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참전 60돌]③ 박정희 방미의 이유
자유주의 나라 건설에 매달린 케네디 외교
쿠데타가 불편했지만, 현실 인정한 케네디
박정희 통해 한국을 리셋할 수 있다 판단
베트남 이용해 미국에 잘보이려 한 박정희
계속된 민정이양 압력에 파병 서둘러 제안
2025년은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50돌, 한국군이 참전한 지 60돌이 되는 해입니다.
재미 역사학자 이길주 시민기자가 [베트남 참전 60돌]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이 기자는 1975년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이민해 대학에서 미국역사를 전공했습니다. 럿거스 뉴저지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뉴욕시립대 등을 거쳐 현재 뉴저지의 버겐 커뮤니티 칼리지 역사학 교수로 있습니다. 또한 뉴욕/뉴저지를 중심으로 우리말 ‘역사 배움터’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이길주 시민기자는 자신의 전공 분야인 미국의 정신사에서 베트남 전쟁의 뿌리를 찾아보겠다는 뜻을 전해 왔습니다. 이번 시리즈는 14개 주제로 나누어 주 2회 정도로 게재될 예정입니다. 필요와 사정에 따라 변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편집자 알림]
1965년 5월 17일. 존슨과 박정희가 백악관에서 만났다. 역사적 사건이란 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다. 야심과 자존심, 성취욕, 그리고 스스로가 부여한 역사의 소명 의식. 이 둘의 공통점이었다.
존슨은 경력에 맞지 않고, 어색하고 불편한 부통령 자리를 지키다 케네디 암살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1937년 텍사스 출신 연방하원에 당선돼 6선을 했다. 1949년 상원에 진출했고 1953년 소수당인 민주당의 상원 대표, 1955년에는 다수당 대표가 됐다. 별명이 '상원의 마스터(Master of the Senate)'일 정도로 입법 과정과 일정을 관리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가 반대하면 법안은 말 그대로 상원 창고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존슨은 대통령이 되겠다는 야심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남부 출신이어서, 상대적으로 진보성이 강한 북부의 경계를 받았다. 1960년 대선에서 전형적인 북부 메사추세츠 출신으로 상원에서 자신을 지도자로 따르던 케네디의 부통령 후보가 됐다. 다음 기회를 노린 것이다. 그러다 1963년 11월 케네디 피살로 황망 중에 대통령이 됐다. 1964년 대선에서 공화당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를 상대로 압승을 거둬 케네디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자신의 시대가 왔다고 확신하고 외교적 성과에 매달렸다.
박정희는 고작 3500명 정도의 병사를 동원해 60만 군대를 관리하는 정부를 뒤엎었다. 반공, 민생, 민정 이양을 내세워 쿠데타 세력을 압박할 수도 있는 미국의 불편함과 의구심을 일단 잠재웠다. 박정희는 쿠데타 세력 내의 이견과 갈등을 누르고, 이를 정치 세력으로 전환한 뒤 군복을 벗고 대통령이 됐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해 미국의 원조로 살아가는 현실을 바꾸겠다는 개혁가의 이미지도 구축했다.
박정희와 존슨은 같은 아웃사이더였다. 케네디 측근들은 존슨의 정치 감각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근본은 텍사스주의 변방임을 잊지 않고 또 주지시켰다. 아이비리그 교육과 세련된 감각, 높은 문화 수준으로 상징되는 케네디 이너써클은 존슨을 끼워주지 않았다. 박정희는 한국 사회 권력 구조의 중심에 서지 못했다. 그는 밖에서 안에 대해 강한 비판 의식을 키워왔다. 1961년 5월 16일 그는 하룻밤에 아웃사이더에서 인사이더가 됐다. 1963년 11월 22일 존슨도 하룻밤에 인사이더가 된 경우다. 존슨과 박정희는 또 다른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존슨은 텍사스의 남부 멕시코계가 사는 한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1년간 아이들을 가르쳤다. 박정희도 문경에서 3년간 교사 생활을 했다. 시골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앞날을 고민한 공통점이 있다.
이 둘의 만남은 한국 근대사의 흐름을 바꾼다. 한국이 나라 밖 전쟁에 뛰어들었다는 사실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두 지도자는 베트남 전쟁을 한국의 발전 에너지로 보았다. 병법에 '처험구안(處險求安)'이 있다. 위험 속으로 들어가 안전 또는 살길을 찾는다는 뜻이다. 존슨과 박정희는 결국 수백만이 목숨을 잃은 깊은 트라우마의 전장을 국가 건설, 경제 발전, 또 안보 보장의 현장으로 보았다. 숨을 고르고 이 역사의 의미를 되돌아 보아야 한다.
존슨-박정희의 회담으로 가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다. 꼭 필요한 우회이다. 한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은 존슨과 박정희의 작품이었다. 이 둘은 1965년 5월 백악관에서 작품 제작에 들어가 그 해 말에 완성했다. 하지만 한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관계가 있다. 존 에프 케네디와 박정희의 관계다. 박정희에게 베트남 전쟁 참전을 한국의 운명과 연계시키도록 의도하지 않은 자극을 준 인물이 케네디다. 따라서 존슨-박정희 관계를 분석하기에 앞서 케네디 박정희와의 만남을 돌아보려 한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비극(American Tragedy)'이라 불린다. 1961년 11월 14일. 백악관에서 한국이 이 비극의 동반자가 되는 역사의 시작점인 날이다. 6개월 전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자신의 나라를 먹여 살리고, 지켜주지만, 쿠데타에 대해 부정적인 미국의 대통령 케네디와 마주했다. 이 둘의 대화는 얼음 언 연못에서 스케이트 타는 느낌이었다. 불안감이 없지 않았다. 둘은 흔한 말로 친구먹을 캐릭터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케네디는 어떤 캐릭터인가? 케네디는 liberal cold warrior라고 불린다. 선량한 폭력배 같은 모순어법으로 들린다. 그는 자유사상에 뿌리를 둔 냉전주의자이다. 박정희가 4년 뒤 외교, 군사적 밀월을 즐기게 될 존슨과는 다른 전략적 사고를 했다. 케네디가 대통령 취임사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싸움터도 피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자유가 총구에서 나온다고 믿지 않았다. 총구는 자유를 지킬 수는 있지만, 자유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자유는 사람들과 그들이 형성하는 공동체가 정치적 참여, 경제적 발전, 사회적 합의를 통해 창출된다고 믿었다.
더욱이 자유는 미국 같은 강한 나라가 약소국에 잉여 농산물 보내듯 안겨줄 수 없었다. 자유는 만들어 가는 것이기도 했다. “존경하는 세계 시민 여러분, 미국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인가 묻지 말고, 인간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함께 할 수 있는가를 물어보십시오.” 이 케네디의 언급은 미국만 바라보지 말라는 뜻이다.
그는 또 생각과 처지가 달라도 함께 평화를 추구할 수 있다고 했다. 초기 데탕트 주의자라 해도 된다. 그의 취임사만큼이나 훌륭한 연설로 평가받는 1963년 아메리칸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천명했다. “…우리의 차이점을 외면하지 말고, 우리의 공통된 이익과 그 차이점을 해결할 방법에도 주의를 기울입시다. 지금 당장 차이점을 없앨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다양성을 존중하며 안전한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공통점은 우리 모두가 이 작은 지구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 같은 공기를 마시고, 아이들의 미래를 소중히 여깁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언젠가 세상을 떠납니다.” 영어로도 읽어 볼 가치가 있는 의미 깊은 말이다.
”…let us not be blind to our differences--but let us also direct attention to our common interests and to the means by which those differences can be resolved. And if we cannot end now our differences, at least we can help make the world safe for diversity. For, in the final analysis, our most basic common link is that we all inhabit this small planet. We all breathe the same air. We all cherish our children's future. And we are all mortal.”
제2차 대전 이후 미국 대통령들의 평화를 위한 전략 구상을 한 단어로 정리해 본다. 해리 투르먼은 'Rollback'이다. 공산 세력의 도전에 맞닥뜨려 후퇴케 하는 대응책이다. 한국 전쟁이 대표적인 예다. 아이젠하워는 'MAD(Mutually Assured Destruction)'이다. 핵전쟁이 터지면, 너 죽고 나 죽을 것이니 알아서 자제토록 하자는 전략이었다.
미국의 횃불이 새로운 세대로 옮겨갔다고 했던 케네디의 전략은 'MAL(Mutually Assured Living)'라고 할 수 있다. 앞의 연설에서 말했듯, 찾으면 같이 살 수 있는 길이 보이고 열릴 것이라는 케네디의 희망이 담겼다. 캐치프레이즈에 능했던 그는 인간의 운명에 관한 어떤 문제도 사람의 능력을 초월하지 않는다(No problem of human destiny is beyond human beings.)고 했다.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공산주의자도 인간 공동체의 한 부분이니만큼 이 땅의 문제 해결을 위해 같이 대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군사 개입을 배제하는 정책이 아님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다. '의심할 여지가 없을 만큼 충분한 군비를 갖추고 있어야만' 무력 사용을 억제할 수 있지만, 동시에 '군비의 사찰과 통제를 위한 진지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공식화' 하자고 제안했다. '두려움 때문에 협상하지 않지만, 협상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유명한 표현도 남겼다. 군대를 육성하고 무장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만, 군축을 논의하면서 신뢰를 쌓자는 제안으로 들린다. 더불어 케네디는 약한 나라들을 위한 다자 협력관계(multilateralism)을 제안했다. 유엔을 “우리의 마지막이자 최고의 희망”이라면서 "미국은 유엔이 신생국과 약소국의 방패 역할을 강화해 그 권한이 미치는 지역을 확대하도록 지원하겠다”고 했다.
일찍부터 대통령의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던 케네디는 60년대가 탈 제국주의 시대가 될 것으로 예측했다.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았던 민족이 독립하면 '탈 식민지화'이다. 하지만 독립 신생국이 되었다고 제국주의 유산이 사라지지 않는다. 민족 재건을 놓고 이념 갈등이 생긴다. 이 소위 '해방의 공간'에서 공산주의는 탈 제국주의의 빠른 해결 방식으로 매력을 발산한다. 한국은 물론 세게 곳곳에서 일어난 일이다. 탈 제국주의 이념으로서 사회주의는 민족주의와 융합했다. 시너지 효과는 가히 파괴적이었다.
There is much to encourage hope in Latin America; the forces of liberal democracy are still strong and are working to create the framework of economic advance, the steady elimination of poverty and want, on which the preservation of freedom will ultimately depend.
케네디가 만든 또 하나 유명한 캐치프레이즈가 있다. 취임사에서 그는 "만일 자유 사회에서 궁핍한 다수를 돕지 못하면 부유한 소수 또한 지킬 수 없을 것이다(If a free society cannot help the many who are poor, it cannot save the few who are rich.)"라ㅗ 했다. 케네디에게 압정은 자유를 빼앗고, 가난은 희망을 꺾는 '적'이었다.
강함으로 지탱되는 미국의 선함으로 세계평화를 이루겠다고 한 케네디 앞에 미국이 받쳐주고 지탱해 준 합법 정부를, 군대를 동원해 무너뜨린 박정희가 앉아 있었다. 둘은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나? 질문을 바꾸면 무엇을 주고 받았나가 된다. 비밀문서였던 대화록은 오래 전에 공개됐다. 문제는 내용 자체가 아니라 이 대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다.
박정희가 케네디를 상대로 펜스를 넘기는 홈런을 날리고 왔다는 평가도 쉽게 발견된다. '케네디도 반한 박정희'란 책도 있다. 5.16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이해를 얻었고, 지속적인 경제, 군사 원조도 계속하겠다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이후 미국은 5.16을 공식적으로 '혁명(Revolution)'으로 규정했다는 주장도 있다. 케네디도 생각하지 못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먼저 거론함으로써 미국의 감동을 얻어내고, 박정희가 아시아 태평양 지역 전체의 흐름을 꿰뚫는 전략적 사고의 소유자란 인상을 심어주었다는 해석도 있다. 강골 군인 이미지가 트레이드 마크인 그가 워싱턴에서 유머 감각을 발휘했다는 논평도 있다.
이건 정확한 상황 판단이 아니다. 첫째, 박정희는 이미 반란에 성공한 장수로 군사 정부에 대한 미국의 재가를 받기 위해 앉아 있지 않았다. 탱크를 몰고 권좌에 올랐지만, 그는 한 나라의 통치자였다. 한국과 같은 분단 대치 상황에서, 더욱이 미군이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기 위해 전진 배치된 상태에서 민간 정부가 아니라는 이유에서 통치 구조를 뒤집을 가능성은 상상조차 어렵다. 미국은 그렇게 무모한 한반도 정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
쿠데타 직후부터 미국은 참으로 발 빠르게 박정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명제를 놓고 정책 수립에 들어갔다. 처음 한 달 동안은 쿠데타 세력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은 민정 회복의 중요성을 앵무새처럼 외쳤다. 보스의 나라로 자존심이 상했음도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한 달 후 케네디 정부는 현 상황을 미국의 국익을 위해 활용할 방도를 찾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자유주의에 입각한 나라 만들기에 박정희가 성공하면 한국은 케네디가 목말라 했던 외교적 성공 사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성공적 나라 만들기에 베트남 개입은 들어있지 않았다.
케네디-박정희 대화록으로 들어가기 전에 흥미로운 연구 하나를 소개한다. 케네디에게 박정희는 독특한 방문객이었다. 쿠데타 직후 박정희의 선글라스를 쓰고 대중에 나타났다. 냉정하고 강한 이미지가 연출됐다. 그는 케네디와 만나서도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다. 외교 프로토콜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에 격무와 과로에 눈이 늘 충혈되어 있어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과연 붉은 눈동자 때문이었을까?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심리학과 연구진은 검은 선글라스를 착용하는지 사람들의 의식을 분석했다. 선글라스가 생활의 필수인 학생 52명이 연구 대상으로 참가했다. 이 연구의 결론이 케네디와 마주한 박정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시각은 정보 수집을 위해 필요하다. 눈짓은 특정 상황에서 무엇이 관심사인지 보여준다. 감정 전달에도 사용된다. 눈은 정보 교환의 종합적 메커니즘이란 뜻이다. 눈치가 빠른 이들은 상대방의 눈길로 그가 어떤 존재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한다. 그에 대한 나의 반응을 정하는 데 필요한 정보가 눈길을 통해 수집된다. 연구진은 선글라스에 집착하는 실험 대상에게서 이들은 정보 수집은 원하지만, 정보 제공은 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음을 발견했다. 정보를 얻지만 주기는 싫은 성품이다. 연구진은 선글라스를 통해 상대방에게 노출되었다는 느낌에서 해방되고, 동시에 상황을 주도할 힘이 나에게 있다는 자신감도 얻는다고 분석했다. (De-evolving human eyes: The effect of eye camouflage on human attention, Cognition, Vol. 225) 힘의 불균형 관계에서 선글라스는 자신을 약하게 생각하는 쪽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뜻이다.
상상력을 동원하면 케네디의 목적은 박정희를 꿰뚫어 보는 일이었다. 그도 권위주의적 제3세계 리더들과 유사한가를 알기 원했다. 민족주의를 내세워 철권통치를 하는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북베트남의 호찌민, 그리고 미국의 골칫거리로 등장한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박정희도 이 대열에 들어갈 인물인가? 케네디에게 관찰 대상이 된 박정희는 그에게 일방적으로 노출되지 않으려 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의 선글라스는 케네디의 정밀 검사에 대한 보호막이었을 지도 모른다.
미국에게 박정희는 아직은 불원불근(不遠不近)이었다. 그의 통치를 무조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도, 반대로 압력을 가할 수도 없는 중간 지점에 서 있었다. 한국에 5만 5000명 이상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런 규모의 군대가 인접한 중국,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다. 논리적으로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될 가능성이 있는 발화지점에 미군이 있었다.
주한 미국 사령관을 지낸 육군 참모 총장 조지 덱커 (George Decker) 장군이 쿠데타 한 달 뒤 케네디 앞에서 불쾌감과 걱정을 토해냈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불길하고 어려운 문제'는 '하급 장교 무리(a bunch of junior officers)'가 국가를 장악하고 있는 사실이라고 했다. 미국은 더 상위의 고위급 군 지도자들에게 국가의 통제권을 이양토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의 통치는 유지하되 쿠데타 세력은 밀어내자는 제안이다.
이때 케네디는 한국 상황에 대한 논의를 일단락 짓는다. “미국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the United States had no alternative except to deal with the people in power.)” 케네디는 한국의 통치구조 변화를 위해 미국이 개입해야 한다는 제안에 뚜렷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이 대화가 전하듯 한국은 비정상 상태였으며 이로써 파생될 비상사태의 위험도 없지 않았다. 이를 미국이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불안하기는 해도 박정희는 통치 메커니즘을 구축해 놓았다. 미국의 강한 입김은 한국인의 민족주의를 자극할 것이 자명했다. 민족주의는 미국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반미를 외칠 정당성을 부여하는 성질이 있었다.
쿠데타 후 6개월, 어느 정도 흙먼지가 내려앉았다고 판단한 케네디는 한반도 현실을 더 뚜렷이 파악하기 위해 박정희를 만났다. 민정 이양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결과로 보면 케네디 행정부는 박정희의 쿠데타를 한국을 미국의 비전에 맞게 요즘 표현으로 리셋(reset)하는 절호의 기회로 보았다. 박정희는 케네디의 자유주의 나라 만들기 논리가 한국에 끼칠 영향을 생각했다. 복잡하지 않다. 1. 미국 원조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2. 군대를 줄이며 3. 권위적 통치를 종식하고 4. 민정을 회복하면 된다. 또 있다. 5. 일본관의 관계를 개선해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짐을 덜어달라는 요구였다. 따지고 보면 리셋을 넘어 리빌드(rebuild)에 가까웠다.
박정희가 비장의 카드를 내놓았다. 한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이었다. 너무 서둘렀고 판을 잘못 읽었다. 케네디는 베트남에 미군을 보내 전선에 투입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아직도 미국의 군사 고문들을 통해 남베트남의 전투력을 향상시키고, 동시에 미국의 풍요를 이용해 자유와 희망이 있는 사회 건설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케네디는 한국군을 베트남으로 끌어들이지 않았다. 박정희가 귀국하고 케네디 정부는 한국에 대한 개혁의 요구를 늦추지 않았다. 민정이양을 하라는 압력도 계속됐다.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가 암살당했다. 케네디가 남베트남을 재건해 북베트남의 호찌민에 대적하는 지도자가 되길 희망했던 응오딘지엠은 열흘 전에 잔혹하게 암살당했다. 남베트남에서 케네디의 자유주의 나라 건설의 희망은 진흙탕에 곤두박질친다. 이 혼란이 박정희에게는 미국이 아닌 한국이 주도하는 리셋과 리빌드의 기회를 준다. 혼란 속에서 그는 기회를 찾았다.
참고로, 박정희가 케네디와 회담하기 위해 13일 오후 워싱턴 내셔널 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를 제일 먼저 영접한 이가 린든 비 존슨 부통령이었다. 그때는 상상할 수 없었겠지만, 4년 뒤 존슨과 박정희는 마주 앉아 한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구체화한다. 존슨도 비극 속에서 기회를 얻은 경우로 박정희와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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