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참전 60돌]② 한국 참전한 이유

미국은 함께 싸워줄 연합군이 절실했고

한국은 미국의 인정과 지원이 필요했다

박정희, 5.16에 격분한 미국 무마 의도

전쟁을 기회로 상승 발판 만들려는 욕심

2025년은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50주년, 한국군이 참전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재미 역사학자인 이길주 시민기자가 [베트남 참전 60돌]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이 기자는 1975년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이민해 대학에서 미국역사를 전공했습니다. 럿거스 뉴저지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뉴욕시립대 등을 거쳐 현재 뉴저지의 버겐 커뮤니티 칼리지 역사학 교수로 있습니다. 또한 뉴욕/뉴저지를 중심으로 우리말 ‘역사 배움터’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이길주 시민기자는 자신의 전공 분야인 미국의 정신사에서 베트남 전쟁의 뿌리를 찾아보겠다는 뜻을 전해 왔습니다. 이번 시리즈는 14개 주제로 나누어 주 2회 정도로 게재될 예정입니다. 필요와 사정에 따라 변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편집자 알림]

 

1961년 1월 20일 취임 선서를 하는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 이어진 취임사에는 그는 “우리는 자유를 지키고 키워나가기 위해 어떤 대가라도 치를 것이며, 어떤 짐도 질 것이며, 어떠한 어려움에도 맞서 우방을 지지하고 어떤 적에게도 저항하겠다”고 선언했다. 베트남을 포함해 냉전의 투쟁 공간을 극대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Public Domain)
1961년 1월 20일 취임 선서를 하는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 이어진 취임사에는 그는 “우리는 자유를 지키고 키워나가기 위해 어떤 대가라도 치를 것이며, 어떤 짐도 질 것이며, 어떠한 어려움에도 맞서 우방을 지지하고 어떤 적에게도 저항하겠다”고 선언했다. 베트남을 포함해 냉전의 투쟁 공간을 극대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Public Domain)

1961년 출범한 케네디 정부와 그 뒤를 이은 린든 존슨 정부는 전임 아이젠하워 도미노 이론을 일부 수정했다. 이름을 붙이자면 주화파(主和派) 논리라 할 수 있다. 인도차이나가 공산화되면 주변 나라들이 쓰러지는 도미노처럼 연이어 공산화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위험은 대륙 공산 세력과 화친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케네디와 존슨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냈고 흔히 베트남 전쟁의 설계자 불렸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의 1964년 경고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하노이의 지원 또는 조종을 받는 민족해방전선이 성공해 남베트남이 붕괴하면 인도차이나의 국가들은 공산화 되거나, 아니면 압력을 느껴 공산 세력과 협상을 벌일 것으로 보았다. 이들은 친미 노선에서 벗어날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공산주의 위협은 바다를 건넌다.

“필리핀마저도 흔들리게 될 것이고, 서쪽으로는 인도, 남쪽으로는 호주와 뉴질랜드, 북쪽과 동쪽으로는 대만, 한국, 일본에 대한 위협이 크게 증가할 것이다.(Even the Philippines would become shaky, and the threat to India to the west, Australia and New Zealand to the south, and Taiwan, Korea, and Japan to the north and east would be greatly increased.)” 속된 표현으로 미국에 우호적인 나라들도 공산권을 향해 '알아서 긴다'는 말이다. 이를 막기 위해 미국은 베트남으로 갔고, 한국은 기꺼이 따라갔다.

 

존 케네디와 린든 존슨의 국방성 장관을 지낸 로버트 맥나마라가 베트남 전쟁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다. 맥나마라는 베트남 전쟁을 민족 해방 투쟁으로 인정하지 않고 국제 공산당 팽창주의의 전초기지로 보았다. 따라서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했다. (Library of Congress)
존 케네디와 린든 존슨의 국방성 장관을 지낸 로버트 맥나마라가 베트남 전쟁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다. 맥나마라는 베트남 전쟁을 민족 해방 투쟁으로 인정하지 않고 국제 공산당 팽창주의의 전초기지로 보았다. 따라서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했다. (Library of Congress)

베트남에서 미국의 전략적 계산과 한국의 분단 현실은 일치화됐다. 요즘 유행어로 '싱크로율 100%'라 할 수 있다. 군가 '청룡은 간다'가 정확하게 정리한다.

삼천만의 자랑인 대한 해병대
얼룩무늬 번개되어 원수를 친다
자유 월남 짓밟는 붉은 무리들
청룡이 가는 곳에 어찌 맞서랴
온 세계의 곳곳에 평화 심고자
조국의 명예 걸고 청룡은 간다

어느새 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이 한국의 원수가 됐고, 이들을 무찌르는 일이 세계 평화와 조국의 명예를 지키는 길이 되었다. 이렇게 청룡은 베트남으로 갔다. 1966년 투입된 백마부대의 노래는 역사적 배경이 더욱 심호하다. 이 군가는 백마부대를 '자유의 십자군, 정의의 십자군, 평화의 십자군'으로 정의한다. 천년 전 십자군이 과연 그런 존재였나는 여기서 논외로 한다.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 병사들이 화기를 정비하고 있다.((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 병사들이 화기를 정비하고 있다.((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어쨌든 한국이 베트남으로 간 이유는 '자유, 정의, 평화'가 전부는 아니었다. 냉전 사고와 전략의 토대를 벗어난 목표가 있었다. 한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에는 실존적 위협에 대한 대응 외의 실리적 동기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들을 A.B.C.D.E.로 정리한다.

Approval: 인정받기다.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다. 이는 단순한 정통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케네디는 자유주의 나라 건설(liberal nation building)을 위한 지원을 약소국들에 약속했다. “인권이 서서히 말살되는 것을 그대로 좌시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집단적 궁핍의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투쟁하는 빈민과 촌락민들에게 아무리 많은 시일이 걸리더라도 그들이 자조자립(自助自立)할 수 있도록 최선의 지원을 다하겠다”고 했다. 가난한 나라들이 공산주의에 빠져 들지 않도록 미국적 가치인 풍요와 자유를 대안으로 제시한다는 뜻이었다. 군사 쿠데타로 들어선 권위, 압제적 정부는 이런 케네디 정부의 역린을 건드렸다. 한국의 쿠데타 소식을 접한 케네디가 “절망적 상황(hopeless situation)”이라며 실망감을 토로한 이유이다.

 

1961년 5.16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소장의 모습. 약속국들에게 빈곤을 극복한 자유 사회 건설을 위해 미국은 도움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한 케네디 정부의 눈에 이 광경은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는 케네디 정부의 역린을 건드렸다고 할 수 있다. (Public Domain)
1961년 5.16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소장의 모습. 약속국들에게 빈곤을 극복한 자유 사회 건설을 위해 미국은 도움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한 케네디 정부의 눈에 이 광경은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는 케네디 정부의 역린을 건드렸다고 할 수 있다. (Public Domain)

케네디 암살 후 들어선 존슨 정부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은 미국에 힘이 아니라, 짐이 되는 나라였다. 박정희는 이 현실을 바꾸기 원했다. 베트남 전쟁이 그 기회를 제공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은 같이 싸워줄 전통적 연합군이 없었다. 아무리 우겨도 호찌민을 히틀러로 보는 나라는 많지 않았다. 박정희가 이 틈새를 보았다. 미국의 주요 동맹들이 몰라라 하는 전쟁이었다. 체면이 깎기고 다급해진 미국에 군사적 도움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군은 미군보다 더 잘 싸운다는 인정을 받기 원했다. 베트남으로 향하는 병사들이 외친 노랫말처럼 귀신 잡던 기백을 총칼에 담아 월남의 하늘 아래 메아리치게 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이 전의가 한국군과 관련된 베트남 양민 학살 논쟁을 불러왔다.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은 강한 군대라는 이미지 만들기에 적극적이었다. 태권도로 훈련된 한국군을 “베트콩”들이 겁을 내고 피한다는 메시지가 담겨있는 청룡부대 대원들의 백병전 훈련 모습 (Warfare History Network)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은 강한 군대라는 이미지 만들기에 적극적이었다. 태권도로 훈련된 한국군을 “베트콩”들이 겁을 내고 피한다는 메시지가 담겨있는 청룡부대 대원들의 백병전 훈련 모습 (Warfare History Network)

Block: 한국이 필히 저지해야 할 사안이 있었다. 한국군 감축과 주한 미군의 부분 철수론이다. 60년대 들어 미당국자들은 60만 한국군이 지나치게 비대하다는 진단을 내놓았다. 워싱턴은 5만 6천에 가까운 주한 미국의 숫자도 비현실적으로 보았다. 한국군과 주한미국의 병력 규모는 북한의 제2남침 가능성을 상정해 유지해 왔다. 미국은 북한이 다시 전면전을 벌일 의지, 능력, 가능성을 하향 조정하면서, 한국국의 감군과 미군 1개 사단 철수 기능성을 검토했다. 필요 없이 큰 군대를 유지해 미국의 지원을 받아내려 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박정희는 반발했다. 미국의 소위 군사력 현실화 논의가 북의 남침 의지를 부추긴다고 믿었다. 한국전쟁 직전 한반도를 미국의 아시아 방어선 밖으로 밀어낸 애치슨 라인을 떠올렸을 것이다.

Combat: 한국은 베트남 전장에서 한국군이 전투 경험을 쌓으면 북한에 더욱 위협적 존재가 된다고 판단했다. 전쟁 경험이란 총론에서는 맞지만, 구체적으로는 빗나간 기대였다. 한반도와 베트남은 다르다. 적은 양민들과 뒤섞여 노출을 최대한 줄인 채 숨어서 싸우는 게릴라였다. 속전속결이 기본 전략인 북한과 비교할 수 없다. 써먹기 어려운 기술을 습득하려는 노력에 비할 수 있다. 대규모 적에 대한 전면전 성격의 소탕 작전이 없지 않았지만, 베트남 전쟁에서는 소규모 탐색섬멸(search and destroy)작전이 주된 전술이었다. 양민은 적과 내통한다는 전제가 때로 지상 작전에 잔혹성을 더했다. 비정규전에서는 비상식적 대응의 폭이 늘어난다. 또 베트남에서는 막강한 공군력이 하늘을 장악했다. 융단폭격, 네이팜(소이탄), 고엽제가 동원됐다. 베트남의 한국군이 배워 활용할 수 있는 차원의 전쟁 수행 방식이 아니었다.

 

“싸우며 건설하자”고 쓰고 외쳤다. 한국은 베트남 전장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군사적 방위력 강화도 꾀했지만, 경제 건설을 위한 외화 획득의 기회 확보에도 적극적이었다. 참전 병사들과 한국 노무자들이 국내로 보내는 송금액은 한국 경제 개발의 “디딤돌”이 되었다는 주장은 쉽게 만난다. (정부기록 사진집)
“싸우며 건설하자”고 쓰고 외쳤다. 한국은 베트남 전장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군사적 방위력 강화도 꾀했지만, 경제 건설을 위한 외화 획득의 기회 확보에도 적극적이었다. 참전 병사들과 한국 노무자들이 국내로 보내는 송금액은 한국 경제 개발의 “디딤돌”이 되었다는 주장은 쉽게 만난다. (정부기록 사진집)

Development: 전쟁이 개발의 기회로 부상했다. 60년대 말 박정희는 “싸우며 건설하자”는 구호를 창안했다. 군사력을 키워 북한의 “남침 야욕”에 맞서면서, 동시에 경제도 건설하자는 국가 건설의 방향 제시였다. 이 구호는 베트남 전쟁과도 맞아떨어졌다. 베트남 전쟁은 국방력 강화의 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매력적인 돈벌이 기회였다. 전투 수당도 있었고, 전사자에게 지급되는 보상도 있었다. 파괴와 건설이 같이 진행되는 기이한 전장에는 민간 노무자들이 파견되어 외화를 벌어들였다. 언론 매체들은 군인과 노무자들의 송금액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했다며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 불렀다. 모든 물품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남베트남은 수출 시장으로서도 매력적이었다. 수만의 한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만큼, 한국 기업에 수출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없지 않았다. 베트남은 초기 단계인 한국 수출 산업의 시장 역할을 톡톡히 했다. 종합해서 베트남 전쟁은 여러 차원에서 말그대로 “특수(特需)”의 현장이었다.

Elevation: 위치 상승이다. 60년대 초까지 대한민국은 원조의 밑 빠진 독 취급을 받았다. 독설가로 유명한 존슨 백악관의 안보 보좌관 로버트 코머(Rober Komer)는 한국을 불안정한 미국의 의붓자식(unstable US stepchild)이라고까지 했다. “걸식 근성(mendicant mentality)”이 있는 나라라는 손가락질도 받았다. 이런 한국이 베트남 전쟁을 통해 신분 상승을 했다.

 

1966년 10월 서울을 방문한 린든 존슨 대통령 환영식장 모습.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불안정한 의붓자식”으로 보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을 아시아 자유세계의 선봉으로 치켜세웠다. (Lyndon B. Johnson Presidential Library)
1966년 10월 서울을 방문한 린든 존슨 대통령 환영식장 모습.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불안정한 의붓자식”으로 보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을 아시아 자유세계의 선봉으로 치켜세웠다. (Lyndon B. Johnson Presidential Library)

1966년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의 수는 5만으로 늘어났다. 그해 10월 존슨은 한국을 방문했다. 퇴임을 앞둔 아이젠하워의 1960년 여름 한국 방문 뒤 처음 있는 미 대통령의 방한이었다. 11월 1일에 있었던 존슨-박정희 회담에 대한 공동성명은 달라진 한국의 위상을 담고 있다.

“존슨대통령은 월남에서의 투쟁을 위하여 한국이 중요한 기여를 한데 대하여 미국 국민들의 찬사를 표명하고, 또한 한국군이 싸움터에 있어서 용맹하고 그들이 윌남 국민의 복지를 향상하고 그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평화롭고 건설적인 노력에 있어서 능률적임을 찬양하였다”고 성명은 밝혔다. 또한 한국이 “아시아 자유 세계국의 선봉”에 서있다며 이는 “도처에서 자유인의 존경과 찬사를 받게 한 탁월한 업적”이라고 했다. 이제 한국은 “절망적 상황”이 아니었다.

경직된 냉전 사고와 철저한 이익 계산이 만나 성사된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 참전은 백악관에서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5년 5월 존슨과 박정희의 만남 3개월 뒤 한국 국회는 전투 부대 파병을 의결했다. 9월 25일 ‘주월한국군 사령부’가 창설됐다. 베트남 전쟁은 이제 한국의 전쟁이 됐다.

10월에 맹호부대(수도사단), 11월에는 청룡부대(해병 제2 여단)가 남베트남에 도착했다. 베트남 참전 기간 8년 6개월 동안 전쟁을 경험한 한국군은 모두 32만여 명. 정부 공식 통계로 5000명이 목숨을 잃었고, 1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

물론 미국의 개입과 희생이 제일 컸다. 프랑스가 떠난 1954년부터는 남베트남을 지원했고, 1965년 전투 부대를 파병해 직접 전쟁에 뛰어들었다. 약 300만 미군이 전쟁을 경험했고 전사, 사망, 실종자 수는 약 5만 8000명. 부상자 수는 15만이다. 그 외 오스트레일리아를 포함해 소규모의 제 3국 피해도 있었다. 이런 희생에도 1975년 남베트남은 패망했다. 나라를 세운 지 20년 만에 지도에서 사라졌다. 인도차이나의 공산화와 더불어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의 친공 유화 물결은 일어나지 않았다. 베트남 공산 세력의 목표물은 사이공, 거기까지였다.

 

박정희는 베트남 전쟁 기간에 연두교서를 통해 참전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베트남은 중공(중국)등 공산국가들이 추구하는 침략과 음모라며 베트남은 한국의 안전과 자유에 직결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의 전략적 사고를 완전히 내면화했다.(대통령 연두교서 장면 유튜브 갈무리)
박정희는 베트남 전쟁 기간에 연두교서를 통해 참전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베트남은 중공(중국)등 공산국가들이 추구하는 침략과 음모라며 베트남은 한국의 안전과 자유에 직결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의 전략적 사고를 완전히 내면화했다.(대통령 연두교서 장면 유튜브 갈무리)

베트남 민족해방 전선과 이를 지원하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월맹), 또 후원국 중국(중공)은 한국에 총부리를 겨누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총구의 각도 문제가 아니었다. 1966년 1월 연두교서에서 박정희는 베트남 전쟁과 한국군 참전의 의미를 길게 설명했다. 앞서 언급한 미국의 베트남 사태 분석을 그대로 옮겼다.

“중공을 비롯한 공산국가들의 부단한 호전적 침략과 그 음모는 인접 자유 진영의 안전을 극도로 위협하고 있어, 실로 국제분쟁의 중심 무대는 바로 ‘아시아’로 옮겨져 있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월남에 대한 국제 공산주의의 침략 행위는 전체 자유 아시아의 안전과 평화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곧 우리의 안전과 자유에 직결되는 문제였던 것입니다…인가의 화재가 풍향 여하에 따라서는 언제든지 우리 집에도 비화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우리는 똑똑히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박정희는 “이러한 격동 속에서도 세계 각국은 대소·선후진의 구별 없이 제각기 실리외교 정책으로 자국의 국가이익 추구를 위해 앞을 다투어 경쟁해 왔던 것”이라 했다. 베트남 전쟁 또한 한국에는 실리를 취할 기회였다. 그는 미국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유세계를 지킨다는 명분을 지키면서, 동시에 실질적 이익을 챙기겠다는 생각을 품고 미국에 왔다. 미국을 진노케 했던 5.16 군사 쿠데타 4주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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