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참전 60돌]⑤ 누가 벌인 전쟁인가
케네디 암살 이후 루비콘강을 건너는 미국
평화를 외쳤지만 싸움꾼 양면성 띤 케네디
남베트남의 쿠데타 악순환에 무력한 존슨
미국, 돕는 전쟁에서 싸우는 전쟁으로 전환
뉴욕의 케네디 국제 공항(John F. Kennedy International Airport)은 대표적인 미국의 관문이다. 공항을 이용하는 승객수로 따지면 미국 공항 중 6위지만, 세계의 수도 소리를 듣는 뉴욕시에 있다는 상징성이 크다. 배우 톰 행크스가 주연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작품 ‘터미널(The Terminal)’이 '케네디 공항=뉴욕=아메리카'의 상징적 연결고리를 보여준다. 공항 터미널을 나서는 그 순간 사람들이 머릿속에 담아둔 미국이 다가오는 느낌을 영화로 표현했다. 케네디의 장례식 뒤 한 달, 1963년 성탄 이브에 이 공항의 이름은 아이들와일드(Idlewild) 공항에서 케네디 공항으로 바뀌었다.
1973년 사망한 린든 존슨의 이름을 딴 공항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없지 않다. 텍사스주 수도 오스틴의 Austin-Bergstrom 국제 공항 (이용객 수 27위)을 Lyndon B. Johnson International Airport로 바꾸자는 제안이 있지만 지지부진하다. 현재로는 이 공항의 서쪽 활주로(17R/35L)가 존슨 런웨이로 그를 기념한다.
공항만이 아니다. 미국에 모두 약 400개 길, 공원, 학교가 케네디 이름을 갖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콧대 높은 프랑스의 파리지앵들도 도심의 길 하나를 ‘케네디 대통령 가(Avenue du Président Kennedy)’로 이름지었다. 세느강 강변도로인데 이 길 116번지가 세계적 공연장이 있는 라디오 프랑스의 집(Maison de Radio France)이다.
존슨을 기념하는 장소도 여럿 있지만 남부, 특히 텍사스에 집중돼 있다. 그 중 하나가 휴스턴의 Lyndon B. Johnson Space Center이다. 여기서도 케네디와 비교가 된다. 플로리다 케이프 커내버럴에 소재한 Kennedy Space Center에서는 우주선 발사가 진행된다. 존슨 센터에서는 우주 비행사 교육과 훈련, 연구가 주목적이다. 누구나 우주 프로그램하면 웅장한 불덩이를 뿜어내며 하늘로 오르는 발사를 떠올린다. 방문객 수와 공간 규모에서 케네디 센터가 앞서는 이유다. 역사적 인물의 기념 차원에서 보면 케네디와 존슨은 격차가 크다. 케네디의 대통령 재임 기간은 1036일이고, 후임 존슨은 1901일이어서, 존슨 임기가 두 배가량 되는 데도 그렇다. 기억이 기념의 기본 소재임을 말해준다.
존 F. 케네디에 대한 기억이 수많은 기념비로 표현되는 이유는 아쉬움이다. 아직도 미국 역사상 선거를 통해 당선된 최연소 대통령이다. 43세에 대통령이 되어 46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미국은 달라졌을 것이란 가정이 아쉬움이 되어 케네디를 이루지 못한 이상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역으로 존슨은 가서는 안 될 길을 너무나 자신 있게 간 무모함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케네디에 대한 '아쉬움=기억=기념'의 진행에 그의 죽음이 큰 역할을 했다. 케네디는 암살당한 그날 중요한 연설을 할 계획이었다. 공항에서 12시 15분으로 예정된 오찬 행사장인 트레이드 마트(Trade Mart)로 무개차를 타고 가는 중에 암살범의 총탄에 쓰러졌다. 그 연설의 공식 명칭은 'Undelivered remarks for Dallas Citizens Council, Trade Mart, Dallas, Texas, 22 November 1963'이다. 직역한 첫 단어 '배달 되지 못한 (Undelivered)'이 아쉬움을 더한다.
문서로만 남은 이 연설은 케네디의 전략적 사고를 잘 보여준다. 핵무기를 포함한 강한 군사력을 통해 공산세력과 맞서야 한다는 신념이 흘러넘치는 냉전 매니페스토다. 그의 뇌리에 공산 세력은 심악이었다. 케네디는 미국의 전략, 전술핵무기, 잠수함, 우주프로램, 군사동맹, 재래식 무기와 병력의 규모를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 언급했다. "(공산주의 세력의 도전이 거세지만) 이제 우리는 자유의 보존과 증진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군사력, 과학력, 경제적 힘을 갖추게 되었다 (But now we have the military, the scientific, and the economic strength to do whatever must be done for the preservation and promotion of freedom)”고 했다. 여기까지는 냉전 용사의 외침이다.
하지만 케네디에게는 다른 면이 있었다. 군사력만으로 이룰 수 없는 이상이 있었다. 다음은 미처 하지 못한 연설의 마지막 문단이다. 세상의 지정학적 언어와 성서의 시적 간구가 상호보완하는 이 문단을 전체 읽어보는 것이 좋다.
“이 나라, 이 세대에 사는 우리는 – 선택이 아니라 운명으로 – 세계 자유의 성벽 위에 서 있는 파수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힘과 책임을 감당할 자격이 있기를, 지혜와 절제력으로 우리의 힘을 발휘하기를, 그리고 우리 시대와 영원토록 “땅 위에는 평화, 인류에게는 선의 (누가복음 2:1)”라는 고대의 비전을 성취하기를 간구한다. 그것이 늘 우리의 목표여야 하며, 우리의 대의의 정의는 항상 우리의 힘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 오래전에 쓰인대로,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다. (시편 127:1)”
“We in this country, in this generation, are – by destiny rather than choice – the watchmen on the walls of world freedom. We ask, therefore, that we may be worthy of our power and responsibility, that we may exercise our strength with wisdom and restraint, and that we may achieve in our time and for all time the ancient vision of "peace on earth, good will toward men." That must always be our goal, and the righteousness of our cause must always underlie our strength. For as was written long ago: "except the Lord keep the city, the watchman waketh but in vain."
때로 마력이라고까지 하는 케네디의 매력의 원천이 여기 있다. 그는 역사적 싸움꾼이었다. 미국이 공산 세력에 밀리면 세계가 불행하다고 믿었다. 동시에 그는 이 싸움이 상대방을 제압하는 단일 목적의 추구가 아니라, '평화와 자유 (peace and freedom)' 모두를 얻기 위한 사명이라 했다. 자유는 싸움의 궁극적 목표이고, 평화는 싸움 없는 상태를 목적한다. 추운 현실도 받아들이지만, 따듯한 이상도 포기하지 말자 했던 케네디의 양면성(duality)이 존슨과는 비교하기 힘든 그의 매력이다.
존슨에 대한 기억의 핵심은 베트남 전쟁이다. 그는 억울할 수도 있다. 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을 미국의 적이 되게 한 결정적 요인은 케네디가 제공했다. 전임 아이젠하워는 미국의 명예, 위신, 미래를 1만 마일 떨어진 남베트남과 연계시켰지만, 군대를 보내지는 않았다. 케네디가 사망했을 때 남베트남에는 1만 6000명 규모의 미국 군사고문단이 있었다. 아이젠하워 임기 마지막 해인 1960년 미국의 남베트남 원조 액수는 약 2억 5000만 달러. 이중 72%가 경제 원조였다. 1963년 케네디 정부 마지막 해 미국은 5억 달러를 베트남에 지출했다.
케네디는 베트남을 도우러 갔고, 존슨은 대신 싸우러 갔다는 인식이 강하다. 케네디가 미국을 베트남 수렁으로 인도했다면, 존슨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전사자가 5만 8000명의 패한 전쟁에 뛰어든 리더에 대한 기억이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베트남 전쟁에는 '존슨의 전쟁 (Johnson’s War)'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반전 시위대가 가장 많이 외쳤던 구호는 “야, LBJ, 오늘은 아이를 몇 죽였냐 (Hey, hey LBJ, how many kids did you kill today?)"였다. LBJ는 존슨(Lyndon B. Johnson) 대통령 이름의 앞글자이다.
미국 국내 정치로 눈을 돌려 존슨이 입법에 성공한 진보 정책들을 따지면, 그는 더욱 분할 것이다. 인권, 보건, 복지, 교육 분야에서 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다음으로 사회보장 시스템을 보강한 대통령으로 꼽힌다. (존슨은 루스벨트 뉴딜의 청년 지원 프로그램 텍사스 디렉터로 활동하면서 그의 정치적 지원을 받았다.) 특히 존슨의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인권법(Civil Rights Act of 1964)은 인권 투쟁의 큰 승리였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베트남은 케네디 전쟁이라 해도 된다. 그는 미국인 대다수가 어디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는 남베트남을 공산 세력에 대한 자유 세계의 방어 의지를 상징하는 존재로 격상시켰다. 취임 5개월 뒤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케네디는 "세계가 미국의 힘을 믿고 따르도록 설득하는 문제에, 베트남이 바로 적격 장소로 보인다"(Now we have a problem in trying to make our power credible, and Vietnam looks like the place.)고 했다. 공산권에 본때를 보이기 좋은 케이스란 뜻이다. 일벌백계의 의도가 있었다.
하지만 케네디는 조심스러웠다. 자신의 자유주의 나라 만들기 독트린과 더불어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응오딘지엠에 대한 기대 때문에 군사 고문단에 의지했다. 보병의 철모보다는 특수 부대의 그린베레에 의존했다. 하지만 이들은 전세를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쿠데타와 군부 통치가 남베트남의 노멀이 되었다. 역사는 케네디의 바람과 반대 방향으로 진행됐다.
베트남 사태와 관련해 존슨은 선택의 폭이 좁았다. 인기 최고였던 매력적인 대통령이 암살당했다. 케네디 측근, 특히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 법무부 장관은 대놓고 존슨을 경멸했다. 대통령직을 훔쳤다는 악담도 했다. 정치 감각이 동물적이라는 존슨이 이 분위기를 모를 리 없었다. 1963년 11월 27일 존슨은 비극적으로 대통령을 잃고 충격과 애도에 잠긴 미국을 위로하고 안심시켜야 했다. 케네디를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라고 평한 존슨은 "케네디의 외교. 군사 정책을 온전히 계승하겠다"고 공언했다. 남베트남에서 서베를린까지 미국이 맺은 약속은 지키겠다(This Nation will keep its commitments from South Vietnam to West Berlin.)고도 했다.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성 장관, 딘 러스크 국무성 장관, 맥조지 번디 같은 케네디 최측근들을 새 정부에 그대로 있게 했다. 존슨이 베트남 전쟁을 미국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들이다.
케네디의 베트남 정책은 가옥의 구조와 같았다. 먼저 두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하나는 미 군사고문단, 다른 하나는 남베트남 군대이다. 지붕은 미국의 원조. 바닥이 제일 중요한 요소였다. 반공, 자유주의 현대 국가 건설의 의지다. 1964년 이 집의 바닥은 갈라졌고, 기둥은 쓰러졌다. 당연히 지붕도 내려앉았다. 미국의 원조가 가시적 결실을 내지 못했다는 뜻이다. 존슨은 이 집을 다시 세우고 그리로 이주할 마음이 없었다.
새해 벽두부터 사이공은 워싱턴을 어둡게 했다. 베트남 정책의 기본적 변화를 촉구하는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개입을 향해 내달리도록 존슨을 밀었다. 베트남은 미국을 숨가쁘게 했다. 1월 29일, 2달 전 응오딘지엠 정권을 무너뜨리고 구성된 군사 정부를 다시 쓰러뜨린 쿠데타가 발생했다. 애초 군사반란에 관여했던 응우옌칸 장군이 앞장섰다.
존슨 정부가 결정적 실수를 했다. 맥나마라는 응우옌칸의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워싱턴은 선택이 없다고 판단했다. 반 응오딘지엠 쿠데타 때처럼 일단 정국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응우옌칸을 새로운 리더로 인정하고 사태를 종결시키려 했다. 이를 위해 맥나마라는 새로운 쿠데타 세력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나중에 그의 남베트남을 향한 '네 탓이요'가 장황하다.
“남베트남에는 민족 통합의 전통이 전혀 없었다. 종교적 적대감, 정치적 파벌주의, 부패한 경찰, 그리고 무엇보다도 북쪽의 이웃 나라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게릴라 반란이 확산되고 있었다. (South Vietnam lacked any tradition of national unity. It was besieged by religious animosities, political factionalism, corrupt police, and, not least, a growing guerrilla insurgency supported by its northern neighbor.)”
존슨 정부는 베트남 군부에 반란 매뉴얼을 만들어 준 것과 같다. 군사 쿠데타는 가장 싼 값의 정국 변화 시도이다. 한 무리의 병력과 더불어, 탱크나 장갑차 또는 한 두 대의 공군기를 동원해 세를 과시한다. 주요 정부 건물과 언론사를 점거하고, 더 효율적 전쟁 수행을 위해 무능하고 타락한 정부를 무너뜨릴 수밖에 없었노라고 반란의 이유를 밝힌다. 전쟁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쿠데타는 불가피했다는 대의명분을 미국이 거부하기는 어렵다. 이 정도로 조건이 갖춰졌다고 판단한 장교들은 잠재적 반란자가 될 수있다. 대통령, 수상 등 그에게 버거운 직함을 붙들고 있던 응우옌칸은 정권을 잡은 뒤 1년 만에 군부 반란으로 출국 조치 된다. 원숭이들은 본 그대로 한다는 말도 있다.
존슨은 육두문자를 써서 남베트남 군부의 쿠데타 중독을 질타했다. "젠장. 이 쿠데타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는 데 진짜 지쳤어. (God damn it. I’m sick and tired of this coup shit that keeps coming back all the time.)” 하지만 군부 내 큰 충돌과 민간 피해만 피하면 미국은 달리 선택이 없다는 가정은 성립됐다. 쿠데타가 상징하는 정치 불안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해방전선과의 싸움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1964년 남베트남 병력에 의한 작전 수가 늘고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는 공식 보고는 늘어났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과 공간이 적에게 넘어갔다. 존슨은 3월 초 상황 파악을 위해 맥나마라를 베트남에 보냈다. 통계학을 이용한 상황 분석의 천재라는 맥나마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했다. (그는 하버드대 비지니스 스쿨 교수였고 포드 자동차 회사 사장을 지냈다.)
도시 밖 농촌지역의 40%가 민족해방전선의 통제 또는 절대적 영향을 받고 있었다. 43개 성(省) 중 22개에서는 민족해방전선의 세력이 50% 이상이라고 했다. 사이공의 지시는 성으로 내려가지도 못하고, 내려간다고 해도 무시된다. 지역 방위를 위해 조직된 민병대는 지급된 무기를 내던지기 일쑤였다.
문제의 핵심은 미국의 정책이 아니다. 남베트남을 통치력과 군사력을 보강하는 지원 정책은 근본적으로 옳다. 문제는 남베트남군의 약한 전쟁 수행 의지였다. 수만 미군 고문단이 어쩔 수 없는 결정적 약점이었다. 맥나마라 보고는 존슨을 우울하게 했다.
“a. 남베트남군과 준군사조직의 탈영률, 특히 후자의 탈영률이 높고 증가하고 있다. b. 민족해방 전선이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신병을 모집하는 동안 (남베트남군에는) 병역 기피가 심각하다. c. 마을의 안보를 책임지는 민병대와 자위대의 사기가 저하되고 있다.” (“a. The ARVN and paramilitary desertion rates, and particularly the latter, are high and increasing. b. Draft dodging is high while the Viet Cong are recruiting energetically and effectively. c. The morale of the hamlet militia and of the Self Defense Corps, on which the security of the hamlets depends, is poor and falling.”)
전의가 땅에 떨어진 이유는 정치였다. "현재 상황의 가장 큰 약점은 (응우옌)칸 정부의 불확실한 생존 가능성이다. (The greatest weakness in the present situation is the uncertain viability of the Khanh government.)”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바버라 터크먼(Barbara Tuchman)은 모든 쿠데타의 첫번째 목적은 정통성의 옷을 걸치는 것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To put on the garment of legitimacy is the first aim of every coup.”) 칸은 정통성을 얻지 못하고 벌거벗은 채로 서 있는 모습이었다.존슨이 남베트남에 극적인 변화를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1964년 11월 대선에서 이겨 케네디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일이 더 중요했다. 큰 변화 없이 봄여름이 지나갔다. 그러다 1964년 8월, 올 것이 왔다. 울고 싶었던 아이가 따귀를 맞고 울음을 터뜨렸다. 통킹만 사건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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