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참전 60돌]④ 케네디와 박정희
응오딘지엠은 해결책 없는 케네디의 짐
박정희, 게릴라전 능력 내세워 파병 제의
케네디는 베트남에 외국 군대 투입 꺼려
지엠 암살로 자유주의 건설의 한계 노출
존슨, 베트남을 강대강 소모전 구도 전환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케네디 암살로 린든 존슨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베트남 분쟁은 본격적인 미국 전쟁, 한국 전쟁, 달러 전쟁, 그리고 소모 전쟁으로 전환된다. 미국과 한국이 전투 부대를 파병한 1965년부터 군대가 거의 철수를 마친 1974년까지 미군 300만 명, 한국군 30만 명, 그리고 총 1760억 달러(현재 가치로 약 1조 3000억 원)의 전비가 들어갔다.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폭격에 사용한 폭탄의 3배가량을 베트남 공폭에 사용한 셈이다. 땅을 뺏고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일단 부시고 죽이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전쟁이 소모전이다.
베트남 전쟁을 국제 전쟁으로 변환시키고 폭력성을 대폭 확대한 존슨의 전임자 케네디는 시종 베트남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상과 현실 가운데서 갈 길을 잃었다. 베트남에 자유주의 반공, 현대 국가를 세우겠다는 그의 정책 비전의 전제 조건은 안보 보장이다.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민족해방전선은 이 전략의 취약성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정부에 대한 불신과 안전이 확보되지 않으면 나라 만들기는 공염불이다. 필요에 따라 전력 낭비가 적은 소규모 작전을 통해 남베트남군을 괴롭힐 수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정부의 행정력과 통제력을 무력화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 상황에서 미국은 전투에 직접 개입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공산 세력을 압도할 능력 발휘를 하지 못하는 남베트남 정부만 바라보고 있을 수도 없었다. 어떤 학자들은 케네디가 1964년 대선까지 어정쩡하지만, 불가불 군사고문단(military advisors)을 중심으로 현상 유지를 하면서, 1964년 재선에 성공하면 남베트남을 포기할 생각이었다고 추측한다. 정답을 알 수는 없지만, 케네디는 끝까지 남베트남의 변화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1961년 5월 처음 파견된 군사고문단은 600명. 이 숫자는 1962년 말에 1만 1000명, 1963년 말에 1만 6000명으로 늘어났다. 빠르게 증가한 군사 고문단 규모는 케네디의 희망과 동시에 딜레마를 읽게 한다. 이들은 남베트남 군대로부터 몇 발짝 뒤에 떨어져, 남베트남이 자신을 도울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명분을 갖고 총이 날아오는 전장에서 비전투요원으로 서 있었다.
이 딜레마를 종식한 인물이 린든 존슨과 박정희이다. 이들은 베트남 분쟁에서 자유주의 나라건설의 이상을 뒤로 빼고, 전쟁 승리를 목표하자고 의기투합했다. 취임 때부터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가 공통의 선으로 하나된 '진보를 향한 새로운 동맹 관계 (a new alliance for progress)'의 이상을 붙들고 있던 케네디의 전략은 이들에게 순진하게 보였을 수도 있다. 동생(남베트남)이 잘되려면 형(미국)이 나서서 이를 방해하는 적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단순 논리를 폈다. 싸움에는 모든 수단을 동원할 수 있다는 기본으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존슨과 박정희의 악수는 뜨거웠지만, 이들의 동맹은 성공하지 못했다. 1975 남베트남은 패망한다.
1954년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떠난 이후, 미국은 마치 앙탈하는 아이 같은 남베트남을 등에 업고 10년을 버텼다. 미국의 발목을 잡은 근본 원인은 미국 스스로가 만들어 낸 이율배반의 논리였다. 암살되기 5개월 전인 1963년 6월 당시 미국인들이 최고로 존경하고 신뢰했던 월터 크롱카이트(Walter Cronkite) CBS 방송 뉴스 진행자와 인터뷰하면서, 케네디는 보기 드물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미국이 돕지만, 결국 베트남 전쟁은 남베트남인의 전쟁이라 했다. 승패는 그들의 몫이었다. ("In the final analysis, it is their war. They are the ones who have to win it or lose it.")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베트남은 질 수 없는 전쟁이었고, 패배를 막아야 하는 책임은 이미 미국에 떠넘겨졌다. 돕기만 한다는 개념의 경계와 한계도 희미해졌다. 도리 없이 전시 국가를 이끌 지도력이 없어도 치켜세우고, 떠받들고, 원조해 준 대표적 인물이 응오딘지엠이다.
아이젠하워부터 미국은 응오딘지엠에게 올인했다. 그를 자유주의 나라 만들기의 적임자로 포장했다. 한때 가톨릭 사제의 길을 가려 했던 신앙인이었다. 덕분에 국가 재정으로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을 금욕주의자란 인상도 구축했다. (남베트남의 고질적인 고위층의 부정부패는 지엠의 가족이 저질렀다. 그의 남동생 응오딘뉴가 대표적인 예다.) 응오딘지엠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통치 시절 투옥될 정도로 민족주의자의 전력도 탄탄했다. 베트남 민족주의를 토대로 힘을 합치자는 호찌민의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한 그의 반공주의자 자격은 의심할 바가 없었다. 또 그에게는 행정 경험도 있었다. 게다가 응오딘지엠은 미국에서 보낸 세월이 적지 않았다. 요즘 유행어로 국제적 감각도 있었다.
케네디도 응오딘지엠에게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불안했다. 1961년 10월 그의 취임 6주년을 맞아 케네디가 보낸 서신에는 13세기 후반 원나라를 다스렸던 초대 황제 쿠빌라이 칸까지 등장한다. “우리는 공산주의의 공포에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한 국가의 고통과 영광을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쿠빌라이 칸의 무리를 두 번이나 무찔렀던 국민에게 그보다 더 나은 것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 그리고 모든 자유인은 여러분이 보여준 모범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 극적인 수사 뒤에서 케네디는 고민했다. 미국은 응오딘지엠이 공산 세력과의 싸움에서 이겨 자유와 풍요가 있는 나라를 만들 수 있는 인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케네디는 신뢰했던 군사 문제 정책 보좌관 테일러 맥스웰 (Taylor Maxwell) 장군을 1961년 10월 베트남으로 보냈다. 공산권의 다각도 도전에 직면한 자유세계의 리더 미국은 유연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케네디의 신뢰를 얻은 인물이다. 케네디는 소문난 매파 월트 로스토우(Walt Rostow) 안보담당 특별 부보좌관을 테일러와 동행시켰다. 개발도상국들이 자본주의 틀 안에서 경제의 단계적 변화를 추구하면 종국에는 풍요로운 소비 사회가 도래한다는 개발 모델을 제시한 경제학자이다.
테일러의 제안은 케네디의 베트남 딜레마를 해결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심화시켰다 미국이 군사적으로 더 깊이 개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1. 공산세력에 대한 정보 수집 능력을 강화하고
2. 북베트남에 의한 침투를 더욱 강력히 저지할 것
3. 남베트남의 비정규 병력과, 작전 지역에 병력을 신속히 투입할 수 있는 공중 이동 수단을 증강할 것
4. 주로 후방 지원 역할을 할 6000-8000 규모의 미군 병력 파병으로 요약된다.
특별한 것은 없다. 전선에서 열세에 있는 쪽이 당장 취할 수 있는 상식선의 조치들이다.
이 뒤에 더 중요한 보고가 있었다. 공산 게릴라들이 노리는 남베트남 정부의 붕괴는 성공을 향해 진일보('well on the way to success')하고 있었다. 남베트남의 군사전략도 잘못이었지만 통치력 문제로 군대는 약하고 정치는 불안한 상황이라 지적했다. 이 상태에서 미국이 더 깊이 개입하면 두 개의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다. 미국의 군사 개입은 통증 완화제 같은 성격이 있다. 증상을 멈춘 상태에서 몸이 나아지면 좋지만, 고열 증상이 계속되면 투약해야 하는 양이 계속 늘어난다. 약을 중단하기는 불가능이다. 미국 파병이 효과가 없으면 당연히 더 큰 규모의 증파가 요구될 것이다. 끝에는 적의 심장 하노이, 또 이를 넘어 중국까지도 공격하자는 전략적 요구가 생겨난다. 한국 전쟁에서 진짜 적은 압록강 건너편에 있다고 주장했던 더글러스 맥아더의 확전 사고와 같다.
또 하나, 미군이 전쟁에 뛰어들면 아시아의 다른 분쟁, 대치 지역에서 공산 세력이 더욱 기세등등해질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테일러는 주로 후방 지원 업무를 담당하지만, 미군 파병을 피할 수 없다고 했다.
머지 않아 미국을 베트남의 수렁으로 깊이 빠져들어 가게 할 논리가 이때 등장한다. “다른 어떤 조치도 (베트남에서) 미국이 진지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베트남 국민과 정부,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다른 미국의 우방국과 동맹국들을 안심시킬 수 없을 것이다. (no other action would demonstrate U.S. seriousness of purpose and hence reassure the people and government of Vietnam and other U.S. friends and allies in Southeast Asia.)” 조직폭력배와 관련된 영화에 등장하는 대사와 같다. 두목은 어떤 경우에도 '쪽팔리면' 안된다.
케네디는 테일러 보고서를 받고 약 10일 후 박정희와 만났다. 이솝 우화에 ‘여우와 두루미’가 있다. 내용은 조금씩 달라도 담긴 메시지는 같다. 친한 사이인 여우가 두루미를 식사에 초대했다. 여우는 친절하게 둥근 접시에 담긴 음식을 내왔다. 부리가 긴 두루미라 접시의 음식을 먹기는 불가능이다. 여우가 자신을 골탕 먹이려 했다고 생각한 두루미는 여우를 집으로 초대해 호리병에 음식을 담아 내왔다. 두루미가 그랬던 것처럼 여우도 쫄쫄 굶어야 했다.
한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과 관련해서 케네디와 박정희가 주고받은 대화는 이 우화를 떠올리게 한다. 박정희는 백악관에서 아주 친절하게 최고의 음식을 내놓았다. 음식 이름은 ‘한국의 베트남 개입’이었다. 하지만 케네디는 입을 댈 수 없었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이 시점에서 위험하기까지 한 단순화된 냉전 사고의 반영이었다. 이를 케네디가 박정희에게 반하게 된 파격, 감동적 제안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들의 대화를 차분히 분석하면 외교 관계에서 피해야 하는 접근 방식을 일깨우는 교훈도 얻을 수 있다.
케네디에게 베트남 사태가 최대로 심각한 외교 사안이었다. 그래서 이날의 대화는 베트남에서부터 시작했다. 남베트남의 붕괴를 막아야 하는데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응오딘지엠의 군대로는 할 수 없음이 분명해 지고 있었다. 결국 미군이 개입해야 하지만, 불확실성이 많았다. “진정한 해결책은 베트남인들이 스스로 해결하고 해외의 도움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the real answer was for the Vietnamese to do for themselves and not rely heavily on help from abroad.)” 케네디는 박정희에게 혹시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있냐는 듯 물었다.
박정희는 외교적 수사를 섞어 대답을 시작했다. 초청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했고, 이 시점에서 미국의 최대 관심사였던 한일 관계 정상화에 대한 그의 의지도 밝혔다. 하기야 박정희는 도쿄를 거쳐 미국에 왔다. 한국은 세계 곳곳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한 미국의 희생을 인지하고 협력하길 원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한국은 미국의 짐을 덜어주어야 했다. 한국과 일본이 관계를 정상화해 결국 아시아에서 미국의 발길을 가볍게 해주는 일이고 자유세계를 더욱 강하게 하는 길이라 했다. 케네디의 의중을 정확하게 읽었다.
문제는 다음이다. 이어지는 베트남과 관련된 박정희의 발언은 성숙한 외교는 아니었다. 영화 장면에서처럼 "형님 맡겨만 주십시오"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다음이 원문인데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동남아시아, 특히 베트남과 관련하여, (박정희) 의장은 확고한 반공 국가로서 한국이 극동 지역의 안보에 기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북베트남에는 잘 훈련된 게릴라 부대가 있다. 한국에는 이러한 유형의 전쟁에 익숙한 잘 훈련된 백만 병력이 있다. 이들은 정규군에서 훈련을 받았고, 현재는 분리되어 있다. 미국의 승인과 지원을 받아 한국은 베트남에 자국 군대를 파견하거나 정규군이 필요하지 않을 경우 지원병을 모집할 수 있다. 이러한 조치는 자유 세계 국가들 사이에 행동의 통일성이 있음을 입증할 것이다. 출발 직전, (박의장은) 한국 고위 장교들과 이 문제를 논의했다. 모두 적극 환영했다. 그는 (케네디) 대통령이 군사 고문들에게 이 제안을 검토하고 결과를 보고하도록 지시할 것을 제안했다.
With regard to Southeast Asia, particularly Viet-Nam, the Chairman stated that, as a firm anti-Communist nation, Korea would do its best to contribute to the security of the Far East. North Viet-Nam had well-trained guerrilla forces. Korea had a million men well trained in this type of warfare. These men had been trained in the regular forces and were now separated. With U.S. approval and support, Korea could send to Viet-Nam its own troops or could recruit volunteers if regular troops were not desired. Such action would prove that there was unity of action among the nations of the Free World. Just before departure he had discussed this question with his senior ROK officers. All were enthusiastic. He suggested that the President ask his military advisers to study this offer and let him know the results.
메시지는 강했지만, 논리 전개에는 약점이 읽힌다. 위험한 사고도 노출했다. 첫째, 케네디의 새로운 전략적 사고를 정확히 읽지 못했다. 그는 이념으로 양분된 세계, 두 대립 세력의 지도 국가들이 엄청난 비용을 감당하면서 핵무기에 의존해 '불확실한 공포의 균형'을 유지하는 현 상태를 바꾸자고 제안한 바 있다. 박정희는 여기서 자유주의 세계가 결집해 공산 세력에 맞서자는 양극, 강 대 강 전략을 제시했다. 케네디도 국제 다자주의자이지만, 지역의 군사 동맹 또는 연합군을 우선 순위를 두지 않았다. 동서가 크게 붙어야 (베팅을 해야) 한국에 돌아올 혜택도 많다는 계산도 느껴진다.
둘째, 재래식 전력에 효율성에 대해 의문을 갖고 한국군과 주한 미군 감축 방안을 검토하고 있던 케네디에게 한국에 게릴라전에 투입될 수 있는 백만 대군이 준비되어 있다고 자랑을 한 모양새였다. 현재 60만 명도 비대한 병력이라 판단한 케네디 정부 앞에서 거기에 40만 명을 더했다.
셋째, 1961년 큰 규모의 북베트남 병력이 남으로 침투해 준동하고 있는 전황은 아니었다. 1959년 북베트남이 남부의 민족해방전선 지원을 결정하고 호찌민 루트를 통한 병사와 물자의 침투가 이루어졌지만, 베트남 사태에서 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이 투쟁의 주체였다. 마오쩌둥의 외침대로 게릴라 투쟁은 인민의 전쟁이다. 인민의 지원으로 지속되고, 인민의 마음과 생각을 잃어버리면 배(투쟁)는 성난 파도에 난파되어 침몰한다.
한국군은 산악지대, 해변, 강가를 통해 침투하는 북한의 무장간첩에 대한 대응 훈련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은 밀림에서 민간인의 틈에 섞이고, 그들의 지원을 받아 치고 빠졌다. 사이공과 같은 도시에서는 타격 능력 과시와 공포 유발을 목적으로 한 테러 전략을 구사하는 전혀 다른 형태의 도전이었다.
이 상황에서 박정희는 정규군이 껄끄러우면 지원병을 보낼 수 있다고 했다. 비록 패했지만, 디엔비엔푸에서 활약한 '외인부대(Légion étrangère)'를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베트남에 군대를 보낼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는지, 이미 군지휘관들이 열의를 보인다고 덧붙였다.
박정희는 이날 처음부터 너무 많은 카드를 내보였다. 외교에 세 개의 접근 방식이 있다. 공개(open), 미묘(subtle), 비밀(secret)을 말한다. 남베트남을 지키겠다는 미국의 의지에 대해서는 공개적 지지가 좋다. 하지만 한국이 미국에 협조하는 방식에 대해서는“여러 가능성을 고려할 수 있다” 정도가 적절했다. 만약, 파병의 가능성이 한미 사이의 테이블에 올려 졌다면 디테일은 비밀로 해야 한다. 참고로 존슨 정부에 들어와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 참전이 논의되면서 이와 관련된 문건은 많은 양이 최고 비밀(Top Secret)로 분류됐다.
오해가 없어야 한다. 케네디는 국제 사회의 베트남 개입을 반대하거나 거부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개입 방식이었다. 그래서 테일러와 로스토우를 남베트남에 보냈었다.
미국의 아킬레스건인 응오딘지엠은 남베트남 정부, 특히 군사 정책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도 마뜩잖아 했다. 엄청난 원조를 받으면서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런 응오딘지엠이 베트남 정부의 통제 밖에 있을 한국군을 수용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케내디와의 대화에서도 남베트남 정부의 입장은 언급되지 않았다. 전쟁 당사국 지도자가 전략 논의장 밖으로 밀려난 형국이다. 전쟁에 대한 중요 결정이 사이공이 아닌 워싱턴에서 이루어지는 이 비정상은 전쟁 막바지까지 이어졌다.
돌아보면 이승만 전 대통령(이하 존칭생략)도 그랬다. 프랑스가 디엔비엔푸에 요새를 세우고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주공화국 군대와 일전을 준비하고 있던 1954년 2월. 이승만은 아이젠하워 정부에 한국군 1개 사단을 프랑스를 도우려고 파병할 의사가 있음을 전했다. 미국과 프랑스는 놀라 손사래를 쳤다. 전략적으로 '한국=미국'의 등식이 존재하는데 한국군이 개입하면 미국이 뛰어든 것과 같다는 반론이 있었다. 프랑스가 한국군과 함께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한다면 베트남인들의 뿌리 깊은 민족주의를 자극해 호찌민의 혁명, 해방자 이미지는 강화된다. 프랑스는 더욱 고전할 것이 뚜렷했다.
박정희의 제안에 대한 케네디의 반응은 그가 암살 당할때까지 헤어 나오지 못하는 딜레마를 그대로 보여준다. 박정희의 파병 제안에 감사하고, 미 정부의 고위 관계자들이 이를 검토 연구할 것이라 전하면서, 베트남 전쟁과 관련해서 한국이 필리핀과 대화하는 것도 좋다고 했다. 박정의로서는 뜻밖이었을 것이다. 그는 베트남에서 미국과 한국이 파트너가 되길 바랐다. 그래야 제대로 된 투자다.
하지만 케네디는 아시안 국가들의 협력 또는 내지는 동맹을 원했다. 프랑스가 큰 희생을 치르고 깨달은대로 베트남 같은 상황에서 얼굴색이 하얀 서양인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음을 케네디는 알았다. ("The President speculated that it would probably be a good idea to talk also with the Filipinos. There was a limit, as the French found out, on what an occidental could do in a situation like this.") 케네디는 베트남에서 한국의 역할을 명확하게 배제하지 않았다. 하지만 베트남 전선에서 한미동맹은 그의 전략사고 안에 들어있지 않았다.
이 사실은 케네디-박정희 공동성명에도 드러난다. 양국은 베트남 사태를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 두 사람이 “태평양 지역에서 외부로부터의 무력 침략 위협에 대한 상호 방위 문제를 토의했다 (discussed the problem of mutual defense against the threat of external armed aggression in the Pacific area.)” 정도로 표현했다. 실제로 논의가 있었던 민감한 사안이었지만, 마치 아무 언급도 없었다는 듯 지나갔다. 민정 회복의 '엄숙한 약속 (solemn pledge)' 이행이 케네디 정부에는 더욱 절실했다. 군정에 의한 자유주의 나라 건설은 케네디에게 모순어법이었다.
미국이 한국의 베트남 파병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이유가 또 하나 있다. 국방성 장관 로버트 맥나마라가 박정희가 귀국한 뒤에도 서울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파병 제안을 냉정하게 잘랐다. 베트남에 주둔하는 한국군 유지 비용은 미국이 지불해야 하는데 차라리 베트남 사람들에게 직접 돈을 주고 일을 시키는 게 낫다 ("We would have to pay for this, and we might as well pay the Vietnamese to do the job themselves.")고 했다. 나중에 용병 시비를 불러오는 보상 필요성을 일찍 인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군 개입을 꺼리는 워싱턴의 정서를 반전시키는 동력은 상징적으로 표현해 죽음에서 나왔다.1963년 11월 응오딘지엠 (2일), 케네디는 (22일) 암살당했다. 하지만 그 전 베트남 전쟁과 관련해서 또 하나 죽음이 역사의 변화를 불러왔다. 1963년 6월 베트남의 불교 승려 틱꽝득이 분신했다. 세수 66세로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였다. 그는 가톨릭교도들을 우대하고 불교도를 차별한 소위 갈라치기의 명수 응오딘지엠 정권에 항의하기 위해 소신공양을 했다. 그의 몸이 타는 광경을 담은 사진은 세계로 퍼져나갔다.
슬프고 충격적인 일이 역사적 비극이 되는데 필요한 요소가 사후 대응이다. 응오딘지엠의 반응은 충격적이었다. “오늘 이른 아침, 진실을 숨기고 정부의 선의에 의심을 심어주려는 극단주의자들의 선전.선동에 중독된 일부 사람들로 인해 부당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나를 매우 슬프게 했습니다." 틱꽝득이 선전·선동가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과 같다는 주장이었다. 미혼인 응오딘지엠을 위해 영부인 역할을 해온 동생의 부인 쩐레쑤언은 이 분신 사건을 외국에서 수입해 온 휴발류를 낭비한 바비큐라 했다.
반대로 케네디는 역사상 그 어떤 뉴스 영상도 이 사진 만큼 전 세계에 큰 감정을 불러일으킨 일이 없다 (“No news picture in history has generated so much emotion around the world as that one”)고 반응한 것으로 전해진다. 절대 잊히지 않을 사건이란 말이다. 그가 옳았다. '응오딘지엠=자유주의 나라 만들기'는 버려야 할 꿈이었다.
5개월 후인 11월 1일 사이공은 군사 쿠데타로 다시 소란해졌다. 반란군 세력에 체포되어 끌려간 응오딘지엠과 그의 비밀경찰 조직의 수장 동생 응오딘뉴 (바비큐 운운했던 쩐레쑤언의 남편)는 다음날 살해됐다. 미국이 이 쿠데타에 어느 정도 관여했나는 아직도 논쟁거리이다. 미국이 응오딘지엠을 몰아내도 좋다는 메시지를 군부에 전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해석이 가능한 신호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박정희의 백악관 방문 2주 뒤인 1961년 11월 30일. 케네디는 '몽구스 작전(Operation Mongoose)'을 재가했다. 그에게 눈엣가시와 같은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의 제거를 위해 다양한 수단을 한데 묶은 작전을 말한다. 쿠바에 반군을 상륙시켜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려 했던 무모한 개입의 상징 '피그만 침공 (Bay of Pigs)' 사건이 6개월 전이었다.
박정희와의 대화 중에 케네디는 쿠바를 언급했다. 안보와 관련해 적과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의 심각성을 모르는바 아니나, 지금 미국에 “가장 어려운 과제는 이란, 베트남, 쿠바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같은 다른 종류의 투쟁 (most difficult task right now was the other kind of struggle, such as that going on in Iran, Viet-Nam and Cuba)”이라고 했다. 적인 쿠바와 우방인 남베트남은 다르지만, 자유주의 나라 건설을 위한 진보를 향한 새로운 동맹 같은 이상주의 뒤에는 국익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미국의 모습도 존재한다.
반응오딘지엠 쿠데타는 영어 숙어 두 개로 상황 설명이 충분하다. “His days are numbered”와 "Go down the toilet"이다. 남베트남이 변기의 오물처럼 밑으로 빨려 나가는 상황에서 응오딘지엠의 날들은 어차피 길지 않았다. 권좌를 포기하고 프랑스 같은 나라로 망명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수모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성정이 아니었다. 미국에 대한 기대도 없지 않았다.
이로써 케네디 딜레마 한 부분이 사라졌다. 유명한 국방성의 비밀 보고서 '펜타곤 문서 (The Pentagon Papers)'는 미국이 응오딘지엠 외에 대안이 없다는 신드롬("The Diem-is-the-only-available leader syndrome")에 시달렸다고 했다. 이 애증의 딜레마가 끝나고, 미국은 독선, 권의의식 불통으로 상징되는 응오딘지엠이 사라진 자리에 합리주의, 유연성, 또 미국과의 대화가 가능한 지도력을 구축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미 국무성은 쿠데타 세력을 인정하고 상황을 정리해야 미국의 남베트남 내정 문제에 관여한다는 인상을 피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가능한 한 빨리 헌정질서를 회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나왔지만, 요즘 유행어로 '쉴드'를 친 모양새였다. 그러던 중 22일 케네디가 암살당했다.
린든 존슨 정부 들어서 남베트남은 군부 쿠데타가 이어지는 혼돈에 빠졌다. 베트남 분쟁은 케네디가 탈피하고 싶어 했던, 양극성 분열구도 속의 강 대 강 격전장이 된다. 1961년 박정희가 상정했던 베트남 전쟁의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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