성을 수개월 더 못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1964년 11월 민주해방전선 게릴라의 공격을 받았던 베트남의 비엔호아 미 공군기지. 1968년경 모습이다 (Public Domain)
1964년 11월 민주해방전선 게릴라의 공격을 받았던 베트남의 비엔호아 미 공군기지. 1968년경 모습이다 (Public Domain)

존슨 행정부가 아무리 신중해도 한국은 베트남으로 자꾸 가까이 가고 있었다. 1964년 11월 1 새벽 사이공에서 동북쪽으로 35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있는 비엔호아(Bien Hua) 미 공군기지를 민족해방전선 게릴라들이 공격했다. 30분 박격포 공격으로 거의 30대의 항공기가 파괴 또는 손상됐다. 3명이 목숨을 잃고 70명이 다쳤다. 이 사건은 전술적 변화를 요구했다. 공군기지는 규모가 큰 군사 시설이다. 항공기는 비싼 무기다. 이런 공군기지의 방어는 신뢰할 수 없는 남베트남 군대, 또는 미국 '군사고문단'으로 할 수 없다. 무장한 지상군이 있어야 한다. 이제까지 미군이 권총을 들고 있었다면 이젠 자동 소총을 꺼내야 할 때가 왔다.

박정희-브라운 대화 후 5일이 지난 1964년 12월 24일 사이공의 미 육군 장교 숙소로 이용되던 브링크스 호텔(Brinks Hotel)에서 인민해방전선 게릴라들이 설치한 폭발물이 터졌다. 미군 2명이 사망하고 미국, 베트남, 호주인 등 107명이 부상을 당했다.

 

1964년 12월  24일 사이공 시내의 미군 장교 숙소 브링크스 호텔에 폭발물이 터져 호텔 일부가 파괴됐고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민족해방전선의 대담함이 과시되고, 사이공 시내도 더 이상 안전할 수 없다는 불안 심리가 퍼져나갔다. 사건 발생 전의 브링크스 호텔 모습 (Public Domain)  
1964년 12월  24일 사이공 시내의 미군 장교 숙소 브링크스 호텔에 폭발물이 터져 호텔 일부가 파괴됐고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민족해방전선의 대담함이 과시되고, 사이공 시내도 더 이상 안전할 수 없다는 불안 심리가 퍼져나갔다. 사건 발생 전의 브링크스 호텔 모습 (Public Domain)  

사이공은 남베트남의 수도라는 상징성도 있지만, 밀림과 촌락을 베이스로 하는 민족해방 전선이 쉽게 침투할 수 없는 안전지대란 신화로 감싸여 있었다. 시골길에서 미군이 타고 있는 지프를 공격한 것과, 사이공 시내의 미군 장교 숙소를 폭파한 작전은 질이 같을 수 없다. 도둑이 사랑방의 도자기 한 점을 턴 것과, 안방의 금고를 노린 것은 심리적 파급 효과가 다르다.

안방이 뚫렸는데 집주인은 속수무책이었다. 민족해방전선과 이를 지원하는 북베트남(베트남민주공화국)의 전략이 먹혀 들었다고 할 수 있다. 공산 세력에게 주적은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이 아니었다. 민족해방과 통일을 방해하려 남의 나라에 들어온 미국을 주적으로 설정했다. 사이공을 상대로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워싱턴을 상대한다는 메시지와 전략은 민족의식을 자극하는데 주효했다.

베트남은 반제국주의 투쟁의 역사가 깊고 길다. 마오쩌둥은 "역사의 경험은 쇠와 피로 쓰인다"고 했다. 베트남의 고통과 피, 또 영광으로 쓰인 반제국주의 투쟁의 역사와 의식은 쉽게 망각하거나 희석될 수 없다. 게릴라전의 자양분은 역사의식이고 민족정신이란 뜻이다. 

아직 없어지지 않았다. ‘미시 레슬링 (Micro Wresting)’이라는 보기 불편한 스포츠 엔터테인먼트가 있다. 1970년대까지 일본에서 수입한 이런 흥행이 한국에서 인기가 있었다. 소인증으로 키가 5피트(152㎝) 미만인 레슬러들이 링에 올라 뒤엉켜 단체로 게임을 벌인다. 누가 어떤 편인지 또 게임의 규칙은 중요하지 않았다. 남녀가 섞일 때도 있다. 반칙을 범하고, 때로 각본에 따라 얼떨결에 같은 편을 공격하기도 해야 재미가 있고 관중은 열광한다. 1964년 사이공은 마치 이런 레슬링 무대로 전락했다.

9월 13일 사이공에서 또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응우옌칸을 제거하려는 이 쿠데타는 실패했다. 하지만 쿠데타를 저지한 공로자들의 권력 투쟁이 뒤따랐다. 머지않아 이들은 응우옌칸을 몰아낸다. 베트남의 수렁은 공산 게릴라들이 판 게 아니다. 불안한 정국은 진흙 구덩이로 변했고 미국은 그리로 들어가고 있었다.

 

베트남의 군부는 계속되는 쿠데타로 통치 기능과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했고 베트남 전쟁은 결국 미국의 전쟁이 되었다. 정치군인의 상징 응우옌반티에우 베트남공화국 대통령(오른쪽)과 응우옌까오끼 수상 (왼쪽)이 등을 뒤로한 존슨 대통령을 마주하고 있다. 이들이 1965년 응우옌칸을 밀어내고 권력을 잡았다. 1968년 사진이다. (LBJ Library)
베트남의 군부는 계속되는 쿠데타로 통치 기능과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했고 베트남 전쟁은 결국 미국의 전쟁이 되었다. 정치군인의 상징 응우옌반티에우 베트남공화국 대통령(오른쪽)과 응우옌까오끼 수상 (왼쪽)이 등을 뒤로한 존슨 대통령을 마주하고 있다. 이들이 1965년 응우옌칸을 밀어내고 권력을 잡았다. 1968년 사진이다. (LBJ Library)

이 상황을 브라운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덕담 조로 개인적 친분은 없지만, 응우옌칸이 능력있는 인물로 느껴진다고 했다. 브라운이 잘 계산된 외교 언어로 대응했다. 수상(칸)은 용기가 있는 군인이고 그의 부수상은 정치적 능력이 있어 앞날을 기대할 만하지만, 칸 정부는 위태롭다고 설정했다. “(그는) 아직 정치적 기반을 굳건히 하지 못했는데 (미국은) 기반 공고화가 베트콩에 대한 승리의 기본 전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However, it had not yet achieved a firm political basis and we felt that its doing so was a fundamental prerequisite to success against the Viet Cong.)” 응우옌칸의 시간은 곧 멈출 것을 예고한 듯하다.

무능의 대명사가 되어가는 남베트남 군부 통치가 무의식중에 한국을 향해 손짓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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