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참전 60돌] ⑫ 존슨의 전쟁 배경

박정희-존슨 백악관 회담 확전 의기투합

베트남전서 방향성 잃은 존슨 고민 덜어

직접 개입의 불안감을 한국이 줄여준 셈

이동원 외무, 참전 반대자들에 "돌대가리"

한국, 아시아판 홀로코스트 '기쁘게' 진입

1965년 3월 8일 베트남 다낭에 도착한 미 해병대. 이들은 더 이상 조언자가 아니었다. 민족해방전선 게릴라들을 상대로 직접 싸우기 위해서 왔다. 한국은 기꺼이 이 대열에 합류했다. 한국의 베트남 참전 8년 역사의 시작이었다. (Public Domain)
1965년 3월 8일 베트남 다낭에 도착한 미 해병대. 이들은 더 이상 조언자가 아니었다. 민족해방전선 게릴라들을 상대로 직접 싸우기 위해서 왔다. 한국은 기꺼이 이 대열에 합류했다. 한국의 베트남 참전 8년 역사의 시작이었다. (Public Domain)

1965년 5월 17일 오후 5시 15분 백악관. 존슨과 박정희가 만났다.

이 만남은 2인극으로 무대에 올려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관심과 흥미를 자극한다. 동시에 한국 근대사의 서글픈 단면도 보여준다. 공연 예술계 표현으로 페이소스가 대화 속에 느껴진다.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의 배경처럼 존슨과 박정희는 안개 낀 오벌 오피스에 앉아 있었다. 그 안개는 베트남의 불확실성과 혼돈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무진'을 '워싱턴'으로, '산'을 '명분'으로 바꾸어 읽어도 된다.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 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 같은 안개를 걷어 내자고 박정희와 존슨이 만났다.

1965년 봄 존슨은 베트남 전쟁에서 방향성을 잃었다. 한때 미국에는 도심의 분주함처럼 뚜렷한 목적지와 할 일이 있었다.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은 자유세계의 결단으로 잉태한 신생 국가이다. 이 나라가 자유, 평화, 번영의 기회를 보장받고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이 자유세계 전체를 지키는 일이라는 큰 명분이었다. 하지만 남베트남은 미국이 설정한 목표로부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자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존경의 대상이 되는 불교 승려의 '소신공양'을 유발할 정도로 사회는 혼란했다. 

미국이 주입하려 한 이상적 가치는 시간이 흐르면서 위선으로 들렸다. 공산 세력과 싸우라고 미국이 막대한 지원을 제공한 군부는 제사보다 젯밥에 매달렸다. 제사상 앞에서 멱살을 잡고 싸웠다. 실리가 지배하는 국제 관계에서 "사이공이 곧 마지노선이다"란 미국의 호소는 설득력이 없었다.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북베트남, 더 북쪽으로 중국, 또 소련이 다 볼 수 있도록 사이공의 자유세계 만국기를 휘날리자는 미국의 호소에 호응이 없었던 이유이다. 다른 나라가 개입해 지켜줄 가치가 있는 나라로 보지 않았다. 미국이 지키고 있는 분단국가 한국의 불안한 호응을 불러오는 데 그쳤다. 

한국군 파병 조건도 신경이 쓰였다. 군대는 보내지만, 파병에 따른 경비 일체는 미국이 해결해야 했다. 비난을 불러 올 수 있는 조건이었다. 보상이 동기인 외국 군대가 독립과 자주가 목표인 게릴라와 싸우는 구도는 불편했다. 목숨 걸고 돈을 벌겠다는 ‘용병(mercenaries)'으로 보일 수 있는 병사들과 죽는 게 사는 것이라 믿는 ‘선교사(missionaries)’ 같은 민족 해방 투쟁 전사들의 싸움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역사는 전자가 후자를 이기지 못한다고 기록한다.

 

1965년 5월 17일. 5.16 군사 쿠데타 4주년쯤에 존슨(오른쪽)과 박정희(왼쪽)는 백악관에서 정상 회담을 했다. 1961년 케네디와의 만남과 다르게 양측이 통역만 배석시켰다. 가운데는 한국 측 통역 조상호(왼쪽에서 두 번째)와 미국 측 통역 폴 크레인(오른쪽에서 두 번째). (LBJ Library)
1965년 5월 17일. 5.16 군사 쿠데타 4주년쯤에 존슨(오른쪽)과 박정희(왼쪽)는 백악관에서 정상 회담을 했다. 1961년 케네디와의 만남과 다르게 양측이 통역만 배석시켰다. 가운데는 한국 측 통역 조상호(왼쪽에서 두 번째)와 미국 측 통역 폴 크레인(오른쪽에서 두 번째). (LBJ Library)

박정희도 불안하고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곳간 열쇠를 움켜쥐고 있는 시어머니(미국)의 시집살이를 견디고 있었다. 살림을 잘하라는 호통과 잔소리에 지치면서도 한국은 곳간만 활짝 열리면 산다는 기대에 시집살이를 견디고 있었다. 이제까지 준 원조는 다 어디다 썼냐는 질타가 되풀이됐다.

한국은 잔머리를 굴린다는 소리도 들었다. 군대를 비대하게 해서 생활비(군사 원조)를 더 타 내려 한다고도 했고, 비상식적 환율을 적용해 별 가치가 없는 '원'을 비싸게 '달러'와 교환토록 강요한다고 했다. 일종의 '환율 조작'이다. 미국의 마지막 외침이 한국의 불안감을 부추겼다. 시어머니는 나만 보고 있지 말고, 잘 사는 형님 일본에 손을 내밀라 했다. 형처럼 되라고 했다. 이 상황에서 선택이 많지 않은 며느리 박정희에게 카드 한 장이 남아 있었다. "어머니 목숨 걸고 잘 모실게요." 이게 박정희의 베트남이었다. 다른 형제들(우방)은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백악관 오벌 오피스 중앙 한쪽에는 세계 최강인 미국, 그 연장선에서 자유세계의 지도자로 불리는 린든 존슨이 흔들의자에 앉았다. 옆 소파에 박정희가 앉았다. 몇 달 전까지도 세계 무대, 더욱이 베트남 같은 복잡미묘한 국제 분쟁에 뛰어들 준비가 되지 않은 나라라는 소리를 들었던 한국의 지도자다. 

존슨은 키가 193센티, 박정희보다 최소한 30센티가 컸다. 존슨은 큰 키 때문에 자연히 대화 상대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 보는 자세가 된다. 그는 자기 뜻을 호소하거나 거래를 제한할 때 상대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버릇이 있었다. 소위 '킬 (kill)'의 순간이 오면 상대와 코가 맞닿을 정도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많은 경우 존슨의 몸짓에 압도당하거나 불편해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려 한다. 대통령의 코끝을 바라보다 그의 요구를 들어주는 이들이 많았다. 이를 주변에서 '존슨식 사람 다루기 (Johnson Treatment)'라 불렀다.

 

존슨(오른쪽)은 상대를 설득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몸과 얼굴을 가까이 대고 계속해서 자기 뜻을 호소하는 스타일이었다. 1963년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2세 목사(왼쪽)를 상대로 그의 유명한 '존슨 사람 다루기(Johnson Treatment)'를 해 보이고 있다. (LBJ Library)
존슨(오른쪽)은 상대를 설득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몸과 얼굴을 가까이 대고 계속해서 자기 뜻을 호소하는 스타일이었다. 1963년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2세 목사(왼쪽)를 상대로 그의 유명한 '존슨식 사람 다루기(Johnson Treatment)'를 해 보이고 있다. (LBJ Library)

존슨과 박정희는 결이 다른 인물이었다. 존슨은 의회 정치에 달인이었다. 법안 통과를 위해 주거니 받거니에 뛰어난 딜 메이커였다. 그는 상대가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감추고 싶어하는지를 정확히 꿰뚫었다. 약점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전자는 부추겨주고, 후자는 덮어주면 거래는 어렵지 않게 성사됐다.

베트남 전쟁은 달랐다. 호찌민과는 거래가 되지 않았다. 박정희를 만나기 한 달 전, 존슨은 호찌민이 절대 거부할 수 없을 거라며 연설을 통해 거래 조건을 밝혔다. 남베트남의 민족 해방 투쟁을 포기하면 북베트남의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대겠다는 제안을 했다. 메콩강을 '젖과 꿀'이 흐르는 물줄기로 바꿔주겠다고 했다. 북베트남의 호응이 있었다. 모든 군사 행동부터 먼저 중단하라고 했다.

딜이 안 되기는 남베트남도 다르지 않았다. 필요한 것 다 줄 테니 쿠데타는 하지 말라는 미국의 요청을 남베트남 군부는 미국의 내정 간섭이라며 저항했고, 엄청난 물자와 인력을 투입하는 와중에 반미 강정이 일어나는 아이러니에 존슨의 좌절감은 깊어졌다.

반면 박정희는 평생 군인이다. 일제가 제국주의 통치의 영원무궁을 위해 세운 사범학교를 나왔으니, 식민지 엘리트로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삶을 접고 황군이 되었다. 해방공간에서는 혁명성이 강한 탈 제국주의 테제였던 사회주의에 경도된 시절이 있었지만, 호찌민의 경우처럼 초지일관 삶을 추동하는 신념으로 뿌리내리지 못했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근대화, 자주국방, 수출입국(輸出立國) 같은 구호와 휘호의 언어를 통치 수단으로 이용했다. 하지만 자립을 위해서 미국의 지원에 의지해야 하는 아이러니 또한 한국의 현실이었다.

1965년 5월 17일 존슨-박정희 회담은 오벌 오피스를 가득 채운 불안과 혼돈의 안개 속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결과는 '무진행'과 같다. 전쟁은 현실이다. 안개 속이 아니다. 어떤 쪽이 더 많이 부수고 죽였냐로 삶과 죽음이 정해지는 검투사의 아레나이다. 한국과 미국은 이 목적 달성을 위해 동맹관계를 맺었다. 2만 명 한국의 전투 병력 투입에 대한 상호 이해가 성립됐다. 기독교 찬송가의 표현대로 베트남을 '의심의 안개 걷히고 근심의 구름 없는 곳'으로 변화시키자며 의기투합했다. 박정희는 더는 '눈치' 볼 필요가 없는 시야가 환한 전쟁이라고 했다. 베트남은 이제 안개 낀 '무진'처럼 '그럭저럭' 살아가는(싸우는) 곳이 아니었다.

이후 8년 동안 한국은 베트남에서 싸운다. 남베트남에 자유로운 나라를 만들고 지킨다는 안개 속 같은 명분 따위에 매달리 필요가 없었다. 남베트남이 스스로 도울 수 있도록 돕는다는 자기 절제 또는 전략적 족쇄를 풀어 던졌다. "태극 깃발 가는 곳 적이야 다를 소냐/ 무찌르고 싸워 이겨 그 이름을 떨치리라/ 무찌르고 싸워 이겨 그 이름을 떨치리라." 이 군가의 파병 목적에 걸맞게 첫 한국은 베트남으로 가는 첫 전투 부대를 '맹호'로 이름 짓는다. 이보다 더 확실한 전의는 베트남에 없었고 미국의 불안을 덜어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베트남으로 가는 존슨과 박정희의 어깨동무가 이루어지는 오벌 오피스 회담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존슨의 인물 탐구가 필요하다. 베트남이 '존슨의 전쟁 (Johnson's War)이 되는 과정에 그의 성격과 성품이 큰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먼저, 존슨의 성격에는 상대를 압도해서 자기 뜻을 관철해야 하는 욕구가 있다. 이 과정에서 존슨은 사회 문제로 지적되는 '불링 (bullying, 괴롭힘)을 했다는 분석이 있다. 존슨 연구에 심리학이 많이 이용되는 이유이다.

존슨의 사람 다루기에는 성기 노출도 있었다. 한번은 그가 국가 안보 보좌관 맥조지 번디를 급히 불렀다. 서둘러 달려간 그는 화장실 문을 열어 놓고 변기에 앉아 볼일을 보는 존슨을 발견했다. 기겁한 번디는 자신이 실례를 범했다고 생각해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실수가 아니고 존슨의 의도였다. 변기에 앉은 존슨은 아랫도리가 훤히 보이는 상태에서 질문이 있다며 자신의 국가 안보 보좌관을 다시 불렀다. 모름지기 그 상태에서 최고 비밀의 군사, 안보 관련 대화가 이어졌을 것이다. 나중에 번디는 당혹감에 그 자리에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존슨은 발가벗은 몸으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수영도 자주 했다. 그리고 나체로 같이 수영하자며 풀로 들어오라 했다. 전설적인 복음 전도자 빌리 그래함도 존슨의 나체 수영에 초대됐었다. 물론 그는 응하지 않았다. (존슨은 케네디와 달리 여성들에게 나체로 같이 수영하자는 제안을 하지 않아 선을 지켰다는 평을 듣는다.) 존슨의 성기 노출은 공중에서도 있었다.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 원'으로 이동하던 중 기자와 인터뷰했다. 기내가 더웠다. 존슨은 옷을 벗고 알몸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존슨에게 별명이 생겼다. 'Jumbo,' 대물(大物')이란 뜻인데 존슨이 아주 좋아했다.

 

존슨과 케네디(오른쪽)는 정 반대의 인물이다. 젊음, 지성, 품위를 상징한 케네디에 대한 존슨의 zjf플렉스는 존슨에게 계산된 저속함을 자신의 이미지에 담으려 했다. (LBJ Library)
존슨과 케네디(오른쪽)는 정 반대의 인물이다. 젊음, 지성, 품위를 상징한 케네디에 대한 존슨의 zjf플렉스는 존슨에게 계산된 저속함을 자신의 이미지에 담으려 했다. (LBJ Library)

이게 존슨의 똑똑한 사람 길들이기 전략이었다. 존슨은 케네디와 그의 ‘빛나는 최고 인재들 (the best and the brightest)’에 대해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케네디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가 있다. 젊음(youth), 지성(intellect), 품위(grace), 외모(handsome)다. 이중 케네디는 품위에 집착했다. 그는 작가 헤밍웨이가 한 말을 즐겨 인용했다. "용기는 압박 속에서도 우아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Courage is grace under pressure.)" 존슨은 자신이 그런 매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느꼈고, 따라서 케네디와 그의 이너서클에 대해 깊은 열등감과 반감을 갖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역발상을 했다. 케네디가 가까이 두었던 매력적인 지성과 두뇌를 빌리면서 케네디의 품위가 아니라 계산된 저속함(vulgarity)으로 자신의 지배력을 과시했다. 일찍이 그는 불링의 효과를 터득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불링은 과장된 '마초 (macho, 수컷의 성질)' 이미지를 요구했다. 케네디가 택한 인재들을 그대로 유임시킨 존슨은 이제 누가 보스인지 하체를 노출하고 변기에 앉아 보고를 받는 것으로 주지시켰다. 지성 위에 마초가 있다는 메시지였다.

존슨의 하체 노출 버릇과 베트남 전쟁, 이 전쟁에서 만들어진 한미 동맹의 상관관계는 무엇인가?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교외로 나가 피서를 즐길 때 역시 수박이 인기다. 가족과 친구들이 둘러앉아 수박이 나오길 기다린다. 이때 자리를 만든 좌장이 수박을 한 손에 들고 주먹으로 때려 수박을 부순다. 수박 격파를 이마로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수박은 이렇게 먹어야 제맛이다"라고 허세를 떤다. 인터넷을 보니 재미로 '마빡으로 수박 깨기' 도전도 나온다. 옆에 칼도 버젓이 있는데 왜 주먹 아니면 이마로 깬 수박이 더 맛있고 분위기를 살린다고 하는 것일까?

주먹 또는 이마로 깬 수박을 먹어본 일이 있다. 큼지막한 수박 조각에 코를 박고 먹자니 단물이 얼굴에 다 묻었다. 또 알차게 과육 부분을 먹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뭔가 남성적인 행동 같았고, 배가 부른 기분마저 들었다.

 

대통령 집무실 오벌 오피스에서 애견 Yuki의 울음소리를 재연하는 존슨. 때로 대통령의 품위와 거리가 있던 그의 행동은 케네디가 상징한 세련됨에 대한 반감의 노출이라는 분석이 있다.  (LBJ Library)
대통령 집무실 오벌 오피스에서 애견 Yuki의 울음소리를 재연하는 존슨. 때로 대통령의 품위와 거리가 있던 그의 행동은 케네디가 상징한 세련됨에 대한 반감의 노출이라는 분석이 있다.  (LBJ Library)

1965년 린든 존슨은 수박 (베트남 전쟁)을 주먹 또 아마로 깨서 먹기 시작했다. 옆에 칼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칼로 수박을 먹기 좋고, 보기 좋게 뾰족한 삼각형으로 자르려면 어느 정도 정교함이 필요하고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기다려야 한다. 아삭아삭 먹고 나면 코를 박고 먹었을 때보다 포만감이 떨어진다.

케네디는 베트남 전쟁 수행에 있어서, 칼로 수박 자르기 같은 정상적 나라 만들기에 매달렸다. 존슨도 처음에는 전임자의 전략을 수용하려 했다. 전시인 것은 분명하지만, 전면전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싸움과 나라 세우기를 병행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공산 세력의 도전은 산발적 게릴라 투쟁이다. 지원과 조언으로 남베트남을 강하게 만들어 게릴라들을 퇴치토록 한다는 이상, 이성적 전략은 1964년 말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쿠데타가 노멀인 나라는 정상이 아니다.

존슨은 그의 천재 길들이기에서 보듯, 성기 노출 같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선 제압 전략으로 방향을 바꿨다. 일종의 '광인 이론 (madman theory)'이다. 무슨 짓은 못할까 하는 의문의 아우라를 풍기면 상식적인 상대는 광인과의 협상을 빨리 끝내려 든다. 어떤 폭탄이 하늘에서 얼마나 떨어질지 모르는 맹폭 전략은 존슨의 수영복 없이 수영장에 뛰어드는 행동과 비슷했다. 주변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도록 했다. 문제는 남베트남에서 그가 상대를 잘 못 봤다는 사실이다.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북베트남은 놀라 물러나는 대신 땅속으로 더 깊이 파고 숨었다. 이를 악물고 적은 인원으로 빠르게 공격해 충격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표적을 기다렸다. (베트남이 통일된 지금 그 지하 요새들은 관광자원으로 활용된다.) 

 

상대를 모든 면에서 압도해야 만족하는 존슨의 성격은 베트남 전쟁에서도 나타났다.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자 진상도 파악이 안 됐지만, 북베트남이 미국에 이유 없이 도발했다면서 압도적 군사력으로 보복했다. 당시 응징에 나섰던 항공모함과 폭격기.(Publid Domain)
상대를 모든 면에서 압도해야 만족하는 존슨의 성격은 베트남 전쟁에서도 나타났다.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자 진상도 파악이 안 됐지만, 북베트남이 미국에 이유 없이 도발했다면서 압도적 군사력으로 보복했다. 당시 응징에 나섰던 항공모함과 폭격기.(Publid Domain)

공폭으로 나타난 미국의 광인 같은 행동에 진작 그랬어야 한다며 손뼉 친 나라가 한국이다. 베트남 전의 민족 해방 투쟁성을 발견한 다른 나라들은 신중했지만, 한국은 달랐다. "잘 살아 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하고 노래하기 위해 전쟁이 필요한 나라였다.

정부 문서를 주요 제1 자료로 의존하는 역사학도들은 '스모킹 건'을 찾기 위해 서고를 전전한다. 미국의 경우처럼 국가 문서의 공개가 법적으로 제도화된 경우, 많은 분량의 자료들이 연구자를 기다린다. 당연히 최고 '1급 비밀 (Top Secret)' 문서에 먼저 눈이 간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는 '3급 비밀 (Confidential)' 문서가 소중한 정보를 제공할 때가 있다. 

1965년 3월 중순 이동원 외무부 장관이 워싱턴을 방문했다. 5월로 예정된 박정희와 존슨의 정상회담 준비를 위해서였다. 15일 직위상 그의 상대인 러스크 국무장관을 만났다. 모두 아홉 페이지인 이동원과 러스크의 대화록은 3급 비밀로 분류됐다. 이미 알려진 내용이지만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 문서는 비밀 등급 수준과 관계없이 베트남 전쟁에 함께 뛰어든 한미 관계 연구에 필요한 1차 자료이다. 한국이 무슨 생각을 하고 그렇게 베트남 참전에 적극적이었는지 말해준다.

대화는 외교적 수사의 교환으로 시작됐다. 이동원은 미국이 과거 한국을 도와준 사실에 대해 감사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한데, 시간이 많지 않으니 장황한 감사 표시는 생략하겠다고 했다. 미국에 대한 고마움을 에둘러한 표현이다. 이동원의 간접어법이 먹혔는지 러스크도 한국에 대한 감사 표시로 화답했다. 추가 파병으로 남베트남에서 보여준 한국의 연대감이 자유세계의 위치를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건설 지원을 위한 한국의 비전투 비둘기 부대는 3월 16일 베트남에 도착했다.)

 

존슨에게 가는 이동원에 관한 보고서. 치밀한 국가안보보좌관 맥조지 번디가 여러곳을 수정했다. 나이가 38세인 이동원은 옥스포드대학 첫 한국인 정치학 박사라고 언급한 이 보고서에 번디는 그가 한일 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적었다.(필자 제공)
존슨에게 가는 이동원에 관한 보고서. 치밀한 국가안보보좌관 맥조지 번디가 여러곳을 수정했다. 나이가 38세인 이동원은 옥스포드대학 첫 한국인 정치학 박사라고 언급한 이 보고서에 번디는 그가 한일 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적었다.(필자 제공)

이어지는 대화에서 믿기 어려운 표현이 대한민국 외무장관에 입에서 나왔다. 미국 국무장관에게 이동원이 한국의 베트남 참전을 반대하는 국회의원을 '돌대가리들(stoneheads)'이라 불렀다. 문제를 일으키는 이런 부류의 반대자들은 국회에 늘 있었다고 했다.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는 행정부에 대한 입법부 내의 반대 입장을 조롱하는 발언으로 국격을 떨어뜨렸다. 삼권 분립의 의미를 무시하는 말이 한국인 최초 영국 옥스퍼드 대학 정치 박사란 긴 수식어로 소개되던 이동원의 입에서 나왔다. 미국에 잘 보이려는 의도가 읽혔다. 

베트남 추가 파병안은 1965년 1월 26일 표결에 부쳐져 재석의원 125명이 투표해 찬성 106표, 반대 11표, 기권 8표로 가결되었다. 제6대 국회의원 수는 175명. 50명이 표결에 불참했다. 

 

절대적 대세였던 통킹만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졌던 웨인 모스 상원의원이 한 베트남 반전 시위에서 연설하고 있다. 그는 특히 공격 대상을 불태우는 네이팜 소이탄 사용을 비난했다. 그는 '돌대가리'가 아니라 선각자였다는 평을 받는다. (Wayne Morse Center for Law and Politics, University of Oregon)
절대적 대세였던 통킹만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졌던 웨인 모스 상원의원이 한 베트남 반전 시위에서 연설하고 있다. 그는 특히 공격 대상을 불태우는 네이팜 소이탄 사용을 비난했다. 그는 '돌대가리'가 아니라 선각자였다는 평을 받는다. (Wayne Morse Center for Law and Politics, University of Oregon)

1964년 8월 의회를 통과한 통킹만 결의안에 두 상원 의원이 반대표를 던졌었다. 오리건주 출신 웨인 모스 (Wayne Morse, 1900~1974) 의원과 알래스카주 출신 어니스트 그리닝 (Ernest Gruening, 1887-1974) 의원이었다. 존슨과 같은 민주당 소속이었지만, 역사는 이들을 배신자 또는 '돌대가리'로 부르지 않는다. 많은 베트남 전쟁 연구자들은 이들을 선각자로 인정한다. 베트남 전쟁을 불법으로 규정한 모스 의원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아시아에서 홀로코스트를 일으키기 전에 법을 존중하는 나라로 돌아가야 함을 미국인들이 서둘러 주장해야 한다(It is urgent that the American people insist that their country return to a respect for law before we create a holocaust in Asia.)"고 외쳤다. 이 정도면 예언자적 인물이다.

한국이 처음으로 정규 부대를 외국의 전쟁터로 파병하는 그때 외무장관은 미국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모아 발언했다. 참전 기회에 대한 감사의 뜻까지 전했다. "박 대통령과 한국 정부는 한마음으로 (베트남)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기회를 얻게 되어 기쁘다(President Park and the Korean Government as a whole were happy to have the opportunity of being of some assistance in preserving peace in that part of the world.)"고 말했다. 

한국은 이렇게 '아시아의 홀로코스트 (유대인 대학살)'라 할 수 있는 베트남 폭력의 장으로 '기쁘게'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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